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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24.01.21 사회주의 혁명가 레닌 사망

감효전(甘曉典) 2012. 3. 11. 17:12

 

1924.01.21  사회주의 혁명가 레닌 사망

 

 

 

 

레닌 출생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24991

3월 혁명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34422

레닌 피격사건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29081

4월테제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24806

 

 

 

 

1924년 오늘,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한 블라디미르 레닌이 모스크바 근교 고리키 별장에서 네 번째 발작을 일으키며 54세로 사망했다. 뇌졸중으로 발표됐지만 그의 죽음을 둘러싼 설들이 무성했다. '스탈린의 지시로 독약이 장시간 소량씩 투여됐다'는 독살설이 떠돌았다. 최근에는 매독 때문이었다는 설도 제기됐다.

 

죽기 전 레닌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긴장된 생활, 과로 등으로 1921년 중반부터 격심한 두통이 있었고, 반혁명분자가 쏜 탄환을 맞고 4년이 지난 후에야 탄환을 제거한 것도 생명을 갉아먹은 원인이었다. 레닌은 죽기 몇 달 전부터 고통을 이기지 못해 '죽게 해달라'고 애걸했다. 스탈린은 아직 살아있는 레닌이 필요했고 레닌은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스탈린은 미망인의 반대를 무시하고 레닌을 방부처리해 모스크바의 붉은광장 지하에 안치했다. 레닌이 신격화될수록 그의 위치도 단단해진다는 계산에서였다. 레닌은 죽기 1년 전 작성한 유서에서 스탈린의 편집광적인 권력욕을 경고하며 그의 경질을 시사했지만 스탈린은 유서를 은폐한 채 '레닌찬가'에 열을 올리며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

 

/매일신문

 

 

 

 

레닌[ Vladimir Ilich Lenin ]

 

본명은 Vladimir Ilich Ulyanov.

1870. 4. 22(구력 4. 10) 러시아 심비르스크~1924. 1. 21 모스크바 근처 고리키.

러시아의 급진적 마르크스주의자

 

러시아 공산당을 창설하여 혁명을 지도했고 소련 최초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창설했으며, 마르크스 이후 가장 위대한 혁명사상가인 동시에 역사상 가장 뛰어난 혁명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다(→ 공산주의).

 

초년기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교육수준이 높고 교양있는 부모의 6명의 자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어머니 마리아는 의사의 딸이었으며 아버지 일리야 니콜라예비치 울리야노프는 농노의 아들이었지만 교사로서 장학사의 지위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대학시절 나로드니키 운동에 가담했던 맏형 알렉산드르가 알렉산드르 3세의 암살음모에 연루되어 1887년 처형당하자, 17세의 레닌은 혁명적 민주주의 전통 및 마르크스의 문헌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1887년 가을, 카잔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같은 해 12월 불법집회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쫓겨났다. 다시 카잔으로 돌아왔지만 재입학은 허용되지 않았고 추방된 혁명가들과 사귀면서 마르크스의 〈자본론 Das Kapital〉 등 혁명서적을 탐독했다. 1889년 1월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혁명조직 결성

1891년 11월 법률 졸업시험을 수석으로 통과한 그는 법률 학위를 취득하여 1893년까지 가족이 정착해 있던 사마라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1895년 레닌은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를 비롯한 러시아 망명 정치가들과 접촉하기 위해 서유럽으로 갔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자 마자 나중에 멘셰비키의 지도자가 된 L. 마르토프 등과 더불어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을 조직했으나, 1895년 12월 체포되어 1년이 넘도록 감옥에 갇혀 있다가 시베리아의 슈셴스코예로 3년간 유배되었다. 같은 동맹 회원이며 약혼녀인 나데주다 크루프스카야는 유형지까지 그를 따라왔고 두 사람은 그곳에서 결혼했다.

