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현대사 재조명

[스크랩] 일제하 밀양 청년 운동8

감효전(甘曉典) 2012. 2. 6. 23:01

日帝下  密陽의 靑年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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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병 수

창신대 교수

 

 

3장 신간회와 근우회 밀양지회

 

1. 신간회의 청년운동

가. 신간회 밀양지회의 창립

신간회 밀양지회(이하 편의에 따라 밀양신간지회․밀양지회․신간지회라고 함)는 1927년 12월 11일 창립준비회를 거쳐 12월 19일 밀양신간회 제1회 정기대회를 개최해 정식 창립되었다. 지회 창립위원은 16명으로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윤치형․박임수․윤세주․정광호․김병환․황상규․안병희․윤상준․박병기․한일근․김희지․이건희․조용숙․이종하․강덕수․안준

밀양청년회와 신간회 양쪽에서 활동하던 인물의 경우 밀양청년동맹의 새로운 연령 상한기준에 따라 28세 이상의 청년회원들은 신간회로 활동을 집중하게 되었다. 대략 27~28세를 경계로 각각 청년동맹과 신간회로 활동영역을 분담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하나의 예로, 밀양청년동맹이 창립되면서 1928년 7월 29일 밀양청년회 간부였던 윤세주를 신임 위원장으로 추대했으나 윤세주는 신간회 지회횔동에만 전념하겠다며 이를 고사한 사실을 들 수 있다.

밀양청년동맹이 연령제한을 고치면서까지 윤세주에게 초대위원장직을 맡을 것을 강권한 점은 윤세주가 청년층 사이에서 위망이 높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1927년 12월 19일 오후 5시 신간지회 제1회 정기대회가 임시의장 황상규의 사회로 회원 130인이 모인 가운데 밀양청년회관에서 열렸다. 임시의장으로 선임된 황상규가 사회를 보는 가운데 본부 규약이 낭독되었고, 지회 규칙이 통과되었다. 이어 ‘밀양폭탄사건’으로 오래 투옥되었다가 1927년 2월 사면으로 출감한 윤세주가 지회 창립과정에 대한 경과보고를 했다. 뒤이은 임원 선거에서 설립준비위원회를 대체할 새로운 정식 집행부가 아래와 같이 구성되었다. 이로써 신간회 밀양지부가 공식 출범한 것이다.

회 장 : 황상규

부 회 장 : 김병환

총무간사 : 안병희․박임수․윤세주․정광호․박병기․박도원․김희지

 

밀양지회 간부들의 성향은 전체적으로 의열단 관련자(윤세주,황상규,김병환,윤치형), 초기 청년회부터 활동한 사람(김희지,정광호,권중휘,박임수,표문호,한일근,박인수,이영집), 청년연맹․청년동맹에 몸담았던 인물(박병륜,이건희,손기채,조용숙), 중앙에서 사회활동을 하다가 낙향한 인물(안병희)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창립 때는 의열단의 중심인물이었던 황상규를 지회장으로 청년연맹․청년동맹 활동가들이 집행위원회를 이끌었다.

 

지회를 만드는데 앞장섰던 이들은 해외 또는 밀양의 3․1운동 만세시위 관련자나 의열단, 특히 1920년 ‘밀양폭탄사건’ 또는 밀양지역의 청년운동을 이끌어 나가던 세력이 주축이 되어 1920년대 중후반 출옥하면서 지역운동을 다시 활성화시키는 가운데 신간회로 결집했다.

 

<신간회 밀양지회 주요집행위원>

시 기

성 명

직 책

활 동(연, 월)

1927년 12월

창립

황상규

지회장

1890~1931.9.2 창원황씨. 호 白民, 黃文玉의 독자. 의열단 김원봉의 고모부. 1913년 비밀결사 의열단원 13인 중 1인. 1915년 박상진의 대한광복회 발기인. 대한광복회의 붕괴후 1918년 중국 탈출. 이상룡,유동열과 함께 1919년 봄 조선독립군정사를 길림서 결성 재정담당 회계과장. 1919년 11월 의열단 결성. 1920년 밀양경찰서 폭탄사건으로 7년형.多物상회운영(27), 밀양군청이전반대위원(27.5), 밀양공립농잠학교맹휴교섭위원(27.11), 밀양협동조합조합장(29.6),신간회밀양지회회장역임(27.12~29.9), 신간회본부중앙집행위원(29.7), 고문의 후유증으로 1931년 9월 2일 사망. 밀양소년동맹과 밀양합동노동조합 소년부상임위원인 황룡암은 그의 외아들임

