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怨望)이란 무엇인가(原怨)/정약용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여 원망하면 옳겠는가. 그것은 안될 일이다.
그러나 자식이 효도를 다하고 있는데도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기를
마치 고수가 우순(虞舜)을 대하듯이 한다면 원망하는 일이 옳은 일이다.
임금이 신하를 돌보지 않는다 하여 원망하면 옳겠는가. 그것은 안될 일이다.
그러나 신하로서 충성을 다했는데도 임금이 돌보지 않기를 마치 회왕(懷王)이 굴평(屈平)을 대하듯이 한다면 원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부모가 미워하더라도 노력을 다할 뿐 원망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있는데도 그대는 원망하는 것이 옳다고 하는가.
그것은 만장(萬章)·공손추(公孫丑)가 일찍이 의심을 품었던 일로서 맹자(孟子)가 이미 논변을 하였다.
고수가 날마다 순(舜)을 죽이려고 하는 것으로 일삼았는데 순임금은 태연한 자세로 아무 근심도 없이 "나는 힘을 다해 밭을 갈아서 자식의 직분을 다할 뿐, 부모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인가?" 하고 말한다면 그 순임금이야말로 차가운 마음과 굳은 배짱의 인물로서 그 부모를 지나가는 사람 보듯 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을 우러러 소리쳐 울며 원망하고 사모하였으니 이것이 천리(天理)이다.
유왕(幽王)이 포사(褒 )를 사랑하여 의구(宜臼)를 폐위시켰을 때 의구가 태연한 자세로 아무런 근심이 없이 "나에겐 아무 잘못이 없다. 부모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인가"라고 했다면, 그 의구야말로 차가운 마음과 굳은 배짱의 인물로서 그 부모를 마치 지나가는 사람 보듯 한 것이다.
그러므로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하여 월나라 사람이 활을 잡고 쏘려는 것처럼 등한히 대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천리이다.
또 회왕(懷王)이 폐첩(嬖妾)과 영신( 臣)에게 매혹되어 굴평을 쫓아냈을 때 굴평이 태연한 자세로 아무 근심도 없이 "나는 하고 싶은 말을 숨김없이 다하여 신하로서의 직분을 충실히 이행할 뿐, 임금이 깨닫지 못한 것이야 나에게 무슨 상관인가"라고 했다면 굴평은 차가운 마음과 굳은 배짱의 인물로서 그 임금을 길가는 사람 보듯 하고 자기 나라 망하는 것을 마치 한판의 바둑에 지듯이 여기는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근심과 슬픔을 안고 맴돌고 또 돌아보고, 「이소(離騷)」니 「구가(九歌)」니 「원유(遠游)」니 하는 글들을 짓고 읊었던 그것이 천리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시(詩)는 원망을 나타내고도 있다"고 하여, 꼭 원망해야 할 자리에 원망을 못하는 것을 성인(聖人)으로서도 근심하였다. 그러므로 시의 궁극적인 뜻을 살핀 나머지 원망을 나타내고도 있음을 좋게 여겼던 것이다.
사마천(司馬遷)은 "시의 소아(小雅)는 원망하고 비방하면서도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고 있다"고 하였고,
맹자(孟子)는 "어버이의 허물이 지나친데도 원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간격을 둔 것이다"라고 하였다.
결국 원망이란 상대의 입장을 이해한 나머지 성인으로서도 인정한 사실이고, 충신(忠臣)·효자(孝子)의 입장에서는 자기 충정을 나타내는 길이다. 그러므로 원망을 설명할 수 있는 자라야 비로소 시를 더불어 말할 수 있고, 원망에 대한 의의를 아는 자라야 비로소 충효에 대한 감정을 더불어 말할 수 있다.
가령 돈이나 재산만을 좋아하고, 제 처자(妻子)만 사랑하여 규방(閨房) 안에서 비난을 일삼는 자이거나, 또는 재능도 없고 덕도 없어서 청명(淸明)한 세상에 버림받고 조잘조잘 윗사람 헐뜯기나 좋아하는 자이면 그것은 패란(悖亂)을 일삼는 일이니 거론할 필요가 있겠는가.
<발췌하여 편집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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