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帝下 密陽의 靑年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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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수
창신대 교수
4장 밀양의 청년운동의 의의
1. 밀양의 청년운동 요약
근대화 초기 단계부터 밀양에서는 전통을 바탕으로 한 근대화, 즉 자주적 근대화의 방향성을 일찍부터 확립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1890년대와 1900년대에 전개된 밀양지역의 근대교육은 민족교육의 과제를 충실히 수행할 수 있었으며 1910년 이후 밀양의 민족해방운동을 이끌어간 수많은 인재들을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배출되기 시작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한일병탄이 이루어진 이후 많은 민족운동가들이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한 방략으로 비밀결사운동을 전개하였는데, 밀양에서도 만주에서 김좌진 등과 같이 활동했던 황상규, 윤세복 등과 관계를 맺으면서 1917년 전후로 ‘일합사’ 와 같은 비밀결사단체가 조직되었다.
이러한 비밀결사의 영향 아래 동화학교에도 ‘연무단’이라는 비밀 애국단체가 조직되었다. 동화학교는 전홍표(全鴻杓)가 광무연간(1897~1906)에 밀양읍 내일동에 소재한, 조선시대 밀양군의 군무를 관할하던 옛 군관청 자리에 설립한 중학과정의 사립학교였다. 이 학교는 새로운 지식을 통하여 청년을 교육하고 자주독립의 애국사상을 고취해서 항일사상과 항일투사를 육성할 것을 교육목표로 삼았다.
김원봉‧윤세주를 비롯하여 최수봉(崔壽鳳)‧김상윤(金相潤)‧김소지(金小池)‧박소중(朴小宗)‧정동찬(丁銅燦) 등은 이 학교에서 항일의식을 고취받고 3‧1운동과 의열단 등의 민족해방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와 같이 동화학교 설립자 전홍표의 영향을 받은 연무단원들은 밀양출신으로 민족해방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밀양의 3․1운동은 ‘일합사’와 ‘연무단’ 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밀양지역에서는 ‘일합사’의 구성원이었던 윤세주가 서울로 올라가 서울의 동향을 보고 귀향한 뒤 밀양의 3․1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특히 김원봉과 윤세주처럼 일합사에서 활동했던 중심 인물들의 다수가 1920년대 ‘의열단’ 에 참여했던 것이다.
영남최초의 만세운동이 된 밀양면 3.13 만세운동은 일합사․연무단 등의 비밀결사, 동화학교․정진학교 등의 민족교육학교, 전홍표․황상규 등의 항일인사들에 의해 길러진 밀양의 항일독립의식이 이 운동을 통해 표출된 것이다.
특히 윤세주를 비롯한 밀양청년들은 3․13 만세운동과 같은 평화시위에서의 경험을 통해 일본제국주의는 자기희생적 결단에 의한 무장 투쟁노선에 의해서만 타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의열단에서 추진한 의열투쟁 대열에 합류했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9일 만주 길림성에서 김원봉․윤세주․한봉근․한봉인․김상윤(이상 밀양인)․이성우․곽경․강세우․이종암․신철휴․배동선․권준․서상락의 13명이 중심이 되어 중국 길림성 파호문밖 평화로 57번지 반씨집(화성여관)에서 결성된 비밀 항일독립운동 단체이다.
당시 밀양에서는 3․1운동 후 시대적 추이로서 1920년대 초반에 청년단체를 중심으로 많은 청년․사회단체가 조직되었다. 밀양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1920년대 전반기 청년단체들은 대부분 지방사회의 ‘유지청년’들이 중심이 도어 풍속교정․덕성함양․지식개발․산업진장 등을 목표로 하는 사회계몽단체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밀양청년회는 기존의 밀양구락부가 명칭과 조직체계가 협의적 성격을 지녔다고 보고, 1920년 8월 8일 영남루에서 200여 명 참석 하에 총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청년회로 명칭을 변경하기로 하였다. 밀양청년회는 당시 밀양사회의 큰 골칫거리였던 콜레라 방역에 주력하기 위해 자위단을 조직하는 등 밀양사회 내에서 필요한 일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밀양지역의 여성운동은 주로 밀양여자청년회와 근우회 밀양지회가 주도했다. 밀양에서 여자청년회가 처음으로 조직된 것은 1920년 말이었다. 밀양여자청년회는 1921년 3월부터 여자약학원을 운영했는데, 이는 이후 밀양여자청년회의 가장 큰 활동이 되었다.
