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특무책임자 김창영
김일성부대 공작책임자... 미 군정하 서울시장
▲ 경찰 시절의 김창영 ⓒ 조선공로자명감
뚜렷한 친일행적을 남긴 친일파 가운데 김창영이라는 다소 낯선 이름의 친일파가 있다. 일제하 총독부 군수·경시 등을 거쳐 다시 만주국 고관으로 선발돼 김일성(金日成)부대 등 항일군의 귀순공작 책임자를 지낸 그였지만, 전문연구자들도 친일파 명단 속에서 그의 이름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친일경력자들과 달리 그가 해방 후 사회활동을 중단한 것이 그 이유가 아닌가 싶다. 지난 93년 도서출판 다락방에서 <반민특위 재판기록>을 출간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친일행적은 한동안 더 '역사의 창고'에 묻혀 있었을지도 모른다.
김창영(金昌永·1890∼?)은 평안북도 강계(江界) 출신이다. 1911년 평양고보 사범과를 졸업한 그는 강계보통학교에서 2년간 훈도(訓導. 교사)생활을 하였다. 공부를 더 할 욕심으로 훈도생활을 그만둔 그는 1913년 4월 도일, 교토 소재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 법과에 진학하여 3년 뒤인 16년 대학을 졸업하였다.
한동안 더 '역사의 창고'에 묻힐 뻔한 김창영의 친일행적
졸업 후 귀국한 그는 그해 10월경 동향출신 강계군수 유진호의 추천으로 고향인 강계군 공북면 면장에 임명돼 일제하 관리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자신의 면장 취임과 관련, 그는 당시 새로 발포된 면제(面制)시행에 따라 신교육을 받은 자신이 임명된 것이라고 반민특위의 조사과정에서 밝힌 바 있다.
공북면장으로 4년을 보낸 그는 1921년 4월 돌연 강원도 경찰부 경무과 경부보로 자리를 옮겼다. 공북면장 재직시절 교류를 쌓아두었던 평안북도 지방과장 일본인 다케이(武井秀吉)가 강원도 경찰부장으로 전직하면서 그를 추천, 데려간 것이다.
경부보 8년만에 경시(警視. 현 총경급)로 승진한 그는 경찰부 위생과장으로 2년간 재직하다가 1932년 전북 금산군수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경찰 출신 가운데 근무성적이 좋은 자는 더러 군수로 나갔는데 이는 '영전'에 해당하는 승진인사였다.
한편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8월 그는 총독부 인사과장의 호출을 받고 총독부로 불려갔다. 그 자리에는 도 이사관, 도 경시, 군수, 판사 등 30여 명이 모여 있었다. 당시 총독부는 이 해 12월을 기하여 만주국이 치외법권을 철폐하게 됨에 따라 만주 거주 조선인들을 지도, 관리할 책임자로 성장(省長) 1인과 사무관 5인을 선발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는데 이때 모인 사람들은 그 후보자들이었다.
그는 총독부의 최종심사를 거쳐 만주국 치안부 사무관으로 임명돼 만주로 향했다. 당시 그와 함께 선발된 자로는 성장 이범익(중추원참의 겸 동척 감사), 민생부 이사관 이필동(경남 울산군수), 사법부 사무관 김광근(전부지방법원 판사), 목단강성 사무관 홍영선(평북 선천군수), 통화성 사무관 차화선(경북 예천군수) 등 5명이었다.
만주시절 그는 대부분을 치안부에서 사무관, 독찰관, 이사관으로 근무했는데 이사관 가운데 조선인으로는 그가 유일했다. 당시 치안부의 주요업무는 조선인 치안단속과 항일군 귀순·토벌공작이었다.
경찰-군수 출신으로 만주 김일성부대 귀순공작 책임자
▲ 만주국 치안부 이사관 시절 김창영이 쓴 글씨. 당시 김창영의 창씨명은 김광창영(金光昌永)
반민특위 조사과정에서 그는 경찰관의 비리를 감찰하는 직책인 독찰관(督察官) 시절 만주 동북지구 일대에서 항일투쟁 공산당 거두 양정우(楊靖宇)의 부대원 7백여 명을 귀순시켰으며, 양정우의 부하로 당시 8사단장 김일성(金日成) 외 수백 명에 대한 귀순공작을 시도한 바 있으나 이는 실패하였다고 밝혔다.
