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Che Guevara)는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의 로자리오에서 미숙아로 태어났다.
본명은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Guevara de la Serna).
아버지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는 귀족의 후손이었으며 어머니 세실리아 데 라 세르나는 독립전쟁 당시의 군인집안에서 태어났다.
결국 그의 부모는 부르주아 계급 출신인 셈이다. 어린 에르네스토의 부모는 무신론자였고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자유주의적 좌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돈을 모으는 데 억척스러운 그런 인색한 사람은 아니었고 또 돈을 버는 기술도 신통치 않았다.
에르네스토가 두 살 때 천식에 걸려 고생을 한 이후 그의 가족은 모두 코르도바로 이사를 갔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건강을 위해 에르네스토에게 여러 가지 운동을 가르쳤다.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당시 그는 활동적이고 자립심이 강했다고 한다. 돈에 대한 욕심도 없었고 옷차림에도 신경쓰지 않았으며 자유롭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종종 고독을 즐기기도 했으며 미친 듯이 책을 읽고 공부에도 열심이었다고 한다.
청년 에르네스토는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모험심 많은 사람이었다.
열일곱살 때 모터를 붙인 자전거로 아르헨티나의 중부지방을 돌아다녔다. 이 여행 후에는 자동차 운전과 비행기 조종술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잠시라도 집에 붙어 있지를 못했다. 에르네스토의 부모는 결혼생활에 불화를 일으켜 1950년 이혼한다. 자녀들은 어머니가 맡게 되었다.
청년 에르네스토는 어려워진 집안살림을 돕고 학비를 벌기 위해 일을 해야했다. 그래서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한 건설회사에서 사무원으로 일했다.
천식으로 고생한 적이 있는 에르네스토는 1947년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 의학부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회만 있으면 여행을 떠났다.
1952년에는 같은 의대의 친구인 알베르토 그라나도스와 둘이서 10개월에 걸쳐 자전거 여행을 했다. 칠레에서 바이크가 고장이 나자 페루의 마츄피츄까지 도보로 여행하였다.
한동안은 상 파울로의 나환자촌에서 환자들과 생활하기도 했다. 그후 아마존강을 횡단하여 콜롬비아로 갔다. 그곳에서 그의 친구는 카리카스에 남고, 에르네스토는 비행기로 마이애미까지 갔다.
여행은 그에게 남미대륙의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을 대조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특히 상 파울로 나환자촌에서의 노동을 통해 “인간들의 사랑과 유대감은 고독하고 절망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싹튼다”는 진실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비행기의 출발이 지연되어 마이애미에서 1개월간 더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미국의 실상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8월에 귀국한 후, 의학공부에 몰입하여 1953년 3월, 무사히 대학을 졸업했다.
게바라는 남미 도보여행을 통해서 그곳 민중들의 비참한 생활과 그들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인식할 수 있는 안목을 길렀고 인간해방에 기초한 인식의 굳건한 토대를 쌓게 되었다.
훗날 그는 남미의 어느 땅에서도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껴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술회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그는 안락한 의사에서 급진적인 변혁주의자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알러지에 대한 연구'로 의사가 된지 두달만에 게바라는 가운을 벗어던지고 아르헨티나를 떠나 새로운 정권이 수립된 볼리비아로 갔다.
아직 게바라의 주 관심사는 정치가 아니었다.
그러나 남미 일부국가에서 이미 현실화 되어가는 사회개혁운동과 부딪히면서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이념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그에 앞서 볼리비아의 라 파스에서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의 변호사 리카르도 로호와 만났다. 조국에서 추방된 이 반페론주의자와의 만남이 결국 그의 삶을 변화시켰다.
로호와 함께 여행을 하면서 1953년 볼리비아 혁명의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였고 그의 설득으로 베네수엘라(달러를 벌 수 있는 곳)로 가지 않고 과테말라(미대륙에 있어서 모범적인 혁명이 시작된 곳)로 가게 된다.
1954년 중미의 작은 나라 과테말라에서 자유주의적 좌파인 하코보 아르벤즈가 선거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혁신적인 정책을 폈으며 당시 막강했던 유나이티드 프루츠사(미국 곡물회사)가 소유하고 있던 대부분의 경작지를 국유화시킨 후 그것을 인디언과 소농에게 분배하려는 개혁을 실시하려는 중이었다.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이 나라의 지독한 빈곤상테에 충격을 받고 아르벤즈이 정책에 절실히 공감했다.
“민중은 물질적으로 굶주렸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의 존엄성에 더욱 굶주려 있다”는 아르벤즈의 사상에 대한 경외심을 게바라는 일생동안 간직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외심을 품고 게바라는 혁명의 실천을 위해 패덴드 순켈에서 의사를 지원하게 된다.
그러나 그곳으로 향하는 여행도중에 과테말라의 우익 망명인사인 호세 카스틸료 아르마가 미국으로부터 자금을 원조받고 군대와 비행기를 동원하여 아르벤즈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일으킨 쿠데타를 목격하게 되었다.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는 ‘체 게바라’가 되었다.
이름을 새로 지어준 사람들은 코스타리카의 수도 산 호세의 한 찻집에서 알게 된 쿠바인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1953년 7월 26일, 쿠바의 몬카타병영 공격 때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즉 피델 카스트로의 동지들이다. 하지만 에르네스토는 그들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라틴 아메리카의 혁명운동 지도자들과 만나고 싶어했다. 코스타리카에서 이미 ‘체’로 이름이 알려져 있던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책을 일기 시작했다.
과테말라 좌익정부의 전복이 계기가 되어 그는 맑스-레닌에 관한 학습을 시작했다.
이 학습을 통해 알게된 것은 가난하고 착취받는 나라의 혁명정부는 계속적인 착취와 수탈을 위해 미제국주의와 결탁한 자본가 세력에 의해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공격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의 과테말라 침공을 통해 게바라는 미국에 대한 철저한 증오심과 제국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미국의 범죄에 정면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대항하였다.
나는 아르벤즈 정부의 요직에 앉을 생각은 전혀 없소. 명백한 정치경제적인 침략을 자행한 미국과 미국자본의 횡포에 덩달아 날뛰는 반민족적인 매판자본가들에게 맞서기 위해 가난한 민중들과 함께 군대를 조직하여 했을 뿐이요.
과테말라는 지금이야말로 투쟁이 필요한 때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
-게바라가 아르헨티나 신문기자 호르헤 리카르도 마셋티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
CIA는 처음부터 ‘진지하게’ 라틴아메리카에 대하여 간섭했다.
그 결과 라틴아메리카의 거의 모든 나라가 선교사를 앞세운 미국식 민주주의란 것을 통해 미국 소유의 식민지가 되어 갔다.
과테말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과테말라의 여러 지역이 CIA의 조정을 받고 있는 군대에 의해 폭격을 받았다. 아르벤즈는 피신할 틈도 없었다. 과테말라 혁명은 시작되자마자 순간에 끝나버렸다.
게바라는 투쟁에 직접 뛰어들어 레지스탕스 조직에 가담했다. 투쟁을 촉구하기도 하고 무기를 운반하기도 했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게다가 미 CIA의 사주를 받은 과테말라정부의 재판부가 이미 그를 사형에 처할 것을 결정, 공고하였기 때문이다. 게바라는 과테말라인 친구 엘 파토호와 함께 혁명이론을 배우러 멕시코의 수도로 향하여 달렸다. 이때가 1954년 9월 21일이었다.
