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帝下 密陽의 靑年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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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수
창신대 교수
라. 밀양청년동맹으로의 전환
1) 주요활동인물
밀양청년회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것은 의열단 사건으로 검거되었던 김병환과 한일근이 1927년 봄에 출옥하면서 시작되었다. 김병환은 출옥과 함께 신간회결성으로 전국이 시끌벅적할 시기인 1927년 3월 밀양청년회 임시의장을 맡는다.
이 후 그는 신임집행부와 함께 밀양청년회를 혁신하고 새롭게 지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김병환의 이러한 노력끝에 그 동안 의열단 투쟁과 관련하여 밀양청년회와 직접적 관계를 맺지 못했던 윤세주․윤치형․황상규 등이 1927년 4월과 9월에 각각 밀양청년회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내밀게 되었다.
특히 윤세주는 1927년 2월 출옥하자 곧바로 밀양청년회에서 체육부원으로 활동을 재기했다. 원래의 계획대로 청년연맹의 연령을 27세로 제한했다면 그는 청년동맹에서 활동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결국 1927년은 과거 의열단 관련자 김병환, 황상규, 윤치형, 윤세주 등이 모두 지역운동에 복귀한 해였다. 이들 중 윤세주를 제외한 연령 30세 이상의 3인은 모두 신간회 밀양지회에서 활동했고 윤세주는 1928년 8월 조용숙에게 밀양청년동맹위원장을 물려주기 전까지 1년 동안 신간지회와 밀양청년동맹에서 동시에 활동했다.
<밀양청년동맹 창립직후 주요 활동 인물>
성 명 |
학력 |
활동상황 |
신간회 밀양지회 |
윤세주 |
사립동화학교 |
1899~1942.6.3 戊松윤씨. 통정대부 前侍從 尹熺圭의 4남중 막내. 사촌형 윤치형과 함께 비밀결사 일합사단원, 1919년 밀양 3․1의거 주동 궐석재판 1년 6개월 선고.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 창립(1919.11), 1920년 밀양경철서폭탄사건으로 징역 7년, 1927년 2월 7일 출옥. 1927년 4월부터 밀양청년회 체육부원으로 밀양청년회에서 활동. 밀양군청이전반대위원(27.5), 밀양협동조합이사(28.3), 중외일보기자, 경남주식회사사장(27~32), 1932년 중국행 김원봉과 재회․조선혁명 간부학교제1기생(32.10), 민족혁명당기관지「민족혁명」편집책임자, 조선의용대대원(38.10), 태항산전투에서 전사(42.6) |
밀양지회 서무부원․지회사무이사(27.12/28.6) 신간회본부출석대의원(29.1) |
박병륜 |
중외일보 밀양주재기자(30.4), 경북기근구제 밀양청년동맹 구제음악회기부(29.5), 야학동정음악기부(30.3) |
밀양지회총무간사․재정부장․조직부장(27.12/30.4/31.1) | |
이건희 |
밀양군청이전반대위원(7.5), 밀양청년동맹 집행위원(29.8), 밀양소년회 회보 「화살」편집겸 발행인. |
밀양지회서무부위원․검사위원(27.12/29.9) | |
손기채 |
밀양청년동맹농천강연(29.12), 밀양청년동맹집행위원장․서무부장(30.3/30.9), 밀양청년동맹집행위원(31.1) |
밀양지회 집행위원(30.4) | |
조용숙 |
밀양소년회지도위원(27.12), 밀양협동조합발기인(28.2), 조선일보 밀양주재기자(30.4) |
밀양지회창립위원․총무간사(27.12/28.7), 경남도지회연합회발기준비회대표위원(29.9), 지회교육부장(30.4), 신간회경성지회분규 조사파견원(31.1) | |
이배근 |
밀공보6회 (16년 졸업) |
밀양공립보통학교 동창회평의원(26.1), 밀양소년회 제3회 동화회 ‘이상한 두루마리’구연 |
|
안병욱 |
밀공보14회 (24년 졸업) |
밀양청년동맹집행위원장․상무집행위원․경남도청년연맹위원(29.8/30.3/30.12), 밀양청년동맹성내지부 임시의장(31.2) |
밀양지회서무부장(31.1) |
이학용 |
밀공보14회 (24년 졸업) |
밀양소년회 지도위원(28.7), 밀양합동노조집행위원(31.9) |
|
서재석 |
밀공보10회 (20년 졸업) |
밀양소년무적단,용승단,역전소년단 야구심판(23.9), 밀양소년군결성(25.), 밀양청년회웅변대회 2등(25.4), 밀양공립보통학교 동창회평의원(26.1), 밀양군청이전반대위원(27.5),밀양청년회집행위원(27.10) |
|
윤차암 |
밀공보8회 (1918) |
1903~1964. 의열단 석정 윤세주의 장조카, 1919년 3월 5일 밀양소년단 결성 단장역임, 4월 2일 만세시위주동으로 14일 구금되었다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 해방 후 밀양교육청 교육감(1954~1960) |
|
윤금하 |
밀양청년회부흥대회위원(25.3) |
||
안민수 |
경남도청년연맹 밀양대표(29.1), 밀양청년동맹조직부원(30.9) |
<자료> 김승, 한말 일제하 밀양지역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밀양문학, 2004, pp66-68.
