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사/古典

선비와 독서

감효전(甘曉典) 2012. 4. 11. 11:19

 

선비와 독서/박지원    


무릇 선비란 아래로는 농공(農工)들과 나란히 설 수 있으며, 위로는 왕공(王公)들과 벗할 수 있는 존재이다. 지위로 보자면 등급이나 차별이 없고, 덕(德)으로 보자면 올바른 일을 한다.

한 선비가 독서를 하면 그 은택이 세계에 미치고 그 공효는 만세에 드리워진다.

《주역》의 "나타난 용이 밭에 있다(見龍在田)"라는 말은 선비가 나타나 세상에 은택을 입힌다는 뜻이니, 천하 문명은 바로 독서하는 선비의 책임임을 말한 것이리라.


그러므로 천자(天子)도 그 본원은 선비 출신이다. 그 본원이 선비라 함은 출생 근본에서 하는 말이다.

직책은 천자지만 신분은 선비인 것이다.

따라서 직책에는 아래 위가 있지만 신분은 변화하는 것이 아니며, 지위에는 귀천이 있지만 선비 신분을 옮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작위가 선비에게 더해지는 것이지, 선비가 작위에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무릇 정치를 하는 대부를 사대부(士大夫)라 말함은 대부를 높이기 위함이고, 군자를 사군자(士君子)라 말함은 군자를 어질게 여기기 위함이다.

군졸을 군사(軍士)라 함은 숫자를 많게 하여 사람들마다 자신이 선비임을 밝히자는 까닭이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을 사(士)라 말함은 독자적으로 판단케 하여 천하에 공평함을 보이려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공적인 말을 사론(士論)이라 말하며, 당세의 일류를 사류(士流)라 말하며, 천하의 의로운 목소리를 외치는 것을 사기(士氣)라 말하며, 군자가 죄없이 죽는 것을 사화(士禍)라 말하며, 학문을 강론하고 도를 논의하는 곳을 사림(士林)이라 말한다.


 

당나라 고종(高宗) 때 외척이 발호하매 송광평(宋廣平, 광평은 宋璟의 자)이 이를 막으려고 장열(張說)에게 "후대의 역사에서 존경받을지의 여부는 바로 이번의 행동에 달려 있다"고 역설한 말은 어찌 천하의 공론이 아니겠느냐? 환관과 궁첩들이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어찌 당세의 제일류가 아니어서이겠는가? 노중련(魯仲連)이 동해바다에 뛰어들어 죽으려 하자 쫓아온 진시황의 군사들이 스스로 물러났으니 어찌 천하의 의로운 소리를 격동시킨 것이 아니겠느냐? 《시경》에 "어진 사람이 없으니 나라가 열병을 앓아 초췌하게 된다" 했으니 어찌 군자들이 무죄로 죽은 것을 애석하게 여긴 것이 아니리요? 또 《시경》에 "재주 있는 여러 선비들 때문에 문 왕이 편안하다"고 했으니 학문과 도를 강론하지 않고서야 능히 그와 같이 될 수 있었겠는가?
무릇 선비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천자가 국립학교에서 춘추제례를 행할 때 삼로(三老, 直·剛·柔)와 오경(五更, 貌·言·視 ·聽·思)을 세우고 신하들의 말을 빌리고 음식을 대접한 것은 천하에 효성을 널리 펴고자 해서이다.

천자의 아들들을 서민의 아들과 같은 자격으로 공부시킨 것은 천하에 공경을 보이고자 해서이다.

효성과 공경이란 선비의 근본 바탕이며, 선비란 인간의 근본 바탕이다. 바름은 모든 행실의 근본 바탕이다. 천자도 오히려 선비의 바름을 명확히 하려거늘, 하물며 벼슬하지 않는 선비임에랴!

요임금 순임금, 그들은 아마도 효성스럽고 공경스러운 바른 선비였을 것이며, 공자와 맹자,그들은 아마도 옛날에 독서를 잘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아! 슬픈 일이다. 누군들 선비가 아닐까만 능히 바른 일을 하는 선비는 드물며, 누가 독서를 하지 않으랴만 제대로 할 수 있는 선비는 드물도다.