 

1900년 1월 형기가 만료되자 독일 뮌헨에서 플레하노프·마르토프 및 3명의 편집인들과 회동하여 마르크스주의 최초의 정치신문인 〈이스크라 Iskra〉('불꽃'이라는 뜻)를 창간했는데, 이는 러시아의 지식인들을 포섭하고 마르크스주의 세력을 규합하여 사회민주당을 형성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당시의 인텔리겐치아들이 마르크스주의에 매료될 수 없었던 이유는 널리 유포되어 있던 인민주의적 경향 때문이었다. 인민주의자( 나로드니키)들은 농민이 전인구의 3/4을 차지하는 러시아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1861년의 농노해방 이후 지방자치적 농민공동체에 의해 생산이 이루어지는 현실상황은 자본주의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한편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 (→ 플레하노프는 산업발전의 추세를 들어 러시아가 이미 자본주의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규정했다. 레닌은 그의 이론을 대체로 수긍하면서 여기에 독자적인 색채를 가미했다. 유배중이던 1899년에 나온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달 Development of Capitalism in Russia〉에서 자본주의가 농민공동체를 급속히 와해시켜가고 있으며, 농민계급은 사실상 농촌 부르주아와 중산농민, 그리고 지방의 프롤레타리아트로 계층구조화되어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농민의 절반 가량에 해당하는 농민 프롤레타리아 세력에서 극소수에 불과한 러시아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제휴세력을 발견한 것이다. 1898년 3월 민스크에서 결성되었다가 정부의 탄압으로 무산되었던 사회민주당대회가 1903년 7월 30일부터 약 3주일에 걸쳐 런던에서 열렸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WP)이라는 명칭이 최초로 사용되기 시작한 이 대회에서는 당의 강령과 규약이 채택되었지만 당원자격과 규약의 성격 등을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났다. 1902년에 발표된 팜플렛 〈무엇을 할 것인가? What is to be done?〉에 이미 나타나 있듯이 레닌은 노동조합운동이 아닌 계급해방과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확고한 당이 사회주의적 계급의식을 심어주어야 한다고 역설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전위대(前衛隊)'로서의 당의 위상을 천명했고, 자본주의 체제하의 프롤레타리아는 자발적으로 혁명에 뛰어들게 되므로 당은 분열되어 있는 그들의 세력을 조정·결집시키기만 하면 된다는 입장에 반대했다. 〈이스크라〉를 통하여 레닌과 협력했던 플레하노프, (→ 마르토프, 레온 트로츠키는 레닌이 자유로운 당내 토론을 억압하는 자코뱅주의로 기울고 있으며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아닌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 나아가서는 1인독재체제를 지향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결과 (→ 사회민주노동당은 레닌을 주축으로 한 볼셰비키(다수파)와 마르토프 중심의 멘셰비키(소수파)로 양분되었다.

 

1905년의 러시아 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

뤼순[旅順] 함락(1904. 12. 19) 이후 러일전쟁 반대의 여론이 팽배해지면서 1905년 1월 제1차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다. 사실 그것은 혁명이라기보다 부르주아 자유주의자와 입헌주의자의 반란, '피의 일요일'의 학살행위에 분개한 노동자의 폭동, 그리고 짓눌려 있던 농민들의 광범위한 민란이 한 데 뒤섞인 것이었으며 사회주의 혁명의 수준에까지는 도달될 수 없었다. 이즈음 레닌과 멘셰비키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어갔고 그는 혁명에서 사회 각 계급이 담당해야 할 임무와 혁명 후에 들어서게 될 정부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골몰했다. 원래 사회민주노동당의 주류는 플레하노프가 초기에 설정했던 대로 부르주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2단계 과정을 거쳐 사회주의 혁명이 완성된다고 믿고 있었다. 부르주아 혁명은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 멘셰비키의 입장이었던 반면, 레닌은 부르주아 혁명단계를 생략하고 곧장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추진해야 하며 그 주도세력은 프롤레타리아가 되어야 하고 믿을 수 있는 동맹자는 오직 농민뿐이라고 주장했다. 1907년에 레닌은 다시 망명생활에 들어갔고 이 2번째 망명은 1917년까지 이어진다.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진영 내부의 도전에 시달리던 그는 기회주의자들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대항할 의도로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Materialism and Empiriocriticism〉(1908)을 썼다. 이 책은 세계관 및 인식론에 주목하여 부르주아 철학의 배후에 은폐되어 있는 스콜라주의를 폭로하고, 관념론적 철학과 그 창시자들을 근본적으로 평가함으로써 변증법적 유물론을 옹호한 것이었다. 레닌은 1912년 프라하에서 볼셰비키만으로 당대회를 소집하여 멘셰비키와 완전히 결별했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제2인터내셔널에 소속된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은 전쟁 전의 결의사항을 무시한 채 제각기 제국주의 전쟁에 가담한 자국 정부를 지원했다. 레닌은 사회주의적 국제주의에 대한 이와 같은 배신행위를 비난하고 이미 죽어버린 인터내셔널 대신 진실로 혁명적인 사회주의 정당들이 모여 새로운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만들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은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노동자와 군인들은 적국의 노동자를 죽이는 대신 총부리를 자기 나라의 자본가와 지배자들에게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레닌은 1917년 출판된 〈제국주의, 자본주의 최고의 단계 Imperialism, the Highest Stage of Capitalism〉에서 전쟁의 실질적인 원인을 분석하고 사회주의자들이 왜 전쟁을 지원했으며, 왜 혁명만이 정당하고 민주적인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설명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

