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현대사 재조명

[스크랩] 일제하 밀양 청년운동4

감효전(甘曉典) 2012. 2. 6. 23:06

日帝下 密陽의 靑年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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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수

창신대 교수

 

  2장. 밀양청년회의 청년운동

1. 밀양청년회 창립과 조직

가. 밀양청년회의 창립

일반적으로 1920년대 전반기 밀양청년단체 회원들은 대부분 지방사회의 ‘유지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풍속교정․덕성함양․지식개발․산업진작 등을 목표로 하는 사회계몽단체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밀양에서 처음으로 조직된 청년운동단체로 확인되는 것은 1919년 가을 경 설립된 밀양구락부이다. 명칭은 비록 ‘구락부(club)'로 일반 사회단체의 형식을 띠었으나 목적이나 사업은 여타 청년회와 마찬가지였다.

 

밀양구락부는 조직 당시 상업야학회 활동에 주력했음이 확인된다. 1920년 5월엔 농상민대운동회를 개최했으며, 문예회나 토론회 등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사업에 들어가는 경비는 주로 기부금으로 조달하였는데 대표적 기부자들은 한춘옥(500원), 김주옥(100원), 최성붕(50원) 등이었다.

 

밀양구락부는 1920년 7월 밀양구락부장인 김병환(金餠煥)과 읍내 무역상 한춘옥 등이 밀양경찰서 폭탄사건 혐의로 검거되는 일을 겪는다. 그 뒤 밀양구락부는 1920년 8월 8일 조직체계의 한계와 명칭의 협의적 성격을 지녔다고 보고 1920년 8월 8일 영남루에서 200여 명 참석 하에 총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청년회로 명칭을 변경하기로 하였다. 이 때 선출된 회장은 이성희, 부회장 이팔우, 총무 김래봉이었다.

김병환(밀양구락부장)

밀양구락부야학관련기사, 동아일보,1920.7.2

밀양구락부관련기사, 동아일보, 2000.6.11

 

이후 밀양청년회는 정기적으로 집행위원회와 총회를 열어 여러 가지 지역현안에 대한 안건을 토의하였으며, 1920년대 밀양의 청년운동, 나아가 밀양지역 사회운동 전반을 주도했던 단체로 성장하였다..

 

. 밀양청년회 조직과 구성

밀양청년회 조직이 체계적으로 구성된 것은 1922년 4월 정기총회에서부터다. 회장제에서 위원장제로 전환하고 규칙 제정․임원 확충 등을 통하여 조직적인 면모를 갖추었다. 밀양청년회는 초기에 회장 안삼덕(安三得)을 중심으로 서무부, 회계부, 교육부, 체육부, 지육부, 사무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원장: 안삼득(安三得)

회계부장: 이영집(李永集), 한성근(韓成根). 서무부장: 박임수(朴壬守), 차정규(車貞奎)

체육부장: 정광호(鄭光浩), 설인길(薛仁吉). 지육부장: 김희지(金熙址), 한인수(韓仁守)

사교부장: 표문장(表文長), 박고지(朴高支). 덕육부잔: 권성업(權成業), 박상호(朴尙五)

감사: 박장억(朴章億)

 

밀양청년회의 초기 간부들은 당시 밀양지역에 남아있던 대표적 인물들이며, 지역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는 계층으로 설인길(薛仁吉)․박상호(朴尙五) 등은 밀양 최초의 3․1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청년회에서는 총회를 개최할 때마다 별도로 임시의장을 두어 사회를 맡아 진행했으며, 회순은 회장 또는 위원장의 개회사, 전(前) 회의 회록(會錄)낭독, 각종 경과보고와 부서별 보고, 규칙 및 세칙 수정․통과, 집행위원 등 임원 선정, 기타 안건토의 등으로 진행되었다.