멕시코시티에서 게바라와 파토호는 겨울참새처럼 극도로 비참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게바라는 이곳에서 혁명이론과 맑스주의, 각국의 민족해방전쟁의 전술을 두루 섭렵한다. 굶주림과 억압 그리고 독서를 통해 게바라는 철저한 급진주의자로 변해갔다.
게바라는 1955년 여름, 멕시코로 추방당한 피델 카스트로와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된다.
그리고 쿠바해방운동에 가담해 달라는 피델 카스트로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피델은 그를 쿠바 진격대의 의사로 임명했다.
Fidel Castro
피델과 나는 밤을 지새우며 토론을 했다. 그리고 그날 밤에 그의 부대의 의사가 되기로 결정했다.
이미 내 자신의 다리가 라틴아메리카의 구석구석을 돌아보았고, 과테말라에서는 가장 잔인하게 숨통을 조였던 제국주의의 실체를 본 후였기 때문에 압제자에 대항하는 혁명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내 한 몸을 바치는 데 두려움이나 주저함이 있을 수 없었다.
피델은 비범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들이 세운 계획은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낙관적인 태도에 공감하게 되었다.
아무튼 혁명은 코앞에 닥친 현실이었고 온몸으로 뛰어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울부짖기만 한다든지 대충 적당히 해치워버린다든지 하는 일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게바라와 멕시코에 있던 망명 쿠바인들은 철저하고 강도높은 훈련에 돌입했다.
훈련교관은 스페인 외인부대의 대장으로 게릴라 전투에 다년간 경험이 있는 알베르토 베이요 대령이 맡았다. 베이요는 멕시코에서는 살바로르 태생의 지주로 통하고 있었다.
망명 쿠바인들은 그의 신분을 이용하여 멕시코주 찰코 지방 부근에 있는 오래된 농장을 구입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고된 훈련과 사격연습에 들어갔다.
726운동의 지도자들은 수개월 동안 카리브해를 건너 전사들을 무사히 쿠바까지 실어다 줄 튼튼한 배를 찾아다녔다.
마침내 피델이 베라쿠르즈주의 리오타투스판이라는 작은 항구에 묶여 있던 고물이 다 된 보트 그란마호를 찾아냈다.
이 배의 주인은 미국인인 로버트 에릭슨이었는데, 피델일행은 멕시코인 안토니오의 중개로 5만페소를 주고 이 낡은 배를 별수 없이 사들였다.
이 배는 1939년에 건조된 것인데 전체 길이는 19미터, 폭 4.5미터로서 정원은 승무원과 승객을 합쳐서 약 20명 정도였다. 250마력짜리 두 개의 엔진을 탑재할 수 있었지만 거의 모든 부분을 수리해야 할 만큼 고물이었다.
그란마호는 1956년 11월 25일 일요일, 동이 틀 무렵 닻을 올렸다. 정원을 훨씬 초과하여 82명이나 승선했다. 게다가 연료, 무기, 전투복, 식량을 적재했으니 최대 시속 9노트에 48톤의 고물 보트는 출발하자마자 허덕이기 시작했다.
더구나 멕시코에서 쿠바의 동부 오리엔테주 해안까지 가는 가장 길고 비효율적인 항로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도중에 FBI나 멕시코 경찰을 만나는 일이 없어야 되기 때문이다.
보트는 언제 격침될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승무원들은 모두 배멀미를 했다. 게다가 식량도 충분치 않았다. 게바라는 지병인 천식이 도져서 심하게 고생했다.
그란마호는 마침내 연료가 떨어졌고 휩쓸려오는 파도에 떠밀려 항로를 잃고 말았다. 상륙 예상지점인 코로라다스 해안에서 2km 가량 떨어진 곳에서 배는 산호초에 좌초되었다.
해안에 배를 갖다댄다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82명의 탑승자는 모두 바다에 뛰어들어 자맥질쳐서 간신히 육지에 닿을 수 있었다.
망그로브 숲은 상륙지로는 최악이었다. 붉은 망그로브 숲은 바다 쪽에서는 두터운 장벽처럼 보였다. 그 거대한 나무들의 밑둥에는 굴조개 따위가 칼끝처럼 빛을 발하며 닥지닥지 붙어 있었다.
게다가 물 위로 드러난 망그로브의 뿌리에는 바늘같은 가시가 돋혀있어서 밟으면 발바닥을 쿡쿡 찌르는 것이었다. 발밑은 뻘밭이어서 발을 옮길 때마다 미끄러지기 쉬웠고 마치 미지근한 고기국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처럼 기분마저 불쾌했다.
게다가 여러 종류의 커다란 게들이 우글거리며 기어올라와 전사들을 괴롭혔다. 설상가상으로 모기나 파리떼가 몰려오면 망그로브숲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세시간이나 걸려서 간신히 이 지긋지긋한 늪지대를 빠져나와 일행은 아침 9시에야 단단한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오전 9시 30분 원정대원들이 늪지대를 막 벗어나자마자 귀청을 때리는 폭음이 들려왔다. 바티스타의 군대와 비행기가 그들이 상륙한 것을 발견하고 폭격을 개시한 것이다. 11시에는 폭격기 세대가 다시 나타나 피델과 그의 동지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던 농가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원정대원들은 다시 쫓겨 나가야 했다. 게바라는 다음과 같이 쿠바에서의 악몽과 같은 첫 날에 대해 기록하였다.
"12월 2일 우리들은 도착예정지인 코로다스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벨릭이란 지점에 상륙했다."
"이때 이미 대부분의 장비는 분실되었다."
"게다가 새로 준비한 군화를 신었기 때문에 늪지대를 빠져나오는 동안, 대원들의 발은 부르터지고 물집이 생겼다."
"문제는 이 상처에 스며들어오는 파상풍균만이 아니었다."
"카리브해를 항해하는 도중 내내 몰아친 폭풍속을 7일간이나 헤쳐왔기 때문에 항해에 익숙치 못한 대원들 거의 모두가 심한 배멀미로 탈진해버려 기진맥진한 상태여서 다음의 작전을 수행해 내기가 어려웠다."
"원정대원들의 모습은 무모한 계획롸 행동의 결과를 보여주는 표본이었다."
"물론 초기의 이러한 자살행위에 가까운 실수들이 후에 성공할 수 있는 생생한 교훈이 되었다."
"장비중에서 우리 손에 남은 것이라곤 총, 탄약대, 눅눅해진 탄환뿐이었다."
"대부분의 구급낭과 배낭은 늪지대를 빠져나오면서 잃어버렸다."
"밤새도록 제당공장 소유의 사탕수수 밭을 헤치고 걸어나갔다."
"전투 경험이 전혀 없던 우리 대원들은 먹다 남은 음식찌꺼기를 행군 도중에 버렸기 때문에 나중엔 식량이 모자라서 사탕수수만으로 허기와 갈증을 달래야 했다."
"뿐만 아니라 무심코 버린 음식 찌꺼기가 후에 화를 자초했다."
"수색대가 이를 발견해서 우리를 추격하는데 좋은 단서들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또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길을 안내했던 사람들을 돌려보낸 것도 커다란 실수였다."
"그들이 돌아가서 바티스타의 정부군에게 우리의 행로를 밀고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쿠바진격 부대원들은 뿔뿔히 흩어져 도주해야 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레지스탕스들과 접선하는 일은 이미 불가능 했다.
12월 5일 바티스타군은 그들이 숨어있던 알레그리아 델 피오라는 사탕수수 재배지역을 습격했다.
사탕수수밭에서 140명 가량의 정부군이 그들을 포위했다. 이 전투에서 세 사람이 전사하고, 게바라를 포함하여 다수가 부상당했다.
