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조선의 혁명을 꿈꾸었다".. 일제의 공포의 대상, 무장투쟁단체 <의열단> 그리고..
1921년 9월 12일
종로의 조선총독부에 전기수리공 한명이 들어갑니다.
조용히 전선들을 만지작 거리던 전기수리공은
갖고 온 공구함에서 작은 물체를 조심스레 꺼냅니다.
정체불명의 물체
총독청사에 있던 군관들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 자그마한 물체가 폭탄이었다는 것을..
실로 순식간에 전기수리공의 행동은 물체의 투척으로 이어졌고,
총독청사에 투척된 그 물체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며 강렬히 폭발합니다.
연기와 비명소리, 충격으로 어수선한 틈을 타서 수리공은 유유히 건물을 빠져나갔고,
총독부 건물을 뒤로한 채 걸어가는 그의 얼굴에는 ... 희미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이 조선총독부 폭탄투척사건 의 범인은 너무나 신출귀몰해서
범인의 가닥조차 쉽사리 잡히지 않았고.. 그 후 7개월 후인 1922년,
상해에서 다나카 저격사건 중 체포된 범인 중 한 명이
총독부 투척사건의 범인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아내면서야 검거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덤덤히, 태연하게 총독부의 뇌관에 폭탄을 꽂아넣은 인물
그의 정체는 의열단원 김익상 이었습니다.
의열단..
약산 김원봉 선생이 22살에 결성한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조직
반공 이데올로기 속에서 불순분자로 취급되며
비극적인 삶의 끝을 맞으신 김원봉 선생의 생애는
우리가 모르고 지나가기에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강렬한 '민족의 혼' 이 있습니다.
오로지 조국해방 한 길만을 보고 달려왔던 비운의 혁명가..
그의 비극적인 생애는 식민시대 최고의 항일무장투쟁단체 의열단에서 시작합니다..
1919년 3월 1일
국내의 모든 사람들은 신분, 지역, 신앙을 초월하고 전 민족의 일치된 독립의지를 행동으로 표현합니다.
시민들이 놀라운 결속력으로 한데 뭉쳐졌던 이 혁명운동에 당황한 일제는 잔혹하게 탄압을 가합니다.
엄청난 사상자를 낳은 3.1운동은 비록 일제의 총과 칼에 의해 실패한 혁명운동으로 끝났지만,
조선인 전민족의 단결된 의지가 외적으로 표출된 최초의 운동이었고,
'돌아가신 분들이 흘린 피' 가 독립운동가들에게 끼친 감동과 영향력은 엄청났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비로소 3.1운동으로 인해 '국민들이 무언가 할 수 있다' 라는 희망을 볼 수 있었고,
이전까지 약간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던 조국해방 계획은 이때부터 구체화 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 조국해방 계획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오로지 민족 계몽만이 진정한 독립이 실현될 수 있다'
라는 말로 대표되는 문화주의론과 독립전쟁론으로 3.1운동 이후의 독립운동 방향은 나뉩니다.
문화주의론 해방계획의 중심에 도산 안창호 선생이 계셨다면
독립전쟁론의 중심에는 청산리 대첩의 김좌진 장군과
바로.. 약산 김원봉 선생이 있었습니다
1920년 10월,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독립군은
만주 청산리에서 그들을 전멸시키려는 일본군에 맞서 오히려 지형적인 유리함을 이용해
완벽히 제압, 일본군 약 3000여명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둡니다.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퇴각하는 일본군을 미행해 역으로 그들의 기지까지 습격하며
식민시대에 가장 빛나는 성과를 올린 청산리에서 벌어진 전투..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희망이란 빛을 비추어 준 이 전투는
후대에 '청산리 대첩'으로 불리워지는 무장항일투쟁이었습니다.
청산리 대첩은 '항일무장투쟁만이 조국독립 실현의 유일한 길이다' 라는
독립전쟁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지만, 이후 '항일투쟁'에 의한 조국해방론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아래 수그러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꺼져가는 항일투쟁의 희미한 불씨를 극적으로 살린 인물..
