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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47.07.19 여운형 피살

감효전(甘曉典) 2012. 3. 11. 17:33

1947.07.19  여운형 피살

 

 

 

 

 

 

휘문고교에서 해방 제일성을 터트린 여운형(1886~1947). 한 신문기자는 그의 풍모를 이렇게 묘사했다. “연단에 올라선 여운형씨는 첫째 그 풍채가 온 청중의 신임을 모았다. 육척장신의 완강한 체구. 게다가 카이저 수염. 커다란 눈. 좌우로 활활 벗어나간 두 귀. 시원스럽게 벗어 오른 면적 넓은 이마. 첫인상에 그야말로 위장부(偉丈夫)란 든든한 감명을 받는다.”

 

여운형은 민족을 위한 길이라면 자기 한 몸의 안위는 돌보지 않은 당대의 호걸이었다. “범의 굴에 가야 범을 잡을 게 아닌가. 설사 내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대도 조선의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천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 1919년 11월 일제는 상하이 임시정부 탄생의 산파 역할을 한 그를 회유하기 위해 제국의 심장 도쿄로 불러들였다. 데이코쿠(帝國) 호텔에 모인 각국의 신문기자들과 일본 정계 주요 인사들 앞에서 그는 당당하게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1921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노동자대회’에 참석한 이후 그는 소련을 우리 독립을 돕는 우군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고려공산당에 들어간 것도 레닌이 200만원의 거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지원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서구 어느 나라도 우리 독립운동을 지원하지 않았던 그때. 그는 레닌이 제3세계 공산화를 위해 구사한 민족주의운동 지지 노선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해방된 오늘, 지주와 지본가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 손을 들어 보시오. 지식인, 사무원, 소시민만으로 나라를 세우자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역시 손을 들어 보시오. 농민, 노동자만으로 나라를 세우자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손을 들어 보시오. 손을 드는 사람이 하나도 없군요. 그렇습니다. 일제 통치 기간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반역적 죄악을 저지른 극소수 반동들을 제외하고 우리는 다 같이 손을 잡고 건국사업에 매진해야 합니다.” 1945년 11월 11일 조선인민당 창당식에서 밝힌 그의 생각은 민족주의 기치 아래의 대동단결이었고, 민주주의적 방법을 통한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이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그날 그는 해방된 조국이 소련군의 지배하에 놓일 것이라 오판했다. 미군이 진주한 이후에도 그는 잘못 끼운 첫 단추를 풀지 않았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위원장(45년 8월), 조선인민당 당수(45년 11월), 좌우합작위원회 좌측 대표(46년 7월), 근로인민당 위원장(47년 5월).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흉탄에 맞아 숨을 거두기까지 그는 좌익의 간판 인물로 활동하며 공산당을 포함한 좌익과 온건우파의 합작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그가 믿던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었으며, 주변의 좌익도 이상을 꿈꾸는 낭만적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좌우의 대립이 극심했던 해방정국에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가 상호 협조적인 것이지 갈등을 가져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그는 좌익의 정략에 이용된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중앙일보

 

 

 

여운형[ 呂運亨 ]

1886. 4. 22 경기 양평~1947. 7. 19 서울.

독립운동가·정치가.

 

 

 

