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월 반미청년회가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로 개편(90년 1월 김정일 북한 권력장악 의미)
김정일정치군사대학(金正日政治軍事大學)는 평양에 있는 대학교이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1947년도 설립한 남로당 대남정책 군사대학 강동정치학원이 1962년 금성정치군사대학으로 개편하였고 1983년 노동당 작전부로 흡수돼 1992년 김정일정치군사대학으로 개편됐다 강동정치학원은 남한출신 빨치산 투쟁 총지휘부대로 대남공작교육기관이다 월북자 출신이 운영하는 정치군사대학으로 알려져왔다 이 말은 한국민족민주전선(반제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정치군사 교육기관이라는 의미이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노동당 작전부 소속 북한 대남사업요원 및 전투원(침투조)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다.
금성정치군사대학으로 1962년 설립되었으며, 당중앙위 직속 정치학교로 명명되었다가 1992년 1월 김정일의 생일 50돌을 맞으며 ‘김정일정치군사대학’으로 개칭되었다. 이 대학은 북한에서 ‘김정일’의 이름을 딴 학교로 유일하다. 입학생은 당 간부 자녀, 대남사업 관련자 자녀, 국가안전보위부 및 보안성 간부 자녀, 인민군 안에서 당성, 체력, 두뇌가 좋은 사람들이 선발되고 있다.
고등중학교 선발대상은 각 도 시 군에 나가 있는 중앙당 5과 지도원들이 한 개 학교에서 1~2명의 우수한 학생들을 토대, 출신 성분, 학력 등을 고려하여 엄선한다. 신체검사를 거친 후 도당, 중앙당 담화 등 약 2년 간 심사를 거쳐 데려간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의 커리큘럼을 보면 김일성 김정일 혁명사상과목이 40%, 전투원으로서 신체단련과 격술, 사격 훈련이 40%, 운전 및 무전, 컴퓨터 기술교육이 20%를 차지한다.
무엇보다 사상교양을 철저히 한다. 전투원들은 최후의 순간 ‘자폭’을 가장 큰 영예로 간직한다. 김정일이 대남사업을 장악하면서 ‘자폭론’을 하나의 교과목으로 채택하고, 철학교재에도 5장은 ‘혁명적 자폭관’으로 되어있다.
“전투원들은 하루 밤에 40~80km를 돌파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김정일의 교시에 따라 전투원들은 25∼30kg의 모래배낭을 메고 40km를 3시간 만에 돌파하기, 해상 8km 돌파하기, 1주일 식량을 가지고 작은 삐토(작은 구덩이)에 잠복하기, 산과 도시에서의 각종 접선방법 취득, 1대 15, 1대 20의 대결훈련 등이다.
6개월간의 전문 특공훈련기간에는 달리는 자동차 잡아타기, 단도 던지기, 산악극복훈련 등을 시킨다. 훈련량이나 강도는 일반 인민군 특수병종의 4∼5배에 달한다.
대남공작부서에 배치돼 다시 비행기 폭파훈련, 요인암살훈련, 천리 행군 등을 훈련받는다. 이러한 훈련들이 모두 끝나면 전투원, 공작원 등의 임무를 부여 받고 대남공작에 투입된다.