그는 파견원 박차석(김일성 친구)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 김일성부대는 산중에 천막 4개에 나뉘어 120명이 포진하고 있었는데 조선인 약 40명, 만주인 80명의 2개 중대였고, 제7단장은 만주인 손장상이며 제8단장은 조선인 최현으로 들었다고 증언했다.
특위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그는 1942년 10월부터 6개월간 안광훈(독립군에서 귀순·통화성 공작반장)·유홍순(간도성 차장)·김송열(밀정·연길 공작반장)·계난수(전 간도성 사무관·왕청 공작반장) 등 친일파, 일만(日滿)군경 등과 더불어 동만(東滿)지구 일대에서 김일성 부대 참모장 임수산 외 30명, 양정우 군사령부 총무부장 오성륜 외 10여 명, 동 군사령부 경위여장 박득범 외 6명, 동 사령부 소속단장 김백산, 김일성부대 정치주임 김재범 외 6명 등 수 백여 명의 항일조선군을 체포·사살하는데 참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공로로 그는 43년 고등관 3등, 종5위, 훈6등을 서훈하였다.
조사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친일행적은 물론 당시 만주에서 같이 활동한 친일조선인들의 명단과 행적도 소상히 털어놓았다. 그가 밝힌 내용에 따르면, 김일성부대 참모장으로 있던 임수산은 귀순 후 헌병공작반의 전위대가 되어 귀순전 자신을 도와주었던 촌민들을 통비죄(通匪罪)로 몰아 협박한 후 무수한 불의와 금품을 탈취하였다.
또 일본 육사출신 박두영(일본육사 15기생)은 일제의 명을 받아 간도성 내에 있는 독립군에게 박해를 가하였으며, 이기권은 관동군의 특명을 받아 자비로 간도성 중심으로 일제에 충성을 다한 자이며, 이용걸(55)과 황재호(통화성 경좌) 등은 통화성 일대 숙청공작에 종사한 자였다고 밝혔다.
만주지역 친일 조선인들의 죄상도 낱낱이 공개
이밖에도 김학성(안도현 경무과장)은 안도현 경찰 대대장으로 안도지구 숙청공작에 종사하였고, 김승식과 김응두는 군수공장을 책임경영하며 전쟁에 적극 협조하였다고 그는 밝혔다.
한편 만주시절 그는 만주인 2천여 명과 김일성 부하 이외 간부급 50∼60명의 목숨을 구해준 바 있다고 특위에 진술하였다. 조선독립군 총사령부 대대장을 지낸 문학빈과 계난수 공작반에 체포돼 귀순한 박득범 등을 총독부 당국을 설득해 목숨을 구해주었다고 밝혔다.
만주국 치안부에서 항일군 토벌작전에 혁혁한 성과를 올린 그는 총무청 참사관으로 자리를 옮겨 6개월간 근무 후 8년간의 만주생활을 청산하고 1943년 10월 전라남도 참여관겸 산업부장으로 전직하였다. 이 무렵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었는데 해방 당시 그의 직책은 전남 광공부장이었다.
당시 그가 맡고있던 직접사무는 화순 무연탄 채굴사업·목재반출과 제재(製材)·송탄유(松炭油) 산출·도로건설 등과 군수품 광산 지휘, 감독이었다. 간접사무로는 조선소 시설 원조와 기타 방공시설 등 전쟁에 필요한 사업을 지휘, 감독하여 원조하는 일이었다.
이 일에 그는 전남지역 조선인 50만명 이상을 동원하여 일제에 충성을 바쳤다. 해방직후 그는 일제하 경력을 인정받아 미군정 하에서 경성부 민정관 겸 경성부윤(현 서울시장) 직무대행을 3개월간 하였다. 그의 인생을 통틀어 마지막 공직생활이었다.
재판장이 검찰관 구형량보다 높게 선고
1949년 4월 13일 그는 반민특위 요원에 체포돼 중부경찰서에 수감됐다가 청주형무소로 이감(6월경 마포형무소로 재이감됨)됐다. 특위의 조사는 신정호 조사관이 맡았는데 김창영은 신 조사관이 만주에서 관리를 지냈다고 폭로한 바 있다.
