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 |
몽양 여운형 선생의 서거
몽양 여운형 선생은 1947년 7월 19일, 극우폭력 테러 단체인 「백의사(白衣社)」(주1)의 성원인 19세 청년 한지근(韓智根)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그 무렵 몽양 여운형 선생은 명륜동 전무묵(鄭武默)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여운형 선생은 그날 아침 9시에 도착한 고경흠(高景欽)을 대동하고 성북 4동 김호(金乎)의 집을 향해 차를 달렸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재미 조선사정협의회」 회장 김용중(金龍中)과 작별인사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김용중과 환담을 마치고 그곳을 나온 몽양은 명륜동 정무묵의 집에 잠깐 들렸다. 그런 후 계동 집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갈 생각으로 명륜동을 향하여 차를 몰았다. 몽양이 탄 차가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렀을 때에, 그곳 경찰관파출소 앞에 서있던 트럭 한 대가 갑자기 달려 나와 선생이 탄 차를 가로막았다. 7월의 강력한 태양이 불 눈을 가지고 내려다보고 있어서 차 밖의 사정을 잘 볼 수 없었다. 선생의 달리던 차는 섰고 선생과 함께 타고 있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이러한 찰나 두 발의 총성이 울림과 동시에 여운형 선생의 거구가 풀썩 앞으로 숙여졌다. 흉한 한 놈이 자동차 뒤에 매달려서 선생을 향해 권총을 두 발을 쏘았던 것이다. 신변보호인 박성복은 권총을 빼어들고 범인을 추적했고 함께 타고 있던 고경흠은 피를 흘리는 몽양선생을 안고서 차는 원남동 「서울대학 대학병원」으로 달렸다. 그러나 흉탄을 맞은 지 채 2분도 못되어 차가 병원에 닿기도 전에 선생의 맥박 고동은 멈추고 말았다. 흉한의 총탄은 한평생 조국독립을 위해 피 끓어 뛰고 있던 심장의 박동을 멈춰버리게 했다. 바로 심장을 관통했기 때문이다. 흉한이 쏜 탄환 하나가 몽양의 등에서 복부를, 다른 하나가 어깨 뒤쪽에서 심장을 정통으로 관통했다. 그때 시각이 바로 오후 1시였다. 혹독한 일제 식민지시대에서도 지조를 지키고 끝까지 조국의 광복을 위해 투쟁한 민족해방의 위대한 지도자 한 분을 동족의 손에 의해 무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단독정부를 수립하려 했던 세력들에게는 좌우합작과 남북통일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몽양 여운형 선생은 없어져야 할 존재였던 것이다. 선생이 한평생을 통하여 부르짖어 왔고 그렇게도 염원하고 노력했던 남북통일과 자주독립 통일정부의 수립을 보지 못하고,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한 채 여운형 선생은 영영 떠나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날 밤 몽양의 시신은 병원 시체실에 안치되었다가 이튿날 오후 「인민당」 당사로 옮겨졌다. 흉한 한지근이 소속했던 「백의사」는 김두한이 고문으로 있던 비밀결사로 이승만의 분단정권을 창출하려는 정책을 폭력적으로 옹호하는 극우 테러단체이다. 김두한은 「백의사」에서 여운형 선생을 암살하기 위한 결사대를 뽑을 때 자기가 한지근을 뽑았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김두한은 암살 전날 밤 일본군 장교용 권총 1정을 내주었고 수첩에다 그 총기번호를 적어두었다고 하며, 한지근은 재판과정에서 자기는 애국투사라고 떠벌렸다고 한다. 한지근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며칠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리고 그가 미성년자라 하여 소년원으로 송치되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그들 일당들은 이들 하수인들을 일본으로 빼돌려 숨겼다고 한다. 「백의사」의 고문으로 암살의 배후로 지목된 김두한이 당시 수사지휘자인 사상검사 조재천(曺在千)에게 불려갔으나, 그는 불려간 자리에서 자신의 수첩에 적어둔 총기번호를 보여 주고 “이만하면 잘 알 것 아니오.”라고 하고, “한지근 선에서 그 윗선으로 수사를 확대하면 조 검사는 물론 그 아들까지 살해하겠다.”고 협박하여 그 이상의 수사 진전을 저지시켰다고 뽐냈다고 한다.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선생은 1886년 경기도 양평(楊平)에서 당시 양반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우무학당(郵務學堂) 등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한 후 1907년 고향집에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세우고, 1908년 그리스도교에 입교했다. 