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帝下 密陽의 靑年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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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수
창신대 교수
3장 신간회와 근우회 밀양지회
1. 신간회의 청년운동
가. 신간회 밀양지회의 창립
신간회 밀양지회(이하 편의에 따라 밀양신간지회․밀양지회․신간지회라고 함)는 1927년 12월 11일 창립준비회를 거쳐 12월 19일 밀양신간회 제1회 정기대회를 개최해 정식 창립되었다. 지회 창립위원은 16명으로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윤치형․박임수․윤세주․정광호․김병환․황상규․안병희․윤상준․박병기․한일근․김희지․이건희․조용숙․이종하․강덕수․안준
밀양청년회와 신간회 양쪽에서 활동하던 인물의 경우 밀양청년동맹의 새로운 연령 상한기준에 따라 28세 이상의 청년회원들은 신간회로 활동을 집중하게 되었다. 대략 27~28세를 경계로 각각 청년동맹과 신간회로 활동영역을 분담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하나의 예로, 밀양청년동맹이 창립되면서 1928년 7월 29일 밀양청년회 간부였던 윤세주를 신임 위원장으로 추대했으나 윤세주는 신간회 지회횔동에만 전념하겠다며 이를 고사한 사실을 들 수 있다.
밀양청년동맹이 연령제한을 고치면서까지 윤세주에게 초대위원장직을 맡을 것을 강권한 점은 윤세주가 청년층 사이에서 위망이 높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1927년 12월 19일 오후 5시 신간지회 제1회 정기대회가 임시의장 황상규의 사회로 회원 130인이 모인 가운데 밀양청년회관에서 열렸다. 임시의장으로 선임된 황상규가 사회를 보는 가운데 본부 규약이 낭독되었고, 지회 규칙이 통과되었다.
이어 ‘밀양폭탄사건’으로 오래 투옥되었다가 1927년 2월 사면으로 출감한 윤세주가 지회 창립과정에 대한 경과보고를 했다. 뒤이은 임원 선거에서 설립준비위원회를 대체할 새로운 정식 집행부가 아래와 같이 구성되었다. 이로써 신간회 밀양지부가 공식 출범한 것이다.
회 장 : 황상규
부 회 장 : 김병환
총무간사 : 안병희․박임수․윤세주․정광호․박병기․박도원․김희지
밀양지회 간부들의 성향은 전체적으로 의열단 관련자(윤세주,황상규,김병환,윤치형), 초기 청년회부터 활동한 사람(김희지,정광호,권중휘,박임수,표문호,한일근,박인수,이영집), 청년연맹․청년동맹에 몸담았던 인물(박병륜,이건희,손기채,조용숙), 중앙에서 사회활동을 하다가 낙향한 인물(안병희)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창립 때는 의열단의 중심인물이었던 황상규를 지회장으로 청년연맹․청년동맹 활동가들이 집행위원회를 이끌었다.
지회를 만드는데 앞장섰던 이들은 해외 또는 밀양의 3․1운동 만세시위 관련자나 의열단, 특히 1920년 ‘밀양폭탄사건’ 또는 밀양지역의 청년운동을 이끌어 나가던 세력이 주축이 되어 1920년대 중후반 출옥하면서 지역운동을 다시 활성화시키는 가운데 신간회로 결집했다.