22세라는 약관의 나이 김원봉은 이러한 식민지 조선의 암흑의 시기에 조용히 세상에 등장합니다
1919년 11월 10일, 중국 만주 길림성의 어느 자그마한 방.
이 곳에 모여있던 갓 20대가 넘은 13명의 청년들.
그들이 모여있었던 방 안은 '열기' 와 '열정'으로 가득차 뜨거웠고,
그런 그들의 굳은 의지와 혁명적 사상은 곧 "의열단" 이란 단체를 조직하기에 이릅니다.
김원봉이 그의 학교 동료와 고향 친구들과 함께 결성한 의열단.
조직의 단장으로는 냉정하고 침착한 성격의 김원봉이 선출됐고 그들은 곧 의열단 수칙을 만듭니다.
오파괴, 칠가살 법칙
오파괴,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주요기관
칠가살,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수뇌부, 대만총독, 매국노, 친일파, 적탐, 반민족적 인사.
이러한 수칙 아래 이들은 청산리 대첩 이후 끊어졌던 '항일투쟁'을 이어가려는 굳은 의지를 보였습니다.
(..이쯤해서 뭔가 생각나시는 분들이 계실텐데요.. 그렇습니다! 애물단의 칠필살!
경성스캔들에 나왔던 애물단의 칠필살 거사와 비슷한 내용의 수칙이었죠
"애물단의 이름으로 처단한다" 이수현 나으리의 외침이 귀에 생생합니다..
거성송주, 애물단 수장 이수현, 혁명전사 완, 여경.... 그립네요...ㅠㅠ )
의열단 강령을 정하고 전적인 '폭력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려는 이러한 의열단의 의지는 곧
1920년 의열단원 박재현의 부산 경찰서 폭탄 투척 거사를 시작으로 서서히 발현되기에 이릅니다.
이후 1920년 11월, 최수봉의 밀양 경찰서 폭탄투척 거사
1921년 9월, 김익상의 조선 총독부 폭탄투척 거사
1922년 3월, 김익상, 오성륜의 일본육군대장 다나카 총살 거사
1923년 1월, 김상옥의 종로 경찰서 폭탄투척 거사
1924년 1월, 김지섭의 도쿄 왕궁 폭탄투척 거사
등등 조국 조선과 일본 가릴 것 없이 수많은 크고 작은 거사들을 행하며
꺼져가는 '항일투쟁'의 불씨를 살리는데 커다란 역할을 합니다.
이중 김익상, 오성륜 등이 주축이 되어 행한 다나카 저격 거사는
비록 그를 향해 쏜 세발의 총알이 모두 빗나가 실패로 끝났지만
의열단이 행한 항일투쟁 중 가장 커다란 규모의 투쟁이었고,
이 거사로 인해 의열단의 이름을 전세계에 알리며
식민지 조선의 비극과 고통을 국외로 전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일제 수뇌부는 의열단이란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도록 분노할 지경이었지만
워낙에 신출귀몰한 단원들의 행동과 단장 김원봉의 전략적인 공격에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내 의열단은 일제 최악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단장 김원봉을 당시 조선총독부 보고서에서는
'전형적인 테러리스트로 냉철하며 두려움이 없다' 고 평가를 하기도 합니다.
의열단이 택한 독립운동의 성격이 폭력성을 수반하고 있었지만 결코 그들은 무고한 시민들을 죽이는 일은 없었습니다.
항상 거사 전 '목표물'을 정했고, 철저한 계획을 바탕으로 거사 당시 정확히 '목표물'에 대해서만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의로운 일을 맹렬히 수행하는, 의열단의 이름 그대로 '의로운' 투쟁이었습니다.
아나키즘 단체 의열단을 이끈 단장 김원봉이 단재 신채호 선생을 만난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김원봉은 단재와 함께 일제시대 나왔던 문건 중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과 함께 가장 훌륭한 문건으로 꼽히는
그 유명한 '조선혁명선언(의열단선언)'을 만들기에 이릅니다.