강릉에 초당의숙(草堂義塾)을 세워 민족의식을 고취하던 중 국권이 피탈되고 학교가 폐쇄되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선교사 클라크를 따라 서간도(西間島)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견학하며 국외에서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학교를 중퇴하고 1913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 남경(南京)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상해(上海)로 가 1918년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발기하여 김규식(金奎植)을 파리평화회의에 그 대표로 파견하였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으로 되었는데, 일본정부는 이를 자치운동(自治運動)의 하나로 해서 회유하려고 공작하여 그 해 11월 그를 일본 동경(東京)으로 초청했다. 선생은 오히려 선수를 치고 장덕수(張德秀)를 통역관으로 삼아 데리고 가서 일본의 조야(朝野) 인사들에게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함으로써 상해임정의 독립운동을 일본의 자치운동으로 바꿔치기 하려는 얄팍한 일제의 공작을 짓부숴버렸다. 1920년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가입하고, 1921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遠東)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했으며, 거기에서 조선혁명과 민족해방운동의 사정을 세계에 호소하였다. 일제는 이를 걸어 1929년 제령(制令)위반죄로 3년간 징역을 살렸다. 1933년 출옥하여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에 취임했는데 1936년 신문이 일제에 의하여 정간되자 사임하고 귀향하여 조국광복의 운동방법을 고민하던 중 1944년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음은 앞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8·15해방을 맞아 1944년부터 이미 조직된 국내의 해방운동조직으로서의 「조선건국동맹」을 기반으로 하여 안재홍(安在鴻) 등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9월에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열어 「중앙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총대 없는 정권은 미 군정의 총대로 파괴되고 말았음도 앞서 자세히 말한 바 있다. 12월에 「조선건국동맹」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여러 민주정당과 아울러서 「조선인민당」으로 재조직 창당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1946년 29개의 좌익단체를 규합하여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朝鮮民主主義民族戰線)」을 결성하였다.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 그리고 「조선신민당」 3당 합당국면을 맞이하여 「조선공산당」의 종파싸움으로 순조로운 합당이 이루지 못하자 그로부터 이탈된 민주인사들을 운동전선으로 재규합하여 「근로인민당」으로 묶어세웠다. 이러한 여운형 선생의 폭넓은 정치운동은 미제와 그 주구 친미 친일 극우 보수정치세력이 조국을 분단하려는 남조선단독정권 수립에서 가장 걸림돌로 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 주구들은 여운형 선생을 제거하려고 8번이나 테러를 가했다. 강장한 체력을 가진 여운형 선생은 그때마다 이겨내었으나 결국 이처럼 암살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몽양이 한평생을 통하여 부르짖어 왔고 그렇게도 염원하고 노력했던 남북통일과 자주독립 통일정부의 수립을 보지 못하고,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한 채 몽양은 영영 떠나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날 밤 몽양의 시체는 병원 시체실에 안치되었다가 이튿날 오후 인민당사로 옮겨졌다. 이 크나큰 불행한 소식이 전해지자 친척과 동지들뿐만 아니라 나라의 모든 인민들은 놀랐고 또한 슬퍼하였음은 물론이다. 몽양의 시신이 안치된 인민당사에는 조문객이 줄을 이었고 수없이 많은 조문과 조전이 잇달아 날아들었다. 