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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59.07.31 조봉암 사형 집행

감효전(甘曉典) 2012. 3. 11. 17:32

 

1959.07.31  조봉암 사형 집행
  

 

 

 

 

 

 

 

 조봉암 사형 집행(1959.07.31)

1959년 7월 31일 진보당사건으로 체포된 조봉암이 사형되었다.


그는 상하이[上海]에서 조선독립운동자동맹을 조직하는 등 독립정신을 고양시키는 데 앞장섰다. 해방 직후에는 반좌익 성향의 정치노선을 견지하며, 제헌국회 의원과 초대 농림부장관, 제2대 민의원 부의장을 지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근소한 표차로 낙선하고,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이렇게 조봉암이 이승만과 자유당을 위협할 만한 존재가 되자, 이승만 정권은 진보당사건을 조작했다. 1958년 조봉암이 창당한 혁신정당 진보당의 간부들이 북한의 간첩들과 접선하고 북한의 통일방안을 주장했다는 혐의로 구속·기소된 것이다. 이 진보당사건으로 조봉암은 간첩, 국가보안법 위반, 무기불법소지 등의 죄목으로 체포되어 1959년 사형되었다.

 

조봉암[ 曺奉岩 ]

 

1898. 9. 25 경기 강화~1959. 7. 31 서울.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죽산(竹山). 강화에서 공립보통학교와 농업보습학교(農業補習學校)를 졸업하고, 1915년 강화군청 급사로 일하다가 상경해 기독교청년회(YMCA) 중학부에서 1년간 수학했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1년간 복역했고, 1920년 출옥 후 일본에 건너가 도쿄[東京] 주오대학[中央大學]에서 1년간 정치학을 공부했다. 1921년 무정부주의에 심취해 비밀결사 조직인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했으나, 곧 회의를 느끼고 사회주의로 경도(傾倒)되었다. 1922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귀국해 10월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소련에서 열린 베르흐네우딘스크 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가했다. 1923년초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 속성과에 입학해 수료했고, 같은 해 9월 조선 공산청년동맹과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국내에 잠입했다.

 

1925년 4월 노동자·농민 운동의 총집결체인 조선노동총동맹, 청년운동을 주도한 조선청년동맹·조선공산당·고려공산청년동맹 등을 결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26년 2월 상하이[上海]에 조선공산당 해외부를 설치하고, 4월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滿洲總局)을 조직해 책임비서가 되었다. 같은 해 7월 코민테른 극동국 조선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927년 4월 이동녕·홍진·조완구 등의 독립운동지도자 24명과 함께 상하이에서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직을 맡았다. 같은 해 5월 중국공산당 한인지부를 조직하여 책임자로 활동했고, 6월 국제적색노동조합(프로핀테른) 주최의 범태평양노동자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해 조선의 노동운동 방침을 밝혔다. 1929년 10월 조선독립운동자동맹을 조직해 독립정신을 고양시키는 데 앞장섰으며, 1931년 12월 만주사변 발발을 계기로 상하이 한인반제동맹을 결성했다. 1932년 11월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피검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했고,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운동을 하다 1945년 1월 다시 검거되었으나 해방이 되어 석방되었다.

 

해방직후 인천에서 치안유지회·건국준비위원회·노동조합·실업자대책위원회 등을 조직했고, 조선공산당 중앙간부 겸 민주주의민주전선 인천지구 위원장에 취임했다. 1946년 반(反)박헌영 공개 서한을 발표하고 조선공산당을 탈당해 반좌익 성향의 정치노선을 견지했다. 이후 1948년 제헌국회의원과 초대 농림부장관, 1950년 제2대 민의원 부의장을 지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후보로 출마해 차점으로 낙선했지만 놀라운 득표로 인해 이승만 장기집권의 큰 장애물로 떠올랐다. 1956년 제3대 대통령후보로 다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해 11월 진보당을 창당, 위원장이 되어 정당활동을 하다가 1958년 1월 이른바 진보당사건으로 체포(국가보안법 위반)되어 1959년 사형당했다.

 

/네이트 백과사전

 

 

 

 

 

  * 조봉암(1898-1959)
    강화 출신. 강화에서 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한 뒤 군청에서 일하다가
    상경하여 3.1운동에 참가하고 1년간 복역하였다. 
    일본 중앙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며 비밀 결사인 흑도회에 참여하고 
    사회주의 이념에 의한 독립쟁취를 목표로 항일운동 전개. 
    24년 조선청년동맹 중앙간부, 25년 조선 공산당 중앙간부로 활약하다가
   공산청년회 대표로 모스크바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동방노동자공산대학에서 2년간 수학. 
   1930년 일본경찰에 잡혀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한 뒤 
   인천에서 지하 활동하다가 45년 1월 다시 검거. 
   해방으로 출감하여 인천지구 민전 의장으로 활동 재개했으나 
   46년 박헌영에게 공개서한 발표한 뒤 단독선거에 참여. 
   제헌 국회의원, 초대농림장관, 제2대 국회부의장 등을 역임하고 
   2,3대 대통령에 출마하여 이승만을 위협하기도 했다. 
   56년 진보당을 결성하여 혁신정치와 평화통일론을 제기하다 
   강력한 라이벌의 부상을 꺼려한 정부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형됨

 

조봉암 선생 50주기 추도식… 재평가 활발


★*…31일 서울 중랑구 망우동 공원묘원에서 열린 죽산 조봉암 선생의 50주기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고인의 영정 앞에 인사하고 있다. 추도식에는 130여 명의 사회 각계 인사가 참석해 고인의 정신을 기렸다.


 

 

 

 

 

출처 : 추억속으로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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