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帝下 密陽의 靑年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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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수
창신대 교수
다. 밀양청년회 총회 및 주요안건
1) 총회일람
밀양청년회는 1920년 창립 이후 1921~23년까지는 매년 봄 정기총회를 개최했으며, 이후 정기총회가 많아졌던 듯하나 정확한 회수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다른 지방의 청년운동이 활성화되던 1923~24년경 청년회의 활동은 다소 부진했던 듯하다. 그래서 1925년 초에는 밀양 청년회부흥기성회까지 조직되어 2월 28일 부흥기성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후 3월 8일 10회 정기총회를 개최했으며, 그해에는 두 차례 임시총회도 열렸다.
특히 그해 11월 18일 개최된 임시총회에서 앞서 살펴본 밀양청년연맹 결성과 관련된 문제가 토의되고 가결되었다. 이후 다시 매년 정기총회가 개최되었는데, 1927년에는 당시 전국적인 청년운동의 흐름에 말맞춰 ‘혁신’과 관련된 문제가 제기되어 두 차례 총회가 열렸다. 1927년 10월 14회 정기총회에서 회원 연령을 30세 이내로 제한했으며, 1928년 7월 15일 15회 총회(마지막)에서는 18~27세로 연령이 제한되고 조직형태도 청년동맹으로 전환하였다. 연령제한이나 조직형태변경 등은 당시의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총회 개최상황은 다음과 같다.
〈표2〉밀양청년회 총회 일람
회의명칭 |
날짜/장소 |
의장/인원 |
안건 |
임원 |
기타 |
1회 정기총회 |
1920.8.8 11시영남루 |
임원선정,자위단(위생단) 조직,방역활동 |
회장 李誠熙, 부회장 李必雨, 총무 金來鳳 |
청년회로의 조직적 전환실행 | |
2회 정기총회 |
1921.5.5 |
임원선정 등 |
회장 安三得, 서무부 鄭光浩, 회계부 李永準, 교육부 崔昌烈, 체육부 金聖鵔, 덕육부 表文昊, 사무원 韓仁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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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정기총회 |
1922.4.22 2-7시 |
회원 40여명 참가 임시의장 安三得, 司察 李章守. |
회장에서 위원제로. 규칙제정위 선정. 회관 신건축 관계. 임원선출(투표식) |
위원장 안삼득, 회계부장 이영집, 부원 韓成根, 서무부장 朴壬守, 부원 車貞奎, 체육부장 鄭光浩, 부원 薛仁吉, 智育부장 김희지, 부원 韓仁守, 사교부장 表文昊, 부원 朴高支, 德育부장 權成業, 부원 朴尙五, 議事 朴章億 |
규칙제정위원 : 안삼득 金熙址 李尙浩 |
제4회 정기총회 |
1923.2.22 1시.밀양청년회관 |
출석회원 52명 위원장 안삼득 |
개회사, 회록낭독, 경과보고, 개정된 규칙 및 세칙 통과 임원개선 |
위원장 권중휘, 서무부장 金熙址, 재무부장 표문호, 지육부장 朴尙五, 덕육부장 안삼득, 체육부장 박임수, 권업부장 한춘옥, 사교부장 李誠熙, 議事 박장억 외 3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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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청년회 부흥기성대회 |
1925.2.28 3시 회관 |
朴昌守 외 15인 발기. 의장 韓一根 |
취지설명, 경과보고, 규칙통과, 초오히개최(3.3)결의 |
서무부 한일근 車徹박임수, 사회부 朴昌守, 鄭雄姜元祚, 尹錦河, 李賢壽 |
회무의부진을 시정하고 회를 확장하고자 밀양청년회부흥기성회 조직 |
10회 정기총회 |
1925.3.8 오전 10시 |
임시의장 김병환(사회) |
경과보고, 규칙수정, 회원정리:20~30세 정회원, 30세이상 특별회원, 회관수선, 집행위원선정 |
집행위원장 이현수, 서무부 김희지 박창수 車貞奎 朴高支, 문예부 김병화 梁泰奭 김래봉 朴晩用 체육부 강원조 정웅, 사회부 박임수 한일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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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총회 |