1917년 2월, 굶주림과 추위와 전쟁에 지친 수도 페트로그라드(1914년까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와 군인들이 황제를 몰아냈다. 스위스에 체류하던 레닌은 독일 정부가 제공한 봉인열차(封印列車)로 1917년 4월 16일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했다. 수도에는 각 공장에서 선출된 노동자 대표위원회인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구성되어 있었고,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로 이루어진 임시정부는 이 소비에트로부터 모든 권한을 위임받았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SR) 및 농민당 당원들이 중심이 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2월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부르주아 지도자들이 새 정부를 이끌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볼셰비키는 여전히 소수파였다. 레닌은 10개항에 걸친 ' 4월 테제'를 발표하여 '임시정부 타도'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그는 평화와 토지분배를 원하는 노동자·농민·병사의 소원을 이루어줄 수 있는 것은 반혁명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임시정부가 아니라 오직 소비에트 정부, 즉 노동자·농민·병사의 직접 지배뿐이라고 선동했다. 이것은 또 1차례의 혁명을 의미했다.

 

1917년 7월 3일의 볼셰비키 무력시위가 임시정부에 의해 진압된 후 독일 스파이로 수배된 레닌은 핀란드로 도피했다. 이 시기에 씌어졌으나 결국 미완성으로 남은 〈국가와 혁명 The State and Revolution〉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국가적 형태인 소비에트 공화국의 이념들이 전개되어 있고, 나아가 계급과 국가가 소멸된 공산주의 사회에 이르는 도정이 서술되어 있다.

 

온건한 사회주의자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이끄는 임시정부는 전쟁에 대한 대중들의 염증과 경제파탄으로 지지를 잃어갔다. 이에 따라 평화와 토지와 빵을 요구하는 볼셰비키가 호응을 얻기 시작했는데, 9월에 들어서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물론 전국 주요도시와 촌락 소비에트에서 다수파로 군림하게 되었다. 지금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켜 모든 국가기관을 전복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확립할 시기라고 판단한 레닌은 당장 무장봉기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 중앙위원회는 그의 무모한 전략에 완강히 저항했다. 레닌은 10월 20일경 몰래 페트로그라드로 잠입하여 중앙위원들을 설득했고, 마침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인 레온 트로츠키의 협력을 얻어 '적위대'(赤衛隊)를 조직했다. 1917년 11월 7일부터 8일 사이 볼셰비키 적위대는 임시정부 타도에 성공했으며, 모든 국가권력이 소비에트에 넘어왔음을 선포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혁명 직후 열린 전(全)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새로운 정부인 인민위원 소비에트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연방의 성립

