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자료/관심인물 정보

[스크랩] 1950.10.18 고당 조만식 선생 사망

감효전(甘曉典) 2012. 3. 11. 17:23

 

1950.10.18  고당 조만식 선생 사망

 

 

 

 

출생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33474

조선물산장려회 창립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33187

조선 민주당 결성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31115

 

 

 


고당 조만식 선생이 6.25의 기습남침으로 밀렸다가 반격에 나선 국군과 유엔군에 쫒겨 인민군이 패주하고 있던 수라장속에서, 1950년 10월 어느날 그를 감시하던 한 인민군의 총탄에 타계했다. 10월 18일은 정확한 기일이 아니고 추정일이다.


고당 선생은 1883년 2월 평양에서 출생했다. 7세에서 15세까지는 엄한 부친 밑에서 한학을 배웠고, 17세에서 23세까지는 영세 포목상으로 생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24세때 처자를 거느린 가장으로써 숭실중학교에 입학했고, 졸업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대학 법학과에 진학하여 32세때 졸업했다. 선생의 이러한 만학은 신구문명이 교착하고 있던 당시의 한국청년으로서는 극히 정상적인 코스였다. 대학을 나온후 선생은 오산고보 교사-교장, 평양YMCA 총무, 숭인학교장, 신간회 조직, 조선일보 사장 등의 다양한 활동을 통하여 민족운동에 투신했다. 3.1운동때는 옥고도 치렀다.


선생은 고결한 인격자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조선의 간디`라는 추앙도 받았다. 해방직후 고당은 조선건국평남준비위원회를 창립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이것을 공산주의자와 동수로 개편하여 평남인민정치위원회란 연립정부를 수립했고 선생은 위원장에 취임했다. 이것이 고당의 비극의 단초였다. 한편 자유민주주의적인 조선민주당을 창립, 당수로 선출됐다.

 

 

 

조만식 [ 曺晩植 ]

1883. 2. 1 평남 강서~1950. 10. 18 평양(?).

독립운동가·교육자·정치가.

 

 

호는 고당(古堂).

8세 때 한학자 장정봉의 문하에 들어가 한학을 배웠고, 16세 때부터 상업을 시작, 포목상과 지물상을 경영해 상당한 재산을 모으고 사업가로 이름을 날렸다. 23세 되던 해인 1904년 친구이자 동업자인 한정교의 전도로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이듬해인 1905년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입학해 1908년에 졸업했다. 그해 6월 일본 도쿄[東京]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해 3년간 수학했으며, 간디의 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을 배워 독립운동의 거울로 삼기로 결심했다. 한일합병 이후 1911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에 진학했고, 이때 김성수·송진우 등을 만나 교우관계를 맺었다. 1913년 동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유학을 준비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했다. 귀국 즉시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취임했다. 이후 오산학교 교감을 거쳐 1915년 교장이 되었고, 1919년 2월 3·1운동을 위해 교장직을 사임하기까지 무보수로 민족교육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3·1운동 직후 보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1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평양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0년 1월 만기를 1개월 앞두고 가출옥했다. 그해 10월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으나, 일제가 교장 취임을 승인하지 않아 1년 만인 1921년 4월 사임했다. 같은 해 5월에 숭실전문학교 강사로 2년간 봉직하는 동시에 평양 기독교청년회(YMCA) 총무로 취임해 1932년까지 활발한 사회운동을 전개했으며 그해 산정현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1922년 오윤선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국산품 장려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그는 '조선의 간디'로 불렸다. 1923년 김성수·송진우 등과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발기해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했고, 1925년 4월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지만 1년 만에 6·10만세운동으로 교장직에서 물러났다. 1926년 9월 평양의 숭인중학교 교장이 되었으나, 일제측의 교장 승인 거부로 1927년 9월 사임했고, 그해 신간회(新幹會) 결성에 참여해 중앙집행위원 및 평양지회장으로 활동했다. 1930년 관서(關西) 체육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1932년 11월 경영난과 내분으로 어려움을 겪던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해 민족언론지 육성에 주력했으며, 1943년 지원병제도(志願兵制度) 실시에 따른 협조를 간청하러 온 조선군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正四郞]의 면담 요청을 거절하고 이 제도에 반대해 구금당했다가 곧 석방되었으나, 산정현교회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쇄당하자 낙향했다.

