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현대사 재조명

[스크랩] 조선의용대의 독립운동과 석정 윤세주

감효전(甘曉典) 2012. 2. 6. 22:39
조선의용대의 독립운동과 석정 윤세주


서울시립대학교  염인호 교수



Ⅰ.머리말


조선의용대는 1938년 호북성(湖北省) 무한(武漢)에서 100여명의 인원으로 창설되였다. 이 부대는 2년 8개월 정도 국민당 지구에서 활동했으며 그 주력은 1941년 여름 화북 팔로군 지구로 이동하여 작전하였다. 해방 후에는 만주로 들어가 활동하였다.

첫째, 최후까지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는 점이다. 조선 국내의 독립운동은 중일전쟁 발발후부터는 일제의 극심해진 탄압으로 인해 쇠퇴의 길을 걸었다. 독립운동 단체는 대부분 파괴되였으며, 소수의 지사들만이 지하 조직을 결성해 때를 기다렸을 뿐, 조직적인 독립운동은 거의 사라졌다. 재만 항일 무장투쟁 세력조차 일본군의 토벌에 밀려 대부분 소련으로 이동했다. 더욱이 일본과 소련간에 중립조약이 체결되면서(1941) 저항운동은 더욱 위축되였다. 다만 중국 관내지방에서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와 한국광복군만이 반일 독립투쟁의 가치를 더 한층 높이 들고 싸웠다.

둘쨰, 침략자에 맞서 조선인들이 중국 민족과 공동으로 투쟁한 귀중한 역사적 경험을 축적했다는 점이다. 20세기 상반기 경우 한민족과 중국 민족은 모두 일본 제국주의자들로부터 국토를 유린당하는 참상을 겪었다. 조선인들은 국망 후 중국을 주요 기지로 삼아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이떄 중국인들은 조선들에게 정신적 물질적 원조를 제공했으며, 조선인 독립투사들은 중국의 항일투쟁에 참가하여 피와 땀을 흘렸다. 중국의 많은 조선인 독립운동 단체 가운데서도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는 중국공산당 중앙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항일투재을 전개했다. 중국공산당이 중국을 통치하고 있는 오늘날 한일들이 과거 중국공산당 중앙과 긴밀히 연대해 항전했던 사실은 21세기 한 • 중 양국 우호 중진에 일정한 기여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 같은 의의를 지니는 투쟁에 참가한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 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은 법에 의해 강제로 참전한 것이 아니다. 오로지 자신들의 결단에 의해 조국 해방의 제단에 몸바칠 각오를 하고 나섰던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 대원 모두의 궤적은 민족사에 기록되여야 하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석정 윤세주의 역할은 특히 주목을 끈다. 본 발표에서는 조선의용대 각 단계 활동이 갖는 의미를 정리하고 그 가운데서 석정 윤세주가 했던 역할을 밝히고자 한다.  

Ⅰ.Ⅱ. 포로 공작


조선의용대는 창설 후 2년 6개월 정도는 주로 황하 이남의 중국국민당 지구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의용대가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대 일본국 선전 활동이였다. 의용대원들은 메가폰을 들고 직접 전선으로 나아가 일본군을 향해, 또는 일본군 활동 지구에 선전 전단을 뿌려, 일본군 자신들이 하고있는 행위가 얼마나 인류에 대한 죄악인지를 선전하였다.

아울러 의용대원들은 전쟁에 지치고 승리의 신심을 잃어가고 있던 중국 민중들을 고무격려하는 활동을 전개했고 중국 군대에서는 이론어 교수, 일본인 포로 심문 등을 통해 지원하였다. 그리고 같은 처지에 놓인 대만인들을 도와 대만의용대 창설에 기여하였고, 일본인들의 반전운동을 지원하였다. 이 같은 활동을 통해서 조선인들의 독립의지를 해내외조선인과 중국인 등 외국인들에게 과시하였다. 조선의용대 활동 소식에 접한 재미 조선인들이 조선의용대 후원회를 결성했던 것은 의용대 활동이 거둔 성과의 하나였다.  

1. 윤세주의 포로 공작

조선의용대의 활동가운데,. 성과에 비해 주목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있는 것이 조선인포로를 설득하고 귀순시켰던 포로공작이다. 조선의용대의 포로공작은 윤세주가 주도하였다. 먼저 윤세주가 행한 포로공작을 보자.