학생들이 졸업할 때는 상위 또는 대위 군사칭호(계급)를 수여한다. 학생들은 외출 시 국방색깔의 단체복을 입고 붉은 별을 단 항일모자를 쓴다. 학생들은 졸업 후 청진, 남포, 원산 등에 위치한 작전부, 대외정보조사부 등 노동당 대남공작부서에 배치되어 전투원으로 활동한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북한의 대남공작요원 전문양성기관으로 현재 평양시 용성구역 신미리에 위치하고 있다. 전신은 1946년의 금강학원이며 이후 정치대학, 금강정치군사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92년 1월 김정일의 50회 생일을 기념키 위해 현재의 이름인 「김정일정치군사대학」으로 확정됐다. 학교 입교생들은 당성·체력·두뇌가 우수한 고등중학교 4학년들 중에서 선발되며 극한 상황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과 위급상황시 대처 능력을 숙달하는 강도 높은 교육과 훈련을 반복한다. 훈련내용을 보면 우선 주기적으로 100리, 150리, 200리 훈련을 실시하여 주어지 시간내에 주파토록 하고 있다. 또 해상침투에 대비하여 수영·잠수 등의 훈련을 수시로 실시해 약 8km정도의 거리는 자유자재로 왕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동계기간에는 아침구보 후 얼음구멍 속에 들어가 몸을 담그는 극기훈련을 통해 강인한 체력을 갖추도록 하고 있다. 이외에도 6개월간의 「전문특공대훈련」을 학생들에게 실시하고 있다. 이 기간동안 개인별로 도끼 1자루와 성냥 1통만 지급하여 비밀 아지트(일명 비트) 5∼6개를 만들도록 시키고, 달리는 자동차 잡아타기, 단도던지기, 수영, 산악구보 등을 교육내용으로 실시한다. 이러한 강도높은 훈련은 일반 북한군인들의 4∼5배 이상되는 것이다. 이 학교 출신들은 선후배의 구별이 확실치 않은 북한의 일반학교들에 비해 선후배 규율이 엄격하며 후배는 선배에 대한 절대 복종을 강요받는다. 이 대학 출신들은 학교를 마친후 35호실(구 대외정보조사부)·대외연락부(구 사회문화부)·통일전선부 등의 대남공작부서에 배치돼 또다시 비행기 폭파훈련, 요인암살훈련, 1천리행군 등을 받게 된다. 이러한 훈련들이 모두 끝나면 전투원, 공작원 등으로 임무를 부여받고 대남공작에 투입된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출신이 김정일좌익군사정부 전위대 지위와 역할
평양 당 대표자 대회와 대의원 선거때 평양 김정일정치군사대학 학생들이 각 분주소에 배치되어 주민들의 동향을 감시하고 있다
-김정일 권력장악 남한 전위대:반미청년회(김정일 선전돌격대)
반미청년회는 1990년 1월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로 개편하여 김일성주의(NLPDR)노선에서 새세대 김정일 주체사상노선(자주노선)으로 개편하였다(예: 여수등지 남해안 북한잠수함 침투와 민혁당사건)
-남파간첩 정경학(48)
함경남도 함주 출신의 그는 1976년 김일성종합대학 외국어문학부 2학년을 중퇴한 뒤 인민군 총정치국 적공국(敵工局)의 사병, 공작원 등을 거쳐 1991년부터 대외정보조사부(현재 35호실) 공작원으로 선발됐으며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의 교육을 받고 1993년 7월부터 방글라데시 등지에서 활동해왔다.
태국에서 활동할 때 `정선생'으로 불린 그는 1993년 7월부터 동남아지역에서 활동하면서 방글라데시, 태국, 중국, 필리핀 사람으로 4차례 국적을 세탁해오면서 정영학, 정철, 모하메드, 마놋세림, 켈톤 등의 가명을 사용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35호실은 통일전선부, 작전부 등과 함께 노동당 내 대남 조직으로, 해외정보를 수집하고 해외인사를 포섭해 남한에 투입시키는 등 제3국에서의 대남사업을 주관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원정화(元正花, 1974년 1월 29일 ~ )는 북한 여간첩이다.북한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태어났다. 1988년 함북 부령군 고무산여자고등중학교 4학년 때는 학업성적이 우수하여 '이중영예 붉은기 휘장'을 받기도 했다. 15세 때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사로청)에 의해 발탁돼 공작원 양성학교인 금성정치군사대학(현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교육을 받다가, 1992년 머리 부상으로 소속 특수부대에서 의병제대했다.
1998년 국가안전보위부에 포섭돼 간첩활동을 시작했다.
