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기업, 박정희에 850만불 대선자금 바치고 석유산업 집어 삼켜
박정희 정권은 대선자금을 위해 한국에 진출해 있는 미국계 기업들에게서 약 850만 달러를 거두어 들였다. 여기엔 거대 석유기업인 칼텍스사가 제공한 4백만 달러와 걸프사가 제공한 3백만 달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박정희에게 정치헌금을 내고 한국의 석유 산업을 사실상 집어삼켜 버렸다.
박정희 대선자금 창구는 공화당 재정위원장 김성곤이었는데, 걸프사 사장 보브 도시는 70년대 후반 열린 미 의회 청문회에서 자신이 대선자금을 뜯긴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문제(정치헌금)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 김성곤 씨가 집으로 초대했다. 내가 평생 만나본 인물 가운데서 아마도 가장 다루기 힘든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 날처럼 모욕을 당한 일은 처음이었다. 그는 거칠고 깐깐한 자금 모집책이었다. 그는 1000만 달러를 요구했으나 결국 300만 달러로 낙착됐다. 그 돈은 걸프 본사의 자금에서 지출된 것이지만 일단 바하마에 있는 바하마탐사 회사로 돌려져 그 회사 장부에 경비로 기록했다가 한국으로 건네졌다."
걸프사는 1975년 5월 16일에 열린 미 의회 프레이저 청문회에서도 "우리가 전 세계의 외국 정부에 제공한 5백만 달러에 달하는 정치자금 중 80%가 한국의 공화당 정권에 지불되었다" 라고 증언했다.
(강준만 교수의 <한국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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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한·일협정 체결때 日 기업서 6600만弗 정치자금 받아”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일협정 체결과정에서 일본기업으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보고서가 공개돼 논란이 일 전망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2일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한 ‘한·일관계의 미래’라는 1966년 3월의 미 CIA 특별보고서를 공개하고 “일본기업이 1965년까지 5년동안 민주공화당 예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6600만달러를 지원했다는 내용이 있다”고 밝혔다. 이 문건은 1965년 한·일협정 체결을 전후해 전개된 한·미·일 3국간의 비밀협상 과정과 불법정치자금 수수,독도문제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구소측은 1962년 미 국무부가 주한·주일 미 대사관에 발송한 전문을 근거로 제시하며 한·일협정에 미국이 깊이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국민일보 2004-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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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과 6600만불의 일본 뇌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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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년 박정희 대선자금 - 국가예산의 10%, 600억 썼다
박정희 "돈을 얼마나 썼는데 표가 겨우..."
87년 겨울 1노3김이 맞싸운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일 때 김종필 공화당 후보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도대체 민정당이 이 나라를 거덜내도 좋다는 말인가. 이렇게 돈을 쏟아 붓고 나중에 민생경제를 어찌 수습하겠다는 건지 도무지 무책임한 사람들이야. 선거는 선거고 나라는 나라 아닌가... 야당은 군중을 떼로 몰고 다니고 집권당은 돈을 봇물처럼 터뜨리는 이런 짓(대통령 직선제)은 그만 해야 돼. 71년 선거에서도 박대통령 당선을 위해 무려 600억원이나 썼다는 걸 나중에 확인했어. 그 이후 16년만의 선거가 이 지경이니..."
그때 김종필 후보는 "71년 선거전에 나는 고문 타이틀만 달고 유세만 불려다니면서 돈 쓰임새도 잘 몰랐더니 그렇게 많이 썼다더라. 박 대통령도 71년 대선 개표 결과를 놓고 '우리가 쓴 돈이 얼마인데 내 표가 이것 뿐이냐' 고 하더라" 고 말했다.
강창성(박정희 정권에서 중정차장보, 보안사령관 역임)씨는 최근 기자에게 71년 대선자금이 모두 '700억원'이었다고 밝혔다. JP 증언보다 100억원이나 많은 액수였다. 강씨는 당시 선거전을 전후해 자금살포계획을 세우고 득표점검 결과분석을 하는 과정에서 집계한 액수가 700억원이었다는 얘기다.
당시 경제규모로 보아 선거자금 600억,700억원이 얼마나 큰 돈인가.