 

임원은 대개 두표 방식으로 선출되었으며, 밀양청년회 창립 당초에는 회장제였으나 1922년 4월 3회 정기총회에서 위원(장)제로 바뀌어 집행위원이 중심이 되는 체제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조직이 체계적으로 꾸려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밀양청년회는 부서별 사업을 전개해 나갔는데, 청년회 창립초기에는 서무부․회계부․교육부․체육부․덕육부(德育部)로 구성되었다가 1922년 3회 정기총회에서는 교육부는 보이지 않고 지육부(智育部)와 사교부가 추가되었다.

1923년에는 회계부가 재무부로 바뀌고 권업부(勸業部)가 신설된 듯하며, 11월에는 음악부가 신설되었다. 그러나 이후 부서가 많이 바뀌어서, 부흥기성대회가 있던 1925년에는 서무부․문예부․체육부․사회부로 구성되어 이후 지속되었던 듯하다.

밀양청년회(1922년) 안삼덕 위원장

창립때부터 1923년 2월까지 선임된 밀양청년회의 임원들은 아래의 표와 같다.

 

<1920~1923년 초기 밀양청년회 임원>

시 기

임 원

1920.8.8

회장 이성희, 부회장 이필우, 총무 김래봉, 덕육부장 김성준 등으로 회원은 200여명〔1920년 밀양구락부장 김병환〕

1921.5.1

위원 암삼득, 서무부 정광호, 회계부 이영집, 교육부 최창렬, 체육부 김성준,

덕육부 표문호, 사무원 한인수

1922.4.22

위원장 안삼득, 회계부 이영집, 부원 한성근, 서무부장 박임수, 부원 차정규,

서무부 정광호, 부원 설인길, 지육부장 김희지, 한인수, 사교부장 표문호, 부원 박고지 덕육부장 권성업, 부원 박상오, 간사 박장억

1923.2.22

위원장 권중휘, 서무부장 김희지, 재무부장 표문호, 지육부장 박상오, 덕육부장 안삼득 체육부장 박임수, 권업부장 한춘옥, 사교부장 이성희, 의사 박장억, 고문 밀양군수, 경찰서장, 보통학교 교장

당시《동아일보》《조선일보》의 밀양청년회 기사 자료를 토대로 편집

 

그리고 다음표에서와 같이 밀양청년회 임원들 중에는 지방의 재력가(이성희, 박장억, 이영집, 한춘옥, 안삼득), 밀양3․1운동 참가자(김래봉, 설인길, 박상오, 김병환)와 의열단 관련자(최수봉,김병환) 등 세 부류의 사람들이 크게 참여하고 있었다.

<초기 밀양청년회 임원 중 지배엘리트들의 경력>

성 명

경 력(년,월)

이성희

밀양지방위원회(1910,11), 밀양유치원설립모금의연 20원납임(23,8), 남천강 철교 및 제방축제 진정위원대표(25,6),밀양번영회고문(26,4), 밀양면장사임(26,7), 밀양부면장역임(27,8), 밀양군청이전방지회위원(27,5), 밀양면 면사무소 삼문리이전반대회장(27,3)

김래봉

1910년대 밀양 부북면 춘화리 사립계성학교 교장역임, 춘화리 3․1운동을 지도, 의열단 최경학 사체 출영을 위해 대구행/최경학 시신에 기도한 것이 불경죄에 해당되어 부산지방법원 검사국에 이송(21,8)밀양교회설립자이며 밀양강습소 설립자였던 고 고삼종 추도식 때 가족위문사/밀양역전 한춘옥 자택 야학1주년 기념 助事(22,3), 밀양수제구제활동/밀양출신 유학생귀향 환영회․위로회 사회/밀양유치원설립기성회 위원․유치원교장/밀양청년회관 낙성식 경과보고(22,7~9),, 밀양청년회내 임시 사무소를 둔 사립집성학원 후원회 개최 때 연사(24,8), 밀양번영회 간사(26,4),밀양공립보통학교기부금모집위원/1926년 밀양수재구제회 회장겸 회계를 담당, 이때 그는 구제금 전체 4568원의 수입금 중 1천원을 횡령하고 달아남(26,7)