연합국은 소비에트 정부를 승인하지 않았고, 레닌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평화협상을 시작했다. 그는 10월혁명 이전만 해도 일단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게 되면 제국주의 전체, 특히 독일과 혁명전쟁을 벌이겠다고 공언했지만, 이제는 갓 태어난 소비에트 국가의 존속이 세계혁명을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설파하면서 추축국이 내세운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여 1918년 3월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러시아에는 평화가 도래하지 않았다. 1918~20년 내전에 휩싸이게 된 러시아는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잃었다. 주로 러시아 제국 장군 출신들이 지휘하는 반소비에트 군대(백군)는 연합군의 지원을 받아 붉은 정권을 타도하려고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결국 패배했다. 소비에트 정부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레닌의 뛰어난 지도력 때문이었다. 그는 트로츠키의 도움을 받아 노동자와 농민들로 적군(赤軍)을 조직하고 전략을 마련했다. 경제가 파탄상태에 빠졌는데도 적군과 산업노동자들에게는 충분한 물자를 보급했으며 산업노동자를 새로운 특권계급으로 인정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충성을 얻어냈다. 내전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잉여농산물을 징발했지만 백군이 패퇴하자 ' 신경제정책'(NEP)을 도입하여 농민들이 공개시장에 잉여농산물을 내다팔 수 있도록 허용했다.

 

1918년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당을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으로 개칭했고, 1919년 3월에는 국제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추진하기 위해 제3인터내셔널을 창설했다. 스스로 코민테른의 강령을 작성한 레닌은 노동자 통일전선에 대한 전략 전술을 제시하여 반제국주의 민족해방투쟁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했다.

공산주의 정부의 체제가 정비되어감에 따라 농민과 노동자들의 불만은 증폭되었다. 레닌은 볼셰비키 노선에 대한 불만세력들을 공개재판 등을 통해 가혹하게 제재하기 시작했으며 이설(異說)을 용납하지 않았다. 볼셰비키 노선에 대한 이와 같은 그의 집착이 결국 스탈린의 1인독재체제로 귀결되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레닌 자신은 스탈린이나 트로츠키가 집권할 경우 초래될 위기상황에 대해 깊은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한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1924년 1월 21일 저녁 고리키에서 뇌동맥경화증으로 사망했다.

 

평가

레닌은 소박하고 서민적이었지만 그의 날카로운 눈빛과 넓은 이마에는 힘이 넘쳐흘렀고, 그 작은 몸속에는 결코 꺼지지 않는 열정이 타오르고 있었다. 레닌주의라고 불리는 그의 사상이 마르크스주의에 창조적 발전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될 만큼 이론에 정통한 인물이었으며, 동시에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면도 있어서 마침내 사회주의 혁명의 완성이라는 필생의 목표를 달성했다.

 

/네이트 백과사전

 

 

 


 

1905년 1월 21일 토요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정교회 사제 게오르기 가퐁 신부는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다음날 아침 궁전으로 가서 전달할 편지였다.

 

 

 

1천여 명이 죽고 3천여 명이 부상을 당한 겨울 궁전 앞에서의 '피의 일요일'


“폐하! 저희 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와 주민, 처자식과 늙은 부모들은 정의와 보호를 구하기 위해 당신께 갑니다. 저희는 가난 속에 억눌리고 힘든 노동 속에 모욕 당하면서도 비참한 운명을 묵묵히 참아내며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왔습니다. 저희의 인내는 고갈됐습니다. 고통을 견뎌내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시점에 이른 것입니다. 저희는 일을 멈추고 고용주에게 최소한의 생존권만이라도 보장해달라고 간절히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요구는 거절됐습니다.”

 

1월 22일(러시아력 1월 9일)은 일요일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시민들은 가볍고 편안한 기분으로 겨울 궁전 앞에서 열리는 평화시위에 참여했다. 일요일 외출답게 시민들은 가장 좋은 옷으로 차려 입었다. 모두 15만 명에 이르는 거대한 시위대였다. 가퐁 신부는 대열의 선두에 섰다. 가퐁 신부는 일년 전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공장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있었다. 이날 시위도 그가 조직한 노동자회의를 통해 준비한 것이었다. 그는 오늘 니콜라이 2세를 면담해 어느 정도 민주적인 정치적 대의제를 포함한 보편적인 시민권을 보장해달라고 부탁할 참이었다.