소위 독서를 잘한다는 것은 읽는 소리를 잘 내는 것을 말함이 아니며, 구두점을 잘 찍는 것을 말함도 아니고, 그 의미를 잘 이해함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그 내용을 잘 말함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비록 효제충신(孝悌忠信)한 사람이 있더라도 독서가 아니면 모두 사사로운 지혜로 천착하는 것이며, 권모지략과 경륜의 기술이 있다 하더라도 독서가 아니면 모두 권 모술수로 맞추는 것이다.

이런 선비란 내가 말하는 바른 선비가 아니다.

내가 말하는 바른 선비란 그 뜻은 갓난아이와 같으며 그 모습은 처녀와 같아서 평생 문을 닫아걸고 독서하는 선비이다.


갓난아이는 비록 연약하지만 그리워하는 것에 전심전력하며, 처녀는 비록 서투르고 꾸밈이 없지만 자신을 지킴은 확고하다. 그처럼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 사람에 부끄럽지 않음은 오직 문을 닫아걸고 독서하는 선비일 것인저.

크고 바르도다! 증자가 독서를 한 것이여! 천하를 헌 짚신짝 버리듯 보고 《시경》을 노래했으니, 그 음성이 천지에 가득하여 마치 악기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논어》에 "공자가 평소 말한 것은 모두《시경》《서경》《예기》이다"라는 경지이다.


혹자는 물을 것이다. 안연이 비록 자주 굶주렸어도 자신의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지만, 만약 그 아비가 굶을 때 안빈낙도할 수 있었겠느냐고. 쌀을 지고 와서 부모를 봉양할 수 있다면 그는 백 리 길도 멀다 여기지 않았을 것이니, 처에게 밥을 짓게 하고 자신은 마루에 올라 독서를 하였을 것이다.


무릇 독서하는 사람은 독서를 통해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글 짓는 기술을 풍부하게 함인가, 글 잘한다는 명예를 높이기 위함인가? 학문을 강론하고 도를 논의하는 것은 독서의 일이요, 효제충신은 강학(講學)의 실체요,  예악형정(禮樂刑政)은 강학의 응용이다.

독서하되 실제의 응용을 모른다면 참된 강학이 아니다.

강학에서 귀하게 여기는 점은 그것의 실제 응용, 곧 실용을 위함이다.

 

만약 거듭 성명설(性命說)에 대해 고담준론(高談峻論)하거나 이기설(理氣說)을 극력 논하여 각기 자기의 견해만을 주장하고 한 가지 이론에 일치시키려 힘쓴다면 담론하고 분변하는 즈음에 흥분하게 되어 이기설은 겨우 논변되겠지만 성정은 진작 어그러질 것이다.

이는 도리어 강학이 성정을 해치는 결과이다.

독서를 하면서 목적을 구하는 것은 모두 제 욕심을 채우려는 사심이다. 평생 독서하되 진보가 없는 사람은 제 욕심 채우려는 사심이 방해한 때문이다.


백가(百家)의 서적을 넘나들고 경전을 고거(考據)하여 자신이 배운 학문을 시험하려 하면서도 공명심과 이익에 급급하여 자신의 욕심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도리어 독서가 해독을 끼치는 것이다.

독서를 잘한다는 것이 어찌 훈고(訓 )에 밝은 것뿐이겠으며, 소위 선비 란 어찌 오경(五經)에 능통한 것뿐이겠는가?

무릇 성인의 서적을 읽는 사람으로서 성인이 고심했던 점을 능히 파악하는 사람은 드물다.

주자가 "공자가 어찌 지극히 공정하고 천부의 정성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겠으며, 맹자는 손이 거칠고 발이 큰 인물이 아니었겠느냐"라고 말한 것을 보면 주자와 같은 사람은 성인의 고심처(苦心處)를 파악했다고 말할 만하다.


 

공자는 "나를 알아주거나 나를 허물할 것은 오직 《춘추》일 것인저"라 했고, 맹자는 "내가 어찌 변론하기를 좋아하겠는가?"라고 했다. 공자는 《주역》을 읽어 위편삼절(韋編三絶)하였기 때문에 "하늘이 나를 몇 년만 더 살게 한다면 가히 《주역》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럼에도 공자는 《주역》을 주석하면서 일찍이 문인에게 《주역》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며, 맹자는 곧잘 《시경》과 《서경》을 말했으나 《주역》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공자의 문하에서 《주역》을 들은 사람은 아마도 오직 증자일 것이다 그는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라고 했으니 말이다.