<신간회 밀양지회 주요집행위원>
시 기 |
성 명 |
직 책 |
활 동(연, 월) |
1927년 12월 창립 |
황상규 |
지회장 |
1890~1931.9.2 창원황씨. 호 白民, 黃文玉의 독자. 의열단 김원봉의 고모부. 1913년 비밀결사 의열단원 13인 중 1인. 1915년 박상진의 대한광복회 발기인. 대한광복회의 붕괴후 1918년 중국 탈출. 이상룡,유동열과 함께 1919년 봄 조선독립군정사를 길림서 결성 재정담당 회계과장. 1919년 11월 의열단 결성. 1920년 밀양경찰서 폭탄사건으로 7년형.多物상회운영(27), 밀양군청이전반대위원(27.5), 밀양공립농잠학교맹휴교섭위원(27.11), 밀양협동조합조합장(29.6),신간회밀양지회회장역임(27.12~29.9), 신간회본부중앙집행위원(29.7), 고문의 후유증으로 1931년 9월 2일 사망. 밀양소년동맹과 밀양합동노동조합 소년부상임위원인 황룡암은 그의 외아들임 |
윤치형 |
재정부간사 |
1893.9.10~1968.11.17. 무송윤씨, 한말 사립동화학교 교장을 지낸 윤병연의 손자. 石五 윤세주의 사촌형. 1911년 밀양공립보통학교 1회 졸업. 1910년대 비밀결사 一合社회원. 박상진 대한광복회 관련, 밀양 3․1운동 주동 결석 공판 6개월형, 1919년 11월 황상규 등과 함께 의열단 결성. 1920년 밀양경찰서 폭탄사건으로 황상규와 함께 7년형. 26년 봄 출옥후 밀양청년회에서 27년 10월 연령제한으로 물러나기까지 황상규와 함께 활동.밀양군청이전반대위원(27.5), 신간회 밀양지회 재정부간사(27.12), 밀양쳠동조합 상무이사(28.4), 신간회출석본부대의원(29.1), 신간회경북기근구제회 간사(29.5), 신간회경남도지회연합회 준비회 대표위원(29.9), 신간회밀양지회서기장(30.4) | |
윤세주 |
1899~1942.6.3 戊松윤씨. 통정대부 前侍從 尹熺圭의 4남중 막내. 사촌형 윤치형과 함께 비밀결사 일합사단원, 1919년 밀양 3․1의거 주동 궐석재판 1년 6개월 선고.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 창립(1919.11), 1920년 밀양경철서폭탄사건으로 징역 7년, 1927년 2월 7일 출옥. 1927년 4월부터 밀양청년회체육부원으로 밀양청년회에서 활동. 밀양군청이전반대위원(27.5), 밀양협동조합이사(28.3), 중외일보기자, 경남주식회사사장(27~32), 1932년 중국행 김원봉과 재회․조선혁명 간부학교제1기생(32.10), 민족혁명당기관지 「민족혁명」편집책임자, 조선의용대대원(38.10), 태항산전투에서 전사 | ||
김병환 |
조사연구부 간사 |
1889년 2월 내이동 生~1947.1.16 死, 독자. 어릴적 부친을 여윔. 곡물상. 교남교육회 회원(1910.4), 밀양 3․1의거로 6개월 부산형무소수감, 밀양구락부장 역임(20.1), 1차 밀양경찰서폭탄사건으로 1920년 7월 검거 1923년 12월 출옥,사상단체 五六會결성․밀양공립보통학교학부형회간사(25.2), 밀양청년회특별회원(25.10), 의열단 경북폭탄사건(이종암사건)에 연루되어 재차 검거 약1년동안 수감되었다고 보증금 300원으로 출옥(26.10), 밀양청년회임시의장(27.3), 밀양면소재지 이전반대․밀양군청이전반대위원(27.5), 밀양공립보통학교대강당 기성회규칙기초위원(27.7), 신간회밀양지회 부회장(27.12), 밀양협동조합발기인․감사(28.6), 신간회본부축석 대의원(29.2), 밀양차가인동맹집행위원장(29.12), 해방후 밀양군 인민위원장․전국인민대표자대회 밀양대표(45.12) | |
안병희 |
선전부위원 |
1890년댕 廣州안씨. 好 于五, 好 昌序, 증조부 안종철이 밀양내 蓮桂所설립. 숙부 안봉수는 대한제국 무관학교 시위연대 보병참위. 숙부따라 귀경하여 한성학교 보습과 입학 중등과중퇴. 한말 일시 기독교신앙생활. 1912년경 측량기사가 되기도 함. 현 초동면 초동학교자리에 사립초동학교건립. 서울파계열 테러단체 적박단활동(24.12), 서울파의 사회주의자동맹 집행위원(25.12), 조선노동교육회(25.3), 서울청년회내 新派로 3차 조공참여.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안광천이 관련된 嶺南親睦會反對聲明(27.9), 밀양지회 검사위원장(29.9~31.1), 전국인민대표자대회 김병환과 함께 밀양군 대표(45.11), 해방후 경남도통일전선준비회밀양대표(46.2), 1979년 남민전사건의 안재구는 그의 손자임 | |
한일근 |
선전부원 |