 

 

 

시위대는 겨울궁전 근처에서 해산명령을 받았다. 군대가 총을 겨누고 있었지만 시위는 해산명령을 무시하고 계속 궁전을 향해 전진했다. 황제는 궁전에 없었다. 궁전 앞에 배치된 군대는 혼란에 빠졌고 장교들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명령했다. 시위에 참가한 많은 군중들이 살해됐다. 1월 22일 일요일 하루 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1천여 명이 죽고 3천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야말로 ‘피의 일요일’이었다.


겨울궁전 앞에서의 학살 소식은 곧 러시아 전국으로 알려졌다. 이내 러시아 전 지역에서 항의 파업과 시위가 이어졌다. 월요일인 23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노동자와 군대의 무력 충돌이 벌어졌고 모스크바에서 총파업이 시작됐다. 26일 리가에서 벌어진 파업과 시위에서는 70여명이 죽었다. 러시아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1월 파업참가자는 44만 4천명으로 늘어났고 4월까지 파업 참가자는 81만 명에 이르렀다. 오를로프 보로네즈 쿠르츠크 등 중앙 흑토지대에서는 농민 봉기가 시작됐고 폴란드 그루지야 등 국경지역에서도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급기야 1905년 10월 하순에는 러시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총파업이 발생하여 국가 기능이 정지상태에 이르게 됐다. 결국 니콜라이 2세도 1905년 10월 17일 ‘10월 선언’을 발표, 시민적 자유와 입법 기능을 가진 국가 두마(의회) 소집을 허락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인, 1905년 1월 23일 월요일 스위스 제네바. 스위스에서 망명생활 중인 레닌은 아침 일찍 자신의 아파트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루나차르스키 부부였다. 루나차르스키는 어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어난 ‘피의 일요일’ 소식을 담은 신문을 레닌에게 전했다. 수천 명에 이르는 러시아 시민들이 겨울궁전 앞에서 학살되거나 부상 당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레닌은 기사를 읽자마자 이 사건이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될 것이란 걸 직감했다. 시민들이 학살된 것은 슬픈 일이지만 레닌이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짜르 체제가 벼랑 끝에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  

 

 

 

레닌 부부와 루나차르스키 부부는 서둘러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모이는 까루즈 가의 카페로 출발했다. 그러나 카페는 문이 닫혀 있었다. 조국에서는 혁명의 기운이 번지고 있었지만, 러시아 망명자들은 닫힌 카페 문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들의 리더격인 레닌 조차 조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이역만리 망명지에서 할 수 있는 실천적 전략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실제로 레닌이 1차 망명을 끝내고 러시아로 돌아간 것은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난 지 8개월이 지난 뒤인 1905년 9월 8일이었다. 이 때는 이미 러시아 전역에서 혁명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레닌은 9월 첫째 주에야 제네바에서 기차를 타고 독일로 출발했다. 독일에서 스톡홀름으로 건너 간 그는 위조여권으로 배를 타고 헬싱키로 갔고, 헬싱키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러시아로 갔다. 9월 8일 레닌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역에 도착했다.