일본에서 귀국 직후인 2008년 7월 15일에 대한민국의 군경합동 사법당국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1987년 대한항공(KAL)기 폭파사건을 일으킨 김현희가 작전부 소속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1987년 KAL기 폭파가 35호실이 벌인 대표적인 테러 사건. 김현희는 작전부 소속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교육받기도 했지만 원래 소속은 35호실이다)
-윤상현 의원 "왕재산 지령 내린 '내각 225부'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출신"
북한 대남공작 부서인 '내각 225부'의 지령을 받아 남한에서 간첩 활동을 벌인 혐의를 받고 있는 지하당 '왕재산'의 배후에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윤상현(한나라당·외교통상통일위)의원은 3일 보도자료를 통해 "지하당 구축과 간첩행위를 지령한 것은 '내각 225부'이고 이와 직접 연계된 기관은 바로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이라면서 "일명 '130연락소'로 불리는 이곳은 대남간첩 침투 및 호송을 담당하는 육상·해상 전투원 양성을 주임무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윤 의원은 "그간 국내에서 지하당을 조직하고 간첩활동을 해온 자들은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교육되고 훈련된 225부의 간첩들에게 포섭당해 그 지령을 받아 스스로 북한 노동당의 소모품 노릇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윤 의원에 따르면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본교(평양시 형제산구역)와 분교(평양시 용성구역)로 나뉘어 각각 전투원 양성과 간첩 위탁교육을 벌이고 있다.
본교의 경우 매년 중학교 졸업 예정자 중에서 선발, 4년 동안 전투원으로서 양성 시키는 임무를 맡고 있다. 전공은 육상·해상반으로 나뉜다.
본교는 ▲혁명역사와 김일성 부자의 저작물 교육 ▲남한정세와 영어·컴퓨터·지형학 ▲체력단련·격술·사격·잠수훈련 등 각종 실전 기술교육을 진행한다.
분교는 대남공작기관에 소속된 간첩을 대상으로 위탁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김일성 부자에 대한 충성심과 간첩으로서의 사명감 부여 ▲담당 업무별 실무교육 진행 ▲기본 체력단련 교육 등을 병행하고 있다.
1947년 설립된 강동정치학원이 1962년 금성정치군사대학으로 개칭됐고, 이후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1983년 노동당 작전부가 창설되면서 이곳에 흡수됐다.
윤 의원은 "김일성 사망 2년 전인 1992년에 '김정일정치군사대학'으로 개칭됐는데 이로써 북한에서 김정일 이름을 붙인 유일한 기관이 탄생했다"면서 "이후 2009년 2월 당과 군의 대남 공작기구들이 '군 정찰총국'으로 통폐합되면서 이곳으로 흡수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김정일은 1942년 2월 16일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바트스코예 마을에서 김일성과 김정숙 사이에서 쌍둥이로 태어났다 그 당시의 그의 러시아 이름은 유라이고 여동생의 이름은 슈라었다 그의 아버지 김일성은 항일 빨치산 출신으로 극동사령부 소련군 88여단에 소속돼 3대대 중 1개 대대를 지휘하는 대대장 출신이었고 그의 어머니 김정숙도 항일 빨치산 출신이면서 소련군인이었다 극동사령부 88여단은 한국인. 만주인(여진족). 중국인들으로 구성된 사할린. 일본열도 그리고 만주. 한반도등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기 위하여 조직화된 공산주의자 중심의 군대조직이었다
김일성과 김정숙, 김정일
그의 여동생 슈라는 3-4세때 하바로프스크 바트코스예 마을 우물(못)에 빠져 죽었다 아직도 슈라의 무덤이 있다
김정일은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그의 부모들과 평양으로 왔어 정착하였다가 한국전쟁 발발과 인천상륙작전으로 평양이 국군의 손에 수복되자 피난하여 길림학원에서 공부하다가 다시 중국인민군 도움으로 평양을 점령하여 1953년 되돌아 왔어 인민무력부 산하 어린이 빨치산부대 학교 만경대혁명가 유자녀학원 3학년에 편입하였다