대다수의 대원들은 사방으로 뿔뿔히 흩어져버려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리하여 카스트로가 이끄는 게릴라들과 바티스타가 두목인 1만 2천여 용병들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실전 속에서 단련된 장교들과 네이팜탄을 비롯하여 무엇이든 탑재할 수 있는 최신형 전투기, 게다가 정치적, 군사적인 면에서 바티스타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미제국주의 이 모든 것들과 소수 게릴라들은 맞서 싸워야 했다.
1957년 초, 우리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의 산악지방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라 플라타강 하구에 위치한 소규모의 병영(라 플라타 병영)을 습격하여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는 험준한 산간벽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알려져 쿠바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 습격은 게릴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투쟁의 준비가 완전히 끝났음을 확인하게 하는 계기였고 부대전체에 있어서는 앞으로 다가올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준 것이었다. 게릴라군은 이 라 플라타 병영 습격사건으로 다수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 체 게바라가 쿠바혁명전쟁을 회고하며
약 36명의 바티스타군을 22명의 게릴라 부대가 습격, 라 플라타 병영에 붙잡혀 있던 포로들을 이끌고 유유히 사라졌다.
쿠바 국내에서는 독재자 바티스타 일당이 국민들에게 더 이상 게릴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 뉴욕 타임즈의 허버트 매튜즈 기자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 속의 게릴라 기지에 들어가 카스트로와 회견을 했다(1957년 2월 17일).
이 회견기사는 정부측 주장을 완전히 뒤집었다. 4월에도 미국의 방송국 기자인 봅 티버를 초청하여 기자회견을 했다. 이 회견 장면이 미국 전역에 TV로 방영되었다. 산속의 게릴라군과 도시의 레지스탕스는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산속과 도시에서 통일전선을 구축했다.
이러한 통일전선은 게릴라 활동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었다.
열악한 조건이었다. 의약품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산속의 환자는 모두 비슷한 증세로 앓고 있었다. 이빨이 몽땅 빠져버린 노인, 기생충이나 구루병으로 고생하는 어린이들, 여러가지의 비타민 결핍증, 이 모두가 시에라 마에스트라 농민들에게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증상이었다.
나는 단순한 치료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활조건 자체를 철저하게 변혁시켜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내가 진료한 첫환자는 이스라엘 프라도였다.
그는 완전히 나아서 돌아갔다. 두번째 환자는 호엘 이글레시아스였는데, 그의 충치를 뽑기 위해서는 이빨에 맞는 치료용 화약이 필요했다.
그건 일종의 환자를 대상으로 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그런 힘겨운 전쟁을 치렀지만 이빨은 그대로 남아 잇몸에 달려 있었다.
그것을 뽑아내려고 온갖 짓을 대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치과의사역을 해 보기는 처음이었고 진통제 한 알도 없었다. 그래서 심한 충치로 고통받는 환자에게는 심리적 마취를 십분 활용했다.
즉 고통스런 치료가 성공하도록 주문을 외우게 하는 방법이었다.
게바라는 의사로서 활동하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산속에서의 전투에도 빠짐없이 참가했다. 라 플라타병영 습격에서부터 엘 우 베로 전투, 엘 옴 브리트 전투, 그리고 알토스 데 콘라도, 브웨이시토, 피노 델 아구아, 마르 베르데 등의 전투에까지. 이 공적이 인정되어 7월에는 소령으로 진급되었다.
게바라는 굳센 의지와 용기를 갖추고 있었고, 지휘자로서의 능력도 탁워하였다. 그의 생애중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의 25개월간은 그를 조직이론가, 사상가, 전략전문가 그리고 영웅으로까지 만들었다.
게릴라군은 산속의 근거지를 확고히 구축했다. 게바라는 병영본부를 건설하고 야채밭, 목장, 진료소, 빵 공장, 간이 방송국, 담배와 신발, 무기제작창 등을 세웠다.
물론 사소한 일이라도 신중하게 추진했다. 이 모든 것은 보통 사람의 능력으로는 힘든 일이었다. 게바라는 등사판 신문 <자유 쿠바인>을 발간하여 병사들에게 배포하기도 했다.
1958년, 게릴라들은 세력을 확장하고 역량을 강화해 갔다.
이해 2월, 게릴라군은 드디어 산을 내려가 혁명전쟁을 개시할 것을 결의했다. 시가전이 조직되었고, 독재자에 대항하는 투쟁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전개되었다. 날이 갈수록 전선은 확대되었다.
게바라가 이끄는 부대는 농민들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였다.
옷은 너덜너덜하게 해어지고 굶어죽지 않을 만큼만 배를 채웠지만 조국해방에 대한 신념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다. 들판에서는 하늘에 노출되어있어 자주 비행기의 폭격을 받았다.
게다가 이해관계 때문이거나 혁명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갖고 참가했던 병사들은 자주 도망을 쳐서 밀고해버리곤 했다. 이런 와중에도 게바라 부대는 20개 이상의 강을 건너며 섬 중앙부를 횡단하여 마침내 에스캄브레이 산속의 게릴라들과 합류했다.
게바라는 그곳에서 가축을 훔치는 등, 농민들을 괴롭히고 있던 ‘자칭 혁명가’들의 규율을 바로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1958년 12월, 마침내 바티스타군은 패주하기 시작했다. 독재의 날들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 게바라 부대의 산타클라라 공격은 바티스타 일당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최후의 일격이 된다.
산타 클라라는 쿠바섬의 중앙평원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인구 15만의 이 지역 중심도시이다.
교통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온갖 소문이나 정보가 가장 빠른 시간에 모여들고 퍼져나갔다. 우리는 공격 당시 소총부대를 상당히 증강시겼고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다발적으로 공격할 수 있을 만한 역량도 갖추었다.
비록 폭탄은 부족했지만 중화기도 갖추고 있었다. 바티스타군의 전차대를 공격할 바츄카포도 입수했다. 우리들은 까마후아니가의 도로 입구에 장갑차를 앞세우고 경비에 임하고 있는 바티스타군에게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로 했다.
12월 29일, 해방조국을 향한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다. 까피로 언덕의 수비는 상당히 완강했다. 30일, 이곳에서 하룻동안 전투를 계속하는 동시에 시의 다른 지역을 점차 장악해 들어갔다.
정부군은 본부와 장갑부대 사이의 통신이 두절되자 까피로 언덕이 포위되어버린 것을 알고는 그제서야 당황하여 철도를 이용해 도주하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미 철로를 파괴해 퇴로를 끊어 놓았기 때문에 기관차와 객차 여러 대가 탈선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집중 폭격을 퍼부어 대자 장갑열차는 성냥곽처럼 부셔졌다. 고사포와 기관총, 그리고 엄청난 양의 총탄을 고스란히 내놓고 적들은 22대의 차량과 함께 항복해오지 않을 수 없었다.
게바라 부대는 12월 31일 경에 산타 클라라의 거의 전지역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 날 밤. 1959년 1월 1일, 새해의 첫날 새벽, 바티스타의 탈출작전이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현금과 보석자루가 비행기에 실리고 공포에 질린 바티스타 부부와 그들의 절친한 몇몇 외국인 친구들이 함께 탑승했다. 비행기는 산토 도밍고를 향해 소리없이 이륙했다.
새벽 2시 10분에 너무나도 황급히 떠나야 했기 때문에 경호원이나 수행원들은 거의 따라가지 못했고, 측근들은 작별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바티스타의 부인 루시아는 귀금속이 달린 블라우스와 현란한 장미빛 판타롱을 차려입고 한껏 멋을 부렸지만 불안해하고 초초해하는 기색을 감출 수는 없었다. 바티스타는 측근들에게 자신이 출발한 직후 일어나는 일들을 이후 반드시 보고하도록 당부했다.