무한 함락(1938.10.말)후 조선의용대 대본부는 광서성(廣西省) 계림(桂林)으로, 제1구대는 호남성(湖南省)으로, 제2구대는 호북성(湖北省)으로 이동했으나 조선의용대 정치조 훈련주임이였던 윤세주는 동지 강흥구와 귀주성 진원(鎭遠) 소재 중국군 제2포로수용소(和平村)으로 향하였다.

1939년 2월 윤세주가 찾아갔을 때 그 포로수용소에는 135명의 포로가 있었는데 그중 31명이 조선인이였다. 조선인 포로는 군인이 아니고 민간인 출신이였다. 31명가운데 11명은 제주도 출신으로 부산의 일상(日商)에 고용된 선원들이였다. 그들은 화물 선박을 타고 서남해안 일대에서 화물을 운송하였으며 때로는 인천에서 대련으로 운송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대련에서 모 일본상인의 위탁을 받고 4천여대의 밀가루를 싣고 천진(天津)으로 가던 두중 표류하여 산동(山東)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중국군에 의해 배가 나포되였고 그들은 포로가 되였다. 또 포로 중 12명은 모두 진포선(津蒲線) 혹은 평한선(北平-武漢)철도가 지나는 각 도시에서 장사하는 상인들로서 각각 잡혀 온 사람들이였다. 나머지 8명은 여자였는데 이중 절반은 앞의 상인의 가속이고 나머지 반은 몸을 팔아 호구(糊口)하는 여성들이였다.

윤세주의 조선인 포로와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였던 것 같다. 31명가운데 1인이였던 최동광에 의하면 중일전쟁 발발 후, 관내지방으로 들어와 행상을 하였던 그와 그의 형은 1938년 4월 산동성 제남(濟南) 인근 평원의 한 여관에 잠을 자다가 국민당 군대의 습격을 받아 체포되였다. 이때 최씨 형제를 포함하여 조선인은 10여명이 체포되였다. 그들은 국민당 헌병사령부가 있던 정주로 호송되였다가 장강을 건너 무창의 국민당헌병대 학교에수용되였다. 이때 조선민족혁명당 성원들이 찾아와 상황을 파악해갔다고 한다. 아마도 윤세주도 그중 한 사람이였을것이다. 최동광 등은 다시 중국 국민정부가 정식으로 개설한 호남성 상덕(常德)의 포로수용소로 이감되였다가 다시 안전한 귀주성 진원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윤세주 일행이 진원의 포로수용소에 당도하자 수용소 소장은 물론이고 조선인 포로들도 환영하였다. 중국 관내지방에서는 조선인들이 말이 통하는 동포를 만나는 것 자체만 해도, 처지에 관계없이 반가운 일이였다. 윤세주 일행과 조선인 포로들은 함께 3.1절 20주년기념행사를 하였다. 이어서 윤세주는 포로 한 사람 한 사람과 면담하였다. 면담을 통해 그들의 인적사항을 파악했고 아울러 조선의용대에 가담할 것을 권유했을것이다.

윤세주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일본인 포로들과 달리 조선인 포로들은 반일운동에 적극적이였다. 중국인 포로수용소장은 중경 인근 남온천(南溫泉)부근에 포로수용소 분소(博愛村)을 건설하고 반일 • 반전운동에 나서기로 한 조선인과 일본인을 1939년 6월 그곳으로 이동시켰다. 아마도 조선인은 31명 전원이 박애촌으로 갔던것으로 보인다.

최동광에 의하면 이 포로수용소(박애촌)로 국민당 군복을 입은 김원봉 등 여러명의 조선민족혁명당 성원들이 찾아와서 중일전쟁과 세계정세, 조선의 전도 문제 등을 상세히 설명해주었다고 한다. 틀림없이 윤세주도 그 자리에 있었을것이다. 얼마 있지 않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의식을 하고 조선인들은 조선의용대에 넘겨졌으며 1939년 9월에는 계림(桂林)의 조선의용대 대본부에 도착하였다. 계림에서 이들 전원은 조선의용대에 가담하였다.

조선의용대 가담 인원이 31명이였다는 점에서 볼 때 전원 포로수용소에 있던 조선인 전원은 일본인들과 달리, 자원하여 조선의용대에 가담하였음이 분명하다.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다 윤세주의 뛰여난 설득력 또한 작용했기 때문에 가능했을것이다. 조선의용대에 가담한 이들 신입대원들은 1939년 10월 19일 전선으로 가기 위해 사람들의 환송속에 계림을 출발하였다.  