3. 밀양청년회의 지역 봉사활동
가. 콜레라 위생방역 및 수해구제해 조직
1920년 8월8일 구락부에서 청년회로 개칭한 밀양청년회는 당시 밀양사회에 번성했던 콜레라를 방역하기 위해 자위단(위생단)을 조직하고 즉석에서 임시의연금을 수합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22년 7월 수해 때 밀양청년회 역전지회와 교풍청년회가 발기하여 수해구제금을 모금했으며, 매년 여름 수해 때마다 밀양청년회 집행위원회에서는 구제사업을 적극 논의하였다. 1925년 여름 대수해 때에는 밀양청년회 발기로 수해구제회가 조직되기도 했다.
나. 민중계몽운동
1) 야학운동
당시 전국 각지에서는 뜻 있는 청년층이 중심이 되어 야학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밀양지역 청년단체들의 활동 중 가장 활발했던 것 역시 야학을 통한 민중계몽활동이었다. 밀양청년회의 전신인 밀양구락부에서도 1920년 6월 21일부터 보통학교 교실에서 상업야학회를 열었는데, 1920년 8월 밀양청년회에서 설립하여 운영하던 노동야학과 밀양여자창년회가 운영하던 여자야학이었다.
이들 야학에서는 농번기인 6월경 방학을 했다가 9월경 다시 개학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리고 종종 여러 명소 등을 찾아 소풍이나 견학을 갔으며 정기적으로 운동회도 개최하였다.대체로 이 행사들을 통해 동정금 명목으로 기부금을 모금하는 것이 야학운영에는 결정적이었던 만큼 매우 중요했다. 대부분 교사들이 무보수로 ‘봉사’했는데도, 야학의 운영경비나 교육장소 등이 항상 문제였다.
2)강연회 개최
야학 외에 일제하 청년단체가 민중을 교양․계몽하기 위한 대표적인 활동으로 각종 강연회 개최를 들 수 있다. 밀양청년회 등의 청년단체는 이들 강연회를 직접 주관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1920년대에 청년단체 중심의 강연회 중 대표적인 몇 가지를 들어보면 아래 표와 같다. 특히 1921년 2월 10일 밀양기독청년회 강연에서와 같이 강연내용이 문제시되어 강사로 초빙된 고원덕(高仁德)이 고초를 겪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1920년대 밀양 청년단체의 강연회 개최 일람>
일시 |
장소 |
주관/후원 |
제목 및 연사 |
청중수 |
참고 |
1920.7.12 밤9시~12시 반 |
서문안 예배당 |
학우회강연단/밀양청년회 |
과부의 해방,신시대와 我等의 急務, 관세철폐문제, 조선의 민족성을 기 說하야 보통교육의 급무에 及함 |
1,000여 명 |
『동아일보』20.7.13.3 |
1920.9.12 밤8시 |
서문안 예배당 |
밀양기독청년회 |
평등, 吾人의 살옴, 금일 여자의 장래 |
『동아일보』20.9.16.4 | |
1921.2.10 |
밀양면 예수교회 |
밀양기독청년회 |
안락의 근본은 고초에 있다. |
3.33. 3인검거징역3년 |
『고등경찰관 계적록』33페이지 |
1921.6.8 밤8시~12시 반 |
서문 안 예배당 |
조선청년회연합회 순회강연단/밀양청년회 |
세계의 進運과 청년의 사명, 신사상론 |
700여 명 |
『동아일보』21.6.12.4 |
1922.2.4 오후7시 |
밀양여자청년회 창립1주년 기념식 행사 |
가치적 생활(李善愛) |
『동아일보』22.2.13.4 | ||
1922.7.16 밤 9시~11시 |
읍내 예배당 |
조선교육협회 순회강연단/밀양청년회 |
무엇을할까(姜仁澤) |
『동아일보』22.7.19.3 | |
1923.2.27 밤 8시~11시 |
서문안 예배당 |
밀양청년회 |
문화시찰담, 진실한 동정, 종교와 철학, 자작자급의 정신에서 예수를 찾자 |