1925.4.3 |
사회 박창수 |
수정규칙 통과, 대운동회 장소변경, 회관수리비 부족분 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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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총회 |
1925.11.18 오후 10시30분 |
임원개선, 밀양청년연맹조직 건, 가결 후 집행위원회에일임, 회원정리건 |
개선된 임선:강덕수 尹相俊 印龍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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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회 정기총회 |
1926.5.2 회관 |
제반사무혁신결의, 춘계대운동회 개최, 신임위원피선(투표) |
집행위원장 구중휘, 서무 박창수 차철, 문예 양태석 윤상준, 사회 박임수 정광호, 체육 박만용 박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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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정기총회 |
1927.3.21 오전 10시~오후6시 회관 |
임시의장 김병환(사회), 서기 박고지 |
회록보고, 각부보고, 규칙 일부수정, 집행위원선거(9인), 기타 청년회 혁신과 신사업계획, 검사원 2인 두기로 결정, 춘계대운동회 |
신임집행위원:황상규 김병환 박고지 朴壬守 徐載錫 尹小龍 尹致衡 尹相俊 梁泰奭 검사위원:尹喆漢 權重* 朴昌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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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회 정기총회 |
1927.10.23 |
위원장 황상규, 임시의장 박태원(사회) |
개회선언, 회록낭독, 각부 사업보고, 규칙 제4조 연력제한 검토의 후 30세 이내로가결(30세이상 현간부즉석 총사직 선언), 인임집행위원 선정, 밀양여자청년회.여자야학회 장소 주선, 교섭위원 선정, 소년회 및 청년동맹 조직 건은 신임위원에게 일임 |
신임집행위원:윤세주 서재석 강덕* 박고지 정광호 박임수 표문칠 이건희 윤상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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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회 정기총회 |
1928.7.20 오전10시. 회관 |
집행위원장 윤세주, 임시의장 조용숙(사회), 서기 박고지 |
회록낭독, 각부보고, 위원선정(투표)하여 동맹 창립준비위원 일임, 청년동맹 조직 건(이후 청년회 해체 결의), 회원연령 18~27세, 동맹조직준비위원 선정, 산외면 형평사원 사건 조사위원 선정, 삼랑진공립보통학교 생도 私刑사건 조사보고 |
전형위원 5인, 신임집행위원:조용숙 李鍵熙 李倍根 安秉旭 李福用 徐載錫 尹且岩 尹錦河 安敏洙 등 18인, 조사위원:안민수 조용숙 朴怲崙 尹冑 |
삼랑진공보교생 사형사건은 임석경관의 제재로 결과보고만 하고 토의못함. |
2) 주요안건
(가) 밀양청년회관을 새로 건축하는 문제
밀양청년회는 1922년 4월 22일 회원 40여 명이 참가하여 제 3회 정기총회를 열고 앞의 집행부가 추진한 청년회관 건립 현황보고회를 가졌다. 이 회의에서는 5시간에 걸쳐 밀양청년회관을 새로 건축하는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원래 청년회는 별도의 회관이 없이 육영재를 빌려서 사용했는데, 삼문리에 있는 청년회운동장 북쪽에 건평 77.5평의 회관을 건축하기로 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노동야학교실 3개와 사무실 1개 등을 두기로 했으며, 회의석상에서는 이미 5,600원으로 계약된 서류를 일반에 보여주기도 했다. 이후 회관건축위원 이영집․안삼득․김*근 3인의 감독 아래 공사가 진행되어 그해 10월 8일 오후 2시 신축회관에서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위원장 안삼득의 식사와 김래봉의 경과보고, 내빈의 축사가 있었는데 진성일은 낙성을 축하하는 동시에 노동야학을 위하여 매년 석유를 기증하기로 했다.