그는 1959년 1월 그의 아버지 김일성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소련공산당 제21차 대회 참석하였고 1960년도 남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노동당 총비서) 남산중,고등학교 시절 모습
그는 1964년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자 마자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권력의 핵심으로 들어간 그는 이후 선전선동부 과장. 부부장을 거쳐 부장으로 고속승진을 계속했고 1960년대 후반부터 김일성의 후계자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1973년 당 중앙위조직 및 선전선동담당 비서로 선출되고 이어 1974년 권력의 핵심인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면서 사실상 김일성의 후계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당 중앙>이라는 호칭으로 불렀고 1980년 6차 당대회를 계기로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이라는 지위까지 확보함으로써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로 불리며 명실상부한 실권자로 부상하였다
그는 1990년에 들어서면서 수령의 지위를 차례로 이양받기 시작하여 1990년 12월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에, 1993년 4월에는 군사주권의 최고지도기관인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각각 취임함으로써 당.정.군을 장악하여 후계자가 되기 위한 지도체계를 구축하였다
그런 가운데 1994년 7월 김일성의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권력 계승하여 1997년 10월 당 총비서가 되었다
1998년 9월 북한이 헌법을 개정해,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으로 하고 주석제를 폐지함에 따라 국가수반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행정수반은 내각총리, 최고 통수권자는 국방위원회로 규정하였다 김정일은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1998년 재추대 되었다
2003년 1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성명을 발표하여 핵무기 생산 및 수출을 통한 핵확산 우려를 낳았다 미국이 북한이 핵개발 프로그램을 원천적으로 포기하면서 경제적 원조를 해주겠다는데 대해 북미간 적대관계의 종식과 외교관계 수립, 경제제재 해제를 포함하는 일괄타결을 주장하였다 북미불가침조액을 요구하여 미국의 대북적대시 정책포기를 기도하고 주한미군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연쇄적 파급효과를 노리고 있다 미국이 다자간 협의를 주장 북핵문제는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등 주변국 나아가 세계 전체의 문제로 어느 한 나라의 일탈에 대해 자국적 제제를 가해 핵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에 한반도 핵문제는 미국과의 문제일 뿐이라는 입장을 고집하며 군사우위강화로 체제유지에 힘쓰고 남북관계은 정경분리원칙을 지키고 있다
김정일은 1974년 그의 여비서 김영숙과 결혼하여 딸 김설송을 두고 있다
(1)김영숙(正室-큰 집)--김정일과 김영숙 사이에 1녀 출생
김정일이 김영숙과 결혼한 건 1974년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김설송이란 딸이 하나 있다 김영숙은 노동당 중앙당 김정일 집무실에서 근무하던 서기(타자수) 출신이다 김영숙의 고향은 황해도로 1947년 빨치산 출신 김철만(인민군 대장으로 국방위원. 대의원) 딸로 태어나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일설에 의하면 김영숙이 김정일의 아내가된 이후 고향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득을 보았다고 한다