그리고 두 명의 장군에게 집무를 대행하도록 명령하고 체라고 알려져 있는 아르헨티나 의사따위와 같은 공산주의자들의 손에는 정권이 절대 넘어가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1959년 1월 5일, 사법관 마누엘 우르티아가 대통령에, 호세 미로 카르도나가 수상에 임명되었다.
게바라는 수도 아바나의 요새인 라 카바냐 지역의 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피델이 이끈 용감한 애국청년들은 세상이 깜짝 놀랄 역사적 과업을 이룩했다.
그것은 바로 제국주의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던 친미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것이다. 무력을 사용한 싸움이 끝나고 나자, 한층 더 어려운 문제가 다가왔다. 즉 그것은 새로운 혁명이었다.
쿠바가 또다시 양키의 식민지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구조를 변혁시켜야만 했다.
피델과 까밀로 시엔후에고스는 아바나의 군정관이 되어 바티스타군의 잔당을 일소하는 일을 맡아했다. 군부와 경찰은 수년에 걸친 내전 기간동안 2만명 이상의 쿠바민중을 학살했다. 고문, 폭력, 강도질에다가 마지막엔 농가에 불을 지르기까지 온갖 만행을 밥먹듯이 저질러 왔다.
이런 야만적인 폭정을 휘두르는데 필요한 모든 지원을 미국으로부터 아낌없이 받아왔던 것이다.
이런 인간 쓰레기들을 자유롭게 놓아두는 것이 옳겠는가? 아니면 처형하는 쪽이 옳겠는가? 게바라는 이들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임무(재판권)를 맡았다.
살려두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재차 반혁명을 꾀할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은 총살하고 나머지는 징역을 살도록 했으며 극소수만 무죄로 석방하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게릴라들은 멕시코나 과테말라 혁명의 선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를 전면 개편했다. 직업군인제를 폐지하고 미국이나 부르주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새로운 군대를 만들었다.
피델과 그의 동지들은 수염을 깍는 일도 미루고 제반문제를 검토했다. 1959년 1월, 게바라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며칠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멕시코의 어느 곳에서 우리가 은밀히 토론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혁명의 강령을 쿠바국민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하자 몬카타병영 습격에 참가했던 한 병사가 이렇게 주장했다. “이건 단순하고도 간단한 일이다. 우리들이 하려고 하는 일은 쿠데타다. 바티스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으니 그 놈으로부터 다시 정권을 빼앗으려면 또 한 번의 쿠데타를 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바티스타가 100의 이권을 미국에 바쳤다면 우리들은 101의 이권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문제는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그에게, “우리들은 확고하게 기초를 다진 후에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으면 안된다. 보다 중요한 일은 권력을 잡은 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라고 말해 주었다.
오리엔테의 산과 평지에서, 카므게이의 저지에서, 라스 비야스의 산과 평지 그리고 여러 도시에서의 2년 동안에 걸친 처절한 투쟁 후에 아바나에 개선한 우리 게릴라들은 초창기와는 몰라볼 정도로 변해 있었다.
농민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우리는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이들 농민의 생활에 대해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실천을 통하여 우리는 이론을 정립해나갔다.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수행되었던 ‘토지개혁’의 깃발 아래 굳게 뭉쳐 우리 게릴라들은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싸워 왔다.
우리는 ‘토지개혁’을 통해 모든 무산자들에게 토지가 돌아가야 하며, 불법 소유자들에게서는 토지를 돌려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수행하는 노력과 치르고 있는 희생이 농민의 해방을 위한 것일 때에는 아낌없이 치루어내야 한다는 것을 농민의 지지와 성원 속에서 배우게 된 것이다. 농민들에게 토지를 줄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인 급진적 토지개혁을 직접적으로 제국주의자들과 그들에 빌붙어먹는자들 즉, 대토지 소유자, 설탕공장 경영자, 대규모 농장소유자들의 이익과 충돌한다. 부르주아듣은 이러한 충돌을 두려워하나 프롤레타리아는 그렇지 않다.
노동자들은 이 토지 소유자들에게 불리하게 제정된 법률을 지지하고 있다. 혁명군은 남녀를 불문하고 기본적인 사명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것은 억압과 착취의 굴레로부터 농민들을 해방시키는 사명이다.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토지를 쟁취하는 투쟁에 그들을 불러 일으켜서 참여시켜야 했고 그 일을 위해 오리엔테주의 구석구석가지 바로 그곳 출신의 교사들이 파견되었다.
쿠바 혁명정부는 사회 각 분야의 개혁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중이고, 민중의 단련된 민주주의 의식이 이를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농지개혁 구상을 구체화하여 실현가능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새로은 혁명적인 법률이 요청되고 있다.
또한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토지의 재분배와 늘어난 농산물의 수급을 처리할 대형 유통기구의 마련이라는 두가지의 과제는 혁명정부가 어떻게 해서라도 실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경제적인 일은 모두 서로 연관되어 있다. 국내산업의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이 과정에서 파생되는 많은 난제들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예컨데 산업장려정책을 진행시킴에 있어서 막 생겨나고 있는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과 이 기업에서 생산해낸 상품을 소비할 국내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대책도 필요하다.
이 시장의 규모는, 구매력은 크지 않더라도 물품을 필요로 하는 농민들의 수요에 맞출 정도면 된다. 사탕 담배 등을 수송하기 위한 상선도 필요하다. 또한 이전에 우리들의 소유였던 토지, 광산을 되찾지 않으면 안된다. 또 하나, 전력을 확실하게 쿠바민중의 것으로 해두어야 한다. 그리고 요금은 비싸고 아직 실생활에 직접적으로 필요없는 전화회사를 국유화하는 일도 고려해야 한다.
게바라는 피델과 몇가지 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던 것은 틀림없었다.
게바라는 자신을 피델의 제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조직가로서의 뛰어난 수완도 있었다. 그래서 게바라는 국립농업개혁국의 공업부장이라는 경제 부문의 임무를 맡게 된다.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을 만나는 게바라
1959년 6월, 게바라는 인도, 이집트, 인도네시아, 유고 등을 돌아보는 여행길에 오른다.
네루 인도 수상을 만나는 게바라
게바라는 자본주의적 방법도 아니고 공산주의적 방법도 아닌 이른바 ‘제3의 길’을 찾기 시작했다.
11월 28일, 게바라는 쿠바 중앙은행의 총재로 임명되었다. 초대총재가 된 게바라는 셔츠차림으로 업무에 들어갔다. 낡아빠진 군복풍의 셔츠를 걸치고, 빗질도 하지 않은 부시시한 머리로 총재자리에 앉은 것이다.
그가 이 자리에 앉아 제일 먼저 한 일은 자신의 급료를 5천페소에서 1천2백페소롤 줄인 일이었다. 이에 놀란 쿠바의 부르주아들은 당황하여 허둥거리며 모두 마이애미로 줄행랑 쳤다.
쿠바의 지폐는 미국에서 인쇄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지폐가 남아 돌아갈 정도로 남발되고 있었다. 게바라는 미국이 마음대로 찍을 수 없도록 지폐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인쇄하도록 했다.
게바라가 중앙은행 총재에 임명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중앙은행의 임원이었던 호세 산티에스테반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은행업무 중에서 그가 가장 고심하는 것은 외화의 축적이었습니다. 매일 외환수지의 균형을 맞추려고 애썼던 것입니다. 그는 외환보유고를 보면서 모든 문제를 분석하곤 했습니다.