《주역》을 찬미한 사람은 아마도 오직 안연이었을 것이다.

그는 한 가지 좋은 말이라도 들으면 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정성스럽게 지켜 잃지 않으려고 했으니 말이다. 자로(子路)의 말은 어질지 못하다.

그는 "종묘사직을 소유하고 인민을 가졌다면 하필 독서를 한 뒤라야 학문했다고 말할 수 있으랴?"고 했다.


군자가 일생을 마치도록 하루도 그만두어서는 안 될 일은 독서하는 일일 것이다.

때문에 선비는 하루라도 독서하지 않으면 모습이 바르지 않게 되며, 그 언어가 바르지 않으면 갈피를 잡지 못해 몸을 의지할 것이 없게 되고 두려워 마음 부칠 곳이 없게 된다.

바둑이나 장기를 두고 술이나 마시는 일 따위를 애초부터 어찌 즐기게 될 것인가?


자제들이 오만 방탕하고 빈둥거리거나 제멋대로 못하는 짓이 없다 하더라도 그 곁에 독서하는 사람이 있게 되면 절로 멋쩍어서 책을 읽을 것이다.

총명 준수한 자제라 하더라도 독서하는 소리를 아름답지 않게 여길 사람은 없을 것이며, 부인네나 뙤약볕의 농부들이라 하더라도 그 자제의 책 읽는 소리를 기쁘게 듣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군자의 아름다운 말도 경우에 따라서는 후회함을 면치 못할 수 있으며, 선행도 혹 허물 있음을 면치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독서하는 데 이르러서야 평생을 하여도 후회가 없고, 모든 사람이 따라서 하여도 허물이 없을 것이다.


명분과 법이 아무리 좋더라도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기 마련이고, 육고기가 비록 맛있더라도 많이 먹으면 폐해가 생긴다.

많을수록 더욱 유익하고 오래될수록 폐단이 없는 것은 오직 독서일 것이다.

어린아이가 독서하면 요절하지 않고 노인이 독서하면 늙어 혼몽해지지 않는다.

귀한 사람은 그 귀함을 유지할 수 있고, 천한 사람은 분수에 넘친 행동을 하지 않게 된다.

어진 사람은 지나치게 넘치지 않게 되고, 못난 사람도 유익함이 없지 않게 된다.

나는 집안이 가난해도 책 읽기를 좋아했다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부자이면서 독서를 좋아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하였다.


대숙(大叔)이란 사람이 《시경》을 읽을 때 3년을 문 밖으로 나오지 않았는데 하루는 마루에 내려왔다가 문득 돌아서는데 집의 개가 놀라 짖었다고 한다.

좋은 음악 소리라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 귀를 시끄럽게 하고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지만, 독서의 경우 책 읽는 소리에 싫증내는 사람은 없다.


부모가 자식에게 독서를 시키려고 할 때 권하지 않았는데도 아들이 책을 읽는다면

그 부모치고 흔연히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아! 슬프다. 나는 어찌 독서함이 마음에 차지 않는가?
도연명(陶淵明)은 바른 선비였다.

그는 살아 있을 때 술을 많이 마실 수 없는 것을 오직 한으로 여겼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을 수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고 했건만

도연명은 어째서 독서를 많이 할 수 없음을 한으로 여기지 않았는가?


독서하는 방법으로는 일과(日課)를 정해놓고 하는 것이 제일 좋고, 오늘 읽을 것을 내일로 미루는 것이 제일 나쁜 방법이다.

너무 많이 읽으려고 욕심내지 말고 빨리 읽으려고 하지도 말라.

순서와 횟수를 한정해놓고 날마다 하여야 한다.

가리키는 대의를 정밀하고 분명하게 하며 음성은 무르녹게, 뜻은 익숙하게 한다면 절로 암송하게 될 것인데, 그런 다음에 차례대로 그 다음으로 넘어간다.


책을 마주해서는 하품하거나 기지개를 켜지 말라.

책을 마주해서는 침을 뱉지 말 것이며, 기침이 나오면 머리를 돌려 책을 피하라.

책장을 넘길 때 침을 바르지 말고 표시를 할 때 손톱으로 하지 말라.

책을 베거나 그릇을 덮지 말며, 책을 난잡하게 늘어놓거나 책으로 먼지를 털지 말 것이다.

책에 좀이 슬면 볕이 들 때 즉시 볕에 쪼여라.