(나) 회원연령 제한에 관한 규칙수정의 건
1925년 3월 8일 10회 정기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여기서는 몇 가지 ‘중요한 사안’이 결의되었다. 임시의장 김병환의 사회로 열린 총회에서는 당시 전체 청년운동의 흐름에 발맞춰 밀양청년회에서도 ‘혁신’차원에서 회원연령 제한에 관한 규칙수정이 진행되었다. 20세 이상 30세 이하를 정회원으로, 30세 이상은 특별회원으로 ‘현재회원’을 정리하기로 했으며, 이밖에도 회관수선 결정과 집행위원 선정 등이 있었다.
(다) 회관 수리건
1925년 3월 17일 집행위원회를 열고, 규칙수정안과 회관수리에 관해 집중적인 토의가 있었다. 회관수리는 총비용 170여 원 중 부족금 80원은 전 회원에게 모집하기로 결정하고 다음날인 3월 18일부터 바로 공사에 착수하기로 하였다. 또한 3월 28일 임시총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했으나 이후 회관수리 때문에 4월 3일로 연기되었다. 4월 3일 임시총회에서 는 수정된 규칙이 통과되었으며, 4월 5일 개최될 대운동회와 회관수리 부족금을 각기 1원씩 분담하기로 하는 결정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회관수리비 문제는 이후 밀양청년회의 부채로 남아 계속 부담이 되었던 듯하다.
(라) 밀양청년연맹으로의 조직 안건
1925년 가을 밀양청년회는 수시로 집행위원회를 열고 주요한 활동들을 전개하였다. 10월 30일 개최된 집행위원회에서는 집행위원과 각부 분담인원이 대거 교체되었으며, 11월 18일 열린 임시총회에서는 밀양청년연맹을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집행위원장은 김병환이 맡았으며, 서무부에 정광호․차철, 사회부에 한일근․김병환, 문예부에 양태석․최적근, 체육부에 김희좌․최적근, 상무집행위원으로 최적근이 선정되었다.
밀양청년연맹은 밀양청년회가 주축이이 되어 밀양사회 내 여러 청년단체들의 연합기관으로 결성된 것으로서, 청총 산하 경남청년연맹의 하부기관으로 조직된 것이었다. 그리고 임시총회에서 다시 강덕수․윤상준․인용성 등으로 임원이 개선되었다.
(마) 밀양청년회 혁신방안 안건(연령문제)
1927년 3월 27일 13회 정기총회와 다음날 열린 집행위원회를 통해 밀양청년회는 회를 한층 혁신하고 밀양사회를 개혁하는 방안을 모색하였으며, 새로이 검사위원제도를 두어 과거의 문제점을 개선하기로 하였다. 그해 10월 23일 14회 정기총회에서는 청년회의 혁신방안으로서 당시 전국적인 추세에 말맞춰 연령제한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규칙 제4조를 수정하여 회원 연령을 20세 이상 30세 이내로 제한하기로 가결한 후, 즉석에서 과반수에 달하던 30세 이상 간부 전원이 총사직을 선언하고, 새로이 윤세주 등 신임집행위원 9명이 선정되었다.
(바) 밀양청년회의 청년동맹으로의 전환 및 회원 연령 재조정
1928년 7월 20일 개최된 15회 정기총회에서는 결국 청년회를 해체하고 청년동맹을 전환조직하기로 결정했으며, 회원 연령도 18~27세까지로 재조정하였다. 이어서 7월 29일 밀양청년동맹설립대회가 개최됨으로써 밀양청년회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그런데 이 대회에서 27세로 제한했던 회원연령이 다시 30세로 조정된 것으로 보아 당시 밀양청년운동에서 연령제한 문제가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2. 밀양청년회의 변화
가. 밀양청년회의 침체
밀양청년회는 1920년 창립 이후 1921~23년까지는 매년 봄 정기총회를 개최했으며, 이후 정기총회가 많아졌던 듯하나 정확한 회수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다른 지방의 청년운동이 활성화되던 1923~24년경 청년회의 활동은 다소 부진했던 듯하다. 그래서 1925년 초에는 밀양 청년회부흥기성회까지 조직되어 2월 28일 부흥기성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후 3월 8일 10회 정기총회를 개최했으며, 그해에는 두 차례 임시총회도 열렸다.