-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휴수하야
부절하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생활에 불합리한 일체제도를 개조하야,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지 못하는 리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
'조선혁명선언' 속에 잠재되어 있는 뜨거운 민족혼은
애국청년들을 항일투쟁전선에 끌어들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됩니다.
(이같은 민족주의의 고취는 몇년 후에 드디어 결실을 맺기에 이르게 되죠)
이 당시, 중국을 중심으로한 해외 독립운동은 상해에 위치하고 있는
백범 김구 선생이 이끌었던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3.1운동 이후 일제의 잔혹한 탄압에 온건노선을 걷고 있었고,
"현재는 때가 아니니, 차분히 전열을 가다듬어 독립전쟁을 준비하자" 라는 입장을 표명합니다.
이와 반대로 의열단은 일본과 조선 각지에서 엄청난 성과를 올리며
임시정부가 주춤한 틈을 타서 독립운동의 중추적 세력으로 부상 하게 되죠.
혁혁한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의열단의 활동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암살이라는 계획은 실질적인 '독립'에는 커다란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총독을 죽이면 또다른 총독이 오고..
그러면 그럴수록 국민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져만 갔고,
의열단도 시간이 지나며 점점 희생자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김원봉은 이러한 의열단의 한계를 깨닫고 커다란 결심을 합니다.
암살과 같은 행동으로 조국독립을 실현시키기엔 역부족이라는 것을 그 역시 깨달았던 것이죠.
그는 암살이 아닌 '넓은 의미의 투쟁'으로 조국해방을 실현시키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먼저
세력을 키워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수반해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단체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러한 그의 생각은 의열단 핵심 세력들과 군관학교에 입학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당시 김원봉과 그의 동료들이 입학한 황포군관학교는 혁명운동가들의 산실이었는데,
김원봉 역시 이 곳에서 정치수업을 받으며 '사회주의 사상'을 처음 접하고.. 이러한 정치교육은
그를 '의열단 단장'에서 '혁명적 지도자'로 탄생시키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칩니다.
황포군관학교의 교육과정을 마치고 졸업한 김원봉은 엄연한 '혁명가'로 다시 태어났고,
이내 민족해방과 사회변혁에 초점을 맞춘 '의열단강령'을 탄생시키며 과거에 비해
훨씬 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조국해방계획'을 꾀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김원봉은 우파의 민족주의운동과 좌파의 사회주의운동이 합쳐져야만 비로소
조국해방이 이루어 질 것이라 생각하며, 좌파와 우파를 넘나들며 둘 사이의 교류를 꾀하게 되죠.
(김원봉의 좌-우파 어느 곳에도 확실히 속해있지않던 이러한 정치적 성향은 후세에 그를 평가하며
비판,비난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 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중요한건.. 좌파든 우파든 모두 '조국해방의 최선책'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김원봉의 이러한 중립적 태도 역시 그가 생각한 조국해방의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좌파-우파 들과 노력의 방법이 다르다고 비판,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
김원봉의 혁명사상의 고취는 곧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의 창설에 이릅니다
조국독립을 위해선 무엇보다 뛰어난 인재들의 양성이 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김원봉을 교장으로 둔 군사학교는 현재 사관학교와 비슷한 성격을 띄고 있었습니다.
달랐던건.. 사관학교 4년 과정을 단 6개월 과정으로 압축하면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교육과정을 받음에도
어느 한명 낙오하는 사람과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던 학생들의 투철한 목표의식과 자긍심이었습니다.
일제의 탄압으로 철거되기 전, 4기까지 약 1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졸업생들 모두는 1940년대 국내외 독립운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됩니다.
혁명으로 한걸음 한걸음씩 힘차게 내딛던 김원봉은 좀 더 구체적인 플랜을 세우게 되고
그 결과물로 드디어 1935년, '민족혁명당'이 결성됩니다.
중국 내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5개 정당과 독립투사들이 모여 창당한 민족혁명당.
자유 평등을 실현하며 단결과 무장항쟁을 추구한 민족혁명당의 총 서기장은 김원봉이 맏게 되고,
당시 김구 선생님의 임시정부 중심의 중국 독립운동 활동은 민족혁명당이 창당하며 김원봉-김구 양김 체제로 나뉘게 됩니다.
