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5월 말
개똥철학에 빠졌던 까까머리 고교 3년생
쉬운 공부도 때려치운 놈이 힘든 운동은 왜 하나 싶었는데...
차리리 잘 된 일이었다.
2주일전 객기로
부산 좌천동 K 고교 씨름부와 패 싸움을 했던 일.
말리던 중부 경찰서 형사를 때린일이 빌미가 되어.
학교에서 학칙에 따라 무기정학 을 준단다.
앵꼽으면 휴학하던지 전학가던지...
걱정이 태산이다 나가는 시합마다 낙화유수인
칠득이 유도 실력을 탐내는 학교도 없고
그래도 알량한 자존심은 살아서
똥낀놈이 성질 부린다고 칠득이를 체육 특기생으로 스카웃한
유도감독 선생님에게 칠득이 공갈 뻥을 친다.
"다른 학교에서 칠득이를 스카웃 할려고
난리인데 합의를 본 사건을 가지고 무기정학은 무슨 소리교??"
쪽 팔리서 학교 못 다니겠다고 전학을 가겠다고 강짜를 부리자,
감독 선생님은 칠득이를 달래며 하시는 말씀
그 말씀이 전국체전이 열리는 10월까지는
감독님께서 책임지고 정학을 풀어 줄태니
그동안 우리들의 놀이터 범내골 광무체육관에서 사범질이나 하면서
전국체전을 준비하라는 이바구
그러나 심신이 고단한 칠득이는 고향 밀양으로 직행하여
어릴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자주갔던 단장면 가실암이라는 절에 올랐다.
산천은 의구하였는데, 고시생은 한 놈도 없었다.
주지승인 욕쟁이 할멈은 마치 잃었던 아들 본듯 반겨 주었고...
스님도 많이 늙으셨고...
행자승(지금의 주지스님)도, 땟국물이 줄줄 흐르던 소년의 모습에서,
어엿한 청년으로 변해 있었고....
칠득이 공부를 하러 산에 온 것은아니였지만
열심히 공부했다.(심심하고 마땅히 할일이 없어서)
보름만에 '삼위일체'라는 영어책 독파하고
한달만에 '고교기본영어'와 '핵심영어'를 훑고...
또 한달 반만에 '수학 1'을 떼고...
칠득이는 지금도 수학의 미적분을 풀 수 있고
물리의 자유낙하운동을 응용할 줄 안다.
절에서 본 책 덕에...
전기가 없었으니 밤엔 촛불을 켰다. 탁자에 양쪽으로 두개씩
어느날인가 성냥으로 한 쪽의 촛불을 붙이다가 문득 요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쪽 촛불과 저쪽 촛불이 같은 촛불인가 다른 촛불인가
당시에는 대부분의 여학생은 문학소녀였고..
대부분의 까까머리는 개똥철학자가 아니겠는가...
칠득이는 칠득이가 생각해낸 이 의문이
참 멋있는 철학적 명제, 고상한 말로 멋있는 화두란 생각을 했다.
누가 지금 그 것을 물어 본다면 칠득이 대답은
"지랄같은 말장난"
이 놈으로 저 놈을 붙였으니 인연이라 하겠으나
근본적으로 같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일축하겠지만...
어쨌거나 한참 고민을 한 칠득이는
당시 외부에서 손님으로 와 계시던 '만용'이란 객승에게 물어 보았다.
행랑채 마루에 앉으면 멀리 마을이 보였는데
저녁 해질무렵 아래 마을을 바라보며........
상기된 얼굴로 대답해 주던 스님의 얼굴........
묘한 매력이 있었다.
대답......
촛불의 예는 인연을 설명할때 늘상 쓰이는 예...
칠득이 너도 스스로 그런 화두를
마음에 붙들어 둘 정도면 불심이 있는 것..
공부를 좀 해 봐라...
그리하여 만용 스님은
일주일에 두 세번, 반시간씩 반야심경을 설명해 주었다.
단어 하나씩 설명해 준 것이었지만 새로운 경험이었다.
만용 스님은 멋쟁이였다.