2. 포로공작의 의의

선전 수단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 전쟁에 있어서 포로 문제가 대단히 중요함은 6.25전쟁에서 우선 확인할수 있을것이다. 1951년 여름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이 그토록 오래 계속되였던 이유는 포로교환문제 때문이였다. 또 6.25전쟁 때도 그런 일이 있었지만 포로들을 언론에 공개하여 상대방을 비난하는 도구로 삼는 일도 있었다.

중일전쟁때에도 포로문제는 대단히 중요하였다. 중국 국민정부는 전쟁초기 후퇴를 거듭하면서도 전투에서는 승리하고 있다고 중국 민중과 전세계사람들에게 선전했다. 국민정부는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생포한 일본군 포로의 존재가 필요했다. 그래서 서안(西安)과 상덕(常德)에 차례로 포로수용소를 세웠다. 더 많은 포로의 존재를 과시하기 위해 국민정부는 일본인 군인만이 아니라 조선인 민간인까지 체포해 수용하기까지 했던 사정도 포로가 갖는 중요한 의미때문이였다. 또 일본군의 사기를 저하시키기 위해서 중국 국민정부는 포로들을 설득 • 귀순시켜 그들을 반전활동에 동원하려 했다.

조선인 동포가 적은 관내지방에서 조선인 포로를 설득 • 귀순시키는 일은 특히 대오를 늘리는데 매우 중요한 몫을 했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0여명으로 출범하였다. 여기에 1년후인 1939년 가을 31명의 포로 출신들이 새로 가담함으로써 역량은 현저히 강화되였다. 해방 당시 조선의용군의 수는 1.000여명에 달했는데 그중 포로 출신들도 적지 않았다. 포로출신가운데 일부는 주요 간부로 성장해있었다.

포로 공작은 조선인에게 있어 전략의 문제로 발전되기도 했다. 1940년대 들어와 20반에 가까운 조선인들이 일본군으로 징집되였고 그가운데 절반이 중국 전선에 투입되였다. 강제 징집된 조선인들이 탈출하는 일이 많았고, 또 체포되는 경우 일본인들과는 달리 항일부대에 투신하는 일이 많았다. 중국전선에서 일본군이 패배해 붕괴되는 날 수만명의 조선인들은 당당한 독립군이 될수있음은 쉽게 상상할수 있는 일이였다. 중국측은 조선인포로의 인도를 법으로 보장하기까지 하였다. 윤세주의 포로공작은 조선인이 시도한 최초의 포로공작이였다는 점에서 그 선구적의의가 있었다.

포로공작을 윤세주가 담당했던 것은 이유가 있었을것이다. 당시 조선의용대는 여러 당파들로 구성되여있었다. 각 당파는 협조하면서 일면 경쟁하였다. 새로운 인원을 받아들이는 문제는 대장 김원봉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윤세주에게 맡겼을것이다. 과거 의열단에서도 졸업생 신상 문제를 윤세주가 주로 담당했었다. 보다 중요했던 것은 그의 뛰여난 설득 능력때문이였을것이다.  

Ⅰ.Ⅲ. 화북으로의 북상


조선의용대의 주력은 2년 6개월 정도 화중 화남에서 활동하다가 1941년 봄 황하를 건너 화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공산당 지구로 이동하였다. 화북 팔로군 지구로 이동한 이유와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의용대 대원수를 늘리기 위해서였다. 조선의용대 창설 당시 조선인들은 ‘조선의용군’이라는 명칭을 원했지만 인원수가 적다는 이유로 거부당한바 있었다. 한편 1940년 9월에 결성된 한국광복군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도 많은 인원이 필요하였다. 화북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이주해오고있었다.

둘째, 중국국민당과의 갈등때문이였다. 중일전쟁 발발 후 국공간의 단결은 비교적 공고했으나 무한 함락 이후 사정은 많이 달라졌다. 1939년 3월 일본군의 중경 폭격 이후 중국국민당은 삼민주의를 강요하는 형태로 반공공세를 시작하였다. 반공공세는 조선의용대에게도 행해졌다. 조선의용대 전선부대가 팔로군이나 신사군과 접촉하자 중국국민당은 의용대가 삼민주의를 채택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경비 제공을 일시 중지하기조차 하였다. 이러한속에 조선의용대 내부에서는 “북진하여 중공 지구로 이동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1941년 새해 벽두 중경에 주둔하고있던 조선의용대 제1지대와 제3지대가 화북을 향해 출발하였다. 이 부대 즉, 조선의용대 1 • 3혼성지대의 지대장은 박효삼이, 정치위원은 윤세주가 각각 맡았다. 지대장이 주로 전투 혹은 작전을 담당했다면, 정치위원은 대원들의 정신교육이나 사상 문제를 담당했다.