밀양청년회 부흥회의장(25.3), 밀양청년회사무부원(25.10), 의열단 경북폭탄사건(이종암사건)에 연루되어 김병환과 함께 검거, 약1년 동안 수감되었다가 보증금 700원으로 출옥(26.10), 신간회밀양지회준비위원․서무부원(27.12), 밀양군청이전 유치측 위원(27.6), 신간회 밀양지회 간사(29,5) | |
김희지 |
선전부장 |
밀양청년회규칙제정위원․밀양청년회智育부장(22.5), 밀양공립보통학교대강당건축발기준비위원(27.5), 밀양청년회서무부장(25.3), 밀양유치원창립기성회상무(23.8), 밀양공립보통학교학부형회간사(25.5), 신간회밀양지회 경북한재기근구제회 준비위원(29.5), 밀양지회 집행위원(30.4), 밀양지회 조사부장(31.1), 해방 후 보도연맹 밀양지부장 솔밭에서 사망 | |
1927년 9월 보선 |
김형달 |
지회장 |
동래고등보통학교졸업, 삼성병원원장․부인을 늑막염으로 사별(24.1), 밀양주일학교 기부금납임(23.7), 밀양유치원설립모금(23.7), 밀양청년회기근구제소인극기부(25.2), 밀양운동구락부조직(25), 밀양청년회운영 노동야학에 전등 1개 기증(27.12), 밀양협동조합지회장(28.2), 신간회중앙위원을 보게 된 황상규의 후임으로 신간회해소때까지 지회장 역임(29.9~31.5), 해방후 밀양체육협회장(48.8) |
권중희 |
집행위원 |
밀양청년회위원장(23.3), 밀양유치원창립기성회위원(23.8), 밀양공립보통학교학부형간사(25.5), 밀양청년회집행위원장(26.5), 밀양농잠학교맹휴교섭위원(27.1), 신간회밀양지회검사위원(30.4) | |
정동준 |
햅행위원 |
1898년생. 밀양 3․1운동 시위 4개월 복역, 밀양차가인동맹 서무부위원(29.12 | |
이수근 |
검사위원 |
밀양공립보통학교 1회(1911년)졸업, 신간회밀양지회검사위원(30.4), 경북기근구제음악회기부(29.5), 밀양청년동맹운영 노동야학원 기부(30.3) | |
1930년 4월 3회 정기대회 |
표문호 |
집행위원 |
밀양초등학교 3회졸업(1913), 직업 밀양자동차부주임(20년대 중반), 밀양청년회덕육부장․사교부장․재무부장(21.5/22.5/23.3 밀양공보학구형회임원․동창회부회장(25.5), 군청이전반대위원(27.5), 밀양협동조합집행위원(28.3), 신간회밀양지회개최 경북기근구제회준비위원(29.5), 밀양동인회발기인․준비위원․규칙기초위원(29.4) |
하상우 |
집행위원 |
밀양공립보통학교 3회(1913년)졸업. 밀양협동조합집행위원(28.3), 밀양동인회규칙기초위원(29.4) | |
김경준 |
재정부원 |
밀양성내 강습소 강사(22.1), 밀양여자청년회경영여자야학교사(23.7), 밀양공보동창회평의원(26.1), 밀양소년회지도자(28.8), 밀양소년회 ‘세동무’ 口演(28.8) | |
안병욱 |
서무부장 |
밀양청년회의 핵심 간부이자, 1928년 밀양청년동맹으로의 개편을 주도했으며, 1929년 7월 이후 밀양청년동맹의 집행위원장, 1930년 11월 이후 집행위원으로 계속 선임되었던 청년운동의 핵심인물 |
<자료>
나. 지역활동
1) 유림들의 『밀양읍주지』발행 저지
신간회 밀양지회와 유림들의 대립과 갈등은 창립총회후 1930년 10월 재차 발생했다. “새로 양반이 되고저 하는 사람들이 동정으로 돈을 모아 당국의 허가를 얻어 밀양 내이동 연계소에서 밀양읍주지를 다시 간행”하고자 하는 움직임에 대해 밀양지회와 청년동맹에서 간행을 강력히 반대했던 것이다.
2) 협동조합운동 전개
신간회 밀양지회는 창립한지 1년이 지난 1928년 2월 17일 밀양지회 역시 양산지회와 마찬가지로 협동조합을 결성하여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했다. 이처럼 밀양의 협동조합은 양산과 마찬가지로 지주․자본가들의 지배엘리트와 지역활동가들의 저항엘리트 양측이 참여한 경제조직이었다. 취급 품목은 비료, 어물, 포백, 곡물, 잡화 등이었다.
2) 지역현안사업 전개
1928년 4월 21일 오후 8시, 지회장 황상규의 사회 아래 개최된 충무간사회는 국농소 소작쟁의 문제 해결과 밀양지역 각 사회단체연합춘계대운동회를 개최하는 건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국농소소작쟁의는 당시 밀양지역의 가장 큰 현안으로 신간회 밀양지회가 농촌지역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대처할 것인지, 또 신간회 존재의 의미를 군민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지 여부가 걸린 시금석이었다.