윤치형

재정부간사

1893.9.10~1968.11.17. 무송윤씨, 한말 사립동화학교 교장을 지낸 윤병연의 손자. 石五 윤세주의 사촌형. 1911년 밀양공립보통학교 1회 졸업. 1910년대 비밀결사 一合社회원. 박상진 대한광복회 관련, 밀양 3․1운동 주동 결석 공판 6개월형, 1919년 11월 황상규 등과 함께 의열단 결성. 1920년 밀양경찰서 폭탄사건으로 황상규와 함께 7년형. 26년 봄 출옥후 밀양청년회에서 27년 10월 연령제한으로 물러나기까지 황상규와 함께 활동.밀양군청이전반대위원(27.5), 신간회 밀양지회 재정부간사(27.12), 밀양쳠동조합 상무이사(28.4), 신간회출석본부대의원(29.1), 신간회경북기근구제회 간사(29.5), 신간회경남도지회연합회 준비회 대표위원(29.9), 신간회밀양지회서기장(30.4)

윤세주

1899~1942.6.3 戊松윤씨. 통정대부 前侍從 尹熺圭의 4남중 막내. 사촌형 윤치형과 함께 비밀결사 일합사단원, 1919년 밀양 3․1의거 주동 궐석재판 1년 6개월 선고.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 창립(1919.11), 1920년 밀양경철서폭탄사건으로 징역 7년, 1927년 2월 7일 출옥. 1927년 4월부터 밀양청년회체육부원으로 밀양청년회에서 활동. 밀양군청이전반대위원(27.5), 밀양협동조합이사(28.3), 중외일보기자, 경남주식회사사장(27~32), 1932년 중국행 김원봉과 재회․조선혁명 간부학교제1기생(32.10), 민족혁명당기관지 「민족혁명」편집책임자, 조선의용대대원(38.10), 태항산전투에서 전사

김병환

조사연구부 간사

1889년 2월 내이동 生~1947.1.16 死, 독자. 어릴적 부친을 여윔. 곡물상. 교남교육회 회원(1910.4), 밀양 3․1의거로 6개월 부산형무소수감, 밀양구락부장 역임(20.1), 1차 밀양경찰서폭탄사건으로 1920년 7월 검거 1923년 12월 출옥,사상단체 五六會결성․밀양공립보통학교학부형회간사(25.2), 밀양청년회특별회원(25.10), 의열단 경북폭탄사건(이종암사건)에 연루되어 재차 검거 약1년동안 수감되었다고 보증금 300원으로 출옥(26.10), 밀양청년회임시의장(27.3), 밀양면소재지 이전반대․밀양군청이전반대위원(27.5), 밀양공립보통학교대강당 기성회규칙기초위원(27.7), 신간회밀양지회 부회장(27.12), 밀양협동조합발기인․감사(28.6), 신간회본부축석 대의원(29.2), 밀양차가인동맹집행위원장(29.12), 해방후 밀양군 인민위원장․전국인민대표자대회 밀양대표(45.12)

안병희

선전부위원

1890년댕 廣州안씨. 好 于五, 好 昌序, 증조부 안종철이 밀양내 蓮桂所설립. 숙부 안봉수는 대한제국 무관학교 시위연대 보병참위. 숙부따라 귀경하여 한성학교 보습과 입학 중등과중퇴. 한말 일시 기독교신앙생활. 1912년경 측량기사가 되기도 함. 현 초동면 초동학교자리에 사립초동학교건립. 서울파계열 테러단체 적박단활동(24.12), 서울파의 사회주의자동맹 집행위원(25.12), 조선노동교육회(25.3), 서울청년회내 新派로 3차 조공참여.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안광천이 관련된 嶺南親睦會反對聲明(27.9), 밀양지회 검사위원장(29.9~31.1), 전국인민대표자대회 김병환과 함께 밀양군 대표(45.11), 해방후 경남도통일전선준비회밀양대표(46.2), 1979년 남민전사건의 안재구는 그의 손자임

한일근

선전부원

밀양청년회 부흥회의장(25.3), 밀양청년회사무부원(25.10), 의열단 경북폭탄사건(이종암사건)에 연루되어 김병환과 함께 검거, 약1년 동안 수감되었다가 보증금 700원으로 출옥(26.10), 신간회밀양지회준비위원․서무부원(27.12), 밀양군청이전 유치측 위원(27.6), 신간회 밀양지회 간사(29,5)

김희지

선전부장

밀양청년회규칙제정위원․밀양청년회智育부장(22.5), 밀양공립보통학교대강당건축발기준비위원(27.5), 밀양청년회서무부장(25.3), 밀양유치원창립기성회상무(23.8), 밀양공립보통학교학부형회간사(25.5), 신간회밀양지회 경북한재기근구제회 준비위원(29.5), 밀양지회 집행위원(30.4), 밀양지회 조사부장(31.1), 해방 후 보도연맹 밀양지부장 솔밭에서 사망

