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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67.10.08 체 게바라 체포

감효전(甘曉典) 2012. 3. 11. 17:26

 

1967.10.08  체 게바라 체포

 

 

 

 

 

출생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26653

사망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30345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에는 이상을 품자.”

혁명가, 정치가, 의사, 게릴라 지도자인 체 게바라(1928∼1967)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의사시험에 합격한 그는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일생을 바꾸는 경험을 한 이후 혁명가의 길에 뛰어들게 된다.

대학시절 그는 친구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남미를 여행했다.(이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여행 도중 미국과 유럽의 농장주들에게 박해받는 남미의 가난한 농민과 빈민을 목격한 뒤 빈부격차, 계급문제 등에 관심을 갖게 되고 결국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 혁명가가 된다.

체 게바라는 28세 때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에서 혁명을 일으켜 당시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독재정부를 무너뜨린다.

그는 혁명 후에 쿠바 재무국장이 되지만 한곳에 안주하는 생활에 싫증을 느꼈다. 37세 때 공산주의의 모토인 ‘세계혁명’을 실천하기 위해 아프리카 앙골라에 건너가 게릴라전을 펼쳤지만 실패했다.

39세 때 볼리비아에서 다시 게릴라전에 참여하였다가 1967년 10월 8일 총상을 입고 포로로 잡혀 그 다음 날 바로 총살됐다.

체 게바라에 대한 평가는 양극단으로 갈린다. ‘세계혁명’을 이루기 위해 실천에 나선 영웅이라는 측면과 잔인하고 무능력한 데다 과대망상증과 소영웅주의에 빠진 몽상가라는 것이다.

체 게바라가 쿠바 재무국장이던 시절 쿠바의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게릴라전을 펼쳤을 때도 그의 작전능력과 정보수집능력은 형편없었다고 한다. 그는 매우 잔인했는데, 혁명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회의적인 생각을 가진 부하들은 직접 그 자리에서 총으로 쏴죽이기도 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체 게바라가 ‘세기의 풍운아’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듯하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부귀영화를 좇고 안락한 삶을 바란다. 젊었을 때 품었던 이상과 정열을 잃은 채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반면 체 게바라는 의사로서의 편안한 삶을 마다하고 혁명의 길에 뛰어들어 39세에 요절할 때까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직접 뛰어들었다는 점에서 ‘보통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동아일보

 

 

 

ㆍ제3세계 혁명사 ‘불멸의 아이콘’

몇 년 전 쿠바에 다녀온 적이 있다. 이 카리브해 사회주의 국가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당시 80세를 넘긴 피델 카스트로였지만, 카스트로의 엽서·책·기념품은 찾기 힘들었다. 이방인의 눈에 들어오는 건 오직 체 게바라의 얼굴이었다. 카스트로가 쿠바인의 삶을 지배한다면, 게바라는 쿠바인의 꿈을 지배한다고나 할까.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1928년 아르헨티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앓았던 천식은 그가 정글에서 총을 들었을 때까지 계속됐다. 의학을 전공하던 대학 시절, 오토바이 한 대에 올라 중남미를 여행한 그는 민중의 가난, 질병을 목도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책은 오직 혁명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의사의 길을 버리고 직업적 혁명가가 되기로 한 게바라의 첫 목표는 쿠바 혁명이었다. 카스트로와 힘을 합친 그는 부패한 독재자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지난한 무장 투쟁을 시작했다. 당시 쿠바는 미국 부유층의 놀이동산쯤으로 전락해 있었다. ‘체’라는 친근한 별칭은 이때 얻었다.

1959년, 혁명은 성공했고 게바라는 쿠바 국립은행 총재가 됐다. 그러나 책상 머리에 앉아 서류에 서명을 하는 일은 게바라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았다. 65년, 카스트로는 오랜 동지 게바라가 또다른 혁명을 이뤄내기 위해 쿠바를 떠났다고 발표했다. 한동안 게바라의 행적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게바라는 쿠바 혁명과 같은 성공을 다시는 맛보지 못했다. 아프리카 콩고에서의 게릴라 전에 실패한 그는 다시 라틴 아메리카로 돌아와 볼리비아의 정글로 들어갔다. 하지만 영토 바로 밑에 있는 쿠바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을 목격한 미국은 팔짱을 끼고 있지 않았다. 미 중앙정보부(CIA)는 볼리비아 정부에 게바라를 잡는 데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했다. 67년 10월9일, 39세의 게바라는 볼리비아 정권에 의해 사살됐고, 깡마른 시신의 사진이 공개됐다. 게바라의 시신은 훗날 쿠바로 옮겨졌다.