그리고, 춘계운동회를 밀양지역 사회운동단체가 연합해 주최하기로 한 것은 지역 운동단체간의 연대 강화와 지역 주민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 제고와 민족의식 고취 그리고 국농소소작쟁의의 장기화에 따른 지역사회 운동단체의 유기적 협조 강화 등에 목적이 있었다.
3) 강연회 개최
식민지 조선에서 매년 여름 거의 연례행사가 되다시피 한 것 중의 하나가 일본유학생들의 하계 순회강좌였다. 신간회 밀양지회 또한 다른 사회운동단체와 함께 중외일보․동아일보 양 밀양지국 후원을 받아 여러 주제의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다. 대외 활동
1) 동포구제사업의 전개
밀양지회의 또 하나 주요사업은 ‘연례행사’처럼 찾아드는 한재와 수재 피해를 입은 조선동포에 대한 구제사업이었다. .1928년 이 해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경북지역의 수해로 이재민이 발생하자 밀양지회는 7월 24일 경북이재동포위문조사보고회를 신간회관에서 개최했다.
2) ‘양산소구회’ 복대표 선출과 황상규의 활동
1929년 상반기 밀양지회의 활동은 신간회 전체 운동 및 조직노선과 맞물려 경남도지회연합회 결성 시도와 복대표대회 개최 문제가 가장 큰 쟁점이었다. 황상규는 복대표대회에서 경남대표 및 중앙집행위원으로, 7월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서기장 및 서무부장에 피선되어 중앙의 요직 간부로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3) 광주학생운동관련 진상조사
1929년 겨울 한반도는 광주학생운동의 소용돌이 속에 휘감겨 들어갔다. 신간회 밀양지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중앙집행위원인 황상규는 신간회 본부 진상조사단의 일원으로 광주로 파견되어 현지 실정을 조사하고 구속 학생 석방을 위해 활동했다. 그해 신간해 중앙상무집행위원회는 ‘광주학생사건보고 대연설회’를 개최해 이을 전국적인 대중운동으로 확대시키고자 했다. 이것이 ‘민중대표자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
4) 경남기자대회 개최
해마다 4월중에 지역마다 돌아가면서 개최되던 경남기자대회 제5회 대회가 1930년 4월 12일 밀양 조일극장에서 개최되었다. 1930년 4월 3일 밀양기자단이 창립되면서 경남기자대회는 더욱 빛을 발했다. 그러나 대회가 시작하기도 전에 개회식 때 읽으려던 4통의 축문 및 축전이 임석경관에세 압수 당했다.
이미 1928년 부산에서 열린 기자대회에서도 신간회의 의의에 대해 자사후를 뿜었던 윤세주가 이번에는 내빈 축사자격으로 ‘의미 있는’축사를 하다 중간에 제지당했다. 첫째 날 회의 종료 후 밀양기자동맹, 밀양청년동맹, 근우회 밀양지회, 신간회 밀양지회 등 각 단체 주최로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이튿날 대회는 70~80명이 참석했는데, 이날은 전날 행진의 기백이 이어져 경관의 ‘주의’, ‘중지’ 연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의안들을 속속 결의하였다고 한다.
라. 신간회 밀양지회의 해소
신간회 밀양지회의 활동과 해소에 이르는 과정은 밀양지역의 특수한 운동 정세도 고려해야겠지만, 무엇보다도 공황과 ‘만주사변’이라는 새로운 정세의 도래, 사회주의 계열의 노선전화, 신간회 본부와 경성지회의 분규로 상징되는 신간회 내부의 사회주의계열과 민족주의계열의 갈등 등이 보다 규정적이었다.
밀양지회가 신간회 해소 반대를 가결할 수 있었던 배경은 다음과 같다. 밀양지역은 3․1운동과 의열단 투쟁을 거치면서 항일투쟁의 경력이 뚨한 민족주의계열의 인물들이 민족교육운동이나 청년운동을 전개하면서 신간회를 탄생시켰다. 밀양은 의열단 조직의 핵심 고향이며 또 의열단과 관련된 이들이 지역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 영향력이 20년대까지는 하나의 신화로서 이 지역을 압도했을 것이다. 실제 밀양지역의 사회주의운동은 신간회 밀양지회의 와해 시점에서 오히려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간 밀양지역 민족해방운동과 신간회 지회를 일끌어 오던 황상규가 신병으로 사망했다.
그 이후 밀양의 청년운동은 1931년말부터 1932년 상반기 대규모 검거태풍을 몰아치면서 합법적인 운동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자연 침체되었다. 그러나 일련의 검거 사태가 드러나듯 황상규의 사망과 신간지회의 침체속에, 청년동맹의 젊은 운동가들은 당시 활발했던 비합법적인 혁명적 대중운동에 합류했을 가능성이 높다.