(오히려 온건정책을 유지하고 있던 임시정부보다 훨씬 더 두드러지고 영향력있는 정당으로 부상하게 되죠)
민족혁명당의 창당으로 인해 탄탄한 기반을 갖춘 김원봉은 본격적인 무장행장을 준비 합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게 되죠.
조선의용대는 의열단원들과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의
엘리트들 만을 선별해 100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 정세는 중일전쟁의 발발과 난징대학살이란
참혹한 비극을 겪고 반일감정이 절정에 이르렀죠.
이러한 상황에서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를 통해 중국내 반일감정을 고취시켜
합심해 반일투쟁을 하고 나아가 조선독립혁명에 이른다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이들이 중국에서 국민당과 힘을 합쳐 일본과 대항하는데 사용했던 무기는 총과 칼만이 아니었습니다.
의용단의 모든 단원들은 기본적으로 한,중,일 3개 국어의 의사소통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는데,
이러한 일본어 구사능력을 이용해 중국 내에 침투해 있던 일본군들을 교란, 포섭, 회유하는 작전을 쓰곤 했죠.
조선의용대의 성과는 엄청났습니다.
지능적인 전략으로 일본군들의 사기를 빼앗고, 치밀한 첩보작전을 수행하며
중국군에서 조선의용대는 곧 없어서는 안 될 핵심적인 세력으로 인정받습니다.
이후 중국군들마저 의욕을 잃고 후퇴, 탈영하던 그 시기에도 의용대는 끝까지 남아 일제에 맞서 싸웠죠..
김원봉의 원래 계획은 중국에서 일제를 몰아내고 그 여세를 몰아 국내로 진격한다는 계획이었지만
일제의 군사력이 예상외로 탄탄했고 되려 중국군들이 퇴각하는 모습을 보며 계획을 수정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의용군 중 일부 선발대를 선별해 조금이라도 더 국내와 가까운 곳으로 북진해서
중국공산당인 팔로군과 협력해 적극적인 항일투쟁 에 박차를 가합니다.
하지만 끼니조차 제때 때울 수 없는 너무나도 열악한 생활환경에 선발대들은 커다란 어려움을 겪습니다.
10평 남짓한 조그마한 방에서 30명의 대원들이 새우잠을 자고, 물품 반입이 통제되어 고립상태를 겪고..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그들이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조국해방'이었습니다.
그들이 그곳에서 그런 고생을 하면서도 '살아야만' 했던 이유는 조국해방을 실현시키려는 강한 '의지'에 있었습니다.
이런 강력한 동기부여에도 불구하고 점차 잔혹해지는 일제의 잔혹한 소탕작전에 이들은 최대 위기를 맞게됩니다.
전차와 비행기까지 동원하며 조선의용군을, 나아가서 중국 팔로군을 쳐부수려는 소탕작전은 막강했고,
이 과정에서 어린 시절 단짝이었던.. 의열단 시절부터 김원봉과 생사를 같이한 석정 윤세주는 운명하게 됩니다.
의열단 시절.
김원봉과 함께 목숨을 건 거사 계획을 세우고,
조선의용군 창설시에도 핵심 간부로 김원봉의 굳건한 믿음을 받아왔던 윤세주 였습니다.
(아니, 어쩌면 김원봉이 그에게 도리어 크게 의지했다고 봐도 무방했습니다..)
선발대를 선별해 조선의용대 일부를 북진시킬때도 김원봉은 윤세주가 있었기에 믿고 맡길 수 있었습니다.
의열단의 철저한 거사계획과 조선의용대의 명석한 전략적 행동들은 모두 윤세주의 머리에서 나온 것어었죠.
이런 그의 죽음은 선발대의 실질적인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조선의용대의 잔류세력들과 함께 충칭에 남아있던 김원봉 역시 최대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동안 중국 국민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세력을 규합해나간 김원봉은
국민당 뿐만 아니라 공산당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된 것이죠..
1940년대 초, 중국의 정치분위기는 최악으로 흘러갑니다.
