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현대사 재조명

[스크랩] 일제하 밀양 청년 운동7

감효전(甘曉典) 2012. 2. 6. 23:03

日帝下 密陽의 靑年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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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수

창신대 교수

 

제2장 밀양청년회의 청년운동

 

5. 민족해방운동

밀양청년회를 비롯한 이 지역의 사회운동단체들의 활동은 민족계몽과 사회운동에 근거한 교육활동․강연회 개최․토론회 및 웅변대회 개최․운동회 개최 등의 사업을 주로 전개하였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사회운동의 여건이 성숙되어있지 않았고, 일제가 문화정치를 실시하였다고는 하나 활동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하에서 일제와 마찰이 없이 진행 가능한 최대한의 활동이었다.

 

특히, 교육활동은 노동․농민․여자(부인) 야학의 설립 등 일제의 식민지 노예교육에 맞서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하는 조선민중에게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으로 사회운동단체들 뿐만 아니라 각 마을․문중 등에서도 근대적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이 독립에 기초가 된다는 인식 아래 지속적으로 이루어 졌다.

 

이상의 활동들은 계몽운동 차원에서 비정기적으로 개최되었으며, 이는 청년들의 민족독립 의식을 고양시켜 사회운동의 저변확대에 기여하였다.

한편 무장투쟁론에 의거한 민족해방 활동은 밀양청년들이 주축이 된 의열단(義烈團)의 두차례에 걸친 밀양경찰서 폭탄사건이다.

 

첫 번째 거사는 1920년 중국에서 제조한 폭탄을 안동을 거쳐 밀양에 반입하여 밀양군 밀양면 내이동 김병환의 집에 숨겨두고 실행을 위해 단원들이 국내로 들어오던 중 동년 6월 일경에 피체된 사건이다. 당일 체포된 윤세주, 황상규를 비롯한 7명 외에도 관련자 16명 전원이 다른 지역에서 연속적으로 검거되고 밀양에서 폭탄이 압수되어 의열단이 계획한 제1차 항일폭파계획은 실패로 돌아가, 중추단원들 대부분이 검거되어 의열단으로서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 거사를 주도한 의열단의 뿌리가 밀양으로, 의백(단장) 김원봉을 비롯한 핵심단원의 출신지가 밀양이고, 이 사건의 실행계획이 밀양을 근거로 진행되어, 일제는 이 사건을 일컬어 <밀양폭탄사건>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인데 항일독립투쟁사에서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건이다. 이 <밀양폭탄사건>은 국내외를 놀라게 하였던 큰 사건으로서 비록 미수에 그치고 수포로 돌아갔으나 일본인과 친일조선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여 밀양인의 저항정신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그후 한봉근, 김상윤 등은 검거망을 피해 북경으로 돌아가서 새로 의열단을 강화시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고, 검거된지 거의 1년만인 1921년 5월 23일 경성지방법원의 재판기록을 보면 곽재기(29세:징역8년), 이성우(22세:징역8년), 김기득(23세:징역7년), 이낙준(31세:징역7년), 황상규(30세:징역7년), 윤세주(22세:징역7년), 신철휴(24세:징역7년), 윤치형(29세:징역5년), 김병환(32세:징역3년), 배중세(27세:징역2년), 이주현(20세:징역1년,집행유예), 김재수(34세:징역1년,집행유예), 강상진(35세:무죄), 최성규(34세:무죄), 곽영조(31세:무죄), 강원석(예심에서 석방) 등이 처분을 받았다.

 

특히 윤세주는 법정에서 “우리의 제1차 계획은 불행히도 실패했지만 아직 잡히지 않은 우리 동지들은 도처에 있으니 반드시 강도 왜적을 섬멸할 것이다”라고 최후 진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밀양청년 주도의 두 번째 거사는 1920년 8월경 밀양군 상남면의 최경학(崔敬鶴)이 예전부터 아는 사이인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출신 임태오(任泰昊)를 만나 밀양경찰서에 투탄(投彈)할 것을 권유받고, 12월26일 폭탄 두개를 받아, 27일 밀양경찰서에 투척하여 다수의 경관에게 상해를 입힌 사건이다.

 

최수봉이라는 이름은 독립운동 당시에 쓰던 별명이고 호적상의 이름은 최경학인데, 열사는 1894년 3월 3일 밀양군 상남면 마산리 마산동에서 태어나 밀양공립보통학교를 다니다 퇴학을 당하고 동화학교에 들어가 을강 전홍표 선생의 훈도를 받다가 동화학교마저 폐고되자 1912년 동래 범어사 안에 있던 명정학원으로 학적을 옮겨 졸업하였다.

 

학교 공부도 거의 쫒겨다니며 마치고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을 때 밀양으로 돌아온 최수봉은 윤세주, 윤치형, 김병환, 이장수 등이 주동한 3월 13일 밀양장날에 일어난 <밀양만세운동>이후 서간도 봉천, 안동 등지를 돌아다니다, 천신만고 끝에 소문을 듣고 북만주 길림으로 가서 김원봉, 윤세주, 김상윤, 한봉근, 한봉인 등 고향동지들이 먼저 조직한 무장독립투쟁단체 <의열단>에 뒤늦게나마 정식으로 가입을 하여 거사를 준비하게 된다.

