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帝下 密陽의 靑年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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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수
창신대 교수
3. 일제하 밀양청년단체의 조직과 흐름
가. 밀양청년조직의 흐름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을 계기로 밀양지역에서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던 인사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거나, 잔류하여 합법적인 청년운동을 전개한 경우, 그리고 학생운동을 전개한 경우 등 크게 세부류로 나타난다.
여기에서는 먼저 밀양의 3․1 만세운동이후 밀양 지역내에서 청년회를 중심으로 합법적인 청년운동이 조직 되던 1920년대 청년회를 중심으로 각 사회단체의 조직․성장․변천과정을 주도인물과 더불어 살펴보고자 한다.
처음으로 조직되었던 단체는 밀양구락부(密陽俱樂部)이다. 밀양구락부는 유림들의 밀양시회(密陽詩會)나 유림구락부(儒林俱樂部)를 본따서 청년들을 중심으로 청년들의 수양․게몽활동을 목적으로 1919년에 조직된 단체였다. 이후 밀양구락부는 1920년 9월 8일 밀양청년회(密陽靑年會)로 개명하여 200여 명의 회원으로 창립된다.
밀양청년회에 이어 당시 항일독립운동의 큰 역할을 했던 종교계에서도 밀양기독청년회(密陽基督靑年會)와 표충사를 중심으로 밀양불교청년회(密陽佛敎靑年會)가 조직되고, 부녀자들에 의해 밀양여자청년회(密陽女子靑年會)도 조직 되었다. 이 중 밀양기독청년회는 종교적인 전도를 목적으로 창립되었으나 지속적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한다. 밀양불교청년회는 단장면 표충사에서 조직되어 교화․강연을 목적으로 활동하였고, 밀양여자청년회는 고원덕(高遠涉)을 중심으로 1920년 창립되어 야학을 유일한 사업으로 운영하였다.
그러나 밀양청년회를 제외하고는 조직적으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기 보다는 밀양여자청년회는 야학운영만을, 밀양기독청년회와 밀양불교청년회는 계몽적인 강연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것은, 1910년대 밀양지역의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많은 인사들이 3․1독립운동을 전후하여 대거 망명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소수나마 국내에 남아있던 인사들은 거의 밀양3․1만세운동때 투옥되었고, 그 후 밀양경찰서 폭탄사건․독립자금모집사건 등으로 옥고를 치르고 있었으므로 운동의 역량이 미흡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2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사회주의 등 신사상이 보급되고 노동․농민운동 등 대중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전국적인 청년운동 지도기관인 조선청년총동맹이 1924년 결성되었다. 이를 계기로 각지의 청년단체들은 이른바 ‘혁신’을 내걸고 그 활동과 성격도 한층 명확하게 변모해갔다. 밀양에서도 기존의 ‘청년회’조직들이 연합하여 1925년 밀양청년회 주도의 ‘밀양청년연맹’이 조직되었고, 또 도(道)단위의 청년연맹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항일 투사들의 출옥과 더불어 본격적인 민족해방운동을 위해 밀양청년단체들은 대부분 1928년에 ‘청년동맹’으로 그 조직적 성격을 변화해 갔다.
<그림> 밀양청년단체의 변화
그러나 밀양청년들의 청년운동은 1930년대들어 합법적인 운동이 불가능 해졌고, 밀양의 독립운동의 대부격인 황상규의 죽음과 청년운동을 저지하려는 일제의 탄압속에서 1932년 여름, 밀양청년회와 밀양청년동맹, 그리고 신간회 밀양지회를 이끌었던 윤세주는 단신으로 중국으로 망명하여 그 당시 조선의열단을 이끌어 왔던 밀양출신이자 같은 동네 친구인 김원봉과 함께 본격적인 항일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황상규의 죽음과 윤세주의 망명으로 밀양청년운동은 적극적인 활동을 하기가 어려워졌다. 하지만 그 이후로 밀양의 청년들도 비합법적인 조직운동을 모색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듯하며 현재로서는 굵직한 흐름을 잡아내기는 어렵고, 간혹 개별적인 몇 가지 사례만 눈에 띌 뿐이다.
