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은 일제시절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는 무력을 통해서만 독립쟁취가 가능하다 생각했던 급진적성향의 애국지사로서, 의열단,조선의용대등을 창설하였고,중국 난징에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조선인혁명 청년간부 학교를 설립해 오늘날 사관학교 형태의 군간부를 배출합니다.
처음에는 상해의 임시정부와 별도로 활동을 벌이며 대립관계였으나, 나중에 김구의 임시정부에 자신이 설립했던 사회주의 정당인 조선 민족혁명당을 흡수시키고 조선의용대 역시 광복군에 편입시킵니다.
해방후에는 김구의 임시정부 요원들과 함께 귀국하여,좌우합작을 위해 애썼으나, 임정의 거부로 결별하고 독자적 기반을 마련하여 연합전선을 형성해 좌우합작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남한 단독정부 수립후 북한에서 남북협상차 방문했다 북에 머물러 활동을 했던 독립투사였습니다..한국전쟁후 북에서도 숙청을 당했다는 말이 있는데,사실확인은 안됩니다.
물론 그가 사회주의 계열이긴 했지만,맹렬히 독립운동을 펼친것은 사실이며, 해방후에는 남북한의 좌우대립을 경계해,어떻게든 남북분단은 막아볼려 노력했던 인사입니다.
그가 남한의 미군정하에서 우익정부가 들어섬에 불만을 느끼고 북한을 택했던 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인데,몇일전 현대인물사라는 kBS다큐멘터리에 놀라운 사실이 나오더군요..
바로 대표적 악질 친일경찰 출신인 노덕술에 의한 고문이었습니다. 노덕술은 일제시절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고 고문하던 대표적 고등계형사 출신으로 해방후에도 반민특위 간부살해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으며, 자신의 친일행적을 감추기위해 일제시절 배운 고문기술을 총 동원해 수많은 좌익,빨갱이를 만들어냈던 인물입니다. 독립투사들의 혀를 뽑기도 하고 머리카락을 뽑아고문할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을 저지른 최고 악질 친일경찰이었던 자가 바로 노덕술입니다.
해방후 그런 노덕술에 의해서 오히려 거물급 독립투사인 김원봉이 잡혀 빨갱이로 날조되면서 고문을 당했다는것은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김원봉이 남한에서는 친일파놈들때문에 못살겠다며 울분을 토해냈다는 일화에는 가슴이 답답함을 느꼈습니다.(일제출신 경찰에 고문당한것에 눈물을 흘렸다 합니다..)
김원봉이 북한으로 넘어간것은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의한 선택이었지만, 남한에서 친일파들이 해방전보다 더 설치며 활동하는것에 남쪽은 틀렸다 라고 포기한것도 한 요인이 아닐까 나름대로 추측해 봅니다..(역사적기록이 아닌 추측입니다..)
물론,그가 월북을 하지않고 남한에 남았다면 김구나 여운형같은 운명을 맞이했을 가능성이 많기는 하지만...일제앞잡이들에 강력히 맞설수 있는 거물이 남쪽을 포기하고 북으로 갔다는것은 슬픈 역사의 기록입니다.
출처 - 미디어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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