최채의 증언에 의하면 윤세주와 박효삼이 팔로군 지구로의 이동을 강력히 주장했다고 한다. 화북 이동에 소극적이였다면 윤세주가 결코 이동하는 대오의 지도자가 되지는 못했을것이다. 윤세주는 1940년 9월 조선의용대 창설 2주년에 즈음하여 이후 자신의 행로를 암시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윤세주는 “우리 역량은 매우 미약하지만, 중국 장병들과 협력하여 적과 육박(肉搏)하는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이 같은 솔직한 실천이 있을 때만 천 • 만 조선동포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호응하게 하고, 우리들의 피의 흔적을 따라 대도(大道)로 매진하게 할수있을것으로 확신한다”한다고 하였다. 적과 직접 맞붙어 싸우고 피를 흘릴 때만이 동포들을 해방의 전선으로 이끌어낼수 있다는 각오를 피력했던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각자가 먼저 장렬한 희생을 할 때 민중이 봉기할것이라고 한 ‘의열단 선언’을 떠올릴수있을것이다. 의열단의 고참 단원이기도 했던 윤세주는 의열단의 희생정신을 이때까지 간직하고있었음을 알 수있다.

윤세주는 다음으로 중국과의 연대를 강조하였다. 그는 과거 2년 동안 “본대 동지들이 남북 전장과 후방 각지에서 400만 중국의 영용한 항전 전사 및 민중과 함께”싸웠다고 회고하고 이로써 “양 민족 미래 억만년의 공영의 건고한 기초를 건립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한민족과 중국민족이 연대투쟁을 전개해야 함을 역사적 사명감으로 승화시켜 피력했던것이다. 윤세주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각오를 밝혔다.  

현재 본대의 기치하에 단결된 동지들은 비록 수백 개인이지만 우리들은 백분의 백 모두는 당의 혁명간부이고 수년동안 정치군사 훈련을 받은 사람이며 대부분 건장한 청년이다. 반드시 전 조선민족을 본대의 기치하에 동원하고, 조국 땅에서 적을 몰아내며 혁명의 최후의 목적을 완성할것이다. 이사의 몇가지 감상은 아마도 우리 전체 동지들이 오늘 공동으로 느끼는 감상일것이다.  

자기를 따르는 소중한 청년들에 대한 믿음을 잘 드러내고있다. 동지와 동포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이 글은 조선의용대의 기치 하에 혁명=독립을 달성해달라는, 젊은 동지들에 남긴 공개적 유언이 되고 말았다.

“승리의 그 날, 해방의 그 날에 다시 만나자고 굳은 약속을 하고” 사랑하는 아내와 구여운 외아들(용문) 중경에 남겨두고 출발한 윤세주는 이동하는 젊은 대원들에게 있어서 정신적 지주였다. 행군 도중에 일본군 비행기가 출몰하여 기총소사하는가 하면, 국민당군대와 공산당군대가 충돌하여 수천명의 희생을 치른 환남사변 직후의 불안한 정세도 작용하여 화북으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하였다. 그때마다 윤세주는 대원들에게 용기를 북돋우는 일을 하였다.

대원들이 탔던 기선 ‘민생호’는 하루 종일 달리다가 서쪽 하늘에 저녁노을이 붉게 타오를 때 산간의 자그마한 도시인 만현에 도착하였다. 배가 강가에 이르자 만현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던 최성오와 그의 아내가 나와 반갑게 맞이하였다. 최성오는 자신의 병원으로 대원들을 안내하고 술에 풍성한 안주까지 내여놓았다. “최성오 의사의 행동에 감동된 석정 동지는 행군 도중에 술을 마시지 못한다던 금주령까지 해소하였다” 이날 저녁 오락회가 열렸고 많은 대원들이 저마다의 장기로 분위기를 돋우웠다. 윤세주도 나섰다.  

변사로 가장한 석정 동지의 영화 해설을 그럴듯하게 하여 사람들을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하였다. 이날 밤 석정 동지는 30년대의 조선 영화 ‘아리랑’해설을 내리엮으면서 피눈물의 민족의 한을 토로하였다.