그는 새벽 서너시까지 피로도 잊은 채 일을 하고 늘 재정산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와 일치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에는 반드시 여러 사람들과 상의했었지요.
간부들에게 자유롭게 발언하도록 하고 최종적으로 그가 결정을 했습니다. 부하들이 과실을 범할 때는 엄격하게 질책했었지요. 하지만 항상 인간적이었어요. 심약한 것은 용서하지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관용을 베풀었죠. 한 인간에 대한 신뢰는 그 사람이 정직하고 혁명적인가 어떤가 살펴보고, 일단 눈에 들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뒷바라지를 해주었습니다.
그는 금융정책을 오로지 혁명사상을 현실화시키는 무기로서 이용하고자 했습니다. 게바라는 어떤 방법론을 채택할 경우, 그 채택의 근거를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덕적인 측면에서 찾았지요. 중앙은행은 단 하나의 참된 가치 즉 ‘혁명수행에 있어서의 동지애’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원칙과 일상적인 삶 그 모두에 있어서 가장 인간적이며 혁명적인 사람이었지요.
1960년 타임지 커버의 체 게바라. 흐루시초프와 모택동이 보인다.
1960년, 게바라는 자신의 발로 사회주의 국가의 땅을 밟아보는 꿈을 실현했다. 소련, 중국, 불가리아, 북한, 체코슬로바키아 등을 방문하고 RDA통상조약을 체결했다.
북조선을 방문한 체 게바라
확실히 라울(피델의 아우)과 나는 자주 충돌한다.
그래서 영광스럽게도 우리는 1, 2등을 다투를 잔소리꾼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역사책을 찾아보면 우리에게 올바른 방향을 가르쳐 주는 모델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면 멕시코는 석유를 국유화한 후에 발전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당시의 대통령 카르데나스는 멕시코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우리도 멕시코처럼 발전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우리들의 정책을 놓고 이러쿵 저러쿵 시비를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우리들이 이 나라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이고 이 나라에서 제국주의의 손아귀에 있는 것들을 국유화하는 것과 우리의 주권을 되찾는 것은 같은 문제라는 것이다.
게바라의 철두철미하게 일하는 태도나 탁월한 능력을 높이 평가한 도르티코스대통령은 피델의 천거를 받아 게바라를 공업장관으로 승진시켰다. 이때 게바라의 나이 32세였다.
쿠바내 미국재산의 국유화와 사회주의 제국과의 통상확대. 이에 대한 미국으로부터의 공격은 예상되었던 것이다. 국유화한 토지, 은행, 제당공장, 상사 등은 대부분 미국자본가들의 소유였었기 때문이다.
1961년 1월 8일 미국은 쿠바와 국교 단절을 한다. 미국은 마침내 1961년 4월 17일부터 48시간에 걸쳐 피그만해안을 침공했다. 게바라는 이 전투에 참가하여 얼굴에 부상을 입었다. 미국의 침공으로 쿠바의 육해공군은 피해를 입었으나 혁명군은 결국 미국의 공격을 물리쳐내었다.
드디어 카스트로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기치를 높이들고 세계를 향해 공언했다. 쿠바는 사회주의의 일원이 되었음을 선포한 것이다. 게바라는 전국 각지에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산업발전 4개년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대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갖가지 시행착오는 감수해야 했다. 그의 경제 정책의 골격은 아래와 같다.
급진적 농지개혁, 사탕수수 경작지의 축소, 급속한 산업화, 1차 상품의 수입제한, 산업의 전면적 국유화, 외화축척, 임금제도의 개선.
게바라는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문제에 부딪혔다. 즉 노동자의 투쟁이 한결같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경제투쟁으로 나아간다는 문제였다.
제국주의자들의 경우에는 문제 해결이 훨씬 쉽다. 많은 이익을 올리려는 욕심이 그들의 본성이기 때문에 임금인상의 요구가 있어도 예우있게 시간을 끌다가 막판에 가서야 임금을 아주 조금 인상해주어 생색만 내면 문제가 해결되니까 말이다.
이제야 게릴라들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지나친 임금격차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동을 하지않는 매우 고급스럼 직업이 있는 반면,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뼈빠지게 일하고도 기아임금에 허덕이는 심각한 상태였다. 게바라가 생각하기에는 무엇보다도 노동자 한사람 한사람에게 신성한 노동의 의미에 대한 자각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성한 의무감에 의해 노동하게 해야 하는 것이었다.
비교적 짧은 시간내에 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자국보다는 ‘의식의 개혁’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금전욕이나 명예욕 혹은 체제에 대한 불안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과 지도자에 대한 신뢰 그리고 자기 자신들을 위한 공동체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상태에 이를 때, 더 이상 노동이 괴로울 필요가 없어지고 즐거운 의무가 될 것이다.
물질적 유혹이란 새로운 사회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과거의 유물이다. 그것은 완전히 척결되어야만 한다. 우리들이 그런 부조리한 것들과 싸워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회주의 정신의 발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쿠바사람들처럼 놀기 좋아하고 소란스러우며, 행실이 분방한 국민을 하나의 기치 아래 결집시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쿠바에는 기술자도 전문직 노동자도 없었고, 경제계획도, 예산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으면서 생산성을 높이고 태만함, 결근, 여럿이 모여서 복잡거림 등의 생산성 하락요인을 없애기 위한 새로운 기술의 습득, 유능한 관리자의 육성, 미국의 간섭을 배제한 자주적 공장운영. 이런 사항이 게바라에게 부관된 중대한 과제였다.
게바라는 노동 그 자체보다는 자유의지로 하는 잉여노동을 더 많이 요구하였다. 그것은 생산성 향상을 위한 하나의 요인인 것만이 아니라 사회의 대중교육의 원천이다.
게바라는 자발노동대를 만들고 한 사람의 노동자로 돌아가 사탕수수를 거두고 노동자 주택의 건설에 참가했다. 이 모든 것이 노동자 교육의 일환이었다. 그럼 게바라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자.
게바라는 좋은 옷이라든가 새구두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한번도 우리 노동자보다 좋은 음식을 먹은 적도 없었구요. 노동자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지급받은 것을 먹고 입었어요.
그는 특권을 갖는 것도 매우 싫어했지요. 자신의 부하에게조차 어떠한 특권도 행사하지 않으려고 항상 자신을 경계했어요. 그는 살아있는 동안 어느 한 순간도 자신이 게릴라 병사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지요. 이만하면 대단한 일물아닙니까?
그와 함께 일했던 것은 귀중한 경험이었어요.
그는 일을 나갈 때는 제일 먼저였고 퇴근할 때는 맨 마지막이었거든요. 게다가 대개의 경우 가능한 한, 일을 마무리하려고 하다가 돌아갈 수 없을 때는 작업장에서 그냥 노숙했지요.
옷도 갈아입지 않고, 마룻바닥에 아무렇게나 웅크리고 잤어요. 침대에서 자고 싶은 유혹은 참아내지 않으면 안되다고 하면서요.
그 사람은 노동자에게는 공손하고 싹싹했지요. 함께 자발적 잉여노동을 할 때나 공장으로 갈 때, 처음에는 아무도 호감을 갖지 않았어요.
그래도 게바라는 우리와 함께 어울려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자유롭게 이야기를 한다든가, 물을 마시려고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기도 하면서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었지요.
산타 코로마 농장에 있었을 때 새벽녘 무렵이었는데 게바라가 갑작스럼 천식 발작으로 시달리고 있었어요.
내가 “왜 잠시도 쉬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약을 꺼내오면서 이렇게 대답했지요. “그렇게 닥달하지 말아요.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거요.”