각계각층의 인사들로 장례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장례위원회는 몽양의 장례를 조선 최초의 「인민장」으로 거행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 장지는 처음에는 남산으로 정했지만 당국이 허가하지 않아서 마포에 있는 와우산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곳도 또한 당국에 의하여 거부되었고 마지막으로 지금의 묘지인 우이동 태봉이 선정되었던 것인데 이때에도 여러 가지로 방해를 받았다. 장례를 준비할 때부터 장례가 끝날 때까지 경찰의 간섭과 감시가 심했다. 심지어 치산(治山)하는 산역 일꾼을 성북경찰서에 연행하는 일도 있었고, 조문객 중에서도 경찰의 심문을 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군정경찰의 탄압은 거기서만 그치지 않고, 장례식 전날인 8월 2일 조병옥 경무부장은 장례를 거행할 때 교통도덕을 준수하라는 담화까지 발표하였는가 하면, 장례식 당일에는 장의행렬의 전차선로 통과도 금지하는 등 일부러 혼잡과 불편을 부채질 했다. 그러나 몽양의 서거를 슬퍼하는 인민들은 자진해서 상가의 문을 닫았고 영구가 지나가는 거리거리는 수만 군중들로 꽉 차있었다. 그들은 통곡을 하고 혹은 흐느껴 울고 혹은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면서 몽양의 영구를 바라보거나 혹은 뒤따르는 진정한 조객들이었다. 특히 영구가 을지로 5가 ‘경성버스’ 앞에 다다르자 거기에 일하고 있던 수십 명의 노동자들이 달려 나와 소리치며 통곡하는 바람에 가족과 조객들이 통곡을 터뜨리게 되었고 영구의 행렬은 또 한 번 울음과 눈물의 바다로 변했다. 노동자들을 향해 몽양선생이 늘 하신 말씀인 “나는 부자의 향수 냄새보다는 노동자의 땀 냄새를 더 좋아한다.” 는 몽양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몽양의 장례는 임시로 가장(假葬)을 했다고 한다. 남북통일이 이루어지고 양쪽에 흩어져 있는 가족과 동지들이 함께 모여 또 한 번 장사를 지내기 위해 관을 철제로 만들고 관속에 방부제를 많이 넣어서 30년간은 썩지 않도록 해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몽양이 그토록 염원했던 남북통일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세월은 벌써 그 갑절인 60년을 훨씬 넘고 말았다. 나는 바쁘게 민전회관으로 갔으나 할아버지는 안계셨다. 그날 저녁에도 안 오셔서 못 뵙고 외갓집에 돌아와 22일 수산으로 갈 때까지도 못 뵈었다. 할아버지는 밀양 군중대회의 일로 많이 바쁘셨고 우익반동들의 테러 때문에 계시는 곳이 일정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 <주>
(1) 백색테러단 「백의사(白衣社)」는 1945년 11월 서울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일본식 집(이 집은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사살된 개축한 집이지만 바로 그 집이다.)에서 당시 월남한 청년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해서 조직되었는데, 중국 국민당 장개석(蔣介石) 정부의 반공특무기관인 「남의사(藍衣社)」를 모방해 백의민족을 상징한다는 뜻으로 백의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김두한이 바로 이 백의사의 고문이다. 백의사의 이른바 총사령인 염응택(廉應澤 - 월남해서는 염동진)은 장개석의 국부군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 – 약칭 「군통국」)에서 활동하다가 연안의 모택동 팔로군에 잡혀 그 와중에 척추뼈가 부러지고 실명하고 자칭 국부군 중장이라 하면서 1944년 서울의 여운형 선생의 「건국동맹」을 모방하여 평양에서 「대동단(大同團)」을 조직했다. 8.15해방 이후 이 「대동단」은 백색테러단체로 이북에서 활동했는데 암살, 테러를 시도하는 한편, 반탁운동을 선동하고 이북의 인민정권에 반대하여 활동하다가 1945년 9월 조선공산당 평남지구당위원장인 현준혁(玄俊赫)을 암살한 뒤 월남 도망하여 「백의사」를 조직했다. 염응택은 월남한 후 여운형 암살사건과 1946년 9월 철도노조 파업투쟁파괴, 대구10월인민항쟁 파괴에도 깊이 관계했다고도 한다. 「백의사」는 이북에 잠입하여 1946년 3.1절 평양 기념행사에 지도부 암살을 위해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호위하고 있던 소련군 장교가 땅에 떨어진 수류탄을 딴 곳으로 던져 지도부를 지켰다고 한다. 3월 3일에는 최용건(崔庸健)의 집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했고, 3월 5일 최용건의 집을 재차 습격하였으나 역시 실패했다. 3월 9일 김책(金策)의 집을 습격하였고 3월 11일에는 강량욱(康良煜)의 집을 습격하여 그의 아들・딸과 가정부·경비보초 등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