만현을 출발해 장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의창 인근에 내려서는 육로로 북상을 시작하였다. 힘든 행군 가운데서 대원들은 여러 혁명가요를 불렀는데 그 중에는 윤세주가 작사한 “최후의 결전가”도 있었다. 호북성 중심 도시 노하구를 거쳐 화북의 관문격인 낙양에 도착하였다. 이때부터 국민당 당국으로부터 도강 허락이 떨어지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게 되였다. 그 무렵의 일이다.

석정 동지는 우리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정세보고 토론도 조직하고 —(중략)— 정치경제학에 관한 보고토론회도 조직하고 문학예술에 관한 보고 토론회도 조직하였다. 벽보를 사흘에 한번씩 꾸리고 문학작품 현상 모집 활동도 벌려놓고 대원들을 장끼에 따라 시도 쓰고 산문도 쓰게 하였다.

낙양에 2개월 가량 지체한 후 마침내 국민정부의 허락이 떨어져 1941년 봄 대원들은 황하를 건넜다. 황하 이북의 국민당 통치 지구에서 2개월 가량 활동하다가 조선의용대 제2대마저 화북에 들어오자 마침내 1941년 6월 조선의용대 제1,2,3지대 80여명의 대원들은 팔로군 근거지에 이동하였다.



Ⅰ.Ⅳ. 중국 팔로군 지구에서의 활동과 전사




1.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위상과 윤세주의 역할

팔로군 지구에 들어온 조선의용대는 그곳에 있던 조선인 청년들과 합세하여 1941년 7월 7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지대장 박효삼)를 결성하였다. 화북지대는 1년간 투쟁을 하고 1942년 7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칭하였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이하 화북지대)의 1년간(1941.7~1942.7)의 활동은 조선의용대 • 조선의용군 7년의 항일역사 가운데 가장 처절하게 싸웠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화북지대는 1941년 12월 12일의 호가장전투(胡家庄戰鬪)에서 4명이 전사하고 2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1942년 5월의 반소탕전(反掃蕩戰)에서 2명이 전사자를 냈다. 윤봉길의 상해 ‘홍구공원의거’가 김구 • 한국독립당의 정치적 자산이 되였듯이 호가장전투와 1942년 5월의 반소탕전은 이른바 연안파(延安派)가 조선 대중에게 가장 자신 있게 내세울수 있는 정치적 자산이 되였다.

이 조선의용대 화북지대(~1942.7)는 다음과 같은 위상을 지녔다.

첫째, 화북조선청년연합회(이하 조청)의 행동부대였다. 조청은 1939년에 북상한 최창익(崔昌益) 일파와 중공 지구에서 활동해온 무정(武亭) 등이 1941년 1월 건립한 화북지구 조선인 민족해방운동 단체였으며 회장은 무정이 추대되였다. 1941년 6월 팔로군 지구로 들어온 의용대원들은 대부분 조청에 입회하였고 의용대 화북지대원들은 조청을 의용대 화북지대의 상부 정치 지도 기구로 인정하였다.

둘째, 중경에 있던 조선의용대 대본부 휘하의 부대였다. 일부의 논자는 중경의 대본부는 명목상 화북지대의 상급 기구일 뿐 화북지대에 대한 영향력은 거의 전무했다고 파악해왔다. 그러나 윤세주는 김세광(金世光) 이춘암(李春岩) 그리고 박효삼 등 유력한 의용대 화북지대 간부들이 의용대 대장 김원봉의 직계 인물들이였다는 점에서 볼 때 화북지대 내에서 배본부의 영향력은 여전히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중공 • 팔로군의 지도를 받는 부대였다. 원래 의용대는 중국국민당 군대 휘하에서 그 지휘를 받는 부대였다. 그러나 중공 지구로 들어오면서 국민당 군대의 영향력은 소멸되였고 그 공백은 중공 팔로군이 메웠다. 팔로군은 무기 등 물자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여러가지 정치적 • 전술적 지도도 제공하였다. 그런 가운데 화북지대에 미치는 팔로군의 영향력은 강화되였다.

조청의 행동부대이자 중경 의용대 휘하에 있으면서, 팔로군의 지도와 원조를 받았던 화북지대는, 중요 간부들 가운데 중경 의용대 대본부 지지세력이 엄존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화북지대가 팔로군 정규편제(正規編制) 안에 들어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독립적인 국제 지원 부대이자 조선인 독립군이였다.

이 화북지대에서 맡았던 윤세주의 역할을 보자.