항상 무라이자라는 이름의 개를 끌고 다녔습니다.
참으로 원기왕성한 개였어요. 그는 동물을 대단히 좋아했어요. 언제인가 한번은 멕시코인가 니카라구아에서 앵무새 한 마리를 가져왔는데 게바라 못지 않게 입이 험악했답니다.
매우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우리 노동자들에게 이야기를 할 때는 언제난 알아듣기 쉬운 말을 사용하였고, 그가 세운 계획들도 아주 구체적이고 확실한 것들이었습니다.
1961년 8월 게바라는 쿠바대표로 우루과이의 푼타 델 에스테에 갔다. 그곳에서는 OEA(미주기구)의 ‘경제사회심의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 당시의 라이프지에 이에 대한 자세한 기사가 실렸다.
어떤 때는 화려하고 잘난 척하는 또 어떤 때는 온화하고 호감을 주는, 구렛나루를 기른 이 쿠바대표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아니었다. 어떤 참석자는 게바라가 능숙하게 외교적인 제스쳐를 쓴다고 하여 ‘체체’라고 이름붙였다.
게바라의 이상한 언동은 그를 적대시하는 그룹에게 있어서는 조소거리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미국에 거주하는 쿠바 망명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또 한편으로는 좌익의 보호를 받지도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진보를 위한 동맹’의 스폰서인 미국을 공격하면서, 쿠바가 동맹의 자금원조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집중적으로 질문을 했다. 각국의 대표들은 게바라야말로 아메리카대륙에서 소련의 침입과 지배를 불러들일 장본인이라고 생각하고는 그 자리에서 NO라고 딱 잘라 대답했다.
푼타 델 에스테 헌장에 서명한 각국 대표들은 만족해 하며 해산했다.
쿠바로 돌아가는 길에 게바라는 대부분의 산업을 국유화시켰던 쿠바경제가 이젠 위기에 직면했고 미국과의 암거래가 다시 이루어지고 있다고 실토했다.
소련권으로부터의 원조는 만족할 만큼의 효과가 없고 쿠바에는 적당하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게바라는 적대국인 미국과 동등한 상업거래가 성립되기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우루과이에서 후에 ‘게바라의 예언’으로 이름붙여진 두가지의 연설을 했다.
그 연설 중에서 케네디의 ‘진보를 위한 동맹’의 속셈을 폭로하고 미 제국주의를 비난했다.
회의가 끝난 후에는 비밀리에 아르헨티나로 가서 후론디시대통령과 회견했다. 거기에서 다시 브라질로 가서 쟈니오 구아드로스대통령으로부터 공식적인 훈장을 수여 받았다.
우리 민중이 주권을 되찾지 않으면 안된다. 독점자본으로부터 주권을 되찾아야 한다.
독점자본은 이미 쿠바에 침투하여 움직이는데 그것은 거의 모두가 미국자본과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다. 쿠바는 이제 무엇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
그 해답은 다른 삶의 노동으로 부유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동으로 살아가야 하는 일이다.
흐루시초프를 만나는 게바라
1962년, 미국은 쿠바 국내에 소련의 미사일이 배치되어 있다고 비난했다. 미국은 쿠바를 침략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깨고 해군을 파견하여 쿠바를 봉쇄했다. 흐루시초프가 소련 미사일의 철수를 결정할 때까지 봉쇄는 계속되었다.
1962년에서 1964년 이 3년 동안은 게바라에게 있어서나 모든 쿠바인에게 있어서나 매우 격심한 ‘노동의 나날’이었다. 그는 이 기간동안 당과 대중조직을 견고하게 꾸리기도 하고 경제계획을 세우는 등 많은 일들을 진행했던 것이다.
1963년 7월, 게바라는 경제계획세미나에 참석 하기 위하여 알제리를 방문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 그는 관리들과 경제운영을 둘러싼 논쟁을 벌였다. 그 논쟁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 논쟁에서 과연 늙은 공산주의자들이 게바라의 노선을 받아들였을까?
게바라는 연애에 대해서는 매우 쑥맥이었다. 그러나 뭇 여성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은 틀림없다.
게릴라 전사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부인과 함께 살 수 없었다.
전사들이 개선할 때까지 일다(게바라의 부인)는 딸 일디타와 멕시코시티에서 살고 있었다. 1959년 1월 21일 두 모녀는 아바나에 도착했다. 게바라를 만나기 위해 쿠바로 돌아온 것이었다.
제가 어린 딸을 데리고 아바나로 온 것은 1959년 1월 21일이었습니다. 이때 에르네스토는 다른 여자와의 관계에 대해 정직하게 말해주었습니다.
그녀와는 산타 클라라 전투에서 알게 되었답니다. 나는 매우 슬펐지만 두사람 사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들은 이혼하기로 했습니다.
처음 그는 이혼하자는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그외에 별 다른 해결방법이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1959년 5월 22일에 우리는 정식으로 이혼했고 그는 6월 2일에 재혼했습니다.
- 일다 가데아
다른 여자란 도대체 누구일까? 그녀는 22세의 쿠바인 교사, 알레이다 마르치 데 라 토레이다. ‘7.26운동연합’의 일원이고, 게바라와는 엘 페드레로 농장의 전투에서 알게 되었다. 그녀는 거기서 게바라부대에 합류하여 승리의 날까지 그의 곁에서 모든 투쟁을 함께 수행했다.
게바라는 재혼한 알레이다와의 사이에 네자녀를 두었다. 그는 바보스러울 만큼 부정이 넘치는 아버지였다. 게바라의 결혼생활이 정상적인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실제로 거의 모든 혁명가는 결혼생활에 실패한다. 남편의 인생은 혁명과 함께 진행되므로 평범한 결혼생활을 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고참 공산주의자들은 게릴라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전혀 전투적이지 않았었다.
그들은 게바라에 대한 불신감을 갖고 있었고 그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인식부족을 노골적으로 경멸했다. 게바라는 쿠바의 공산주의자들이 취하고 있던 공장자주관리방식이나 국가계획경제가 근간이 되는 소련형 사회주의 모델보다도, 정신적 자격(刺激)을 중시하고 통일적인 예산 융자제도를 취하는 중국형 사회주의 방식을 더 선호했다.
게바라와 소련의 동지들 사이에는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
논쟁이나 서로 상대방을 비꼬는 좋지못한 평이 오고가고 했지만 그다지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 이상의 대립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게바라가 소련에 대해 기본적으로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건설을 위한 당내 논쟁에 있어서도 게바라의 동지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쿠바경제는 자력갱생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야 했다.
한편에서는 혁명의 원동력이자 사회주의 건설을 추진시킬 당이 만들어졌다.
게바라에게 있어서는 두번 다시 맞기는 힘든 어려운 일만 계속되었지만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그의 가슴속엔 혁명적 과업의 완수에 대한 불타는 열정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바라는 주위에서 염려했던 대로 큰 실책을 범하지는 않았다. 레닌도, 카스트로도, 아니면 예수일지라도 그런 경우라면 그와 같이 실천했을 것이다. 쿠바경제는 성장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게바라는 경제학자로서는 그렇게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쿠바경제는 그가 바라는 대로 나아가 주지만은 않았다.
1965년 1월, 그는 장기여행을 계획하고 아프리카로 향한다. 콩고, 기니아, 가나, 다오메이, 알제리, 탄자니아. 그리고 카이로를 방문했다.
알제리에서는 ‘제2회 아프리카 아시아 연대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는 그곳에서 소련을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 “소련은 돈을 지불하는 나라들에게만 무기를 내줍니다.”
