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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을사늑약 100년, 일제 강제병탄 95년, 해방과 분단 60년, 한일협정 40년을 맞아 친일청산이라는 민족사의 숙원을 풀기 위한 분수령에 서 있습니다. 이에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역사의 발전과 과거 청산을 희망하는 국민들의 성원과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축이 되어 일제강점기 친일인사 3,090명에 대한 명단을 발표하여 우리민족의 역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바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는 시련과 극복으로 점철된 험난한 과정이었습니다. 일제식민지배와 분단, 동족간의 전쟁, 그리고 독재로 이어진 민족사의 비극은 그 상처를 온전히 치유하지 못한 채, 아직도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온갖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친일이라는 치욕적인 현실이 있었다면, 반대로 국내외에서 전개된 고난에 찬 자랑스런 항일투쟁의 역사도 엄연히 존재하였습니다. 한국독립유공자협회가 얼마전 추산하기로는, 3.1만세운동에 참가한 국내외 동포가 1천만명, 독립운동자(의병, 독립군, 광복군 등)가 600만명, 순국선열자가 60만명 정도이며, 그 중에서 대한민국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분이 9,000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독립운동가란 이유로 서훈이 보류되었던 백여명이 넘는 분들이, 최근 독립유공자 심사기준 완화를 통해 새로이 서훈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대한민국정부로부터 새로이 서훈을 받은 분들중 대표적인 두 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 분은 몽양 여운형이고 다른 한 분은 약산 김원봉입니다. 1. 몽양 여운형은 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백범 김구 선생보다 십년 늦게 태어났습니다. 그의 나이 서른 세살(1918)에 중국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당수에 취임해 조국해방운동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9년 1월, 김규식박사를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견해 한국의 완전자주독립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그해 11월 일본정부 초청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제국호텔에서 한국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일본조야를 발칵 뒤집고 마침내 내각을 총사퇴시키는 계기를 만듭니다. 1929년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된 여운형은 일본으로 압송되어 3년 징역형을 치루었고 1942년에 두번째로 투옥됩니다. 1936년에는 손기정선수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그가 사장으로 재임중이던 조선중앙일보가 강제폐간되고, 자신도 사장직에서 물러납니다. 동아일보가 일장기를 지운 사건을 보도한 것은 그 뒤의 일입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그는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취임합니다. 그리고 2년 뒤, 서울 혜화동 로타리에서 총에 맞아 62살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그것은 그가 평생을 통해 당한 9번째 테러였으며, 백범 김 구 선생이 서거하기 2년전입니다. 2. 약산 김원봉은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기미년 1919년 늦가을 스물 두 살의 나이로 중국 길림성에서 다른 열두명의 동지와 함께 대일무력단체 의열단을 결성하고 단장이 됩니다. 그가 보낸 의열단원 김 지섭은 일본왕을 제거하기 위해 동경에 있는 황궁 앞 이중교에 폭탄을 던졌다가 체포되어 옥사합니다. 의열단 활동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그는 중국 국민당이 세운 황포군관학교를 수료한 뒤 35세에 중국 남경교외에서 혁명간부학교를 열고 교장에 취임합니다. 백범 김 구선생이 낙양에 있는 중국 군관학교안에 한인특별대를 설치하기 일년 반 전입니다. 한편 김원봉은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이듬해 우한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총대장에 취임한 뒤 우한전투에 참가합니다. 백범이 광복군을 창설하기 2년 전입니다. 1939년에는 독립운동 관련 한인 정당들을 통합하는데 백범과 함께 선봉에서 7당 통합회의를 이끕니다. 1944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명실상부하게 망명세력 전체가 참여하는 통일정부로 개편될 때, 그는 군무부장(1942년 12월 광복군 부사령 겸 제1지대장에 이미 취임)으로, 백범은 주석으로 취임해서 망명정부가 해체될 때까지 함께 합니다. 이 무렵 그는 첫부인과 사별하고 두번째 혼례를 올릴 때 백범이 주례를 섰습니다. 그 정도로 그는 백범을 존경했고, 백범 또한 그를 아꼈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도 백범을 뒤따라서 12월 2일에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48살이었습니다. 약산 김원봉이 고향 밀양에 살고 있는 부모형제들을 찾아 가자, 마을사람들은 금의환향한 독립운동가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고, 지방경찰서장도 찾아와 인사를 드릴 정도였습니다. 그가 중국에서 독립운동가의 길을 가는 동안 그의 부모형제들은 고향에서 얼마나 많은 핍박과 고통을 당하였을지는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합니다. 1947년 3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주도한 24시간 총파업 때 그는 경찰에 체포됩니다. 그런데 그를 체포한 사람이 바로 대표적인 친일파 친일경찰 노덕술입니다. 의열단 단장으로 많은 공적을 쌓고 광복군 부사령과 임시정부의 국방장관으로 돌아온 김원봉이 조국에 돌아와 그의 손으로 가장 먼저 제거했어야 할 부왜역적 친일경찰의 손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무혐의로 풀려났는데, 그는 이때의 충격과 상심으로 1948년 4월 자진월북했고, 그 해 9월 북한정권의 국가검열상에 취임합니다. 그러나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공산독재 정권과는 상종하기가 어려웠던지 1958년 11월에 61살의 나이로 숙청되고 맙니다. 참으로 기막힌 것은, 일제 때는 숨을 죽이며 살았고 해방 뒤에 잠시동안만 세상의 부러움과 주목을 받았던 약산 김원봉의 부모형제는 그의 월북과 함께 빨갱이 집안으로 지목되었고, 그들은 일제 때보다 더욱 심한 고통을 받고 몰락합니다. 6.25당시 네형제가 한국경찰에 떼죽음당했고, 노부는 굶어 죽었습니다. --- 해방 뒤 대한민국정부수립 과정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역대정부는 반공논리를 우선시 해 이념적인 공적심사를 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일제 때는 좌파도 독립운동 이념 중 하나였으므로 그 공적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줄곧 있어 왔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정부가 그분들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하든 아니 하든, 그분들의 겨레사랑과 나라사랑의 정신, 헌신, 업적은 영원히 변치도 사라지지도 않고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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