첫째, 최고 지도 간부의 한 사람이였다. 그는 조청 진기로예(晉冀魯豫) 지회 부회장을 맡았다. 진기로예 지회는 조청의 핵심 역량이였다. 회장 진광화가 원 조청을 대표했다면, 부회장 윤세주는 1941년 6월 북상한 대원들을 대표하였다. 부회장으로서 윤세주는 조청과 조청의 지도를 받았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지로 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음이 분명하다. 부연하면 이 대오 내에서 그는 중경 대본부 • 김원봉을 대리했을것이다.

둘째, 유능한 교관이였다. 화북지대는 1941년 8월 16일부터 간부훈련반을 개설하여 2개월동안 화북지대의 신입대원 30여명을 교육하였다. 훈련 내용을 크게 구분하면 정치와 군사였다. 특히 정치 훈련을 통해 신입대원들의 민족 각오 및 정세를 판단 능력, 조직의 강령 정책 이해 능력을 높이고자 하였다. 정치교육의 과목은 조선문제(朝鮮問題), 정치상식(政治常識), 시사문제(時事問題)였으며, 교관으로는 화북지대 내 3명의 걸출한 이론가 윤세주, 최창익(崔昌益), 김학무(金學武)가 각각 담당하였다.

윤세주는 조선문제 과목을 통해 신입대원들에게 조선의 사회경제 분석을 비롯하여, 혁명의 동력, 혁명의 전도(前途)를 교육하였다. 윤세주는 먼저 인쇄된 강의 요지(提綱)를 배포하여 강의하고 이 요지와 강의에 근거하여 학생들이 토론하도록 하였다. 비록 10시간에 불과한 강의 시간이였지만 당시 보고문헌에 의하면 윤세주는 예정된 진도를 끝냈다고 한다. “재능이 많고 언변에 뛰여났으며(多才善辨)” “뛰여난 선전선동가(很好的宣傳鼓動家)”였던 윤세주는 교관으로서도 유능한 그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을것이다.

2. 반소탕전에서의 전사

윤세주는 반소탕전(反掃蕩戰) 가운데 희생된였다. 중공의 1940년 백단전투(白團戰鬪)에 놀란 일본 대본영 육군부는 1941년 1월 모든 수단을 다하여 중국 점령구의 ‘치안’을 유지한다는 작전계획을 확정하였다. 1941년 2월 일본 화북방면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강촌녕차(岡村寧次)는 휘하 부대에게 “4개월 안에 화북경내의 공산당과 팔로군을 철저히 소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과 황협군(황협군:친일 중국군)은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항일근거지를 반복적으로 ‘소탕’하였는데 1941년부터 1942년까지 화북의 근거지를 ‘소탕’할 때 투입된 병력이 한번에 1천명~1만명에 달했던 것이 132차례였고, 1만~7만에 달했던 것이 27차였으며 한 지구에 3~4개월 동안 반복적으로 ‘소탕’하기도 했다. 이에 맞서 대항했던 팔로군 측의 활동을 ‘반소탕전’으로 일컫는다.

해방 직후 국내의 한 잡지에 실린 자료에 따르면 1942년 5월에는 본격적으로 20개 사단 약 40만명을 동원하여 소탕전을 시작하였다. 이때는 전차와 비행기까지 동원하였다고 한다.

같은 자료에 따르면 5월 초순부터 개시된 일본군의 소탕전이 중순을 넘어서서 하순에 이르는 즈음 적의 포위망은 최후의 일선까지 압축되여 팔로군 총사령부와 의용대 지대부가 있던 마전(馬田)조차 적의 대포 사격권내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로써 팔로군과 의용군의 최고간부급 인물들이 전부 포위 당하였다. 팔로군 총사령부는 어느 한 지점을 공격, 점령하여 위지(危地)를 탈출코자 의용대에게 두개 고지 점령할 것과 포위 당하고 있는 전군이 탈출할 때까지 그 고지를 사수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의용대는 지대장 박효삼의 지휘하에 일본군과의 치열한 접전 끝에 두 고지를 점령하였고, 팔로군 부대는 두 고지 사이를 통해 탈출하였다고 한다. 이 포위 돌파전 속에서 팔로군 측에서는 사령부 참모장 좌권(左權) 등이 전사하였고 의용대 측에서는 진광화 그리고 윤세주가 전사하였다.

윤세주의 비장하면서도 ‘애석한 전사 과정은 동지이자 부하였던 최채의 증언을 통해 잘 전해져 오고 있다.