밀양청년회에 이어 당시 항일독립운동의 큰 역할을 했던 종교계에서도 밀양기독청년회와 표충사를 중심으로 밀양불교청년회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밀양청년회를 제외하고는 조직적으로 사회운동을 전개 하였다기 보다는 여자청년회는 야학운영만을, 기독청년회와 불교청년회는 계몽적인 강연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것은, 1910년대 밀양지역의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많은 인사들이 3․1독립운동을 전후하여 대거 망명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역에 남아 있던 주요 인사들은 보수적․소극적 성향의 사람들로 보이는데, 따라서 1920년대 초기의 사회운동은 합법의 테두리 내에서 소극적으로 전개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밀양 청년층의 청년운동은 민족해방운동을 중심으로 부문별․계층별로 그리고 국내외에 걸쳐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192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사회주의 등 신사상이 보급되고 노동․농민운동 등 대중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전국적인 청년운동 지도기관인 조선청년총동맹이 1924년 결성되었다. 이를 계기로 각지의 청년단체들은 이른바 ‘혁신’을 내걸고 그 활동과 성격도 한층 명확하게 변모해갔다.
당시 밀양지역 청년운동을 주도한 밀양청년회 조직의 특징과 흐름을 살펴보면, 밀양청년회 조직이 체계적으로 구성된 것은 1922년 4월 정기총회에서부터다. 회장제에서 위원장제로 전환하고 규칙 제정․임원 확충 등을 통하여 조직적인 면모를 갖추었다. 밀양청년회의 초기 간부들은 당시 밀양지역에 남아있던 대표적 인물들이며, 지역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는 계층이였다.
밀양청년회 임원들 중에는 지방의 재력가(이성희,박장억,이영집,한춘옥,안삼득), 3․1운동 참가자(김래봉,설인길,박상오,김병환)와 의열단 관련자(최수봉,김병환), 그 뒤 밀양청년동맹과 신간회 지회에서 활동하는 등 세 부류의 사람들이 크게 참여하고 있었다. 이런 변화는 한말․1910년대를 거치면서 밀양지역 내에서 상당 정도의 계층 변동과 여론 주동층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들 지배엘리트들은 실력양성론의 근대화지상론에 입각하여 초기 밀양청년회에 참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 밀양청년회에는 이들뿐만 아니라 1920년 밀양경찰서폭탄사건에서 드러나듯이 최경학, 김병환과 같은 의열단의 직접적인 테러방식의 투쟁노선을 추구한 인물들도 혼재되어 있었는데 이점이 다른 지역의 청년회와 차별성을 갖는 밀양청년회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1925년 11월 23일 밀양청년회관에서는 당시 사회운동의 일반적 추세에 발맞춰 밀양청년회가 주도하여 6개 단체 대표가 참가한 밀양군 청년연맹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청년연맹의 강령에 나타나 있듯이, 기존의 청년운동은 실력양성론에 입각한 계몽적 차원의 활동이었으나, 이 시기부터 역사발전에 필요한 신사회(新社會)를 지향한다는 뚜렷한 방향성을 제기하는 운동의 질적 성장을 이룩한 시기였다.
밀양청년연맹의 창립을 계기로 이 지역 사회운동의 양적성장은 이루었지만, 연맹형태로는 일사불란하게 일들을 추진할 수 없었고 또하나 분열양상으로 질적인 성장은 그 이후로 뚜렷한 성과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경북사건으로 청년운동을 주도하던 김병환․한일근이 체포되어 활동이 더욱 위축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한편, 밀양청년연맹은 사상단체 오륙회를 중심으로 과거 3․1운동(김병화, 강덕수) 또는 의열단사건(김병환, 한일근)에 참여한 활동가와 밀양여자청년회, 읍외 지역 청년단체들이 참가하여 오륙회(五六會)를 조직하였다.
1928년 7월 밀양청년회가 발전적 해체됨과 동시에 밀양청년회가 주축이 된 밀양청년동맹이 설립되었다. 새로 출범한 밀양청년동맹은 집행위원회를 열어 여러 사무를 처리하였다. 1920년대 후반이후 밀양의 청년운동은 밀양청년회에서 발전한 밀양청년동맹이 주도하게 된다. 이 후 밀양청년동맹의 구체적인 활동과 조직의 향방에 대해서는 확인 할 수 없다.