변화된 사회운동의 분위기와 밀양지역 민족해방운동을 박멸시키기려는 검거의 광풍 속에서, 1932년 여름 윤세주는 단신으로 중국에 망명했다. 황상규의 죽음과 윤세주의 망명으로 신간회 밀양지회는 역사의 뒤로 사라졌다.
2. 근우회의 청년운동
가. 근우회 밀양지회의 창립과 정기대회
1) 창립과정
1926년 11월 ‘민족협동전선의 결성과 정치운동으로의 방향 전환’이 선언된 후 여성운동도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사회주의여성단체의 통합,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계열에서 여성운동의 민족통일전선운동이 일어나 근우회가 창립된 것이다. 먼저 사회주의 여성운동단체의 통합을 거쳐, 사회주의계열과 민족주의계열(큭히 기독교여성운동계열)의 통합을 이룸으로써 근우회가 발족되었다.
근우회 밀양지회는 밀양여자청년회의 핵심간부 고원섭․윤치정․최종업 등이 주축이 되어 창립되었다. 이들은 오랜 준비를 거쳐 1928년 4월 3일 밤 9시 내이동 연계소에서 발기인회를 개최해 15인의 준비 위원을 뽑아 7일 9시 연계소에서 1회 준비위원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준비위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윤치정․고원섭․이영복․박의정․최종업․강농주․김경악․윤계순․박수악․최숙이․박무자․최말숙․김병숙․박수․신순이
이들 준비위원들은 연계소에서 창립대회를 열기 위해 선전삐라를 준비한 끝에 1928년 4월 28일 신간회밀양지회 회관내에서 회원 70여명이 참가한 근우회 밀양지회를 창립하였다.
한편 1928년 9월 8일 밀양청년회관에서 회장 윤치정의 개회사를 지삭으로 열린 8회 정기총회에서 밀양여자야학원을 비롯한 전체 사업을 근우회 밀양지회로 ‘인계’하기로 하고 여청은 해체되었다. 해체 후 회원들은 밀양청년동맹에 개인적으로 가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여자야학원은 1930년에 내이동으로 이전했으며 당시 야학생 수는 83명이었는데, 1931년까지 근우회 밀양지회와 밀양청년동맹이 함께 운영했던 듯하다.
창립 주축인물로는 고원섭은 1920년 밀양여자청년회를 창립한 주역으로 1922년 3월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녀는 1923년 밀양문산장려소비절약선전대회에서 연사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1924년 5월 23일 발회한 조선여성동우회 발기인이기도 했다.
윤치정은 1922년 당시 밀양여자청년회 부회장으로 고원섭과 오랫동안 함께 활동했으며, 근우회를 창립에서 소멸 때까지 실제 책임을 맡았던 인물이다.
최종업과 전병숙은 1922년 3월 밀양여자청년회 평의원이었으며, 박의정은 1925년 밀양청년연맹과 1931년 9월 밀양합동노동조합 부인부 의장을 맡았던 여성이었다. 박의정은 지회 해소 전후까지 밀양에서 활동행적이 드러나는 유일한 인물이다.
당시 근우회 밀양지회의 일차적 과제는 다음과 같다.
1)근우회의 취지 선전과 회원 확보(선전 조직에 관한 건)
2)재정과 공간의 안정적 확보(회비와 회관문제)
3)(여성에 대한)봉건적 인습에 대한 타파
4)농촌의 젊은 여성들이 인신매매로 끌려가던 당면한 비참한 현실 문제 해결
5)지역사회운동단체와의 연대
6)여성에 대한 계몽
2) 근우회 밀양지회의 정기대회
근우회 밀양지회는 창립 때부터 1930년 3월까지 집행위원들의 큰 변화는 없었다. 1929년 3월 10일 밀양근우지회는 제2회정기대회를 신간회관에서 개최했다. 신임 집행위원들과 토의사항은 다음과 같다.
<신임집행위원>
위원장 : 윤치정
위 원 : 윤계순․이영복․최종업․강농주․김경악․최말숙․김계순․박정수․곽두남․이복수․신순이․윤덕수․김*악․김병숙
<토의 사항>
당면문제 / 제정방침 / 회원정리의 건 / 규약 수정의 건 / 여자야학원 유지의 건 / 가정강과 개최의 건 / 미신타파 / 허례허식 폐지 / 금년도 각부 사업계획안 / 염색의복 권장
창립당시 준비위원 13인의 명단과 비교하면 고원섭․박의정․박수악․박수 네 사람이 집행위원에서 빠져있다. 그러나 1930년 3차 지회 정기대회에서 고원섭박의정은 집행위원 등으로 복귀하며, 박의정은 본부대표대의원으로도 선임되는 등 여전히 중심적인 활동을 한다.