김영숙은 공식 석상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북한에서는 "퍼스트 레이디"의 역할이란 게 없다 외국 국빈이 와도 특별한 경우외에는 공식석상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김정일은 그동안 외국원수를 공식적으로 접견한 사실도 없었기 때문에 김영숙의 존재는 더욱 더 외부에 드러나지 않는다
공식적으로 추진된 이번 남북정상회담에서는 혹시나 김영숙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역시 그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추진된 이번 남북정상회담에서는 혹시나 김영숙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역시 그녀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2)부실(副室, 작은 집)
ㄱ.첫사랑 성혜림--김정일과 성혜림 사이에서 1남 출생
김정일은 1968년 무렵, 문화예술지도과장으로 영화제작지도를 맡으면서 "첫사랑"으로 일컬어진 한 여인을 만났다 그는 바로 영화배우 출신 성혜림이다 성혜림은 당시 딸을 하나 둔 유부녀로 김정일보다 다섯 살 위인 연상의 여인이었다
성혜림은 1937년생으로 경상남도 창녕에서 창녕 성씨(成氏) 부자집 집안 부친 성유경(成유경, 1982년 사망)과 김원주(김원추, 1994년 사망) 사이의 1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나 서울에서 서울사대 부속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풍문여중을 다니다 1948년 부친 성유경 가족들과 함께 월북했다
그녀는 평양 제3여자중학교를 졸업한 뒤 평양예술학교를 나왔다
성혜림은 미인인데다 예의가 밝아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소설 <땅>으로 알려진 유명한 월북 작가 이기영(李箕永, 前 문예총위원장 84년 사망)의 장남 이평(李平)과 결혼해 딸 이옥돌을 낳은 뒤 다시 평양연극영화대학 연출과에 입학하여 졸업했다
성혜림은 이 대학 졸업반 때 김일성주석이 호평한 영화 <분계선 마을에서> 첫 여주인공을 맡았고 이를 계기로 문화예술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상인 <인민상>을 받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영화 <백일홍> <인민교원> <안개 흐르는 언덕>등에서도 여주인공을 맡아 북한 주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그러나 이평과의 결혼생활이 순탄치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성혜림은 영화에만 몰두했고 그 와중에 그녀는 프놈펜 국제영화축전에 두 차례 참가하면서 시아누크 캄보디아 국왕과 김일성 주석을 자연스럽게 접촉하도록 유도한 것이 김정일을 만난 계기가 되었다
성혜림과 김정일이 동거에 들어간 건 1969년 무렵, 김정일은 성혜림에게서 아들을 얻었다 그가 바로 1971년 5월 10일생 아들 김정남(金正男)이다 김정일은 성혜림과 동거하는 사실을 극비에 붙였다
그러나 성혜림이 김정일의 아이를 갖자 영화계를 비롯한 문화예술계에서 소문이 안날 수 없었다 이 사실은 성혜림의 시아버지 이기영의 귀에 들어갔다 꼿꼿한 선비였던 이기영은 끝내 붓을 꺾어버리고 이후 한줄의 글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김정일과 성혜림의 결혼생활은 처음부터 곡절이 많았다 또한 성혜림과 김정일의 갈등도 적지 않았다 김정일의 동생 김경희는 성혜림에게 "아이는 내가 키울테니 나가달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충격을 받은 성혜림은 아이를 데리고 나가버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김정일이 공개적으로 성혜림을 찾을 수도 없어 애를 많이 먹었다고 한다
성혜림은 1974년경부터 언니 성혜랑과 함께 모스크바의 한 아파트에서 살게 됐다 김정일은 그런 성혜림에게 옷과 음식은 물론 수백만 달러를 모스크바에 공수해 주었다고 한다
성혜림은 언니 성혜랑과 그의 가족일행이 함께 1996년 2월 모스크바를 탈출, 서방으로 망명할때 스위스까지 따라갔으나 그 후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모스크바로 되돌아 갔다 모스크바를 탈출한 성혜랑은 프랑스 정보기관 보호를 받았으며 성혜림은 2002년 5월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ㄱ)성혜랑
