개여울
김소월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히 개여울에 주저 안자서
파릇한 풀포기가
도다 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해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안노라시든
그러한 약속(約束)이 잇섯겟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안자서
하염업시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안노라심은
구지 닛지말라는 부탁인지요
김소월의 개여울은 7-5 율격으로 리듬을 타고 있다.
첫 행에서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시인은 답답한 마음을 스스로 되묻고있는 말 처럼 들린다.
김소월의 개여울은 1925년에 지은 시이지만, 물론 작가의
사업 실패의 영향력에 의미를 느끼는 시가 아닌가 생각한다.
김소월은 조부의 사업과 개인의 경영하던 동아일보지국이 실패하면서
처가살이에서 술로 생(生)을 보내다 매일
괴로운 마음을 보여주며 스스로 자책을 많이하였다고 한다.
어린시절 아버지가 일본놈에게 폭행을 당하여 정신 질환자가 되어버린
시인의 어린 시절은 조부에게 맡기면서
언제나 어머니와 누나를 그리워한 것 같은 마음을 담고 있다.
시인의 이상세계는 그의 시 "엄마야누나야"와 같이 소박하게 살고 싶은 마음을 담고 있다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시인은 겨울이 가고 날이 풀리는 개여울에 홀로 앉아 지난날을 생각하니
가슴에 눈물이 마치 봄바람이 잔물 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보여준다.
자연을 벗 삼아 자기의 내면을 전개해가는 시인의 서정적인 노래는
대부분 자기의 연민에서 찾아오는 이상을 꿈꾸다 좌절의 아픔을 담고 있다.
시인의 개여울은 다시 꿈을 가지고 앞으로 전진하려는 희망의 메세지를 담고 있다.
그것이 약속이다.
시인의 약속은 좋은 날이 다시 올 것을 말하고 있지만,
암담한 현실이 주는 고통에 내면에 차오르는 불안한 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고독이다.
아픈 현실과 바라보아야할 미래에 대한 의지는 굳은 약속이 되는 것이다.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언가를 생각했던 시인의 마음은
점차 자성(自省)을 통한 그의 예민한 마음들을 드려보고 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떠나도 남겨야 할 이상 세계를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은
부탁이라는 말 속에 자유(이상세계)을 담고 있다.(문인화의 글)
김소월(金素月: 廷湜,1902-1934)
본관은 공주. 평북 정주군 곽산면 남서동, 김성도(性燾)의 장남.
평안북도 구성군 구성면 왕인동 외가에서 1902년 9월 7일에 태어났다.
2세 때 1904년,부친이 처갓댁에 음식선물을 싣고 가다가
철도를 설치하던 공사장의 일본인 목도꾼에게 폭행을 당해, 정신이상이 되자,
조부 밑에서 한문을 배우며 자람.
1909년 정주의 남산 보통학교가 설립되자 머리를 깍고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남산 보통학교는 사립학교로,
소월이 민족의식을 고취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15년에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는데 졸업이 늦어진 이유는 1년동안 장티푸스를 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해5월,오산 중학교에 입학하여 안서 김억과 사제관계를 맺었다
소월은 안서 김억에게는 문학을 배움, 김억은 소월이 시를 쓰는데 있어 큰 영향을 준다.
1915년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 1916년 홍단실(洪丹實=홍명희의 딸)과 결혼.
3·1운동 직후 오산학교가 잠시 문을 닫게 되자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해 1923년 졸업했다
그가 오산학교에 다닐 때에는 조만식이 교장, 서춘·이돈화·김억이 교사로 있었는데,
김억에게 시적 재능을 인정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20년 김억의 소개로 창조에 ‘춘강’, ‘낭인의 봄’, ‘그리워’ 등을 발표.
이때부터 그의 시풍은 민요조에 바탕을 둔 곱고 애달픈 가락이었다.
동아일보(독자문단)나 잡지 학생(‘먼 후일’)에 시 발표.
작품 발표가 본 궤도에 오른 것은 개벽지를 통해서였다.
‘개벽’(‘진달래꽃’, 금잔디 등 50여 편 발표).
1923년 도쿄상과대학[東京商科大學]에 입학했으나,
9월에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학교를 그만두고 귀국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돕다가 광산일이 실패하자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이사했다.
땅을 팔아 동아일보사 지국을 경영했으나 실패했다.
1924년〈진달래 꽃〉의 무대인 영변을 잠깐 다녀왔다. 김동인·김찬영·임장화 등과
〈영대 靈臺〉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나도향과 친하게 지냈다.
그뒤 생활이 어려워져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술만 마시게 된다.
이 때의 10년 간의 시기는 소월에게 있어 가장 비극적인 시기였다.
그의 정신과 육체 그리고 문학이 서서히 몰락하여 아편이라는 마약과다 복용으로
1934년 12월 24일 33세에 곽산에서 음독 자살했다.
이상과 꿈에 대한 좌절,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恨, 적응할 수 없는 현실과 세속적인 삶에 대한 절망,
가정적인 불행, 역사의 거대한 횡포 등은 나약하고 성격적으로 불안정한 이 서정시인을 일개 폐인으로 만들어
세상을 하직하게 만든다.
짧은 생애 동안 가장 여성적이고 서정시를 많이 쓴 시인이며, 김소월의 詩가 지금까지 노래가 되어
불려지는 이유 중 하나가 그의 시에는 운율이 7-5 조에 잘 어울러졌기 때문이다.
소월의 시를 우리는 정서적으로 한(限)이 많은 시라고 하는 것은 소월이 어릴 때 부터 숙모 계희영씨에게
민담과 전설을 많이 들었던 이유 중 하나다. 그의 시중 '접동새'도 숙모의 이야기를 시로 옮겼다.
소월은 그와 이성관계였던 기생 채란의 신세 타령을 듣고 그에 대한 시를 적기도 하였다고 한다.
사후 43년 만인 1977년 그의 시작 노트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 실린 시들 중에 스승 김억의 시로 이미 발표된 것들이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김억이 제자의 시를 자신의 시로 둔갑시켜 발표했던 것이다(?).
1968년 3월 한국일보사에서 남산에 그의 시비를 세웠다.
1981년 금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민족 고유의 정서에 기반을 둔 시를 쓴 민족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관심사 >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당신의 습관 (0) | 2011.12.29 |
---|---|
[스크랩] 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 (0) | 2011.12.29 |
변기 (0) | 2011.12.28 |
풍경 (0) | 2011.12.25 |
[스크랩] 옛날 옛적에 칠득이 스님이 될뻔 했다. (0) | 2011.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