그리고 1930년 3월 28일 오후 3시 30분부터 밀양 근우지회 제3회 정기대회가 성내 내이동 서한공회당에서 개최되었다. 윤치정의 사회로 개회가 되고 임시집행부로 의장 윤치정, 서기 이영복이 선임되었다. 전회 회의록 낭독과 각부 보고가 있은 후 집행위원회를 새로 뽑고 본부대회에 파견할 대의원 3인을 선임했다. 이어 예산안과 본부(대회)에 제출할 의안을 통과시킨 후 축문 낭독과 내빈 축사를 마치고 의안 토의에 들어갔다.
그러나 제3회 정기대회에서 확인되는 김옥순과 이복수는 밀양공립보통학교를 1928년과 1929년 각각 졸업한 인물들로 파악된다. 밀양청년동맹원들의 평균연령이 낮아지는것과 마찬가지로 근우회 밀양지회 회원들 또한 보통학교를 졸업한 낮은 연령층의 여성활동가들이 집행부 일을 맡기 시작했던 것이다.
근우회 밀양지회는 1930년 3월 제3회 대회부터 인물들의 교체현상이 약간 나타났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밀양여자청년회 때부터 활동했던 고원섭, 윤치정, 박의정, 최말숙, 최종업 등 장년의 기독교 여성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영향력은 새로운 인물들이 집행위원에 진출하는 1931년 3월 제4회 대회 이후에도 여전히 논의의 중심세력으로 활동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날 개선된 간부진과 토의사항은 다음과 같다.
<임원진>
집행위원장 : 윤치정
집행 위원 : 고원섭․이영복․김옥순․강농주․박순이․이복수․김덕악․신순이․김복발․최일경․윤복수․박의정․배철자․윤덕수․장순이․윤경수․최말숙․최종업․김계순․윤계순․김경악․김옥악
대 의 원 : 이영복․윤계순․김경악
<토의사항>
회원 교양에 관한 건 / 우의단체 연락 / 재정 방침 / 본부회관 건축비 부담 건 / 춘기원유회 / 밀양사회운동자간친회 개최 건 / 밀양청소년운동조장에 관한 건 / 월례회 / 토론회 / 경남기자대회 개최 / 도지회연합회 / 기타사항
위의 안건건 가운데 춘기원유회, 밀양사회운동자간친회, 밀양기자대회 그리고 청소년운동 조장에 관한 건은 밀양 지역사회운동단체의 공통 과제이기도 했다. 밀양사회운동자간친회는 개최되지 못했을 것이다. 밀양청년동맹이 3월 25일 제3회 정기대회에서 의안으로 다루려고 하자 논의 자체를 임석경관이 금지시킨 것으로 보아 그렇게 추측할 수 있다.
춘기원유회는 근우지회 단독 행사가 아니라 5월 18일 청년동맹이 주최한 시민춘계대운동회일 것이다. 밀양신간지회에서도 4월1일 동일한 안건으로 이를 다루고 있으며, 며칠 전 밀양청맹 또한 시민춘계대운동회라는 안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밀양여자청년회 때부터 4월에 원유회를 개최한 기록이 있어서 여성들은 단독 행사일 수도 있다. 밀양기자대회 건은 1930년 4월 3일 밀양기자단의 창립과 4우얼 12일 제5회 경남기자대회가 밀양 조일극장에서 개최될 예정이어서, 이를 논의한 것이다. 경남기자대회는 근우지회를 비롯해 지역사회운동단체가 모두 참가했다.