1927년 9월

보선

김형달

지회장

동래고등보통학교졸업, 삼성병원원장․부인을 늑막염으로 사별(24.1), 밀양주일학교 기부금납임(23.7), 밀양유치원설립모금(23.7), 밀양청년회기근구제소인극기부(25.2), 밀양운동구락부조직(25), 밀양청년회운영 노동야학에 전등 1개 기증(27.12), 밀양협동조합지회장(28.2), 신간회중앙위원을 보게 된 황상규의 후임으로 신간회해소때까지 지회장 역임(29.9~31.5), 해방후 밀양체육협회장(48.8)

권중희

집행위원

밀양청년회위원장(23.3), 밀양유치원창립기성회위원(23.8), 밀양공립보통학교학부형간사(25.5), 밀양청년회집행위원장(26.5), 밀양농잠학교맹휴교섭위원(27.1), 신간회밀양지회검사위원(30.4)

정동준

햅행위원

1898년생. 밀양 3․1운동 시위 4개월 복역, 밀양차가인동맹 서무부위원(29.12

이수근

검사위원

밀양공립보통학교 1회(1911년)졸업, 신간회밀양지회검사위원(30.4), 경북기근구제음악회기부(29.5), 밀양청년동맹운영 노동야학원 기부(30.3)

1930년 4월 3회

정기대회

표문호

집행위원

밀양초등학교 3회졸업(1913), 직업 밀양자동차부주임(20년대 중반), 밀양청년회덕육부장․사교부장․재무부장(21.5/22.5/23.3 밀양공보학구형회임원․동창회부회장(25.5), 군청이전반대위원(27.5), 밀양협동조합집행위원(28.3), 신간회밀양지회개최 경북기근구제회준비위원(29.5), 밀양동인회발기인․준비위원․규칙기초위원(29.4)

하상우

집행위원

밀양공립보통학교 3회(1913년)졸업. 밀양협동조합집행위원(28.3), 밀양동인회규칙기초위원(29.4)

김경준

재정부원

밀양성내 강습소 강사(22.1), 밀양여자청년회경영여자야학교사(23.7), 밀양공보동창회평의원(26.1), 밀양소년회지도자(28.8), 밀양소년회 ‘세동무’ 口演(28.8)

안병욱

서무부장

밀양청년회의 핵심 간부이자, 1928년 밀양청년동맹으로의 개편을 주도했으며, 1929년 7월 이후 밀양청년동맹의 집행위원장, 1930년 11월 이후 집행위원으로 계속 선임되었던 청년운동의 핵심인물

<자료> 한말 일제하 밀양지역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김승, 밀양문학, 2004.

 

나. 지역활동

 

1) 유림들의 『밀양읍주지』발행 저지

신간회 밀양지회와 유림들의 대립과 갈등은 창립총회후 1930년 10월 재차 발생했다. “새로 양반이 되고저 하는 사람들이 동정으로 돈을 모아 당국의 허가를 얻어 밀양 내이동 연계소에서 밀양읍주지를 다시 간행”하고자 하는 움직임에 대해 밀양지회와 청년동맹에서 간행을 강력히 반대했던 것이다.

 

2) 협동조합운동 전개

신간회 밀양지회는 창립한지 1년이 지난 1928년 2월 17일 밀양지회 역시 양산지회와 마찬가지로 협동조합을 결성하여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했다. 이처럼 밀양의 협동조합은 양산과 마찬가지로 지주․자본가들의 지배엘리트와 지역활동가들의 저항엘리트 양측이 참여한 경제조직이었다. 취급 품목은 비료, 어물, 포백, 곡물, 잡화 등이었다.

 

2) 지역현안사업 전개

1928년 4월 21일 오후 8시, 지회장 황상규의 사회 아래 개최된 충무간사회는 국농소 소작쟁의 문제 해결과 밀양지역 각 사회단체연합춘계대운동회를 개최하는 건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국농소소작쟁의는 당시 밀양지역의 가장 큰 현안으로 신간회 밀양지회가 농촌지역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대처할 것인지, 또 신간회 존재의 의미를 군민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지 여부가 걸린 시금석이었다.

 

 그리고, 춘계운동회를 밀양지역 사회운동단체가 연합해 주최하기로 한 것은 지역 운동단체간의 연대 강화와 지역 주민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 제고와 민족의식 고취 그리고 국농소소작쟁의의 장기화에 따른 지역사회 운동단체의 유기적 협조 강화 등에 목적이 있었다.