중국의 국공합작이 무산될 위기 에 처했기 때문이죠.
국공합작의 무산 위기는 김원봉에게 엄청난 타격을 줍니다.
국민당과 공산당 양측 진영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오던 김원봉은
한순간에 그 어느 쪽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 가 되어버립니다.
국민당은 그를 공산당파로 치부하며 지원을 줄였고, 공산당 역시 그를 외면합니다.
국민당은 '정치적 원조'를 계속 받고 싶으면 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통합을 요구했고,
상해의 임시정부 또한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을 재촉하게 됩니다.
김원봉은 선택의 길이 없었습니다.
조선의용군 선발대가 '중국공산당'과 규합해 항일투쟁을 하고 있던 시점에서
국민당이 백번 양보해주며 '광복군과 통합하라'는 기회를 준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조선의용대는 광복군에 통합되어
조선의용대란 이름은 광복군 제1지대로 바뀌게 되고,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에 임명됩니다.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통합은 임시정부와의 세력 통합과도 같은 의미였고
김원봉-김구 체제로 양분되던 중국내 독립운동 활동은 비로소 하나로 모아집니다.
원치않은 통합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중국 각지에 산재해있던 독립운동 세력들이 하나로 모이며
더욱더 체계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기회였고, 그리고.. 그의 목표는 언제나 조국해방 이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경우에서도 오로지 하나의 목표만을 향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고,
이러한 절대적인 동기부여 는 조선의용군이 광복군으로 통합된 그 시점에서도 사그러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해방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려던 찰나...... 조국은 독립을 맞이하게 됩니다.
1945년 8월 15일
보통 만화나 영화에서보면 이런 경우, 이 시점에서 대부분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됩니다.
하지만.. 김원봉의 비극은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조국이 독립된 그 시점부터 절정으로 치닫게 됩니다.
1945년 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 결정에 대한 논의를 하게되고
오히려 소련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미국은 이 문제를 "UN에서 다룰 것" 요구합니다.
UN에서 취급한다는 이야기는 사실상 남과 북에 두개의 정부가 선다는 것을 의미 했지요.
당시 남한에는 크게 두개의 당이 존재했습니다.
하나는 이승만이 이끈 한국민주당으로 미군정과 세력을 규합하며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을 주장합니다.
또 하나는 백범 김구 선생님 이 주축이셨던 한국독립당이었는데 남과 북은 반드시 단일국가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죠.
이런 시점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국의 신탁통치 주장은 김구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남,북한 국민들 사이에서 강한 반발을 낳았습니다.
국민들 역시 남북 단일정부 수립을 원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승만 똘마니들과 미국만이 단독정부수립을 외쳐댔던 거죠.
이에 발맞춰 (당연히)이 시점 미군정이 남측 공산당을 비롯한 진보,좌익계열들을 향한 탄압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신탁통치 결정을 둘러싼 극렬한 좌파와 우파의 대립 속에서
김원봉 역시 이제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그는 당연하게도 좌익 계열의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택하게 됩니다.
이런 선택으로 인해 김원봉 역시 미군정과 이승만 똘마니들에의한 탄압을 피해갈 수 없었죠.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있던 그 상태 그대로 악랄한 친일경찰 노덕술에 의해 검거된 김원봉은
치욕적인 상태로 수갑이 채워진 채 연행되어졌고, 체포된 김원봉은 온갖 수모와 갖은 시련을 당합니다.
22살 약관의 나이로 오로지 조국해방만을 위해 살아왔던 그에게 조국이 행했던 짓꺼리들은 치욕적인 대우와 탄압이었습니다..
이러한 갖가지 탄압에도 수그러들지 않던 좌파계열 독립운동가들과 국민들의 강한 반발에
어쩔 수 없이 미군정은 남과 북에 있는 여러 정당들이 하나로 모여 논의를 갖는 자리를 마련해야 했고
이렇게 개최된 것이 1948년 4월 18일부터 12일 동안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 입니다.