단지 1931년 5월 27일 밤사이에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밀양청년동맹회관 사무실 문을 부셔버린 것이 다음날 발견되었다는 신문보도만이 확인된다. 이후 더욱 강화되어간 이같은 탄압국면과 전국적 지도기관마저 부재한 상황에서 밀양 청년동맹이 이후 정상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후 밀양청년들의 청년운동은 1930년대들어 대규모 검거태풍을 몰아치면서 합법적인 운동이 불가능 해졌고, 밀양의 독립운동의 대부격인 황상규의 죽음과 청년운동을 저지하려는 일제의 탄압속에서 1932년 여름, 밀양청년회와 밀양청년동맹, 그리고 신간회 밀양지회를 이끌었던 윤세주는 단신으로 중국으로 망명하여 그 당시 조선 의열단을 이끌어 왔던 밀양출신이자 같은 동네 친구인 김원봉 장군과 함께 본격적인 항일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황상규의 죽음과 윤세주의 망명으로 밀양청년운동은 지역에 남아 있는 인사들 중심으로 소극적일 수밖에 없을을 것이다.
당시 1920년대 밀양청년단체들의 지역을 위한 봉사활동은 다음과 같다.
1920년 8월8일 구락부에서 청년회로 개칭한 밀양청년회는 당시 밀양사회에 번성했던 콜레라를 방역하기 위해 자위단(위생단)을 조직하고 즉석에서 임시의연금을 수합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또, 1920년 8월 밀양청년회에서 설립하여 운영하던 노동야학과 밀양여자창년회가 운영하던 여자야학이 있었다. 이 야학들은 창립 1년도 못되어 학생 수가 150~200명에 달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밀양청년회의 노동야학은 1921년 9월 당시 학생이 200여 명이나 되었다. 야학 외에 일제하 청년단체가 민중을 교양․계몽하기 위한 대표적인 활동으로 각종 강연회 개최를 들 수 있다.
밀양청년회를 비롯한 청년단체들은 당시 밀양사회를 대표하는 각종 행사를 주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운동회와 체육대회, 연극․영화 등 문화공연, 각종 환영회나 송별회 등을 수시로 혹은 정례적으로 개최하였다. 주로 밀양청년회가 가장 많이 주도하였으나 여러 단체가 연합하여 주최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대규모 행사는 동아․조선․시대일보 등의 밀양지국이 후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행사들은 밀양군민의 화합을 도모하고 심신을 단련시키며 문화의식을 높이는 계몽적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며, 야학운영자금이나 각종 구제기금 마련 등 재정적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또, 밀양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도 앞장을 섰다. 1927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국농소 소작쟁의’ 당시 진상조사를 철저히 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1928년 4월 24일에는 조사보고를 하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밀양청년회는 창립이후 노동야학과 청년회관건립, 각종 운동회 개최와 방역사업 등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당시 밀양청년회는 전국적인 민족운동 내지 사회운동의 흐름과 보조를 맞추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1927년 한 해를 달궜던 ‘밀양군청 이전반대운동’ 에도 참여하여 운동의 방향을 올바르게 이끌기 위해 노력했다. 그 외 기타 활동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밀양장업회․밀양청년회․밀양여자청년회․밀양장로교연합 등의 단체가 공동으로 개최한 물산장려소비절약선전대회와 회관신축, 정기적인 운동회 개최 등의 일반사업도 전개하였다.
2. 밀양청년운동의 민족사적 의의
이상에서 일제하 밀양지역의 청년운동을 청년운동단체의 변화와 이들 청년운동의 한 단면으로 전개되었던 활동들을 위주로 살펴보았다. 일제하 밀양지역의 청년운동은 1910년대 항일운동을 기초로 하여, 3․1독립운동을 기점으로 태동하여 1920년부터 1930년대 초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서 밀양지역 청년운동의 특징을 부문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사회운동을 주도했던 청년운동은 密陽俱樂部를 모체로 密陽靑年會․密陽女子靑年會․密陽基督靑年會․密陽佛敎靑年會로 密陽靑年聯盟으로, 密陽靑年同盟으로, 1927년 新幹會의 창립과 함께 新幹會 密陽支會와 密陽靑年同盟․槿友會 密陽支會로 변화․발전하였다. 여기서 신간회 밀양지회는 좌우합작이라기 보다는 청년층은 청맹, 청장년층은 신간회 밀양지회로 활동공간이 이분된 것이다.