 

1920년 밀양경찰서장 와타나베가 순사 19명을 집합시켜 연말 치안유지를 위한 서장의 훈시를 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최수봉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준비해 간 두발의 수류탄 중 한 발을 경찰서 현관 오른편에 있던 서장실을 향해 유리창 밖에서 던졌다. 유리창을 깨뜨리고 들어간 폭탄은 도순사부장 남경오의 오른쪽 팔에 맞아 가볍게 마루바닥에 떨어져 그 충돌력이 약했던지 불발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장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범인을 체포하기 위하여 달려나오는 순간에 또 한발이 터져 현관문과 마루와 벽이 파손되었다.

 

왜경들에게 쫓기는 사이 최수봉은 달아나다가 아무래도 일이 실패하였음을 감지하고 도주로 근처에 있던 황석이라는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 품에 숨겨두고 있던 25cm짜리 단도로 배를 그었다. 절명 전에 왜경들이 억지로 살리려고 부산의 도립병원으로 이송하여 약 2주간 응급 치료 후에 검찰로 넘겼는데, 복부가 15cm나 찔렸는데도 현장에서 죽지 못하고 왜놈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최수봉의 폭탄투척으로 죽은 사람은 없었으나 밀양을 중심으로 경상도 일대에서 연이어 일어나는 폭탄사건으로 왜놈들의 공포는 절정에 달했고 그 만큼 의열단에 대한 그들의 증오심도 절정에 달했다고 볼 수 있다.

 

부산지방법원은 처음에 최수봉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으나 검사가 이에 불복, 1921년 4월 16일 대구복심법원 형사 2부에 항소하여 마에사와 재판장으로부터 사형을 선고받고 곧이어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5월 23일 동 법원의 기각결정으로 1921년 7월 8일 마침내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으니 열사의 나이 27세로 결혼도 하지 않은 미혼청년의 몸이었다. 그는 오늘날까지 그에 대한 행적이 안타깝게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밀양인의 저항정신을 대변하고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위대한 애국자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다.

 

이 외에도 기독 청년출신으로 경북폭탄사건(일명 이종암 사건)에 가담하여 복역 중 옥중에서 자결한 고인덕(1887~1926.12.21)열사는 밀양장로교회를 설립하신 고삼종 목사의 친동생으로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1918년 11월경에 세상일이 잘못되어 감을 보고 분연히 고향을 떠나 상해, 길림, 안동 등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에 관여를 하다가 밀양 사람들이 조직한 의열단원이 되었으며 그의 부인도 1919년 3월 13일 밀양 장날에 있었던 밀양만세운동 때에 태극기를 만들어서 공급하는 등 안팎으로 독립운동에 온 힘을 기울였던 사람이다.

 

1920년 여름에는 밀양으로 돌아와 윤세주를 비롯한 동지들과 같이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주요기관, 밀양경찰서 폭파계획에 가담하는 등 활약을 하였는데, 1921년 2월 10일 오후 8시경 부북면 출신 백희원과 같이 밀양장로교회에서 개최하는 기독교청년회 강연회에 참석하여 「안락의 본은 고초에 있다」는 조선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연설을 한 것이 화근이 되어 동년 3월 22일에 왜경에 체포되어 3년의 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던 중 지병으로 인하여 1년 6개월 만에 병 보석으로 출옥을 하였다.

 

그 뒤에도 그는 해외로 동지들을 파견할 때에 여비가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재산을 정리하여 3천원의 거금을 만들어 제공하기도 하였는데, 이종암사건으로 이종함, 배중세, 김병환, 신철휴 등 12명의 동지들과 함께 다시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여에 걸쳐 예심공판을 받기 위해 복역 중에 왜놈들의 갖은 악형과 고문을 견뎌내지 못하였으므로 약병을 깨어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1차에는 실패하고 두 손에 채워진 수갑으로 변기를 깨뜨려 그 파편으로 배를 그어 많은 피를 흘리고 열이 높아져 1926년 12월 21일 옥중에서 절명한 것으로 당시의 신문들은 전하고 있다.

 

고인덕 열사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밀양에 전해지자 가족은 물론 밀양 청년 수십 명이 일부러 대구까지 올라가 고인의 유해를 수습하여 돌아왔는데 부인 이씨와 친동생 금식씨의 애처로운 울음소리는 멀리 하늘에 사무쳐 유해를 영접하려는 그의 친구들과 많은 밀양 사람들이 흐르는 눈물을 멈추기 어려웠다고 전하고 있다.

 

기독교청년회강연관련 기사, 동아일보, 1920.9.16

독립열사들이 재판장으로 들어가는 모습

1921년 의열단사건 공판기록

의열단 관련 밀양의 주요 독립운동가들(사진)

고인덕(1887~1926), 김병환(1889~1947), 황상규(1890~1931), 최수봉(1894~1921)

한봉근(1894~1927), 김상윤(1897~1927), 김원봉(1898~1958), 윤세주(1901~1942)

김상윤 열사의 의열투쟁기념비(상남면 기산리 마을입구)

출처 : 밀양 이야기(밀양향토사연구회)
글쓴이 : 우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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