특히 그해 11월 18일 개최된 임시총회에서 앞서 살펴본 밀양청년연맹 결성과 관련된 문제가 토의되고 가겨로디었다. 하지만 1926년 들어서까지 밀양청년회의 활동은 여전히 부진을 면치 못하였다. 창립 당초 200여 명이던 회원 수도 100명 내외로 줄었다. 청년회 집행위원이던 김병환과 한일근은 경북지역의 모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rhtodg아다가 10월이 되어서야 각기 보증금 300원과 700원으로 보석 석방되었다.
원래 그해 2월에 개최하기로 했던 정기총회조차 “여러 사정으로”열지 못하다가, 5월 2일에야 12회 정기총회를 개최하여 박창수 외 8인의 신임 집행위원을 선임하고 이후 집행위원회를 통해 구체적인 사무분담을 정하였다. 거기에다가 6~7월경 밀양청년회는 수해구제금 횡령사건으로 인해 큰 곤욕을 치르기까지 했다.
이 사건은 1925에 입은 밀양지역 수해를 구제하기 위해 밀양청년회 발기 아래 수해구제회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1926년 들어 청년회가 이를 인계 받았는데, 청년회원이자 구제회장을 맡은 김래봉이 그 중 1,000여 원을 횡령하고 종적을 감춘 데에서 비롯되었다. 결국 이사건으로 마산에서 조사단이 밀양에 파견되어 올 정도로 밀양 사회는 시끄러웠다. 김래봉은 원래 평양 출생의 기독교 신자로서 밀양에 와서는 장로까지 되었으며 교회에서 경영하는 밀양유치원 원장까지 맡았던 인물이다.
그는 이 사건이 발각되면서 자기가 경영하던 밀양양화점을 대구사람 명의로 넘겨 삼일양화점이라 바꾸기가지 하여 일반인의 분노를 자아냈다. 원인이야 어찌됐든 간에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밀양은 전국적인 주목을 받아 진상조사위원회가 열리는 등 불명예스러운 파문의 온상이 되기도 했으며 밀양 지역민들에게 밀양청년회와 밀양청년연맹의 이미지를 실추시킨 사건이었다.
이후 다시 매년 정기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앞서 밝힌대로 1927년에는 당시 전국적인 청년운동의 흐름에 말맞춰 ‘혁신’과 관련된 문제가 제기되어 두 차례 총회가 열렸다. 1927년 10월 14회 정기총회에서 회원 연령을 30세 이내로 제한했으며, 1928년 7월 15일 15회 총회(마지막)에서는 18~27세로 연령이 제한되고 조직형태도 청년동맹으로 전환하였다. 연령제한이나 조직형태변경 등은 당시의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나. 밀양청년회 부흥기성회(復興期成會)
밀양지역은 1925년이 되면서 청년․학생․노동․농민 등 대부분의 운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이는 밀양경찰서 폭탄사건의 관련자 출옥과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밀양청년회는 전국적인 청년조직인 청총과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던 듯하다. 한 예로 1925년 6월 28일 집행위원회를 열어, 청총에서 자체 선정한 위원에 대해 밀양청년회의 별도 통지가 없으면 승인으로 간주하겠다는 청총측의 통첩을 ‘절대 부인’하기로 결의했던 일을 들 수 있다.
한편, 1925년 신문지상에 “밀양청년회는 창립이후 근근히 보존”되어오다가 이를 떨쳐내고자 부흥기성회를 조직했다는 기사까지 실릴 정도였다. 박창수외 청년 15인의 발기로 만들어진 밀양청년회부흥기성회는 1925년 2월 28일 청년회관에서 기성대회를 개최하고, 새로운 임원진을 구성하였다. 한편 이날 의장 韓一根의 취지설명․경과보고․규칙통과․임원개선 등을 의결한다. 3월 13일에는 일의 집행을 위해 집행위원회를 개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의결했다.