30대 중반쯤 되었는데... 다재다능, 박학다식했다.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72년 8월 초순 가실암에 손님이 왔다.
쪽발이 한 놈, 코쟁이 하나, 가이드 한 년.
역시 해질녁 행랑채 마루에 앉아
영어와 일어를 넘나드는 만용스님을 보고 넋을 놓고 말았다.
마치 '커플링'이 끼고 싶어 연애 하고 싶다는 어떤 놈 처럼,
중들 처럼 머리를 빡빡 깍고싶어(옛날에는 중,고등학생은 머리를 빡빡 깎았음)
중학교 가고 싶던 내 어린날처럼...
해질녁에 사색하는 얼굴로 마루에 앉아 보고픈 마음에서 중이 되고 싶었다.
만용스님처럼 폼나게
저녁밥을 짓는다고 산아래 마을 굴뚝마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정경을 내려다 보며
사색에 잠긴 칠득이 모습을 상상해 보니...
멋져 보였다.ㅎㅎ
당연히 영어와 국어 공부만 하고 수학은 멀리 했다.
나도 멋진 말로 폼 잡을려면 말을 잘 해야 할 것 아닌가.
아궁이 행자승에게 헐렁한 잿빛 핫바지도 하나 얻어입었고...
욕쟁이 주지스님이 물으셨다.
"칠득이 중되고 싶냐 ?"
얼굴이 붉어 지며 대답을 못했다.
"이놈아, 중은 아무나 되는 줄 아냐... 팔자가 중팔자라야지..."
중팔자??
교회에 다니는 나를 보고 작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중팔자라 했는데...
"핫바지 벗어 버리고.. 이거 입어!"
스님의 승복 하나를 내어 주셨다.
"중 되라고 주는게 아니고 절에 있을때만 입어...
이 또한 젊은날의 추억일테지... 허 그놈 참..."
승복을 멋있게 걸친 칠득이는 서산대사, 사명당, 원효대사가 되어
절 마당을, 도량이라고 해야되나(?), 도량을 돌고 또 돌고 또 돌았고.
가실암절 뒷산의 세개 봉우리를 매일 오르내렸다.
어떤때는 만해(한용운)가 되어 님의 침묵을 읊었다.
아버님이 무기정학이 풀려 여름방학이 끝나는
9월 초순에 학교에 등교 하라는 소식을 가지고 절에 올라 오셨다.
기쁜 소식을 가지고 단숨에 올라오신 아버님은 머리를 면도칼로 빡빡 밀고
승복입은 칠득이를 보시곤 거의 기절 직전이셨다.
주지스님에게 화를 내며 따지셨다.
스님은 웃으면서
"두고 보래이 칠득이는 큰 스님이 될걸세...허허허"
아버님은 그날 집에 돌아가시지도 않고
절에서 주무셨고
출가하기로 작정한 아들에게 죽기 살기로 매 달렸다.
칠득이는 파계 아닌 파계를 하고 속세로 내려왔다.
아버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효도....
그 또한 수행일터....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새로운 새 뜻을 가지고 하산한 칠득이
그해 전국체전 개인전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덕분으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당시 대학에는 체육 특기자가 많아서
체육과가 아닌 다른학과에도 갈 수 있어 칠득이는 국문학과를 택했다,
그 덕분으로 젊을때 부터 직장생활과 글쓰는 투잡생활을 하게 되었고
늙그막에는 글로 용돈 버는 재미도 솔솔하고.ㅎㅎㅎㅎ
그런데 만약에 그때 아버지를 따라 하산하지 아니하고
산속에서 중이 되었다면...
지금의 칠득이 모습은 어떻게 되었을까???
디기 궁금하다.ㅎㅎ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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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龍 雲 山寺의 처마마루 밑에 걸린 저 생선이
깨달음을 얻어 해탈을 하면... 바람소리에 지레 겁을 먹고 뎅그렁 거리는 아픔의 소리는 지르지 아니할 것인데..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염불소리에 놀라 가슴속으로 삼키는 낮은 비명을 지르고 있을까?
玄鎔云 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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