성혜랑은 성혜림의 언니이고 이태선과 재혼해 한명의 아들 이일만(이한영, 1997년 서울 사망)과 한명의 딸 이남옥을 두었고 이들은 서울과 서방으로 망명했다
(ㄴ)김정남(金正男)
김정남은 김정일과 성혜림 사이에서 1971년 5월 10일 태어났다 그는 그의 모친 성혜림의 병 치료차 모스크바로 떠난 이후 그의 외할머니 김원주와 이모 성혜랑등이 도맡아 키웠다 그는 스위스 제네바 종합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국가보위부 간부로 활동하면서 국제문제와 첨단 산업등에 종사해왔다
ㄴ.사랑스런 여인 고영희---김정일과 고영희 사이에 2남 1녀 출생
고영희(고영자)는 제주(濟州) 고씨(高氏)로 1953년 6월 16일 일본에서 태어나 1960년 초 부친 고태문등 가족들과 함께 어린 나이에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녀의 본명은 <영자>로 북한이 1970년대 일제 잔재 차원에서 <자>가 들어간 이름을 전부 고치도록 조치함에 따라 고영희로 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의 부친 고태문은 북한 유도의 창시자이다 그리고 고태문은 유도선수 역도산(김광호)과도 절친한 친구 사이었다 그리고 고영희의 형제로는 남동생과 여동생 1명씩 있으며 여동생 고영숙은 1990년대 말 서방으로 망명했고 남동생은 고영희가 살고 있던 창광사 관저의 부과장 직책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영희는 만수대 예술단이 1973년 일본 공연을 가질때 단원으로 참가, 일본 언론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이때 처음 일본언론에 고영희의 얼굴이 공개되었다 김정일은 고영희가 만수대 무용단원으로 활약할 당시 반했고 김정일이가 고영희를 집에 들어앉힌 것은 1976년경이다 김정일 옆에 앉던 고영희는 1977년부터는 파티에 나오지 않았다가 아예 살림을 차린 것이다
고영희와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에 아들 두명을 두었고 딸 한명을 두었다 아들이 바로 1981년생 김정철과 1983년생 김정은이고 딸은 1986년생 김여정이다
고영희는 2003년 1월 8일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평양에서 교통사고로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상처를 입은 후 혼수상태로 있다가 2004년 6월경 사망했다
(ㄱ)김정철---1981년생 스위스 국제학교 졸업하고 노동당 선전부 간부로 활동함
(ㄴ)김정은---1983년생
(ㄷ)김여정---1986년생
-김정일 체제이며 고영희의 여동생 고영숙. 박건부부는 지난 1998년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3)1964년 3월 김일성종합대학교 정치경제학부 졸업
ㄱ.대학논문---삼국통일과 외세개입에 대하여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외세 당나라를 한반도 내전(삼국 통일)에 요청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입장 논문
ㄴ.졸업논문--군(郡)의 지위와 역할(정치경제학과 졸업논문)
북한 행정구역 군(郡)을 기초자치단체로 도시와 농촌의 교량적 지위와 역할로 중요성을 역설한 논문이다 그리고 면과 읍단위를 행정구역에서 없애고 군 단위로 행정업무와사회나 문화등을 통합화하려는 정책이다 독일행정구역 참고한 논문: 주--도(광역시)---시. 군. 구
*김정일:
조선당과 국가최고영도자이며 조선노동당 총서기, 국방위원회 위원장,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다.