러시아 마르크시스트이자 노동계급 해방을 위한 상트페테르부르크조직의
설립자들과 함께한 레닌(왼쪽에서 세번째 앉은 이)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아노프가 본명인 레닌은 1870년 4월 22일(러시아력 4월 10일) 러시아 볼가강 연안에 있는 심비르스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사이자 장학사였고 어머니는 유태계였다. 맏형 알렉산드르 울리아노프가 알렉산드르 3세 암살 계획에 연루되어 1887년 처형당하자 당시 17세였던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고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기 시작한다. 1887년 가을 레닌은 카잔대학에 입학했으나 이해 12월 불법집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쫓겨난다. 이후 레닌은 카잔에서 혁명가들과 사귀면서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에 대한 공부를 시작한다. 1889년 1월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청강생으로 사법시험을 치를 수 있는 허가를 얻은 레닌은 시험에서 최고 점수를 받고 1891년 12월 변호사 자격증을 받았다. 사마라에서 1893년까지 변호사로 일했던 레닌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시작한다. 레닌은 당시 마르크스 해석의 1인자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를 우상처럼 떠받들었는데, 플레하노프를 비롯한 러시아 망명가들을 만나기 위해 1895년 서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레닌은 파리 제네바 취리히 베를린 등을 방문하면서 플레하노프, 악셀로트 등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토론하고 마르크스의 사위인 폴 라파르그를 찾아가기도 했다. 레닌은 이때를 회고하면서 “마르크스, 플레하노프와 사랑에 빠졌다”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형이 알렉산드르3세 암살 계획에 연루되어 처형된 뒤
마르크스주의가 된 레닌


선진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교류 경험을 가진 레닌은 1895년 9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귀국하자마자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우파인 멘셰비키파의 리더인 마르토프 등과 함께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을 조직했으나 1895년 12월 당국에 체포돼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1897년 시베리아 유배형을 받은 레닌은 시베리아 가운데에 위치한 크라스노야르스크를 거쳐 슈센스케에서 3년간 유배 생활을 한다. 그는 1898년 유배지에서 크루프스카야와 결혼했으며, 그곳에서 주요 저작이 된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집필했다. 책은 1898년 8월 블라디미르 일린이란 가명으로 출판됐다. 

 

 

 

 

 

1900년 1월 서른 살이 된 레닌은 3년 유배 형을 마치고 모스크바 남쪽에 있는 포돌스크로 돌아왔다. 5월 다시 서유럽으로 떠난 그는 독일 뮌헨에서 플레하노프, 마르토프 등과 더불어 <이스크라>를 같은 해 12월 말 창간했다. 마르크스주의 최초의 정치신문인 <이스크라>는 러시아 지식인을 혁명운동으로 포섭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규합해 사회민주당을 만드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 시기에 레닌은 팸플릿 <무엇을 할 것인가>를 써서 1902년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레닌이란 필명을 처음으로 썼는데,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이로 인해 레닌은 혁명가 그룹에서 문제적 인물로 부각됐다. <이스크라> 편집진 사이에서도 노선 갈등이 시작됐다. 1902년부터 1903년 사이에 <이스크라> 본부는 경찰의 감시를 피해 뮌헨에서 런던으로 또 제네바로 옮겨 다녀야 했다. 이 기간에 <이스크라>를 통해 협력했던 플레하노프, 마르토프, 트로츠키 등도 레닌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결국 런던 제네바에서 두 차례에 걸쳐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대회’에서 플레하노프는 주변부로 밀려났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레닌을 중심으로 한 볼셰비키(과격 정통파)와 마르토프를 중심으로 한 멘셰비키파(당내 우파)로 양분되었다. 서유럽으로 망명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격렬한 논쟁과 분쟁을 겪는 동안 그들의 조국 러시아에서는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나면서 혁명의 열기가 불붙기 시작한다. 이에 레닌은 1차 망명을 끝내고 귀국하기로 한 것이다. 제1차 러시아 혁명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는 조국에서 레닌은 본격적인 혁명조직을 만들어감과 동시에 멘셰비키파와 격렬한 분쟁을 시작한다. 그러나 1907년 러시아에서 입헌 쿠데타가 일어나 혁명 지도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됐다. 볼셰비키파는 지하로 숨어야 했고 레닌은 다시 해외 망명길에 올랐다. 두 번째인 이번 망명은 1917년까지 이어진다. 망명기간 내내 멘셰비키의 공격과 볼셰비키 내부 진영의 도전에 시달리던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론>(1908)을 발표하고, 1912년에는 프라하에서 볼셰비키만의 당대회를 소집하며 멘셰비키와 완전한 결별을 선언했다.