게바라의 육신은 죽었지만, 제3세계 혁명의 아이콘으로 영원히 살아남았다. 정치적인 의미를 떠나서라도, 베레모를 쓴 채 시가를 문 채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은 어느 영화 배우보다 매력적이다. 게바라가 꿈꾼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지만, 그는 여전히 젊은이의 낭만적인 영웅으로 남아있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

 

 

 

 

 

 

 

체 게바라[ Che Guevara ]

1928. 6. 14 아르헨티나 로사리오~1967. 10 볼리비아.

게릴라전의 이론가·전술가.

 

쿠바 혁명(1956~59)에서 이름을 날린 공산주의자로 후에 남아메리카의 게릴라 지도자가 되었다.

 

좌익 성향이 있는 스페인-아일랜드 혈통의 중류 가정에서 5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천식을 앓았으나 운동선수와 학자로서의 재능이 뛰어났으며 1953년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여가가 생기면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서민들의 가난한 생활을 몸소 체험했으며, 빈곤에 대한 해결책은 폭력혁명밖에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라틴아메리카를 각각 독립된 여러 국가의 집합체로 보지 않고 하나의 문화적·경제적 실체로 보았다. 또한 라틴아메리카 해방을 위해 전대륙적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53년 그는 과테말라로 갔다. 그곳에는 하코보 아르벤스가 진보적인 정권을 이끌고 사회주의 혁명을 시도하고 있었다(이때 게바라에게 '체'라는 별칭이 붙었는데 그것은 아르헨티나인들이 말할 때 흔히 붙이는 감탄사의 하나임). 1954년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후원한 쿠데타로 아르벤스 정권이 무너지자 그는 미국이 진보적인 좌익정부에 반대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확신이 전세계적인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그의 계획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는 과테말라를 떠나 멕시코로 갔고, 그곳에서 쿠바인인 카스트로 형제(피델·라울)를 만났다. 카스트로 형제는 그때 정치적 망명생활을 하며 쿠바의 풀겐시오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전복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카스트로의 군대에 합류해 1956년 11월말에 쿠바의 오리엔테 주(州)에 상륙했다. 그 군대는 상륙 즉시 바티스타 정부군에게 발각되어 거의 전멸했다. 그러나 부상당한 그를 포함한 몇몇 생존자들은 마에스트라 산맥에 이르렀는데, 그후 그곳이 게릴라군의 중심지가 되었다. 반란군은 바티스타 정부군으로부터 무기를 빼앗고, 주민들의 지지 속에 신병을 모집해 차츰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는 카스트로가 가장 신임하는 보좌관이 되었고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하는 싸움에 2년이나 참여했는데, 〈쿠바 혁명전쟁 회고록 Pasajes de la guerra revolucionaria〉(1963)에 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1959년 1월 2일, 승리한 카스트로 군대가 수도 아바나에 들어가 마르크스주의 정부를 세운 후, 쿠바 시민이 되었다. 그는 혁명군에 가담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정부에서도 유능한 인사였으며 쿠바를 대표하는 산업대표단을 이끌고 해외에도 나갔다. 또한 모든 종류의 제국주의, 식민지주의, 미국의 외교정책에 반대하는 인물로 서방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국가 농업개혁연구소의 산업부장, 쿠바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을 역임했다.

 

1960년대 초반, 쿠바의 정책과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많은 연설과 저술을 했는데, 그때의 저술 가운데 특히 유명한 것이 쿠바식의 공산주의를 논한 〈쿠바에서의 인간과 사회주의 El socialismo y el hombre en Cuba〉(1965)와 게릴라전의 교본으로 큰 영향을 끼친 〈게릴라전 La guerra de guerrillas〉(1960)이다. 1965년 4월 이후 공적인 생활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그후 2년간 그의 활동과 거처는 비밀에 붙여졌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다른 쿠바의 전사들과 함께 콩고로 가서 내전에 참전하고 있는 파트리스 루뭄바 부대의 조직을 도왔다고 한다.

 

1966년 가을, 볼리비아로 잠입해 산타크루스 지역에서 게릴라 부대를 조직·통솔했다. 1967년 10월 8일 이 부대는 볼리비아 육군 특별파견대에 의하여 전멸되었고, 그는 부상을 입고 사로잡힌 후에 총살당했다.

 

A. A. Sinclair 글 | 朴善禧 참조집필

 

/네이트 백과사전

 

 

 

 

 

출처 : 추억속으로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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