‘밀양청소년운동 조장 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 다만 밀양은 경남지역 소년운동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당시 밀양에서는 청년․소년운동자, 신간회․밀양농우회 간부 등에 대한 검거선풍이 일고 있었고, 밀양농잠학교에서는 학생맹휴가 한창이었다. 1930년 3월 28일 근우회 정기대회에서 청소년운동의 진작을 논의한 것도 이러한 소년․학생들의 움직임과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신간회 해소문제가 붉어졌던 당시, 1931년 3월 26일 오후 2시부터 내이동 서한공회당에서는 제4회 정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집행위원회>
집행위원장 : 윤치정 위원 : 김세붕
서무부장 : 이영복 위원 : 김복발
재정부장 : 박의정 위원 : 방차석
교양부장 : 김옥순 위원 : 윤경수
선전부장 : 최말숙 위원 : 김덕악
조사부장 : 홍기자
위원후보 : 윤복수․한경쇠
검사위원장 : 김경악 / 상무 윤계순 / 의원 최일경
분부대의원 : 박의정․최일경․김복발
건의안작성위원 : 박의정․최일경․김복발
<토의안건>
교양문제의 건 / 일체 봉건적 인습 및 미신타파의 건 / 농촌부녀에 관한 건 / 재정에 관한 건 / 본부 회관 건축 부담금의 건
이렇게 근우회 밀양지회는 밀양청년동맹과 신간회 밀양지회처럼 정치적 문제에 매달리기 보다는 일상의 문제, 예를 들어 여자야학, 봉건적 인습타파, 색의(色衣)착용 등을 운동의 주요한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근우회 밀양지회는 기독교계통의 여성들이 다수를 차지한 때문인지 근우회 해소논쟁이 한창 진행되던 1931년 당시 근우회 밀양지회는 뚜렷한 자신들의 입장을 표방하지 않고 있었다. 1931년 5월 신간회 본부가 해소하면서 밀양지회 또한 자연히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나. 지역활동과 봉사활동
1) 밀양여자야학원의 운영
1920년대 전반기 여성운동은 근대교육을 받은 부르주아 자식인 여성과 기독교․불교 등 종교여성단체의 계몽적 여성운동이 주류를 이루었다. 1925년을 전후해 사회주의가 수용되면서 여성을 위한 사상단체와 청년단체가 급격히 증가했다. 1920년대 중반 대부분의 여성운동단체는 성별분리에 기초한 직업별․지역별․연령별 여성조직이었다. 활동의 중심도 조선 여성의 현실을 반영하여 여성과 사회문제, 여성해방과 계급운동, 인습타파를 내용으로 하는 부녀야학이나 강연회 등 대중교양․교육사업에 두었다.
근우회 밀양지회는 밀양여자청년회를 해체하고 “장구한 세월과 역사를 가지고 오던” 여자청년회 사업인 밀양여자야학원과 밀양여자청년회 전 사업을 근우회 밀양지회로 인계하기로 결의했다. 이로써 근우회 밀양지회는 밀양여자청년회로부터 밀양여자야학원과 제반 업무를 인계 받았다.
밀양여자야학원은 밀양여자청년회가 1921년 창립했으며 학생수는 80~100명 정도였다. 당시 밀양지역의 15개 야학 가운데 밀양청년회(밀양청년동맹으로 해소)가 운영하던 밀양노동야학원( 1920년 6월 21일 설립)의 학생수 200명 다음으로 규모가 컸다. 밀양여자야학원의 운영은 근우회 밀양지회의 가장 중요한 일상 사업이었다.
2) 동포구제사업
밀양근우지회는 신간회 밀양지회 등과 함께 공동으로 동포구제사업에 나섰다. 10월 7일 밀양지역 각 사회단체는 공동으로 ‘관북이재민 동포구제회’를 조직해 모금액 159원 40전(10월 7일 현재)을 걷는 성과를 발휘했다.
1929년 4월 전년의 관북수해 참상을 뒤집어 되풀이하듯 영남지방에 대가뭄이 발생했다. 근우회 중앙집행위원회는 전국 지회에 한재 동포 돕기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밀양지회는 5월 5일 밀양 시민대운동회 당일 간부와 회원 모두 총출동하여 과자를 판매했다. 가두행상을 전개한 것이다. 밀양지회의 이러한 노력은 동아일보에 「근우지회, 경북 한재동포 구제코저 행상」이라는 기사제목으로 나가 전국의 동포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다. 근우회 밀양지회의 해소
1931년 3월 26일에 개최된 근우회 밀양지회의 제4회 정기대회에서 근우회 밀양지회의 해소에 대한 토의가 이루어 졌다. 이미 신간회 밀양지회가 이보다 앞선 1월의 정기대회에서 해소 반대를 결의했다는 점, 해소 반대의 선봉인 황상규 등 민족주의계열이 이 지역 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황상규 등은 국외 의열단계열과 비밀리에 선에 닿고 있었으며, 사회주의계열이 신간회 해소를 주장하는 이론적 뒷받침이던 ‘민족주의 개량화 또는 반동화’에는 맞지 않는 전투적 민족주의자였다. 밀양지역의 사회주의 세력이 이런점을 몰랐을 리 없다. 또 황상규는 지역운동의 사실상 대부역할을 하고 있었다. 황상규 및 그의 동료들이 견지한 신간회 해소 반대입장이 근우지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근우회 밀양지회 지도자들의 경향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밀양지회를 이끌어 온 윤치정은 행적으로 보아 민족주의계열로 파악할 수 있으며, 그녀는 이 지역 여성 운동의 대모격이기도 했다. 밀양지회의 핵심간부 박의정은 자회활동이 침체에 빠져있다고 추정될 무렵인 1931년 9월 밀양합동노동조합의 부인부 상임으로 선임되었기 때문이다.