 

 

 

 

1917년 2월 페트로그라드(191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개명)에서 드디어 니콜라이 2세가 물러났다. 스위스 취리히에 머물던 레닌은 32명의 러시아 망명자들과 함께 1917년 4월 3일 늦은 밤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 핀란드역에 도착했다. 페트로그라드에는 각 공장에서 선출된 노동자 대표위원회인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구성되어 있었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농민당 당원들이 중심이 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2월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부르주아 지도자들이 새 정부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볼셰비키는 여전히 소수파였다. 이에 레닌은 2차 망명을 마치면서 준비한 10개항의 ‘4월 테제’를 발표한다. ‘4월 테제’는 ‘임시정부 타도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레닌은 1922년 뇌동맥 경화증으로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고
마지막 1년은 실어증까지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1924년)

 

 

 

1917년 7월 3일 있었던 볼셰비키의 무력시위가 임시정부에 의해 진압된 후 레닌은 다시 핀란드로 도피했다. 그러나 온건사회주의자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이끌던 임시정부는 전쟁에 대한 대중의 염증과 경제파탄으로 급격하게 지지기반을 잃어갔다. 9월 들어서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전국적인 지지를 얻게 되고 다수파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 해 10월, 레닌은 비밀리에 페트로그라드에 잠입하여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중앙위원들을 설득했고 의장인 트로츠키의 협력을 얻어 ‘적위대’을 조직하는 데 성공한다. 결국 1917년 11월 7일(러시아력 10월 25일) 10시 볼셰비키 적위대는 임시정부 타도에 성공하고 모든 국가권력이 소비에트로 넘어왔음을 선포한다. 11월 8일(러시아력 10월 26일) 새로운 소비에트 정부인 소브나르콤(인민위원평의회)이 평의회의 갈채 속에 탄생했다. 레닌은 의장이 되었다. 10월 혁명이 완결되는 날이며, 마르크스주의에 의한 세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완성된 날이었다. 레닌은 1918년 러시아 사회민주당을 러시아 공산당으로 개칭했고, 1919년 3월에는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추진하기 위해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 제3인터내셔널)을 창설했다. 레닌은 1924년 1월 21일 저녁 6시 50분 고리키에서 뇌동맥 경화증으로 사망했다. 장례식은 사망 6일 후인 1월 27일 거행됐다.

 

 

 

 

레닌의 삶을 다룬 주요저작으로는 9백 쪽에 이르는 전기 <레닌>(로버트 서비스 지음, 시학사)을 들 수 있다. 편집증적이고 격정적인 레닌의 캐릭터뿐 아니라,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내분과 끊임없는 갈등, 그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혁명에 대한 레닌의 확신을 소상하게 읽을 수 있다. 80년대 한국에서는 레닌의 저작이 비록 ‘불법 출판물’이었지만 공공연한 베스트셀러였다. ‘합법 출판물’로 출간되고 있는 지금, 서점가에서 만날 수 있는 책은 <무엇을 할 것인가>(레닌 지음, 박종철출판사)와 <제국주의론>(레닌 지음, 백산서당) 등 불과 두 종에 지나지 않는다.


레닌무엇을 할 것인가제국주의론

 

 

 

전집으로까지 출간됐던 수많은 레닌의 저작은 모두 절판 상태다. 역사의 아이러니인지 자본의 승리인지, 한국에서 레닌은 불법 출판물일 때가 전성기였다. 그밖에 1900년대 러시아 혁명기의 삶을 잘 말해주는 저작으로는 보리스 싸빈코프라는 실제 테러리스트가 쓴 소설 <검은 말>(뿔)과 그의 자전기 <창백한 말>(뿔)을 들 수 있다. 암살과 테러가 횡행했던 혁명기에 한 때 좌파였으나 무정부주의자로 돌아선 싸빈코프의 진술은 테러리스트의 내면과 갈등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특히 <검은 말>은 소설가 이병주 등에 의해 ‘강추’돼 알음알음으로 널리 알려진 저작이다. <창백한 말>은 1904년부터 1905년까지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나던 무렵, 테러리즘의 진면목을 펼쳐 보인다.

출처 : 추억속으로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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