 

1945년 8·15해방이 되자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인민정치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활약했고, 같은 해 소련 군정청(軍政廳)에서 북조선 인민정치위원회를 설치하고 그에게 위원장 취임을 권고했으나 소련의 한국공산화정책을 간파하여 이를 거부했다. 같은 해 11월 민족주의자들을 결집해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당수가 되어 반공노선을 뚜렷이 하는 동시에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소련군정에 대한 비타협적인 태도와 신탁통치 반대의 입장 고수로 인해 1946년 1월 5일 이후 평양 고려 호텔에 감금됨과 아울러 조선민주당 역시 소련 군정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접수되었으나, 끝까지 제자들의 월남 권유를 거절하다가 6·25전쟁때 조선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70년 8월 15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1976년 12월 어린이대공원에 그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1976년 1월 '고당 조만식선생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매년 2월 1일 기념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그의 사상 및 업적을 후세에 알리고 있다.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2가 4번지에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네이트 백과사전

 

 

 

 

선생은 민족의 사표(師表)였다. 오산학교 교사로 출발한 그의 활동은, 열렬한 애국심과 독립정신 속에서 독립만세운동, 국산품애용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선생은 좌우파가 하나가 되는 신간회가 결성되도록 애썼으며, 광복 후 반탁운동과 민족자주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만학도

 

조만식(曺晩植, 1883. 2. 1~ 1950.10.18) 선생은  1883년 2월 1일 평남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 내동에서 엄친 창녕 조씨(昌寧曺氏) 경학(景學)과 자친 경주 김씨 경건(敬虔) 사이에서 외아들로 출생했다. 선생은 7세 때에 한문 공부를 시작해 10년에 걸쳐 사서삼경 등 기초과정을 배웠다. 15세 때부터 평양에서 포목상과 지물상을 경영하며 가계를 꾸려온 선생은 5척 단구의 이름난 술꾼이었다. 그러다가 서당에서 알게 된 한정교(韓鼎敎)의 인도를 받아 기독교 장로교에 입교했다.

 

이후 선생은 신학문에 대한 동경이 불 같이 일어나서 23세의 만학으로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입학했다. 1906년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 먼저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했고 1910년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학부(明治大學 專門部 法學部)에 입학했다.


 

 

 

평남 사천에서 독립만세 시위 주도하고 1년간 옥고

 

동아일보 1920년 8월 22일자 기사. 물산장려회가 조만식 등의 발기로 평양에서 창립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선생은 1913년 명치대학을 졸업한 후 남강 이승훈(南崗 李昇薰) 선생의 초청으로 민족교육의 요람인 오산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동경에서 견문을 넓히고, 또한 세계 속의 조선을 바라보며 교육의 방향과 포부를 가졌다는 점 등을 인정받아 2년 후에는 교장으로 승진했다. 사감까지 겸하여 주야 24시간을 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기거했다. 선생의 풍모는 매우 독특해서 5척 단구에 머리를 빡빡 깎아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었다.

 

이때부터 선생은 국산품을 애용하여 허영을 배척하는 모범된 삶을 보여주어 항일의 표징으로 손 꾭혔으며, 민족적인 긍지를 가지고 국산품 애용을 실천했다. 선생의 교장생활은 스스로 학생과 똑같은 규율을 지키고 민주적 자치력을 십분 발휘하도록 지도하면서 장차 이 나라의 큰 일꾼을 양성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교장직을 사퇴하고 평안남도 강서군 사천(江西郡 沙川) 장날의 독립만세 운동시위를 주동하였으며, 그 후 특별한 사명을 띠고 상하이(上海)로 망명하려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어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르게 되어 교육계를 떠나게 되었다.

 

 

“우리는 먼저 조선 사람임을 알아야 하고 자신을 분명하게 인식하여야 한다.”


선생은 항상 조선 사람의 약점과 결점을 뚜렷이 지적하고 이를 개선하려는 데 앞장섰다. “우리는 먼저 조선 사람임을 알아야 하고 자신을 분명하게 인식하여야 한다”는 철저한 신념의 소유자였다. 언제나 애국애족하는 정신을 고취하고 무엇보다 국산품을 애용하는 것이 나라 사랑의 지름길이며 민족자립 경제를 촉진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그 정신보급에 힘썼다.