박장억

향리출신, 전서기신분으로 밀흥야학교기부금납입(1908,8), 밀양식산조합발기(1910,4), 명원여학교창설(1910,5), 밀양불교회발기인(21,1), 밀양청년회연합운동개최회장(21,5), 밀양성내 강습소 발기인(22,1), 밀양군 시의소 회원, 밀양정업회회장(23,2), 밀양유치원창립기성회 회계(23,8), 밀양금융조합장(23,4/27,4), 밀양면협의원(23,5~26,5), 밀양공립보통학교 학부형회회장(25,5/26,5), 밀양강 철교부설 진정대표위원(25,5), 밀양군청 이전반대 임시의장(27,5), 밀양번영회회장(26,4), 협동조합발기인(28,2), 밀양공보개축기성회 부회장(28,5), 밀양동인조직(29,4)

이영집

밀양여자청년회동정금 납입(22,2), 밀양유치원창립기성회위원(23,8), 남천강 밀양공보학부형회 평의원(25,11), 밀양번영회간사(26,4), 밀양포목상조합장(29,5), 밀양청년동맹운영 야학동정금기부(30,3), 신간회밀양지회 검사위원(30,4)

한춘옥

원래 부산사람. 경부선 개통 이후 品川지점장으로 밀양진출, 정미․운동․내외곡물무역상, 의열단 관련자 한봉근과 한봉인 형제의 삼촌임. 그의 사위는 의열단원이었다가 변절하여 20년 6월 김병환과 윤세주가 검거되는데 일제에 정보를 제공한 구영필임, 밀양군 시의소회원(1910,4), 商民신분으로 밀양기독교인(19,5), 밀양경찰서폭탄사건혐의자로 김병환과 함께 서울압송(20,7), 밀양불교회발기인(21,1), 자택에서 야학생모집 무료 비용담당(22,3), 밀양면 강습소연합회회장(22,10), 밀양면 강습소연합회 회장(22,10), 물산장려운동선전위원장(23,2), 밀양유치원창립기성회위원(23,8), 밀양철교가설면민대표(25,5), 밀양번영회고문(26,4), 밀양공보학부형회부회장(26,5), 밀양협동조합발기인(28.3), 밀양동인회 준비위원(29,4)

안삼득

기독교인(19,5), 물산장려운동선전연사(23,2), 밀양양조주식회사 상무역(31,4)

<자료> 한말 일제하 밀양지역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김승, 밀양문학, p43-p45, 2004.

 

이들은 한말 지방위원회(이성희)와 식산조합(박장억․한춘옥)등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일제하 밀양번영회(이성희․김래봉․박장억․이영집․한춘옥), 밀양면협의회(박장억․한춘옥), 금융조합(박장억․한춘옥), 밀양장업회(박장억), 면장(이성희), 각종 민원진정위원들을 지낸 인물들이었다. 특히 박장억은 1910년대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1923년 밀양장업회 회장으로 물산장려운동을 이끌었다.

 

향리출신인 그가 1920년대 밀양 경제계의 중심 인물로 부상하여 물산장려운동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은, 밀양사회의 부가 이제 새로운 자본주의의 경제활동을 통해 이윤을 추구한 계층에게 옮겨 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상당 정도의 계층 변동과 여론 주동층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수있다.

 

초기 밀양청년회에는 이들뿐만 아니라 1920년 밀양경찰서폭탄사건에서 드러나듯이 최수봉(崔壽鳳), 김병환과 같은 의열단의 직접적인 테러방식의 투쟁노선을 추구한 인물들도 혼재되어 있었는데 이점이 다른 지역의 청년회와 차별성을 갖는 밀양청년회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의열단 관련 독립열사들>

출처 : 밀양 이야기(밀양향토사연구회)
글쓴이 : 우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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