팔로군 심장부인 전선총사령부에 일본군의 밀려들기 시작한 것은 1942년 5월 24일이였다. 전선총사령부 인근 운두저 촌에 주둔하였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원은 전투원 100여명외에 ‘정치사업 일군’ ‘후방사업 일군’ 그리고 여성 대원들이 함께 있었다. 전투원들은 위에서 본대로 팔로군 측의 요청에 따라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던 반면, ‘정치사업 일군’ 윤세주가 포함된 비전투원들은 여러 조로 나뉘여 일본군과 쫓고 쫓기는,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하였다.

연로한 김두봉과 여성대원들이 많았던 대오에 앞장서서 정찰에 나섰던 윤세주 진광화 최채 등 3명은 일본군에게 발견되였고 이들 3명은 관목 숲에 숨은 나머지 대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방향으로 뛰였으며 그 과정에서 윤세주와 진광화는 총을 맞았다. 그 날이 1941년 5월 28일이였다. 진광화는 절벽에 떨어져 바로 전사하였으나 다리에 총을 맞은 윤세주는 이때부터 힘겨운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최채 등은 윤세주를 치료하기 위해 팔로군 의무대를 찾아 나섰지만, 찾지 모하였다. 아무런 처치를 받지 못하는 속에, 날씨마저 더워 상처는 썩어들었다. 5월 31일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최채 하진동이 높은 곳에 올라가서 하루종일 망을 보는 사이에, 윤세주는 움집에서 임종을 지켜보는 이 없는 가운데,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때 나이 41살이였다. 최채와 하진동은 “열손가락에 피가 흐르는것도 모르고 묵어서 돌덩이같이 굳어진 땅을 파헤치고” 윤세주를 묻고 그위에 흙과 돌로 덮어주었다.

피로써 한 • 중 연대를 실현했던 윤세주의 죽음은 오늘날 중국에서도 기리고 있다. 중일전쟁 발발 60주년 기념으로 발간한 《외국 친우들과 항일전쟁》(《國際友人與抗日戰爭))에서는 중일전쟁 때 중국을 도운 외국인들의 활동을 나열하고 있다. 조선인 사례로는 조선의용군의 활동을 유일하게 싣고 있다. 특히 1942년 5월 “2만명의 일본군이 팔로군 총사령부를 포위했을 때 조선의용군 30여명이 팽덕회(彭德懷)와 유관인원(有關人員)의 철퇴를 엄호하였고, 조선동지 진광화 석정 등이 영용하게 희생된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윤세주의 전사 소식에 눈물을 뿌리지 않는 동지들이야 없었겠지만 그 누구보다도 슬퍼했을 사람은 중경의 김원봉이였을것이다. 의열단 창단이래 고난을 같이해온,가장 신뢰했던 동지의 죽음은 김원봉에게는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이기도 하였다. 중국국민당 측의 한 문서에서는 “조선민족혁명당의 영혼” 석정은 김원봉이가 “힘을 얻는 원천(膀臂:옆구리와 팔뚝)이며” “석정의 죽음은 실로 김씨의 최대 손실”이라고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사실 김원봉에게 있어 조선의용대 주력의 팔로군 지구 파견은 일종의 모험이였다. 국민당 군대 내부에는 황포군관학교 동창생들이 곳곳에 포진하여 그를 도와주었으나 팔로군 지구에는 사정이 달랐다. 아울러 팔로군 지구에는 김원봉의 경쟁자라 할 수 있는 최창익이나 한빈, 특히 중공의 신입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무정이 있었다.

화북의 조선의용대가 팔로군과 굳게 결합할수록 중경 김원봉과는 점차 떨어질 가능성이 컸다. 김원봉의 측근 왕통이 1941년 10월 기관지 《조선의용대》(중경)에서 조선의용대는 계급의 대오가 아니라 민족의 대오임을 명심해야 하며, 우리는 중국 항일전쟁의 최고 지도자 장개석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했던 것도 그 같은 가능성을 우려해서였을것이다. 김원봉과 보조를 같이해온 김두봉이 조선의용대 주력을 찾아 1941년 9월 중경을 출발(태항산 도착은 이듬해 4월)했던 것도 화북지대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고자 했던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정신적 지도자였으며, 김원봉과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였던 윤세주가 전사함으로써 의용대 화북지대에 대한 김원봉의 장악력은 급속히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윤세주의 전사는 아울러 국 • 공 양 지역 조선인 민족운동 진영의 단결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조선의용대가 팔로군 지구로 북상하고 있을 즈음인 1941년 5월, 조선민족혁명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를 결정하였다. 그리고 민족혁명당은 그 해 10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참여를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1942년 3월 1일자로 발간한 조선의용대 기관지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고 천명하였다.