호는 몽양(夢陽). 1889~90년 고향에서 한문을 수학한 후 1900년 신학문에 뜻을 두고 배재학당에 입학했다가 1901년 흥화학교(興化學校)로 전학했으며, 1902년 관립우체학교에 입학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수학을 단념하고, 1906년 농사를 지으면서 사서삼경을 독파했다. 1907년 그리스도교에 입교했으며, 교육사업에 뜻을 두고 고향인 양평에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했다. 1908년 국채보상 단연동맹(國債報償斷煙同盟)을 조직하고 각지를 순회하면서 연설했으며, 초당의숙(草堂義塾)에 교사로 초빙되었다. 1911년 평양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일본 군호를 안 쓴다고 강릉으로 퇴거 명령을 받았다. 1913년 서간도 신흥무관학교 및 서간도 각지를 순방하면서 조국 광복의 웅지를 펼치다가 중국 난징[南京]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 1917년 졸업했다. 1918년 결성된 신한청년당의 당수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11월에는 미국 대통령 특사 크레인에게 조선의 독립청원서 2통을 건네주어 윌슨 대통령에게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해줄 것을 부탁했다.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로 김규식을 파견하여 한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호소했다. 4월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의정원을 설치하고 임시정부를 구성하고자 했을 때 여운형은 '정부'의 구성에 반대했지만, 임시정부의 제1차 내각의 외무부 차장으로 참여했다. 같은 해 11월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도쿄[東京]로 건너가 하라[原敬] 총리 등 정부 요인들과 회담하면서 조선독립의 정당함을 주장했고, 제국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일제의 대조선정책을 혹독히 비판하여 일본 조야는 물론 전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1920년 미국 국회의원 사절단 100여 명이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北京]을 시찰하는 동안 임시정부의 대표로 안창호와 함께 이들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역설했고, 1921년 상하이에서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조직하여 한국독립과 중국혁명과의 유기적인 유대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원동(遠東) 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5인 주석단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고, 레닌·트로츠키 등과 만나 한국독립에 대한 적극적인 원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또한 11월 김구를 이사장으로 결성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에 참여하여 장교와 기사(技師)의 양성을 위해 노력했으며, 1923년 이동녕·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촉진회를 조직했다. 1924년 중국국민당에 가입했고, 타스통신사 중국지부에 근무하면서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와의 관계도 매우 밀접해져, 1925년 국내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에 대한 코민테른의 승인에도 상당히 기여했다. 1926년 이후 중국국민당의 중국공산당에 대한 북벌에 참가했고, 북벌과정에서 '조선병단'의 조직을 기도하기도 했다. 1929년 상하이복단대학[上海復旦大學] 축구단을 인솔하여 동남아시아 각지를 순회하면서 영국과 미국의 식민지정책을 통렬히 비난했다. 같은 해 7월 상하이 랴오둥[遼東] 운동장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 1930년 3년의 징역형을 언도받아 복역하다가 1932년 7월 출옥했다. 이후 주로 국내에서 활동했는데, 국외에서와는 달리 합법적인 활동과 비합법적인 활동의 험난한 경계를 넘나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에 취임한 후 〈조선중앙일보〉의 본사와 각 지부에 독립운동가들과 사회주의자들을 많이 배치하여 활동하게 했다. 또한 조선체육회장에 취임하여 체육활동을 통한 민족의식의 앙양에도 노력했다.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보도에서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이후 계속되는 탄압으로 1937년 11월에 폐간되었다. 여운형은 1940년 일본 도쿄로 세계정세를 포착하고 유학생을 규합하여 해방될 조국의 인재양성을 위해 활동하다가, 1942년 일본에서 귀국하는 도중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다시 투옥되었다. 1943년 집행유예로 출옥한 후 은거하며 청년 지도에 진력했다.

 

1944년 조선건국동맹이라는 항일지하조직을 전국에 조직하여 해방에 대비하고자 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항복 방송이 나가기 전 여운형은 정무총감 엔도오[遠藤]로부터 해방 후 치안을 맡아줄 것을 부탁받았다. 이에 여운형이, ① 전 조선의 정치범·경제범 석방, ② 경성에 8~10월의 3개월분 식량 확보, ③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불간섭, ④ 학생들의 훈련과 청년의 조직화에 불간섭, ⑤ 일본 노무자들도 건설사업에 협력 등 5가지 조건을 제시하자 엔도오는 주저없이 수락했다. 그는 8·15해방 후 공백기간의 질서유지의 일익을 담당하며 안재홍 등을 비롯한 건국동맹원들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17일 제1차 부서 결정을 완료하는 동시에 '치안확보, 건국사업을 위한 민족 총역랑의 일원화, 교통·통신·금융 및 식량대책의 강구' 등을 건국준비위원회의 설립 목적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같은 해 9월 6일 미군의 남한 진주를 앞두고 박헌영이 이끄는 공산계열과 연대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부주석이 되었다. 10월 1일 조선인민공화국 수립경위에 관한 〈매일신보〉 기자의 질문에 응답한 답변내용을 보면, "북한의 소련군처럼 남한의 미군도 행정일체를 조선인에게 넘겨줄 가능성이 있다"라는 희망적 관측을 가졌으나, 조선인민공화국은 우익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의 승인 거부로 실패하고 말았다. 11월 12일에는 건국동맹세력을 모체로 고려국민동맹·인민동지회·일오회(一五會) 등의 단체를 흡수하여 조선인민당을 창당하고 당수로 취임했다. 1946년 2월에 결성한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에 참가하여 의장단에 선출된 이후 3월초에 열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여 6월 6일 남조선민주의원을 대표한 김규식과 원세훈, 민전을 대표한 허헌 등과 함께 제1차 회합을 가졌고, 14일 제2차 회합에서 좌우합작 3원칙을 발표했다. 이후 좌우합작운동은 미군정의 지지를 받으며 7월 21일 4개항의 합의사항이 공동명의로 발표됨으로써 좌우합작기구인 좌우합작위원회가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같은 해 9월 평양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자 김일성과 회동하기도 했으며, 11월 남조선노동당으로의 합당과정에서 이탈한 세력을 결집하여 사회노동당을 결성했다. 그러나 사회노동당 세력의 남조선노동당으로의 대거 이탈과 사회노동당에 대한 북한의 비판적 입장으로, 1947년 5월 사회노동당을 해체하고 온건좌파 세력을 중심으로 근로인민당을 창당하여 당수를 지내며,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적극 추진했고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위해 계속 노력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그해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에게 암살당했다.

 

/네이트 백과사전

 

 

 

 

 

출처 : 추억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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