나. 밀양청년단체의 현황
아래표와 같이 밀양에서는 1920년대 초반에 많은 청년․사회단체가 조직되었다. 일반적으로 1920년대 전반기 청년단체들은 대부분 지방사회의 ‘유지청년’들이 중심이 도어 풍속교정․덕성함양․지식개발․산업진장 등을 목표로 하는 사회계몽단체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일제하 밀양에서 조직되었던 청년․사회단체로서 현재 그 명칭이 확인되는 것은 13~14개 정도로서 아래 표와 같다.
〈표〉일제하 밀양지역 청년단체 현황
명 칭 |
위 치 |
청립시기 |
조직․현황 |
취지․활동 |
비 고 |
밀양구락부 |
1919 가을 |
운동회,강연회 등 개최, 상업야학회 설립․운영 |
동아일보』1920.6.11/8.1 | ||
밀양청년회 |
1920.8.8~1928.7.29 |
1920.8.8이전 밀양구락부에서 명칭 변경 개정, 회원 100~200명, 1920.8 회장 李誠熙, 부회장 李必雨, 총무金來鳳, 1921.5 회장 安三得 1925.2 집행위원장 이현수 1927.10 위원장 황상규 1928.7 집행위원장 윤세주 역전지회 조직.음악부 |
체육회,강연회,극회,웅변변회,야학회 등 개최,防疫활동,수해구제사업 |
『동아일보』 1920.8.14/1921.5.5/1922.5.3/1923.3.4/1925.3.3/3.11/4.7/11.27/1926.5.6/8.8/1927.3.25/10.27/1928.7.25 鮮于基聖,『한국청년운동사』,398~399 | |
밀양기독청년회 |
1922년 당시 회장 吳根睦, 부회장 表文七, 서기 金海龍, 회계 韓仁業 |
전도활동 사회운동참여 |
『동아일보』1922.11.17 | ||
밀양여자청년회 |
1920 |
야학,여성운동 |
『동아일보』1926.8.8 | ||
밀양불교청년회 |
단장면 표충사 |
1922.10회장 趙漢月, 부회장金琪憲, 회원 70여명 |
『동아일보』1922.11.13/1926.9.28 『한국청년운동사』 | ||
교풍청년회 |
1922.7 |
『동아일보』1926.9.28 | |||
삼랑진청년회 |
삼랑진 (하동면송지리) |
1923 |
삼랑진. 송지리 일대 청년 170여 명이 조직. 1929년 현재 회장 趙亨植 |
講話會,운동회개최, 수해구호활동,苗圃경영(桑苗양성),공동경작,養鷄,야학부설치 |
「기초가 견실하여진 밀양군 삼랑진청년회」 『신민』제47호, 1929.3.1 |
역전구락부 |
밀양청년연맹가맹단체 |
『동아일보』1925.12.19 | |||
五六會 |
1925.5.6 밀양청년회관에서창립 |
김병환 등 5~6인 |
신진사상연구,소작운동지원,강령및규약치안유지법 저촉 강령:우리는 단결의 힘과조직적단련으로써XX(자산)계급을타파하며자유해방을 기함 |
『동아일보』 1925.5.11/5.23 | |
밀양청년연맹 |
1925.11.23 밀양청년회관에서 설립 |
6개 단체 연합 위원:서무부 정광호 차철. 조직부 장세영 정광호, 교무부운구례 朴義貞,陣起準 |
강령:역사발전에 필요한사회목표,상호친목도모 및 정의의 희생정신 함양, 경남도연맹가맹, 異流단체와 투쟁 |
『동아일보』 1925.11.27/12.19 『시대일보』 1925.12.19 『한국청년운동사』399 | |
三角청년연맹 |
밀양청년연맹과 대립 |
『동아일보』1925.12.19 『시대일보』1925.12.19 | |||
밀양청년동맹 |
1928.7.29 밀양청년회관에서설립~1931 |
밀양청년회의 후신 임시집행의장 윤세주 집행위원장 조용숙 서무부 박고지, 교양부 李鍵熙, 경리부 李在根, 체육부 李鶴用, 조직부 안병욱, 운동부 안민수, 악대부 이배근 1930.3 집행위원장 孫基埰, 집행위원 朴振浩,李八壽,李東雨,李尙洙,金熙淳,崔宗得,金沖,宋在晶,尹正洙,집행위원후보 河寶京,尹致璟,尹東鳳 밀양면지구,삼랑진면 낙동지부,밀양역전지부,산외면지부 등 설립 |
청년운동의 혁신. 30세 이하로 연령제한 순회강연단 노동야학원,이재민구호 등 밀양청년회 활동 계승 |
『동아일보』1928.8.1/ 8.15/1929.8.3/1930.3.28/12.6/1931.1.22/6.1 『중외일보』1928.8.1/ 8.15/1930.4.5/8.2/8.5/9.17 『한국청년운동사』399 | |
에쓰청년회 |
삼랑진 |
1925.12.13경 남도연맹(부산) 주최단체인 관계상 밀양청년연맹 탈퇴 |
『동아일보』1925.12.17 | ||