이러한 중경의 민족혁명당의 지침은 곧 화북의 민족혁명당 계열에게도 하나의 지침이였을것이다. 1942년 가을에 개최된 독립동맹 진서북 분맹 결성식장에서 김구의 초상화가 내걸렸던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윤세주가 전사함으로 인해 그 같은 민족혁명당의 지침을 화북에서 실천할 수 있는 힘은 많이 소진되였을 것이다. 일제 패망직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동맹 • 조선의용군과의 통일을 위해 노력했지만 독립동맹 • 의용군의 지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무정 • 박일우 등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일제 항복 후 임정 세력은 남한으로, 독립동맹 세력은 만주와 북한으로, 제 갈 길로 각각 가버렸다.

Ⅰ.Ⅴ. 맺음말



이상에서 볼 때 윤세주는 조선의용대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일찍이 포로공작을 중시하여 직접 포로수용소를 방문하여 그들을 항일의 주력으로 편성하는데 성공하였는데 이후 민족운동에서 포로공작은 대단히 위상을 차지하게 되였던것이다.

그리고 그는 의용대의 북상을 앞장서서 주도했고 팔로군 지구에서도 조청의 최고 간부로서, 그리고 간부학교의 교관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말로만 하는 이론가가 아니라 실천가였으며 실천가이자 또한 끊임없이 정세를 분석 • 종합하고 민족독립운동의 진로를 앞장서서 제시했던 이론가였다.

조선의용대 지도자로서의 윤세주의 역할은 그 드러난 활동이나 직책보다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빛을 더 발산하였다. 윤세주는 청년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을 정신적으로 감화시키고 독립운동가로 단련시켰다. 관내지방에서의 독립운동이란 몇백명에 불과한 청년들 하나 하나의 민족애의 실천이였다. 그 청년들은 법에 의해 강제로 징집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고 결의하고 목숨을 건 투쟁에 참가한 사람들이였다. 그러므로 청년들을 감화시키고 독립운동 전선으로 이끌며 앞길을 제시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독립운동의 초년병” 시기부터 윤세주의 영향을 받아온 김학철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홀쭉한 얼굴, 호리호리한 몸집에 목소리까지 잔잔해 도무지 용사 같아 보이지 않았다. 사이토 마코도(齊藤實) 총독을 살해하려고 폭탄을 가지고 국내에 잠입했다가 발각돼 7년 동안 징역을 살고 나온 열혈한으로는 도저히 보이지를 않았다. 하건만 그분은 우리 당(소선민족혁명당 – 인용자)의 손꼽히는 이론가였고 또 그 물이 흐르듯이 거침이 없는 현하지변(縣河之辯)에는 어더한 적수도 맞서지를 못했다. 나는 석정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 또 지도를 받은 몇 해 동안 그분이 역정내는 것 한번도 못봤다. 그분은 언제나 순순히 타이르는 식으로 우리를 설복하였다.

한편 윤세주 생애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던 최채는 윤세주가 “정치간부였지만 예술에 재능이 있고 예술을 무척 즐기였다” “예술을 즐기고 나를 사랑해주던 스승이며 생사를 같이한 전우”였다고 회고하였다.

그의 뛰여난 능력은 당시 기록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중국공산당은 윤세주를 “재능이 많고 언변이 뛰여나다(多才善辯)” 또는 “뛰여난 선정선동가(很好的宣傳鼓動家)”였다고 추모했다.

윤세주의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뛰여남을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한 말이 있다. 중국국민당 측의 한 문서에는 화북에서 전사한 윤세주를 “조선민족혁명당의 영혼”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때의 ‘영혼’은 무슨 뜻일까. 그는 살아 있을 때도 “조선민족혁명당의 영혼”이라고 불렀다. 1941년 10월 29일자로 중국국민정부 인사 왕(汪榮生)이 작성한 문서 ‘조선 각 당파활동 근황보고’에는 박효삼 및 “號稱 民族革命黨 靈魂之石正”이 팔로군 지구로 넘어갔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때의 “영혼”은 “죽은 자의 넋”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혼(精魂)” 혹은 “정령(精靈)” 즉 “만물의 근원이 된다고 하는 불가사의한 기운”으로서의 영혼일것이다. 민족혁명당과 그것의 한 파생물인 조선의용대는 윤세주의 위대한 정신에 의해 지도되였음을 이 표현에서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 《石正 尹世胄 烈士의 生涯와 獨立精神》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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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밀양 이야기(밀양향토사연구회)
글쓴이 : 가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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