『동아일보』23.3.3.4 | |
1923.3.2 밤 |
밀양여자청년회 총회 행사 |
산업의 위기와 그 대책, 혼돈 세계를 벗어나서 |
『동아일보』23.3.12.4 | ||
1923.8.8 밤 8시 |
하남면수산리,노동야학회관 |
운동에 대하여, 청년다운 청년, 청년의 장래, 無諒解한 부모와 부랑한 자식 |
『동아일보』23,8,17,4 | ||
1923.8.28 밤 9시 |
밀양극장 |
재경성조선여자고학생상 조회 남선순강대/밀양청년회 |
相助의 상황보고, 현대사회의 불평을 개조, 현 사회와 여자의 각성 |
『동아일보』23.9.5.4 | |
1925.3.30 밤 8시 반 |
밀양청년회 문예부 |
극동문제와 조선쳥년 |
『동아일보』25.4.2.3 | ||
1927.7.20 밤 8시 |
삼문리보통학교 |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순회강연대/밀양청년회 |
生의 연구, 현대경제조직, 경제학상으로 본 사회상 |
300여 명 |
『동아일보』27.7.24.4 |
1928.7.6 |
밀양청년회관 |
조선농우연맹 하기순회강연단/중외․동아 밀양지국 |
농촌문제대강연회: 사회 황상규, 현대사회와 농촌문제, 농촌시대문제, 농민생활의 李烈 |
『동아일보』28.7.10.4 | |
1929.12 |
밀양청년동맹 |
농촌순회강연 연사:梁基必, 孫基採 |
『동아일보』29.12.10.3 |
<자료> 강만길 편, 밀양의 독립운동사, 밀양문화원, 2003.
다. 각종 체육․문화행사 개최
밀양청년회를 비롯한 청년단체들은 당시 밀양사회를 대표하는 각종 행사를 주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행사들은 밀양군민의 화합을 도모하고 심신을 단련시키며 문화의식을 높이는 계몽적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며, 야학운영자금이나 각종 구제기금 마련 등 재정적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처음으로 확인되는 것은 1921년 5월 13일 밀양청년회와 밀양여자청년회 등 청년단체 연합으로 삼문리 운동장에서 개최한 춘계대운동회였다.
대운동회 장소는 주로 삼문리 공설운동장이나 밀양공립보통학교 운동장이 이용되었으며, 대부분 동아․조선 등의 밀양지국이 후원하였고, 마라톤 등 수십 종목의 경기가 열렸다.
이밖에 청년단체에서는 단체 상호간의 친목도모나 인접 지역 청년단체들과의 친선 등을 목적으로 각종 운동경기를 수시로 개최하였다.
밀양청년회를 비롯한 청년단체 등은 연극 등 각종 문화행사를 열거나 유치하였는데, 이러한 문화공연은 민중계몽의 수단이라는 측면뿐만 아니라 청년단체들의 활동자금 마련이라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컸다. 밀양청년회는 매년 신극을 공연하여 의연금을 거두었다.
밀양여자청년회에서는 동아일보 밀양분국과 밀양청년회의 후원으로 당시 연극공연 이나 영화를 상영하기도 하였다. 관중이 매일 1,000여명에 달했으며, 입장료 등의 수입은 실비를 제외하고 모두 노동야학과 여자야학, 청년회 음악기성회에 기증하였다.
이밖에도 밀양청년회에서는 일본 동경으로 유학하는 동료들을 환송하기 위해 동경유학생송별회, 밀양유학생들을 위한 간담회 겸 웅변연습회을 개최하였으며, 밀양청년회관에서 밀양유학생위로회를 열기도 했다.
4. 지역 권익보호운동
가. 국농소소작쟁의
1920년대 밀양은 경제적으로는 전체인구의 90%가 농업인구이고 이중 밀양농민의 90% 이상이 소작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소작조건은 이들의 생존과 연결되는 가장 중요한 조건들로, 이를 두고 지주와 모순관계를 나타낼 수 밖에 없었다.