一. 야학원 무료교수로 다년간 신고한 선생 제씨의 감노회 준비의 건
: 문예부에 일임
二. 임시총회는 3월 28일 거행키로 결정
三. 규칙수정 : 이현수 김병환 김래봉에게 일임
四. 회원정리, 회관수리 : 서무부에 일임
五. 춘계대운동회 : 체육부, 사회부에 일임
六. 오는 17일 임시집행위원회를 동사무실에서 개최
(임시총회에 대한 제반준비를 결정)
청년회 부흥은 위와 같이 조직정비․확장 노력뿐만 아니라, 金海靑年會와 일반사회문제에 대하여 공동연락을 취하고 보조를 일치하기로 하는 한편, 少年軍조직에 문제되는 普通學敎학생에 대해서는 학교장에게 문의하기로 하는 등의 외부적으로 세확장의 노력도 전개하였다. 이러한 청년회의 활동 인사들은 초기의 인사들과 달리, 밀양지역의 사회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金銒煥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던 인물이 많았다. 따라서 고립분산적으로 추진되어 오던 청년운동은 조직통일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1925년 11월 8일 密陽靑年會聯盟 組織을 가결하게 된다.(영대자료)
다. 밀양청년연맹과 오륙회(五六會)의 결성
1) 밀양청년연맹의 결성
1925년 11월 23일 밀양청년회관에서는 당시 사회운동의 일반적 추세에 발맞춰 밀양청년회가 주도하여 6개 단체 대표가 참가한 밀양군청년연맹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는 선언과 강령, 기타 의안들을 토의하고, 慶南道聯盟發起會참가를 의결하고 참가대표로 鄭光浩․尹玖福․張世英 삼인을 선출한다.
◈ 선언(略)
◈ 강령
- 우리는 역사발전에 필요한 사회를 목표로 하고 전진함.
- 우리는 상호친목을 도모하며 정의의 희생정신을 함양하기로 기함.
◈ 결의안
一. 청년단 조직의 건 二. 청년수양의 건
三. 노동야학에 관한 건 四. 여성운동에 관한 건
五. 형평운동에 관한 건 六. 소년운동에 관한 건
七. 이류단체에 관한 건 八. 집성학교내부 초등학교내부 조사에 관한 건
강령에 나타나 있듯이 기존의 청년운동은 실력양성론에 입각한 계몽적 차원의 활동이었으나, 이 시기부터 역사발전에 필요한 新社會를 지향한다는 뚜렷한 방향성을 제기하는 운동의 질적 성장을 이룩한 시기였다. 그리고 결의안을 보면 청년․여성․형평․소년운동을 총괄하는 단체가 되어 이 지역 사회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三浪津 에쓰靑年會와 驛前婦人會가 탈퇴를 신청하여 이내 분열된 모습을 나타낸다.
이는 12월 13일에 결의한 내용에서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연맹이 이 지역의 조직을 대표하지는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에쓰靑年會와 驛前婦人會의 탈퇴는 연맹이 대외적으로 성장하면서 나타난 부작용으로 보인다. 밀양청년연맹의 창립을 계기로 이 지역 사회운동의 양적성장은 이루었지만, 연맹형태로는 일사불란하게 일들을 추진할 수 없었고 또하나 분열양상으로 질적인 성장은 그 이후로 뚜렷한 성과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경북사건으로 청년운동을 주도하던 金銒煥․韓一根이 체포되어 활동이 더욱 위축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영대자료)
2) 사상단체 오륙회의 결성
밀양청년연맹은 사상단체 오륙회를 중심으로 과거 3․1운동(김병화, 강덕수) 또는 의열단사건(김병환, 한일근)에 참여한 활동가와 밀양여자청년회, 읍외 지역 청년단체들이 참가하여 오륙회(五六會)를 조직하였다.