 

1920년 평양에서 조선 물산장려운동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운동이 시작되자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가서 각 지방에서는 물산장려회 또는 토산품장려회 등으로 단체조직이 속출하고 금주․금연동맹과 같은 도덕적인 성격의 운동으로까지 파급되었다. 1923년에는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유능한 인재양성을 위하여 조선민립대학 기성회를 주축으로 벌어진 조선 민립대학 설립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1932년에는 조선일보사 사장으로 취임, 언론창달에 힘쓰고 민족계몽에 앞장섰으며 그 후 1937년에 수양동우회 운동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또한 1921년부터 11년 간에 걸쳐 평양 YMCA 총무로서 기독교정신과 민족부흥의 정신을 일체화 함으로써 항일의 선봉에 서서 일제 말기에 소위 신사참배, 궁성요배 등 강요에 결연히 반대했다.

 

중외일보 1927년 12월 22일자 기사. 신간회 평양지회 창립대회가 열렸으며 조만식이 회장으로 선출된 사실을 알리고 있다.

 

 

민족유일당인 신간회의 중앙위원 및 평양지회장으로 활동


1927년 민족의 좌우합일로 결성된 신간회(新幹會)가 서울에서 조직되자 선생은 신간회 중앙위원과 평양시 지회장으로 피선되어 한국정치사상 최초의 민족단일당에 참여하게 되었다. 물론 항일투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려는 대전제와 민족과 사회가 한 덩어리가 되어 항일 공동전선을 펴나가는데 그 의미가 있었다. 선생은 이 무렵 육신의 곤고함을 잊어버리면서 청년회 조직과 강연회 토론회 등에서 활동하였는데 이때의 별명이 ‘무주랑 빗자루’였다. 키는 작았으나 담대했고, 얼굴 빛과 흰 머리카락은 청초한 모습이었으며 낭랑한 음성으로 열띤 웅변을 할 때는 듣는 사람마다 공명을 얻어내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광복 후 평양에서 조선건국준비 평남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


1945년 8월 17일 평양에서 조선건국준비평남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동년 8월 18일 평남 도청에서 있었던 일본군 항복조인식에 입회하는 형식으로 참석하였다. 8월 26일 소련군은 건국준비위원회와 공산당을 평양 호텔로 초청하고 연립정권을 수립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때 선생이 위원장이 되고 건국준비위원회 측에서도 여러 명이 조각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연립정권의 수립은 이때까지는 선생의 지도력을 배제할 수 없어 이뤄진 부득이한 방편이었다. 이러는 한편 공산당의 위상은 날로 떠오르고 소련군정과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인민위원회는 날치기 행정으로 제 세력을 키워갔다.

 

여운형, 안창호와 찍은 사진.(1935)
안창호 출옥 후 기념촬영한 것으로 왼쪽부터 여운형, 안창호, 조만식이다.

 

 

조선민주당 창당한 후에 소련군정, 김일성 일파와 담판 벌였으나 결렬


1945년 11월 3일 선생은 평양에서 조선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조선에 대한 5년 간의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자 1946년 1월 2일 소련군정에 신탁통치 불찬성의 뜻을 통고하고 한편으로는 반탁 성명을 발표했다. 동시에 소위 인민위원회 위원장 직도 사퇴했다. 1946년 1월 6일 마침내 소련군정 및 김일성 일파와의 최후 담판은 결렬되고 선생이 인민위원회 건물 현관을 나서자 이미 소련군에 의해서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실려 고려호텔로 연행되어 갔다.

 

서울 능동 어린이대공원에 자리한 고당 조만식선생 동상.

 

 

그 후 공개적인 장소에서 선생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선생은 월남을 권하는 인사들에게 “나의 일신을 염려하지 마시오. 나는 북한의 일천만 동포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이미 굳게 결심하였고”라며 오직 애국애족과 민주주의를 위하는 굳센 신념으로 끝내 권유를 거부했다. 북한동포의 절대적인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분, 공산당원도 그 인격 앞에 겸손하게 절을 하였던 분, 월남 동포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선생, 오늘도 우리 민족의 가슴마다에 살아 계신 분이다. 선생의 높은 유덕을 기리는 소리는 지금도 끊임이 없다.

 

출처 : 추억속으로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