남의 서적을 빌렸는데 글자가 틀렸으면 고거하여 교정하고, '찌지(표하거나 적어 붙이는 종이 쪽지.)'가 찢어졌으면 기워주고 책을 묶은 끈이 끊어졌으면 묶어서 되돌려 주라.


첫닭이 울면 일어나 눈을 감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전에 암송한 것을 복습하면서 가만히 반복 연역해 보아 그 내용 파악에 충실치 못한 것이 있는가, 그 의미를 상세히 이해치 못한 것이 있는지 살펴서 심신에 체험하고 자득한 것이 있으면 기뻐하여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등불을 밝혀 의복을 갈아입고 엄숙 공경히 책상에 마주 앉은 다음에 새로운 편(篇)을 묵묵히 반복해서 음미한다. 몇 줄씩 끊어서 암송한 뒤 서산(書算)을 접어 옮겨놓고, 가만히 훈고적 의미를 따져보며, 상세히 주소(註疏)를 점검하여 그 차이점을 변별한다.

그 음과 뜻을 밝게 알고 침착한 마음으로 자기 의지에 합치되도록 하되, 사사롭게 천착하거나 억지 의심은 하지 말고 혹 심신에 자득할 수 없는 경우에는 반복하고 그냥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


하늘이 훤히 밝아지면 세면을 마치고 즉시 부모의 침소에 나아가 문 밖에서 살피다가 혹 안에서 기침 소리나 하품 소리가 나면 방으로 들어가서 문안을 드린다.

부모와 이야기하다가 혹 심부름을 시키면 바쁘다고 돌아가지 않아야 하며, 책 읽는다는 핑계로 거절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도 하나의 독서이다.

혹 독서를 부지런히 한답시고 혼정신성(昏定晨省)을 때맞춰 하지 않거나 신체발부(身體髮膚)를 깨끗하게 하지 않는다면 이는 독서가 아니다.

 
부모가 물러나라 명하면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먼지를 소제하고 책상을 털며 서책을 가지런히 정리하고는 단정히 앉아 잡생각을 그치고 한참 지난 뒤에 책장을 펴서 읽는다.

너무 느리게도 빠르게도 읽지 말고 자구(字句)를 분명히 음의 고저를 지켜 읽는다.


긴급한 말이 아니면 한가하게 말대꾸하지 말고, 바쁜 일이 있지 않으면 문득 일어나지 않는다.

부모가 부르시면 책을 덮고 즉시 일어나며, 손님이 이르면 독서를 그치되 존귀한 손님이면 책을 덮는다.

음식이 이르면 책을 덮되, 반쯤 읽었다면 숫자를 마친 것으로 하고, 식사를 마치고는 곧 일어나서 천천히 걸어다니다가 소화가 된 뒤에 다시 읽는다.


부모가 질병을 앓으면 일과 공부를 폐하고, 재계(齋戒)할 때나 초상이 나면 폐한다.

친척의 상을 당해서는 성복(成服)과 매장을 한 뒤에 책을 읽는다.

붕우의 초상에는 비록 멀더라도 함께 공부했던 사람이면 문상을 하고 일과 공부를 폐하며, 함께 어려움을 맛본 사람이면 탄식을 한다.

갈까 말까 망설이게 하는 친구나 새로 얻은 사람의 초상에는 탄식한다.

부모의 초상 에는 장례를 치르고 나서도 3년까지는 예서(禮書)를 읽으며, 어린이들은 그대로 읽던 책을 읽는다.

 

혹자는 물을 것이다

"아비가 죽으면 그 아비의 책을 읽을 수 없으니, 아비의 손때가 책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집안에 전해오는 책은 모 두 묶어 다락에 넣어두고 읽지 않아야 하는가?"라고.

옛날 증자의 아버지 증석(曾晳)은 양고기와 대추를 즐겼는데, 그가 죽은 뒤에 증자는 양고기와 대추를 먹지 않았으니 마치 부모의 명을 듣고 머뭇거리는 행동이 없기를 생각하며, 붕우와 약속을 해놓고 곧 실행함을 생각하는 듯하여 주저함이 없었다.

이것이 독서하는 도리이다.
천하의 사람들이 편안히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다면 그 천하는 아무 일이 없는 태평세상일 것이다.  [원사(原士)]

 

옮겨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