회의가 개최되는 기간조차도 미군정이 남한에서 펼친 '반공정책'은 그치지 않고 오히려 절정에 달했는데
그들은 회의에 참석한 모든 정당들의 당원들과 그 가족들마저 '빨갱이', '불순분자'로 매도하고 선동했습니다.
남북연석회의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단일정부 수립의 기미는 미국의 일방적인 입장 고수로 어려워지고
결국 이런 막무가내 밀어붙이기 식의 정책은 광복 3주년인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한 정부수립 선포식을 일방적으로 선언하며 사실상 남과 북의 단절 로 이어집니다.
(이 시점에서 미군정은 행정권을 남한 정부에 이양하는 대신 군작전통제권은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할 때까지 갖는다는 이상한 조항을 맺죠..)
미국 수뇌부의 손에 넘어가버린 남한 땅에서는 더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김원봉 선생..
결국 그가 선택한 길은 남북연석회의 후 평양에 남아 북한 건립에 참여하는 길이었습니다.
이런 판단은 김원봉이 후대에 이승만 정권에 의해 '빨갱이'로 취급되는 가장 결정적인 부분이었습니다.
의열단 결성 후,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조선의용단까지 이어지며 혼신의 독립운동을 펼친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였던 그의 업적은 '월북' 이라는 단어 하나로 깡그리 잊혀져 버리고 왜곡됩니다.
월북한 김원봉이 남한에 두고 온 가족들은 모두.. 이승만 똘마니들에 의해 사살당합니다.
김원봉 가족들의 비극은 김원봉에게도 이어집니다.
북한에서 혁혁한 성과들을 올리며 노동훈장까지 수여한 김원봉.
하지만 한국전쟁 발발후 강력한 김일성 중심의 일인독재체제로 바뀐 북한은
그무렵 북한 내 '반김일성계'를 처단 하기에 이르렀고, 과거 독립운동 시절
중국 국민당 장개석과 같이 활동한 적이 있던 김원봉의 전적은 그를 구속시키기에 충분한 사유였죠.
김원봉은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일평생을 조국독립에 바친 자신을 대하던 조국의 태도가 너무나도 믿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평생 바쳐온 목표와 신념, 진정한 조국해방을 잃은 김원봉이 선택한 길은...
......자살이었습니다
(아직까지 김원봉 선생의 최후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완고한 성격으로 보면 자살로 생을 마감하셨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김일성의 지령에 따른 암살설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원인조차 확실히 모를 정도로 조국은 젊은 혁명독립투사에게 너무나도 냉정했습니다..)
식민시대에서.. 그 더러운 일제 치하에서 독립된 후,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
미국의 강력한 신탁통치 아래, 극렬한 반공 이데올로기 속에 우리가 교육받았던
그 모든 내용들이 '사실'이며 '진실'이었던 것일까요..
그들의 사상에 반하는 이들은 매도하고 남김없이 처단하고 비극을 동반하며 살아갔습니다.
(이런 당시 형국에서 김구 선생님이 후세에 까지 그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약산 김원봉 선생
거사 직전, 항상 검은 정장 차림으로 '자신의 최후가 될지도 모를'사진을 남겨두던 의열단의 단장
의로운 일을 맹렬하게 행한다는 원칙 아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국해방에 온 몸을 던진
그들을 이끌었던 열정적인 독립투사, 열정적인 젊은 혁명가를 우리들은 쉽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매국노 이완용과 우범선, 독재 정치자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이라는 더러운 이름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우리와
김원봉 선생을 비롯한 여운형, 조봉암 선생같은 분들의 이름을 '사상에 반했다는 이유' 하나로
알지 못하고, 배우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
과연 어느 쪽이 진정한 비극일까요..
출처는 베드 ,parismatch 님이 올리신 자료인데..읽고나서 너무 가슴이 먹먹해져서 제가 소장하고있는 자료에요
방금 대왕,세종 갤러리에서 대왕,세종 후속작품으로 독립군에대한 이야기를 다룬작품이 어떠겠느냐 라는말이 지나가는듯이 나왔는데
정말 공감하는바입니다.. 물론 친일파들이 정권을 잡고있는 이 시점에 제대로만들어지기는 힘들겠지만요..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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