楓嶽 贈 小菴 老僧 幷書/ 이이
내가 풍악(楓嶽)에 구경 갔을 때에, 하루는 혼자 깊은 골로 들어가서 몇 리쯤 가니 조그마한 암자(庵子) 하나가 나왔다.
늙은 스님이 가사(袈裟)를 입고 반듯이 앉아서, 나를 보고 일어나지도 않으며 또한 말 한 마디도 없었다.
암자 가운데를 두루 살펴보니, 다른 물건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부엌에는 밥 지은 지가 벌써 여러 날이 되었다.
내가 묻기를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느냐' 하니, 노승이 웃으며 대답을 아니 했다.
또 묻기를, 무얼 먹고 굶주림을 면하느냐 하니, 노승이 소나무를 가리키며 '저것이 내 양식'이라 하였다.
내가 그의 말솜씨를 시험하려고 묻기를 공자와 석가는 누가 더 성인이냐 하니, 노승이 '조대(措大 :깨끗하고 가난한 선비)는 늙은 중을 속이지 말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불가(佛家)의 묘(妙)한 곳이 우리 유교(儒敎)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하필이면 유교를 버리고 부처를 찾으려 하느냐' 하니 노승이 말하기를, 유가(儒家)에도 또한 '마음이 부처'라는 말이 있느냐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맹자(孟子)가 성선(性善)을 이야기할 때마다 반드시 요순(堯舜)을 들어 말하였는데,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고 무엇이 다르랴, 다만 우리 유가에서 본 것이 더 착실한 것뿐이다' 하였다.
노승은 긍정하지 않고, "색(色)도 아니요, 공(空)도 아니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묻기에, 이것도 또한 앞에서 말한 경우니라 하니 노승이 비웃었다.
내가 또 묻기를, "솔개는 날아서 하늘을 지나가고, 고기는 못에서 뛰는 것[鳶飛戾天 魚躍于淵(연비려천 어약우연)]이 색이냐 공이냐?" 하니,
노승이 말하기를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닌 것이 진여(眞如)의 본체(本體)이니 어찌 이 따위 시를 가지고 비길 수 있느냐' 했다.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벌써 말이 있으면 곧 경계(境界)가 되는 것인데 어떻게 본체라 할 수 있느냐?
만약 그렇다고 하면 유가의 묘한 곳은 말로 전할 수 없는 곳이고,
부처님의 도는 글자 밖에 있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노승이 깜짝 놀라서 나의 손을 잡으며, "당신은 시속(時俗)의 선비가 아니로구려.
나를 위하여 시를 짓되, 솔개가 날고 고기가 뛰는 뜻을 해석해 주시오." 했다.
내가 곧 절구(絶句) 한 수를 써서 주니, 노승이 보고 난 뒤에 소매 속에 집어넣고 벽을 향하여 돌아앉는다.
나도 또한 그 곳에서 나왔는데, 얼떨결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 뒤 사흘 만에 다시 가 보니, 조그마한 암자는 그대로 있는데, 노승은 벌써 어디론지 가고 없었다.
魚躍鳶飛上下同 고기 뛰고 솔개 날아 아래 위가 한가진데
這般非色亦非空 저것은 색도 아니고 또 공은 아니로세
等閒一笑看身世 심상히 빙긋 웃고 내 신세를 돌아보며
獨立斜陽萬木中 지는 해 우거진 숲 속에 홀로 섰어라.
<발췌한 글>
'관심사 > 古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장 (代杖) (0) | 2012.04.12 |
---|---|
원망(怨望)이란 무엇인가 (0) | 2012.04.12 |
선비와 독서 (0) | 2012.04.11 |
[스크랩] 어부사(漁父辭)-굴원(屈原) (0) | 2012.04.09 |
[스크랩] 교만에 대하여 (0) | 2012.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