그에 대한 최종 선고공판은 7월 28일 오전 11시 서울지방법원 대법정에서 열렸다. 조병한 특별검찰관은 공소한 범죄사실은 모두 증명이 충분하다며 반민법 제4조 9항(관공리 되었던 자로서 그 직위를 악용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적 죄적이 현저한 자)을 적용, 피고인에게 공민권정지 1년을 구형하였다.
변호인단과 피고인은 관대한 처분을 요망하였다. 그러나 재판장 김병우 재판관은 판결문 '이유'에서 "증거자료와 피고의 진술내용, 검찰관의 피의자신문조서 등을 종합해보건대 피고는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적인 형적(形跡)이 현저하다"며 검찰관의 구형량보다 많은 '공민권정지 3년'을 선고하였다.
일제하 고급관료 출신 가운데 상당수가 해방 후에도 권력엘리트로 변신, 공직에서 활동한 것과 달리 이후 그의 이름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호적자료에 따르면 그는 1967년 4월 2일 성북구 돈암동 자택에서 76세로 사망한 것으로 나와 있다.
"김일성이 평양에서 활동하는 그 김일성인가?" - "그렇다"
반민특위 재판과정에서 밝혀진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
지난 94년 사망한 북한 김일성 주석의 일제하 항일행적 여부를 놓고 한국사회에서는 한동안 논란이 있었다. 이른바 '가짜 김일성론'이 그것이다.
한국 정보기관에서 유포한 것으로 알려진 이 '가짜 김일성론'의 요지는 해방 당시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은 일제하 항일운동을 한 독립운동가 김일성과는 다른 인물이라는 것.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국내외 북한연구자들의 반론에 직면했었고, 지난 90년대 후반 정보기관은 마침내 김일성 주석의 항일투쟁 경력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김 주석의 항일투쟁 경력은 이미 반세기 전인 지난 1949년 반민특위에서 재판과정에서 확인된 바 있다. 일제말기 만주지역 항일세력 귀순공작 책임을 맡았던 김창영은 반민특위 재판과정에서 자신이 직접 김일성부대 귀순공작을 한 사실을 인정했고, 또 나름의 성과(?)를 소개했다.
재판과정에서 조사관이 "김일성이 지금 평양에서 활동하는 바로 그 김일성이 맞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그런 줄로 안다"고 말했다. 즉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과 함께 항일투쟁을 펼쳤던 김일성이 바로 북한정권의 김일성과 동일인물임을 확인한 셈이다.
김창영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만주 동북지구 일대에서 항일투쟁 공산당 거두 양정우의 부대원 7백여 명을 귀순시켰으며, 양정우의 부하로 당시 8사단장 김일성 외 수백 명에 대한 귀순공작을 시도한 바 있으나 이는 실패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형직 항일운동사료, 독립기념관 소장
사실 독립기념관에는 김 주석의 항일운동의 입증해주는 중국공산당의 비밀문건을 비롯해 김일성 주석의 부친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조부인 김형직(金亨稷, 1894~1926)이 항일 비밀결사를 통해 독립운동을 펼쳤음을 입증하는 사료가 다양하게 소장돼 있다.
이미 1989년에 김형직이 활동했던 조선국민회에 대한 연구논문이 나왔고, 함께 활동했던 배민수(裵敏洙, 1896~1968))의 자서전 속에도 김형직에 대한 기록은 빈번하게 나온다. 일제시기와 해방 후 기독교 민족운동사, 농촌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장로교 목사였던 배민수는 김형직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자서전에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항상 눈물로 기도하였다. 어떻게 조국을 해방시킬 것인가 하는 것만이 우리의 관심사이자 희망이었다. 우리 삶에서 애국심 이외에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하지 않았다.(배민수 자서전, 92쪽)”
배민수는 1913년 여름 김형직의 제안으로 평양 기자묘 숲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서하는 의식을 갖기도 했다. 이러한 기록 외에도 조선국민회에 대한 여러 일제자료들이 있지만 북에 대해 적대적 인식을 갖고 있는 일부 사람들만이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북은 이미 대화의 상대이자 통일의 상대이며, 화해하고 협력해야 할 동반자 관계로 변화됐다. 그런 점에서 북의 최고지도자였던 김일성 주석의 항일활동도 이제는 역사적 평가를 사실 그대로, 미화차원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평가하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다.
정운현/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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