 

3) 강연회 개최

식민지 조선에서 매년 여름 거의 연례행사가 되다시피 한 것 중의 하나가 일본유학생들의 하계 순회강좌였다. 신간회 밀양지회 또한 다른 사회운동단체와 함께 중외일보․동아일보 양 밀양지국 후원을 받아 여러 주제의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다. 대외 활동

 

1) 동포구제사업의 전개

밀양지회의 또 하나 주요사업은 ‘연례행사’처럼 찾아드는 한재와 수재 피해를 입은 조선동포에 대한 구제사업이었다. .1928년 이 해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경북지역의 수해로 이재민이 발생하자 밀양지회는 7월 24일 경북이재동포위문조사보고회를 신간회관에서 개최했다.

 

2) ‘양산소구회’ 복대표 선출과 황상규의 활동

1929년 상반기 밀양지회의 활동은 신간회 전체 운동 및 조직노선과 맞물려 경남도지회연합회 결성 시도와 복대표대회 개최 문제가 가장 큰 쟁점이었다. 황상규는 복대표대회에서 경남대표 및 중앙집행위원으로, 7월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서기장 및 서무부장에 피선되어 중앙의 요직 간부로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3) 광주학생운동관련 진상조사

1929년 겨울 한반도는 광주학생운동의 소용돌이 속에 휘감겨 들어갔다. 신간회 밀양지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중앙집행위원인 황상규는 신간회 본부 진상조사단의 일원으로 광주로 파견되어 현지 실정을 조사하고 구속 학생 석방을 위해 활동했다. 그해 신간해 중앙상무집행위원회는 ‘광주학생사건보고 대연설회’를 개최해 이을 전국적인 대중운동으로 확대시키고자 했다. 이것이 ‘민중대표자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

 

4) 경남기자대회 개최

해마다 4월중에 지역마다 돌아가면서 개최되던 경남기자대회 제5회 대회가 1930년 4월 12일 밀양 조일극장에서 개최되었다. 1930년 4월 3일 밀양기자단이 창립되면서 경남기자대회는 더욱 빛을 발했다. 그러나 대회가 시작하기도 전에 개회식 때 읽으려던 4통의 축문 및 축전이 임석경관에세 압수 당했다.

 

이미 1928년 부산에서 열린 기자대회에서도 신간회의 의의에 대해 자사후를 뿜었던 윤세주가 이번에는 내빈 축사자격으로 ‘의미 있는’축사를 하다 중간에 제지당했다. 첫째 날 회의 종료 후 밀양기자동맹, 밀양청년동맹, 근우회 밀양지회, 신간회 밀양지회 등 각 단체 주최로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이튿날 대회는 70~80명이 참석했는데, 이날은 전날 행진의 기백이 이어져 경관의 ‘주의’, ‘중지’ 연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의안들을 속속 결의하였다고 한다.

 

라. 신간회 밀양지회의 해소

신간회 밀양지회의 활동과 해소에 이르는 과정은 밀양지역의 특수한 운동 정세도 고려해야겠지만, 무엇보다도 공황과 ‘만주사변’이라는 새로운 정세의 도래, 사회주의 계열의 노선전화, 신간회 본부와 경성지회의 분규로 상징되는 신간회 내부의 사회주의계열과 민족주의계열의 갈등 등이 보다 규정적이었다.

밀양지회가 신간회 해소 반대를 가결할 수 있었던 배경은 다음과 같다.

 

밀양지역은 3․1운동과 의열단 투쟁을 거치면서 항일투쟁의 경력이 뚨한 민족주의계열의 인물들이 민족교육운동이나 청년운동을 전개하면서 신간회를 탄생시켰다. 밀양은 의열단 조직의 핵심 고향이며 또 의열단과 관련된 이들이 지역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 영향력이 20년대까지는 하나의 신화로서 이 지역을 압도했을 것이다. 실제 밀양지역의 사회주의운동은 신간회 밀양지회의 와해 시점에서 오히려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간 밀양지역 민족해방운동과 신간회 지회를 일끌어 오던 황상규가 신병으로 사망했다.

그 이후 밀양의 청년운동은 1931년말부터 1932년 상반기 대규모 검거태풍을 몰아치면서 합법적인 운동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자연 침체되었다. 그러나 일련의 검거 사태가 드러나듯 황상규의 사망과 신간지회의 침체속에, 청년동맹의 젊은 운동가들은 당시 활발했던 비합법적인 혁명적 대중운동에 합류했을 가능성이 높다.

 

변화된 사회운동의 분위기와 밀양지역 민족해방운동을 박멸시키기려는 검거의 광풍 속에서, 1932년 여름 윤세주는 단신으로 중국에 망명했다. 황상규의 죽음과 윤세주의 망명으로 신간회 밀양지회는 역사의 뒤로 사라졌다.

출처 : 밀양 이야기(밀양향토사연구회)
글쓴이 : 우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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