1942년 2월생이다. 1960년-1964년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했고 1964년부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사업했다. 1973년 9월 중앙서기로 선거되었고 이듬해 2월 당중앙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되었다. 1980년 10월 조선노동당 제6차 대표대회에서 당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서기와 당중앙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거되었다.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직무를 맡았으며 1991년 12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직무를 맡았다. 1992년 4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원수로 당선되었다. 1993년 4월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당선되었으며 1997년 10월 조선노동당 총서기 직무를 맡았다. 1998년 9월과 2003년 9월에 재차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추천받았다(중국 국제방송 자료)
*대남정치학원 자료--강동정치학원과 금강정치학원
1.남로당과 강동정치학원(江東政治學院)
(1)강동정치학원 형성과정
ㄱ.강동정치학원이란
강동정치학원은 남로당 군사정치학교로서 1947년 9월 평남 강동군에 월북한 남로당 간부들을 집결시켜 설치한 대남공작원 및 유격전문요원 양성소이다
북한 노동당은 1947년 8월 미군정이 공산당 활동을 불법화하자 남로당의 지하당을 제건과 지하활동에로 주력하고 대거 월북한 남로당원들을 강동정치학원에 수용하여 대남공작원훈련과 유격전위주의 군사훈련 후 남파시켜 남로당의 유격투쟁을 지원하였다 1949년 기지를 신안주로 이전하였다가 1950년 6.25전쟁발발과 동시에 폐쇄되었다
대표적인 강동정치학원 출신으로는 남한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본명:이상현)이 있다 1953년 9월 지리산 산청군 생비량 빗점골에서 사살된 남한 빨치산 총책임자 이현상(본명:이상현)은 1928년 조선공산당에 입당, 1948년 남로당 군사정치학교인 강동정치학원에서 3개월간 교육을 받은 뒤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투쟁을 지도하다가 1951년 5월 남한 5도 도당위원장회의를 주재 남한 빨치산 총책임자가 된 후 1953년 9월 지리산 빗점골에서 토벌대의 야간 매복조에 의하여 사살되었다
이외 서양철학자 1세대에 속하는 박치우도 강동정치학원의 정치부원장이 되었다가 뒤에 빨치산 부대의 정치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강동정치학원 출신들은 한국전쟁 때는 빨치산으로 한국전쟁 이후에는 박헌영.이승엽등의 김일성 타도 군사혁명 모의등에 참여하여 실패한 후 대부분이 처형되었다
(ㄱ)박헌영 계열이며 남한 출신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이다
(ㄴ)강동정치학원은 남파공작원 교육원이다
(ㄷ)강동정치학원은 1960년이전 남로당 박헌영계열 숙청이전 대남공작원 교육기관이다
(ㄹ)강동정치학원은 유격활동 기관이다
(ㅁ)강동정치학원은 조국전선 모체이다
ㄴ.강동정치학원 주요 인물
(ㄱ)남부군 총사령관--이상현(가명:이현상)
(ㄴ)강동정치학원 주도로 김일성 제거 군사혁명 주동자---이승엽
(2)강동정치학원 목적---반미인민전쟁론과 인민민주주의 혁명론(NLPDR)--박헌영계열
강동정치학원은 소련 극동사령부 김일성부대가 아닌 남한출신 조산공산당 계열로 박헌영계열이며 그들의 이론도 김일성노선처럼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NLPDR)이론이었다 한국전쟁때 지리산이나 태백산맥등지에서 반미 민족해방 투쟁과 인민민민주주의 혁명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과 박헌영 헤게모니 투쟁에서 박헌영을 지지함으로 소련군 지원을 받고 있는 김일성부대에게 제거되었다 북한정부에서는 한국전쟁 패배 책임과 미국의 스파이로 몰아 강동정치학원 출신 대부분을 공개적으로 처형했다 강동정치학원 출신 대부분은 남한에서는 공산주의 빨치산 투쟁가로 북한에서는 한국전쟁 패배 책임과 미국 스파이로 지칭되어 남북에서 재야로 남아 있다
(3)한국전쟁 이후 강동정치학원 동향
ㄱ.박헌영과 이승엽등의 주도로 군사혁명 모의 그리고 미국 스파이로 처형
--북한 현대사 남로당 박헌영 미국스파이로 재판과정과 처형과정 서술(참고)--
ㄴ.박헌영등 남로당 출신 제거된 후 강동정치학원 폐쇄
2.칠보산연락사무소와 금강정치학원(今剛政治學院)
(1)금강정치학원 형성과정
ㄱ.금강정치학원이란
금강정치학원은 남조선노동당(남로당)출신들로 운영된 노동당 대남교육기관이다 금강정치학원이 바로 칠보산연락 사무소로 보면 올바른다