71년 국가예산이 5242억여원, 공화당 정권이 예산의 1할을 넘는 액수를 털어 넣은 선거가 71년 박정희-김대중 대결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해 공화당의 명목상 재산이 2억 8천만원,신민당이 4000만원, 전경련의 선관위 정치자금 기탁액이 모두 3000만원 (공화당 1600만원,신민당 1400만원으로 나누었다) 뿐인 점을 살펴보면 실로 엄청난 자금 살포였다.
(동아일보 김충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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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적인 돈으로 정권을 훔친 박정희>
71년 4.27 대선은 언론이 자유롭지 못한 가운데 치러진데다 박정희 정권은 대규모 부정선거를 자행하여 결국 정권을 재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박정희는 6백34만 표 (53.2%) 를 얻었고, 김대중은 5백39만 (45.3%) 표를 얻었다. 선거가 끝나고 박정희는 94만여 표밖에 차이가 나지 않은 것에 대해 "하마터면 정권을 도둑맞을 뻔했다"고 말했다지만, 정작 정권을 도둑맞은 건 김대중이었다.
1971년 국가예산은 5242억 원이었는데, 박정희는 이 선거에서 국가예산의 10%가 넘는 600-700억 원을 썼다. (600억 김종필, 700억 강창성 증언). 당시 입석버스 요금이 15원, 연탄 한장이 20원, 커피 50원, 정부미 80kg이 7천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지금 기준으로 따지면 조(兆) 단위를 넘는 엄청난 돈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대선자금을 위해 한국에 진출해 있는 미국계 기업들에게서 약 850만 달러를 거두어 들였다. 여기엔 거대 석유기업인 칼텍스사가 제공한 4백만 달러와 걸프사가 제공한 3백만 달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박정희에게 정치헌금을 내고 한국의 석유 산업을 사실상 집어삼켜 버렸다.
박정희 대선자금 창구는 공화당 재정위원장 김성곤이었는데, 걸프사 사장 보브 도시는 70년대 후반 열린 미 의회 청문회에서 자신이 대선자금을 뜯긴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문제(정치헌금)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 김성곤 씨가 집으로 초대했다. 내가 평생 만나본 인물 가운데서 아마도 가장 다루기 힘든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 날처럼 모욕을 당한 일은 처음이었다. 그는 거칠고 깐깐한 자금 모집책이었다. 그는 1000만 달러를 요구했으나 결국 300만 달러로 낙착됐다. 그 돈은 걸프 본사의 자금에서 지출된 것이지만 일단 바하마에 있는 바하마탐사 회사로 돌려져 그 회사 장부에 경비로 기록했다가 한국으로 건네졌다."
걸프사는 1975년 5월 16일에 열린 미 의회 프레이저 청문회에서도 "우리가 전 세계의 외국 정부에 제공한 5백만 달러에 달하는 정치자금 중 80%가 한국의 공화당 정권에 지불되었다" 라고 증언했다.
<조선일보가 준 '이번이 마지막' 아이디어>
박정희는 71년 4.27 대선에서 유권자들에게 "이번이 마지막 출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마지막'에 약한 우리 국민의 심성을 파고들어 제법 재미를 보았다. 김대중이 4월 17일 전주 유세부터 "박정희 정권이 종신 총통제를 획책하고 있다"라고 폭로했기 때문에 박정희로서는 그에 대항할 필요도 있었으리라.
그런데 그 아이디어가 조선일보에서 나왔다는 게 흥미롭다. 박정희는 이미 군정 초기부터 당시 조선일보 사장 방일영의 집을 찾아가 사적인 교류를 가질 만큼 조선일보와 가까웠는데, 박정희와 조선일보의 상부상조 관계는 70년대 내내 지속된다. 조선일보 회장 방우영이 자신의 자서전 <조선일보와 45년> 에서 밝힌 말을 들어 보자.
"박 대통령이 부산 유세를 앞두고 이후락 실장이 본사를 찾아와 환담중에 '결정적 묘안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때 최석채 주필이 '3선만 하고 더 이상은 안 하겠다고 국민 앞에 공약을 하라'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박정희는 부산 유세에서 처음으로 국민 앞에서 '이번만 하고는 다시는 여러분께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박정희가 단지 말만 한 건 아니었다. 한 편의 신파극을 연출했다. 그는 4월 24일 부산 유세에 이어 25일 서울 유세에서는 눈물까지 흘리며 "더 이상 여러분들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라고 호소했다. 아닌게 아니라 그 말은 사실이었다. 김대중의 폭로 그대로 박정희는 이후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유신으로 국민의 투표권을 아예 박탈해 버렸으니 말이다.