초기의 청년운동 단체들의 활동은 실력양성론에 의거 야학운영․강연회 개최․운동회 개최 등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수준이었다. 이것은 청년운동 초기의 인적구성의 한계로 운동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3․1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일경의 피해 대거 도만하여, 의열단을 조직하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는 등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하였고, 국내에 남아있던 인사들은 3․1독립운동과 의열단의 밀양경찰서 폭탄사건으로 투옥되어, 주도적으로 사회운동을 전개할 인사들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5년 청맹이 창립되고, 이후 1927년 좌우합작에 의한 신간회가 창립되어 밀양지역에도 신간회 밀양지회가 창립되면서부터 청년운동은 다시 활성화되었다. 1910년대부터 밀양지역 항일운동을 주도했던 황상규를 중심으로 윤세주․김병환․윤치형 등이 여기에 참가하여, 청년층은 밀양청년동맹에서 청장년층은 신간회 밀양지회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밀양의 청년운동은 일제하 식민지체제의 우리 시대에 대한 인식에서 분단을 국복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사관의 정립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통일 지향적 사관에서 볼 때, 근현대 시기에 전개된 밀양의 청년운동사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첫째, 밀양의 청년운동은 지역 주민 대다수의 참여을 이끌어 민중적 토대 위에서 시기별로 다양한 형태로 풍부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1890년대와 1900년대에는 개화 교육운동과 구국계몽운동이, 1910년대에는 비밀결사운동과 3․1운동이, 1920년대에는 의열단의 의열투쟁은 물론 농민운동․노동운동․학생운동․국민권익옹호운동․민족교육운동․종교운동․신간회와 근우회 운동 등이, 1930년대에는 국내의 대중운동과 국외 조선민족혁명당 등의 통일전선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렇게 다양하고 풍부한 밀양의 민족해방운동은 전체 민족운동의 역량을 강화하는 바탕이 되었다. 특히 밀양청년들의 민족해방운동은 전체 민족운동의 주요한 고비에서 예외 없이 최대의 역량을 발휘했다. 앞서 말한 여러 종류의 민족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 점에서 밀양의 청년운동은 전체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주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하겠다.
둘째, 밀양의 청년운동사는 부문과 계층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혼란과 분열된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부문별․계층별 연합과 국내외의 유기적 연게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말하자면 다양성 속의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다. 밀양 주민들은 3․1운동에서 부여준 전체 주민의 통합된 역량에 바탕을 두고, 세대․종교․계층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운동을 전개하여 전체의 운동역량을 강화했다.
이러한 운동의 다양성과 풍부성은 국내외가 긴밀히 연결되었을 때에만 가능한 치열한 의열 투쟁이 지속적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했으며, 신간회를 통해 밀양 주민의 대중적 역량을 조직화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밀양청년들이 주도한 민족해방운동의 통일적 전개는 밀양 주민들이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 아래서도 군민 자신들의 권익을 확립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군민권익옹호운동에서 확립된 주민 자치적 역량은 오늘날 지방자치 시대를 개척하는 데에도 비옥한 토양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셋째, 밀양의 청년운동은 20세기 전 시기에 걸쳐 항상 우리 민족운동이 지향해야 할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1890년대와 1900년대에 전개된 개화 교육운동과 구국계몽운동은 유교적 전통에 바탕을 둔 주체적 근대화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때게 되었다. 따라서 다른 지역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보수와 개화의 심한 갈등이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에서는 계층․종교․연령을 넘어선 전민족적 운동의 성격을 전향적으로 표현했으며, 1920년대 의열단 및 신간회 운동가가 1930년대 민족혁명당에서 통일전선운동 노선을 확립했다. 특히 밀양의 청년들이 주도한 민족통일전선운동은 이념적대립을 넘어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와 국외의 유기적 연결, 그리고 기성 세대와 청년 세대의 밀접한 관련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1930년대 중반이후부터는 이전과 같은 민족해방 의미의 청년운동이 전개되기는 어려운 조건이었고 이는 밀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전시파쇼체제 하의 엄혹한 조건에서도 청년층은 일제의 패망을 전망하면서 독립과 건국에 앞장서서 준비했던 가장 핵심적인 계층이었다.
이러한 일제하 청년운동의 흐름은 8.15해방 직후 맞이한 자주적인 공간에서 각 지방의 치안유지활동 등 각종 신국가건설운동 등으로 계승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같이 밀양의 민족해방운동사의 주요한 특징은 통일전선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일관되게 견지하고 확립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밀양 청년들의 민족해방을 위한 청년운동은 21세기 통일 한국의 미래를 전망할 때, 우리 민족 전체가 지향해야 할 방향과 교훈을 이껄어 낼 수 있는 소중한 역사적 자산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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