하지만 밀양청년연맹의 결성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김병환과 한일근이 경북의열단사건, 즉 일명 이종암사건에 연루되어 1925년 11월 검거됨으로써 1926년 이후 이렇다 할 정치적 활동을 하지는 못하였다. 이런 와중에 1926년 5월 춘계운동회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순종의 죽음으로 행사가 연기되는 등 밀양청년연맹의 활동은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다.
<표 > 사상단체 오륙회(五六會) 구성원
성 명 |
활 동 |
김병환 |
1889년 2월 내이동 生~1947.1.16 死, 독자. 어릴적 부친을 여윔. 곡물상. 교남교육회 회원(1910.4), 밀양 3․1의거로 6개월 부산형무소수감, 밀양구락부장 역임(20.1), 1차 밀양경찰서폭탄사건으로 1920년 7월 검거 1923년 12월 출옥, 옥중모친상, 동료 청년회원들이 밀양郡葬을 치름(20.7/20.9/23.12), 출옥후 모친상에 대한 감사표시로 밀양 蓮桂所에서 잔치(24.1), 사상단체 五六會결성․밀양공립보통학교학부형회간사(25.2), 밀양청년회특별회원(25.10), 의열단 경북폭탄사건(이종암사건)에 연루되어 재차 검거 약1년동안 수감되었다고 보증금 300원으로 출옥(26.10), 밀양청년회임시의장(27.3), 밀양면소재지 이전반대․밀양군청이전반대위원(27.5), 밀양공립보통학교대강당 기성회규칙기초위원(27.7), 신간회밀양지회 부회장(27.12), 밀양협동조합발기인․감사(28.6), 신간회본부축석 대의원(29.2), 밀양차가인동맹집행위원장(29.12), 신간회밀양지회검사위원․집행위원회상무․신간회본부와 경성지회분규대칙강구위원(30.4/31.1/31.2), 해방후 밀양군 인민위원장․전국인민대표자대회 밀양대표(45.12) |
한일근 |
밀양청년회 부흥회의장(25.3), 밀양청년회사무부원(25.10), 의열단 경북폭탄사건(이종암사건)에 연루되어 김병환과 함께 검거, 약1년 동안 수감되었다가 보증금 700원으로 출옥(26.10), 신간회밀양지회준비위원․서무부원(27.12), 밀양군청이전 유치측 위원(27.6), 신간회 밀양지회 간사(29,5) |
정광호 |
밀양청년회서무부장(21.5), 밀양청년회 대구원정 용진축구단단원(21.6), 밀양청년회체육뷰장(22.5), 밀양청년회서무부장․경남도 청련발기 참가대표(25.11), 경남기자동맹 임원․밀양청년회 사회부부원(26.4/26.5), 국농소소작인동맹임원․밀양공립농잠학교맹휴교섭위원(27.3), 밀양군청이전반대위원회(27.5), 삼랑진공립보통학교생도 사형진상조사위원회(27.10), 신간회밀양지회선전부원(27.12), 신간회본부 출석대의원(29.1), 신간회밀양지회 집행위원․중외일보 밀양주재 기자(30.4) |
《동아일보》《조선일보》《중외일보》;社團法人三一同志會,《釜山慶南三一運動史》,1979, p212,p240;신종대, 〈해방직후 부산․경남지방의 변혁운동〉《한국근현대지역운동사》, 여강, 1993, p241.
한편, 1920년대 후반이후 밀양의 청년운동은 밀양청년회에서 발전한 밀양청년동맹이 주도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후 밀양청년연맹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아마도 밀양청년회와 함께 밀양청년동맹을 만든 것이 아닌가 추축된다. 그리고 1931년 청총이 해소될 즈음까지 경남청년연맹 활동이 보이고 또 경남청년연맹에 밀양의 위원들이 참가하거나 밀양에서 도연맹 회의가 잡혀있는 것으로 보아 1930년대 초반까지 밀양의 청년운동 조직들은 밀양청년동맹을 주축으로 전체조선의 청년운동과 함께 움직여 나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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