3월 14일, 아바나로 돌아와서 그는 피델 카스트로와 모종의 장소에 틀어박혀 밀담을 나누었다. 그 후 직장으로 돌아온 그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취했다.
1965년 4월 중순, 게바라는 자취를 감추었다. 정부청사에도 사탕수수밭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에 카스트로는 “지금 내가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게바라는 늘 혁명의 최전선에 서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나의 관계는 아무 이상없이 좋습니다”라고 했다.
게바라의 실종에 대해서 온갖 소문과 억측이 난무했다. 피델과 싸우다가 죽었다, 도미니카에서 객사했다, 발작을 해서 멕시코시티의 병원에 감금되어 있다, 소련사람들이 시베리아로 유배보냈다, 수도승이 되어 스페인으로 갔다, 반카스트로주의자 그룹이 미국으로 납치해 갔다 등등.
1965년 7월, 보다 사실에 가까운 소문이 콩고에서 돌았다. 게바라가 어떤 쿠바인과 더불어 촘베의 용병과 싸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해 11월 11일, 피델은 아바나의 채플린 극장에서 게바라에게서 온 편지를 낭독했다. 그것은 양친에게, 딸 일디타에게, 그리고 피델에게 보낸 세통의 편지였다.
민족해방을 위한 십자군의 한 전사로서 게바라는 영원한 해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단념한 것이다. 게바라는 다시 투쟁에 뛰어들기 위해 옛 벨기에령의 콩고를 훈련장으로 택했다.
1966년 3월, 게바라는 게릴라 훈련을 마치고 콩고를 떠났다.
볼리비아의 공산당원과 만나기 위해 파리를 경유하여 프라하로 갔다. 그러나 CIA는 이미 그가 콩고에 있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유럽을 통해서 볼리비아로 갈 것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이 때문에 게바라는 면밀한 변장작전으로 대응했다. 또 다시 구렛나루와 콧수염을 깍고 머리도 짧게 잘랐다.
헤어스타일도 커다란 수건을 이용해서 변화시켰다. 그는 우루과이의 상인 아돌포 메나로 변장을 한다.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다른 증명서도 준비했는데 증명서에 쓰인 이름은 라몬 베니테스 훼르난데스였다. 볼리비아에 입국할 때는 메나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메나는 볼리비아의 오지에 별장 하나를 갖기를 원하는 사람이었다.
볼리비아는 여러가지 이유로 해서 게릴라 전투의 근거지로 적당하였다.
국민과 유리된 정부, 대중화된 불만, 기근, 정부의 충실한 하수인인인 군대, 투쟁의욕이 넘치는 광부들, 게다가 정부내의 부정부패.
그리고 게릴라 활동에 유리한 삼림까지 모두가 충분한 조건이 되었다. 남미의 5개국과 국경이 접해 있는 볼리비아는 장차 라틴아메리카 민족해방군을 구성할 게릴라 공작기지로서 전략적으로 매우 이상적인 위치에 있다고 하겠다.
이미 볼리비아를 비롯하여 라틴아메리카 여러나라에서 새로운 투쟁이 싹트고 있다.
혁명가가 수행해야 할 임무가 위험하면 위험해 질수록 혁명의 싹은 무럭무럭 커나갈 것이다. 즉, 한 나라의 해방 후에도 우리는 ‘라틴 아메리카 민족해방’이라는 신성한 의무를 완수하도록 끝까지 투쟁해야만 한다.
- 제3세계(A.A.LA)의 연대를 위해 발간된 기관지 <트리 콘티넨탈>에 체가 쓴 메시지
라틴 아메리카 대륙은 현대의 오랜 정치투쟁에서 잊혀진 대륙이었다.
그러나 쿠바혁명이라는 인민대중의 함성이 제3세계 단합기구를 통해 전세계에 울려퍼지기 시작했으며, 이제야말로 혁명에 대해 명확한 임무를 가진 대륙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 임무란 범세계적으로 제2, 제3의 베트남을 만드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최종단계에서 발악적으로 등장한 세계체제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전 세계적인 연합전선을 통해서 이를 타도해야만 하는 것이다.
평소에 점잖은 신사인 미국인들은 전쟁도덕에 있어선 매우 악랄하다.
따라서 그들에 대항하는 투쟁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쓸데없는 희생은 피해야 한다. 하지만 오로지 투쟁만이 미제국주의를 물리칠 수 있다. 적들은 우리로 하여금 투쟁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투쟁을 준비하고 투쟁을 시작할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이런 전쟁이 처음에는 매우 어려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과두지배 계급은 온갖 무력을 동원하여 탄압해오고 온갖 폭력과 악선전을 이용할 것이다. 우선은 살아남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그리고 이어서 베트남에서 실천된 것처럼 무장선전이라는 게릴라의 영원한 규범이 실행될 것이다. 즉, 총에 의한 선전, 적과 대치하여 승부를 거는 전투, 그 자체에 의한 선전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게릴라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위대한 교훈이 착취받고 있는 민중들 가슴속에 자리잡게 될 것이다.
민족정신이 고양되고, 보다 지난한 임무에 대한 준비와 폭력적인 탄압에 대해 저항할 준비가 가능해진다.
적이 있는 모든 지점까지 투쟁의 장을 넓히지 않으면 안된다.
적의 집, 적의 휴식처까지도 전쟁은 확산되어야 할 것이다. 적에게 일초의 평온, 잠시의 휴식도 주어서는 안된다. 그 어떤 미국 병사도 자신의 막사에서나 극장, 혹은 거리에서 안심하고 다닐 수 없도록, 자신을 독안에 든 쥐로 생각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점점 더 그가 야수와 같이 행동하게 되면 될 수록 그의 발광은 결국 그를 파멸로 이끌어 갈 것이다.
- 1967년 4월, 아바나에서 개최된 ‘3대륙 단합기구’회의에서 대독된 게바라의 보고서
게바라의 일기를 읽어 내려가면 한 사람의 게릴라 전사가 겪는 인생의 희비극을 엿볼 수 있다.
동지의 배반, 낙심과 기쁨, 투쟁과 죽음 등. 처음에는 지형을 숙지하는 훈련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게릴라들이 속속 도착했다. 1967년 3월까지 적과의 싸움은 없었다.
그러나 2명이 훈련중 익사했다. 이때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레지 드브레와 시로 부즈토스가 내방했었다.
경찰이 이 두사람을 취조해서 중요서류를 압수하고 그들로부터 게바라의 은신처를 알아냈다. 드브레와 부즈토스는 후에 체포되었고 고문에 못이겨 게릴라의 은신처를 자백한 것이다.
4월11일, 볼리비아군은 게릴라 기지를 수색하면서 그 속에서 게바라의 사진을 찾아냈다. 이 정보를 넘겨받은 CIA는 볼리비아에서 수색활동을 시작했다. 미국은 게릴라 중 두 사람의 변절자 덕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게릴라가 있는 곳을 알아냈다. 명령은 간단했다. 즉시 사살하라.
두 사람의 변절자 바레라와 로카바드는 볼리비아 군대에서 게바라에 대해 아는 것을 전부 불어버렸다.
4월, 볼리비아군은 본격적으로 ‘게릴라 사냥’을 시작했다. 2천명 이상의 병사와 대 게릴라전 미국인 특별고문관들, CIA의 앞잡이들을 투입하였다.
게바라는 게릴라전에 관한 논문 <게릴라전-하나의 방법>을 쓰면서 연구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실패의 원인은 다른 데 있었는데 그것을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실패의 원인이란
1. 아직 군대와 싸울 준비가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발견되어 버렸다.