대남군사교육원이며 대남 교육원 강동정치학원이 폐쇄된 이후 등장한 교육원이 바로 금강정치학원이다
(ㄱ)금강정치학원은 김일성계열이며 남한출신이다
(ㄴ)1960년 4.19혁명 전후 칭립된 정치학원이다
(ㄷ)금강정치학원은 대남공작원 교육원이다
(ㄹ)금강정치학원이 유격활동이나 반정부 투쟁 기관이다
(ㅁ)금강정치학원이 한국민족민주전선(반미청년회) 모체이다
ㄴ.칠보산연락사무소와 금강정치학원
칠보산연락사무소 정치교육원이 바로 금강정치학원이다
칠보산연락사무소는 평양시 흥부동에 소재하고 있으며 대남 흑색방송인 구국의 소리방송과 민중의 메아리 방송(1989년 6월 중단)을 주관하고 있다
칠보산연락사무소 산하에 3개국을 두고 150-200명이 근무하고 있는데 1국은 조직국으로 음악부, 편집부등이 있으며 평양에 있는 <윤이상 음악연구소>를 지원하고 편집부는 기관신문 <구국전선:한국민족민주전선 기관지>과 기관잡지 <청맥:통일혁명당 기관지>을 발행한다
칠보산연락 사무소는 한때 1986년 당시 당 중앙위원회 비서 김중린이 소장을 맡은 바 있으며 실권자는 1972년부터 1985년의 남북적십자회담이나 고향방문단 상호방문 때 6차례에 걸쳐 수행기자로 위장하여 서울을 방문했던 김동수로 밝혀졌다
(ㄱ)통일혁명당(통련당 사건:청맥 기관지)--김종태 간첩
통일혁명당 검거 열쇠--청맥 잡지
통일혁명당(統一革命黨)사건은 다음과 같다
김종태(金鍾泰)는 북한정부 대남사업총국장 허봉학으로부터 직접 지령과 공작금(미화 7만 달러와 한화 2,250만원)을 받고 남파 된 거물간첩이었다 그는 운수업으로 위장하여 통일혁명당(북한노동당의 남한지하당)을 조직하고 전(前)남로당원이나 혁신적 지식인. 학생. 청년등을 대량 포섭하였다 그리고 결정적인 시기가 오면 무장봉기하여 수도권을 장악하고 요인암살. 정부전복을 기도하려 하다가 일망타진 되었다
이 사건에 관련되어 검거된 자는 158명이었으며 그 중에는 문화인. 종교인. 학생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중 73명이 송치(23명은 불구속)되었는데, 김종태는 1969년 7월 10일 사형이 집행되고 이문규(李文奎)등 4명은 9월 23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이들 일당을 검거하면서 무장공작선 1척, 고무보트 1척, 무전기 7대, 기관단총 12정, 수류탄 7개, 무반동총 1정 및 실탄 140발, 12.7mm 고사총(高射銃) 1정, 레이더 1대와 라디오 수신기 6대, 미화 3만여달러와 한화 73만원등을 압수하였다 통일혁명당 미화소설로는 애국시대 상.중.하 3권의 소설책이 있다(통일혁명당은 남한 최초의 김일성주의 정당으로 알려져 있다)
(ㄴ)한국민족민주전선(민혁당 사건: 구국전선 기관지)--이선실 여간첩
민혁당 검거 열쇠---구국전선 기관지(강철서신-->구국의 소리-->새세대-->여명-->아리랑-->백두산)
민혁당 사건은 반미청년회(강철서신과 구국의 소리)와 한국민족민주전선(구국의 소리와 새세대. 여명등) 조직원 검거 전체를 하나로 규정하여 사건화 한 것이다 민혁당 지도부 김영환씨 자수와 검거로 일단락 되어지만 아직도 한민전 잔당 지하조직원들의 활동을 하고 있다
민혁당 지도부 검거 과정에 중부노동당 사건과 영남위 그리고 김동식 . 최정남 간첩 검거, 강릉.여수잠수함 격침 검거등을 성과도 있었지만 한민전 부위원장이며 북한 노동당 중앙위 이선실 여간첩을 체포하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민혁당 검거로 한총련 친북 월북조도 사실상 와해 되었다
민혁당은 통일혁명당을 모델로 조직화한 남한 김일성 주체형 정당이다
(2)금강정치학원 목적--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NLPDR)--김일성계열
김일성은 대남정책팀이며 군사기관인 박헌영의 강동정치학원이 남로당 숙청으로 제거되고 남한내 친북세력이 일거에 제거되자 이런 공백으 메우기 위하여 등장한 기구가 김일성 친위세력으로 조직한 금강정치학원이다
금강정치학원이 박헌영처럼 남한내 친북세력 중심세력이 되었고 그들의 이론도 과거 남로당처럼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NLPDR)이론이 주목적이었다
(3)민혁당 제거 이후 금강정치학원 동향
ㄱ.민혁당 제거이후 한민전 조직 와해 위기
ㄴ.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위원회 등장으로 대남세력 위축과 대북세력 급성장.
ㄷ.중립적 우경화 푸틴정부 등장으로 공산주의 김정일 정부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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