박의정의 행보는 계급․계층의 통일전선 조직인 신간회․근우회․청년총동맹을 해소하고 혁명적 노동조합․농민조합 등 계급별 조직으로 전화하는 당시의 사회주의 노선과 일맥상통하는 움직임이라 하겠다. 측 근우회 성원들은 농민조합․노동조합의 여성부(부녀부)로, 청년ㄷ옹맹의 남성청년의 경우 노동조합․농민조합의 청년부로 재편되어 가는 1930년대 사회주의운동의 전술 변화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사례라 하겠다.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침략이 개시되고 이해 가을, 겨울 밀양에서도 검거 선풍이 휘몰아쳐 밀양지역의 근우회 활동도 위축이 되어 역사의 뒤로 사라졌다.
3. 신간회와 근우회 밀양지회의 역사적 의의
신간회와 근우회 밀야지회는 3․1운동에 참여하고, 1920년대 초중반 밀양지역 청년운동을 주도하던 계층에 의해 창립되었다. 대체적으로 민족주의 좌파의 성향이 강했으며, 신간회 지회의 간부들의 경우 의열단 할동과도 연계되어 있었다.
신간회나 근우회 밀양지회는 창립 후 신간회가 내세운 비타협적 정치투쟁을 전개하지는 못했다. 당시 고양되던 노동운동․농민운동․학생운동을 직접적으로 지도한 적도 없었다. 실제 신간회나 근우회는 지역 주민들에 대한 민족의식의 고취와 같은 계몽 사업과 동포구제사업 그리고 반동유림에 대한 투쟁 등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근우회 밀양지회의 경우 밀양여자야학원이 주력사업이었다.
신간회․근우회 밀양지회가 존속할 무렵 밀양지역의 대중투쟁은 적지 않았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줄기차게 일어난 경남 밀양공립농잠학교의 동맹휴교나 지역의 각종 현안이었던 국농소소작쟁의․밀양강 개수공사에 따른 이전비의 민족적 차별 지급에 대한 주민의 항의(1927~28), 부북수리조합을 반대하는 농민들의 농성(1928~29)등 밀양지역에서는 이 시기 다양한 대중투쟁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대중투쟁은 은산농민조합이나 밀양청년동맹 등 지역의 다른 조직이 주도하거나 관계를 맺었다. 특히 밀양청년동맹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렇다고 해서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것만으로 신간회와 근우회 밀양지회의 활동을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간회와 근우회 밀양지회는 밀양청년동맹과 연령을 계선으로 분리되었지만 일정한 역할분담을 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신간회의 핵심간부들 중 상당수는 신간회․근우회 간부이면서 동시에 밀양협동조합․밀양차가인조합․밀양청년동맹․학교학부형회․야학․밀양기자단 등 다양한 부문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 부문운동에서 활동하는 간부들에 의해 지역 현안들이 신간회․근우회 밀양지회에서도 끊임없이 논의되고 있었다. 따라서 지역의 농민․노동운동 등은 직접적으로 관련된 조직이 관여하고, 신간회는 이를 지원하는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경찰의 1차 검거나 탄압은 청년동맹 등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1930년을 기점으로 신간회와 근우회 지회 간부들은 대거 물갈이되는 현상을 보였다. 밀양청년동맹이 연령상한을 25세로 대폭 낮추면서 청년운동가들이 신간회․근우회 지회로 진출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와 함께 지역운동의 세대교체도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지역운동의 상징성과 주도성은 황상규․김병환․윤세주 등 신간회 창립세력이 쥐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의열단과 관련되어 활동한 전투적 민족주의자였기에, 지역의 젊은 시회주의자들도 대립보다는 공존 협력 그리고 그들의 지원을 받았다.
신간회의 해소, 일제의 만주침략과 일제의 탄압에 따른 합법공간의 축소 등은 신간회와 밀양지회의 활동공간을 축소시켰다. 여기에 황상규의 죽음과 윤세주의 망명을 거치면서 1920년대 밀양의 운동을 주도했던 민족주의자들은 신간회 활동을 마지막으로 운동 일선에서 후퇴하는 듯하다. 대신 젊은 사회주의자들이 1931~32년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 밀양지역 민족해방운동을 계승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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