2. 볼리비아의 농민은 쿠바의 농민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이것은 게바라의 큰 오산이었다.
3. 당시 지극히 미약한 상태였던 게릴라 활동에 CIA의 그린베레가 개입하리란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4. 볼리비아 공산당(비합법이어서 지하활동만 하고 있었음)의 지원이 없어 도시와의 연대가 이루어 지지 않아 게릴라는 고립되어 있었다.
5. 당시의 볼리비아는 혁명적 조건이 성숙되지 못했다. 이를테면 바티스타같은 독재자도 없었고, ‘7.26운동연합’ 같은 조직이 결성돼 있지도 않았다.
게바라는 5월의 마지막 일기에서 상황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정부군이 게릴라를 추격하고 있음.
쿠바와 연결이 안됨. 라 파스와 연락이 두절됨. 볼리비아 농민의 협력이 없음. 게릴라 내에 환자 속출. 식량 부족. 천식재발에 대한 초조함.
윤리의식의 저하. 부대가 둘로 갈라져 전투에 임했으나 한쪽이 전멸. 나머지 절반도 호아킨이 지휘하는 부대와 연락이 두절됨.
8월 31일, 볼리비아군은 게릴라들이 당일 오노라트 로하즈라는 농부의 집으로 간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로하즈는 엘 이에소의 얕은 곳으로 마시쿠리강을 건너도록 게릴라를 안내할 예정이었다. 한달전, 게바라는 로하즈의 아이들을 치료해 준 적이 있었다.
결국 로하즈는 배신을 했다. 호아킨의 게릴라 부대가 얕은 내를 건너기 시작할 때, 매복해 있던 정부군은 집중 사격을 가했다.
열 명의 게릴라가 쓰러졌다. 그중 오직 한 사람 파코만이 살아 남았다. 게바라의 일기와 볼리비아 군인들과 행동을 같이 했던 볼리비아인 저널리스트 호세 알카사르의 기록에 의하면 게바라부대는 겨우 달아났음에도 불구하고 탈출에 실패하여 결국은 다시 포위되었다.
게릴라는 게바라의 부대와 호아킨의 부대 둘로 나뉘어 행동했었다.
볼리비아 군은 우리를 발견했다. 촌장이 정보를 제공했던 것이다.
촌장은 마을의 한 노파와 사원의 경내에서 감자를 파는 그의 아들 두 사람에게서 우리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이다. 병사들이 산의 계곡에 배치되었다. 정부군은 우리가 그들에게 유리한 지점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우리는 그날 오전, 2시 반에 이동하기로 했다. 환자가 발행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두 시간의 착오가 생겼다. 오전 9시 반 경 잠을 깬 게바라는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몸은 어떠냐고 물었다.
내게 어디 아픈 곳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정찰에 나갈 수 있겠느냐고 묻고는 “이 부근 전체를 정찰해 주었으면 좋겠네. 특히 오른쪽에 있는 산을 말이야”라고 말했다.
전투가 벌어질 경우를 대비하여 파쵸를 동반했다. 나는 그때, 한쪽 손밖에 쓸 수 없었다. 백미터 정도 나아가 전방의 구릉을 살피기 위해 덤불에 몸을 숨겼다. 그때 파죠가 구릉위에 서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 “저기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목동인가 했지만, 목동이 나오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이었다. 그때가 아침 6시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보초병의 행동으로 보였다. 이윽고 구릉의 전체에 걸쳐 차례차례로 병사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캠프로 돌아와 게바라에게 전했다. “최악이다. 저 구릉 전체에 적이 깔려 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좋다. 오른쪽 계곡으로 나가서 적어도 오늘 하룻동안 만이라도 발견되지 않도록 하자. 밤이 되면 봉우리를 넘어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다.” 계곡에는 숨을 곳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위장을 하였다.
봉우리는 5백미터 정도 앞에 있고 그곳에 군인들이 있는 것이다.
게바라는 모두를 격려하면서 방어체제를 조직하고, 탈출경로를 지시하고, 흩어졌다가 어느 장소에 재집결할 것인가도 결정했다.
계곡의 입구에 안토니오를 지휘관으로 하여 파쵸, 아르투로, 윌리가 복병으로 배치되었다. 계곡의 깊은 곳은 폼보와 나토, 우르바노가 맡았다.
계곡의 바위 근처에 나무 한 그루가 서있었는데 게바라는 나에게 그리고 가라고 했다. 내 위치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지만 지시한 그곳은 적군의 움직임을 잘 관찰할 수 있는 유리한 장소였고 공격을 받을 경우 탈출지점으로도 용이했기 때문에 가야만 했다.
아침 8시, 나는 인티와 다리오의 도움을 받아 그곳으로 갔다.
그리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아침 11경, 군대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 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에 나에게로 다가온 게바라에게 보고했다. 곧 우리의 말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지점에까지 적이 바짝 다가왔다. 우리는 나무 뒤쪽에 몸을 숨겼다.
나무는 둥치는 곧았고 뭄을 숨기기에도 매우 작은 은폐물이었다. 게바라가 있는 곳에 윌리와 함께 몸을 감추고 있던 아니세트와 엘나토가 폼보와 우르바노가 있는 쪽으로 파견되었다.
폼보 등을 게바라가 있는 쪽으로 다시 집결시키기 위해서였다. 아니세트가 계곡의 중앙으로 한발자욱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언덕 위의 병사들에게 발견되어 버렸다. 그는 즉시 사살되었다. 그리고 나서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오후 1시 반 경이었다.
다른 동지들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인티와 다리오 그리고 나 세사람은 높은 위치에 있었으므로 적을 쏠 수 있었지만 나머지 동지들은 낮은 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적들을 미처 볼 수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다른 동지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 채 우리는 총격전을 계속했다. 적군 5명 사망, 부상자 6명 발생.
오후 늦게 폼보가 우르바노와 엘 나토와 함께 우리들이 올라왔던 지점으로 계곡을 건너오려고 했다.
우리는 몸짓으로 그렇게 하면 전멸할 것이라고 필사적으로 전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어두워지길 기다리면서 우리가 내려갈 때까지 숨어있었다. 우리가 모두 다시 집결했을 때, 폼보가 “게바라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도 동시에 그들에게 반문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게바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시한 집합장소 어디에서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배낭과 발자국이 남아있어서 부상당했을 것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더 멀리 떨어진 집합장소로 갔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봉우리를 넘어서 라 이게라 시가로 돌아가려 할 때 한바탕 총격전이 벌어졌으나 그 이후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우리는 라 이게라 시가에서 6백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관목지대에 몸을 숨겼다.
아침 9시 반 경, 마을 쪽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11시쯤 다시 몇 발의 총소리가 더 들려왔다. 후에 그것이 윌리와 엘치노, 또 게바라를 살해하는 총소리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입회인으로서 게바라의 총살을 목격했던 사람은 두 사람의 저널리스트, 볼리비아인 알카사르와 프랑스인 레지 드브레였다. 그들의 증언에 의하면 게바라는 부상당한 상태에서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함께 붙잡힌 사람은 볼리비아인 광부 윌리와 시몬 쿠바였다. 오후 세시 반 경이었다.
11시15분, CIA는 게바라를 총살하기로 결정했다. 볼리비아인 하사관 마리오 테란이 사형집행인 역을 자원하여 게바라에게 마구 총질을 했다.
또 다시 다른 볼리비안인 페레스 중위가 확인사살로 게바라의 목에 총을 쏘았다. 1967년 10월 9일 12시, 라틴아메리카 해방전쟁에 생명을 바친 한 사나이가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게바라의 마지막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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