밀양청년회는 1927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국농소 소작쟁의’당시 진상조사를 철저히 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1928년 4월 24일에는 조사보고를 하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국농소분쟁이 맨 처음 시작되었을때 밀양청년회와 신흥청년동맹은 분쟁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분쟁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뒷받침되지 못하면서 밀양청년회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는 밀양청년회가 갖는 청년운동의 한계이기도 했다.
사실 밀양청년회는 1927년 벽두부터 밀양군청과 밀양면 소재지 이전문제에 청년단의 직접적 이해관계가 걸려 있어, 읍내 밖 수산의 국농소분쟁은 자연히 관심의 제일 순위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나. 물산장려운동
밀양청년회는 창립이후 노동야학과 청년회관건립, 각종 운동회 개최와 방역사업 등에 힘을 쏟았던 밀양청년회는 1923년 전국에 일어나고 있던 물산장려운동에 발맞추어 밀양지역의 물산장려운동에 적극 앞장섰다. 소비절약과 토산장려운동 목적으로 전개된 이 운동은 밀양청년회만의 독자적 운동은 아니었다.
밀양청년회 못지 않게 밀양장업회의 역할이 컸었는데 밀양장업회는 1923년 1월 지역 경제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단체였다. 물산장려운동에 대한 군민들의 적극적인 호응 때문인지 밀양지역에서 염직기구와 양말기계를 구입하여 공장을 설치하여 제조업부문의 시설을 확장하기로 결의할 정도로 군민들의 물산장려운동 호응은 좋았다. 이 운동의 선전대 위원장에는 한춘옥, 선전연사 김봉호, 안삼득, 문창호, 고원섭 등이 맡았다. 그리고 밀양청년회와 밀양여자청년회는 각기 조직 내에 장려회를 두어 물산장려운동에 참가하였다.
다. 밀양군청 이전반대운동
밀양청년회를 비롯한 청년단체들은 밀양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앞장섰으며, 전국적인 민족운동 내지 사회운동의 흐름과 보조를 맞추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1927년 한 해를 달궜던 ‘밀양군청 이전반대운동’에도 참여하여 운동의 방향을 올바르게 이끌기 위해 노력했다. 반대운동이 처음 확산되었던 5월 3일 밀양청년회는 1,000여 명이 방청한 가운데 긴급임시총회를 열어 다음 내용의 결의문을 발표했다.
-밀양군청을 역전에 이전함은 당국의 횡포한 망동으로써 민의를 무시하고 郡勢에 영합하는 행동으로 인정하고 따라서 적극적으로 이를 반항함.
-이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임시총회를 소집하여 이 의안통과를 요구하는 동시에 대책을 강구함
라. 기타사회문제 해결
1928년 7월 산외면 화계리에서 동네 주민 수십 명을 난타한 사건, 삼랑진의 일본인이 삼랑진공립보통학교 생도를 사형한 사건 등도 조사위원을 선정하여 철저히 조사하는 등, 일제하 밀양사회 내 여려 사건에 적극 개입하여 문제해결에 앞장섰다. 이러한 활동은 밀양청년회가 밀양청년동맹으로 조직을 전환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1929년에는 밀양청년동맹원들이 한해이재동포구제를 위해 성냥행상까지 했으며, 이밖에 1930년 5월 30일 밀양청년동맹 집행위원 손기주․최종득․안병욱 등은 산외공립보통학교 교장 나가다를 만나 “개인용무로 3일간 휴교시켜 학교용 석탄을 사적으로 소비한 것”에 대해 따지다가 밀양서에 검거되기도 했다.
이밖에도 1926년 순종의 서거로 인해 전국적으로 봉도망곡이 행해지는 가운데, 밀양청년회 역시 회관에서 봉도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밀양에서는 읍내의 전 시가가 철시를 했으며, 심지어 밀양성내 예기 20여 명이 일제히 소복을 입고 영남루에서 망곡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 다음호에서는 밀양청년회 회원들이 이룩한 항일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내용들을 기술하고자 한다.
밀양청년회와 밀양여자청년회연합대운동회 밀양시민대운동회 동아일보광고
개최 기사, 동아일보, 1921,4,30
밀양청년회의 방역활동, 동아일보, 192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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