(강준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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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만평 강남 땅투기로 박정희 비자금
서울 도시계획의 산증인인 손정목(75.전 서울시립대 교수)씨가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서울 도시계획 반세기의 '증언'을 담은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한울 刊. 전 5권)를 냈다.
서울시의 모습이 가장 달라진 시기는 1966년 김현옥 시장부터 양택식, 구자춘 시장을 거친 1980년까지의 15년간. 저자는 1970-77년 서울시 기획관리관과 도시계획국장을, 22년간 중앙도시계획위원을 각각 지내면서 각종 도시계획에 참여, 겪거나 알게된 갖가지 '비화'를 가감없이 공개했다.
저자는 "서울 도시계획에 대해 최종적으로 한명이 책임져야 한다면 바로 나"라면서 "도시계획이 잘됐다 못됐다의 가치 판단을 떠나 있었던 일과 알고있었던 일을 관련자들이 살아있을 때 쓰고자 했다"고 말했다.
▲강남개발 = 1966년 제3한강교 건설(現 한남대교)이 강남개발의 첫 단추였다. 강남개발은 단순 인구과밀의 억제책이 아니라 전쟁이 다시 발발할 경우, 6.25 당시 서울시민이 피난가지 못했던 상황의 재연을 피하고자 시작됐다.
여기에 1968년 착공된 경부고속도로 주변 영동지역에 400만평이 구획정리사업지구로 지적되며 허허벌판이던 강남개발이 탄력을 받는다. 실무 책임자였던 윤진우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은 이면에서 박종규, 김종필, 김정렴 등의 배후지원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대선자금 마련을 위해 강남개발과 부동산투기를 동시에 벌이는 악역을 맡았다.
고속도로 건설에서는 땅값을 안들이려 구획정리사업의 명목으로 땅을 강제로 기부받는 방식으로 빼앗았다. 그래서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땅값으로 들어간 비용은 500만원에 불과했다.
▲정치자금 마련을 위한 강남 토지투기 = 대통령 경호실장 박종규는 서울시 실무과장에게 과천.서초.강남.잠실 가운데 가장 투자가치가 큰 지역을 꼽을 것을 지시했고 "탄천을 경계로 그 서부지역 일대"라는 답을 듣고 그 땅을 사모았다. 토지매입은 1970년 2월부터 시작됐다. 자금이 실무과장에게 공급돼 그가 사고 땅값이 오르면 되파는 방식이었다. 이후 영동 제2지구, 남서울 개발계획 등이 잇따라 발표됐다.
이 사건은 박종규.김현옥 두 사람이 장차 있을 대선에 대비해 박 대통령에게 목돈을 마련해주겠다는 발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저자는 최근의 청계천 복원과 관련, "청계고가 건설 당시 시멘트는 많았지만 철강이 모자라 적게 쓴 탓에 수명이 다됐고 이를 해체하는 것에 겸해 청계천을 복원하는 것은 잘하는 일로 본다"며 "복개한지 무척 오래됐는데 지금쯤 그 밑이 어떻게 됐는지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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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비자금 - 1년에 60억
(70년대 60억이면 지금 돈 1천억 이상은 족히 될 것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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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 접수된 박정희와 그 친인척 비리는 트럭 한대분
"전두환씨는 박근혜씨 이야기(5공이 박대통령을 섭섭하게 대우했다.)를 듣고 대단히 화를 냈다고... 박대통령 친인척 비리가 드러나지 않은 것은 자신이 적극적으로 그 부분의 조사를 저지했기 때문인데 "저럴 수가 있느냐"는 반응이었다는 것이다. 전두환씨는 "접수된 박대통령과 그 친인척 비리에 대한 신고.진정서만 해도 한 트럭분은 족히 되었다. 내가 물러나면 저렇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고 말했다고 한다.
전씨 측근에서는 "지금 언론에서는 박대통령이 친인척 관리를 잘했다고 하는데, 전두환대통령이, 지금 5공 비리 수사하듯 3공비리를 조사했다면 그 규모가 전 전대통령의 친인척 비리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엄청났음이 드러났을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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