凝州친목회 |
내이동 육영제 |
회원80여명,孫永卨(회장),李炳榮(총무),朴忠穆(부회장) 申鉉悳 등 발기 |
쇠퇴한 풍기와불합리한 현상 혁신이 목적 |
『동아일보』 1926.6.16/8.8 | |
시흥청년동맹 |
1927.3.29 밀양청년회관에서창립 |
鄭雄 韓鳳高 등 신흥청년계급 20여명 |
강령:신사회 건설, 계급의식에 필요한 지적교양, 무산청년의 당면 이익 옹호 |
『동아일보』 1927.4.1/5.19 |
다. 밀양청년단체의 활동
일제하 밀양의 청년운동을 주도해온 밀양청년회에 대해서는 다음호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고 아래에서는 종교계 청년단체들과 여성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밀양여자청년회에 대해 살펴보겠다.
1) 주요청년단체의 창립과 활동
밀양구락부 야학관련기사, 동아일보,1920.7.2
이 외에 밀양지역에서 눈에 띄는 단체로는 밀양여자청년회와 밀양기독청년회, 밀양불교청년회 등이 있었다.
밀양에서 여자청년회가 처음으로 조직된 것은 1920년 말이었다. 밀양여자청년회(이하 여청으로 약함)는 1921년 3월부터 여자 야학원을 운영했는데, 이는 이후 여청의 가장 큰 활동이 되었다. 이 당시 밀양여자청년회의 임원은 회장 고원섭, 부회장 윤치정 이었고, 회원 대부분이 밀양교회의 교인들이었다. 따라서 밀양여자청년회는 기독교 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청이 순탄하게 운영된 것만은 아니었다. 항상 경영난에 시달리며, 야학활동과 강연회 개최 외에 그다지 큰 성과를 내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1928년 들어서는 신간회와 함께 근우회 밀양지회가 조직되어 밀양에서 여성운동의 중심이 완전히 근우회 쪽으로 넘어가면 여청의 중심인물들도 대부분 근우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20년경 조직된 밀양기독청년회는 원래는 전도를 목적으로 창립되어 사회운동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하였다. 1921년 11월 밀양성내 복음전도관에서 밀양기독청년회 청년전도회가 조직되었는데 1922년 3월 현재 회장 오근목, 부회장 표문칠, 서기 김해룡, 회계 한인업 등이었다. 하지만 1924년 2월 27일 관련 유지들이 “창립한지 수삼년간 수면상태로 유야무야함을 개탄하여” 서문 안 예배당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규칙개정과 임원개선 등을 가결하고 이후 전도에 주력하기로 결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후 기독청년회의 활동이 그리 활발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밀양기독교청년회 관련 기사, 1920.9.16
밀양불교청년회의 정확한 창립 일시는 확인할 수 없으나, 1922년 10월 22일 단장면 표충사에서 회원 7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3회 정기총회를 개최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창립은 1920년경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3회 총회에서는 표충학원 이전기지로 유지 2인이 전답을 기증한 일과 노동야학 개설 등이 논의되었다. 당시 임원진은 회장 조한월, 부회장 김기헌, 총무 오성모 등이었다.
이밖에 1923년 조직된 삼랑진 청년회는 교통의 요지인 삼랑진을 중심으로 송지리 일대의 ‘청년유지’ 170여 명이 총망라되어 결성된 조직이다. 삼랑진청년회에서는 강연회나 운동회 개최, 야학설치 등의 일반적인 활동 외에도, 회원의 하천부지 공동경작과 양계를 통한 농가부업 양성 등 농사개량운동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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