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현대사 재조명

[스크랩] 일제 하 밀양의 청년 운동2

감효전(甘曉典) 2012. 2. 6. 23:08

日帝下 密陽의 靑年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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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수

창신대 교수

  밀양 청년운동의 배경

1. 밀양 청년운동의 태동

가. 밀양학생들의 비밀결사단 조직

1910년 일제에 의해 식민지화가 이루어진 이후 많은 민족운동가들이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한 방략으로 비밀결사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비밀결사의 영향 아래 밀양에서도 항일적 분위기에 고조되어 있던 동화학교 학생 김원봉(金元鳳)‧ 윤세주(尹世冑) 등이 연무단을 조직한 것이다.

 

연무단은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이룰 것을 목적으로 하여 조직된 항일 학생단체였다. 동화학교에 편입하기 전 김원봉‧ 윤세주 등은 밀양공립보통학교에 다녔는데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 소식을 접하고 일본어과 공부를 거부하고 소위 ‘천장절 경축’을 반대하여 ‘일장기를 변소의 똥구덩 속에 꽂는’ 반일운동 등을 전개했다. 이 사건으로 이 학교 일본인 교장은 학생들을 위협하고 구타 고문하였지만 어린 학생들은 시종 부인하였다. 결국 이 일을 계기로 김원봉‧윤세주는 일제의 일본인학교를 떠나 동화학교에 편입하였다.

 

동화학교는 전홍표(全鴻杓)가 광무연간(1897~1906)에 밀양읍 내일동에 소재한, 조선시대 밀양군의 군무를 관할하던 옛 군관청 자리에 설립한 중학과정의 사립학교였다. 이 학교는 새로운 지식을 통하여 청년을 교육하고 자주독립의 애국사상을 고취해서 항일사상과 항일투사를 육성할 것을 교육목표로 삼았다. 이 학교 교장 전홍표는 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이 학교 출신 김원봉‧윤세주를 비롯하여 최수봉(崔壽鳳)‧김상윤(金相潤)‧김소지(金小池)‧박소중(朴小宗)‧정동찬(丁銅燦) 등은 이 학교에서 항일의식을 고취받고 3‧1운동과 의열단 등의 민족해방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와 같이 동화학교 설립자 전홍표의 영향을 받은 연무단원들은 밀양출신으로 민족해방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한편 1915년을 전후하여 대한광복회와 조선국권회복단 등이 결성될 무렵 밀양에서도 국외의 무장독립노선과 흐름을 같이한 비밀결사 『일합사』가 결성되었다. “조국 독립을 위하여 청춘의 一片丹心을 合한다” 는 뜻의 일합사는 한말 국운이 장차 기울어감을 보고 이를 일본인의 손에서 되찾기 위해 구국운동을 결심한 황상규(黃尙奎)‧ 김대지(金大池)‧ 윤치형(尹致衡)‧ 안곽(安郭)‧ 이영재‧ 이각(李覺)등이 조직하였다.

 

일합사 역시 밀양 출신으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윤세복 등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은 일합사의 약산 김원봉과 약산의 고모부이자 밀양 민족운동의 대부였던 백민 황상규가 윤세복 선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봐서 이런 연결 관계를 일정 정도 상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1916년도 약산 김원봉은 친구인 한봉인과 그의 삼촌인 한춘옥의 도움으로 중국으로 먼저 건너간 윤세복, 황상규 선생등과 만나게 된다.

 

한씨가문의 독립운동의 근원 한춘옥 단애 윤세복

밀양의 3․1운동은 일합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밀양지역에서는 일합사의 구성원이었던 윤세주와 윤치형이 서울로 올라가 서울의 동향을 보고 귀향한 뒤 밀양의 3․1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즉 밀양지역 3․1운동은 1910년대 비밀결사체였던 일합사를 발판으로 해서 전개되었으며, 특히 김원봉과 윤세주처럼 동화학교에서 민족교육을 받고 일합사에서 활동했던 중심 인물들의 다수가 1920년대 의열단에 참여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밀양에서 조직된 일합사‧연무단 등은 항일운동의 선구적 비밀결사가 되었고, 이러한 경험은 밀양3‧1운동과 조직적이고 체게적인 항일운동의 토대로써 밀양 출신 청년운동가들에게 적극적 항일투쟁으로 나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국외 밀양 청년들에 의해 추진된 항일독립운동의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나. 밀양의 민족교육운동

1) 개창학교(밀양공립보통학교)

한말의 민족운동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선각자들에 의한 근대학교 설립운동이다. 당시 선각자들은 근대학교 설립에 앞장섰는데 밀양지역 최초의 근대학교는 1897년11월 1일 문산 손정현(孫貞鉉, 충추원의관;1847~1905)에 의해 설립된 사립 개창학교였다. 사립개창학교는 향청(鄕廳)에 속한 관아 부속건물에 세운 학교로서 개창학교의 설립에는 향반계열의 개명 유학자 인사들이 관여한 듯하다. 1901년 공립 개창학교로 되었다가 1906년 교육령에 의하여 밀양공립보통학교로 개칭되었다. 오늘날 밀양 초등학교의 전신이 된다.

 

밀양공립보통학교는 밀양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 수많은 독립운동 인사들을 배출했다. 밀양공립보통학교가 일제 강점 시기 밀양지역 민족교육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고 하는 것은 1919년 3․1운동시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활동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19년 읍내에서 3.13만세운동이 일어난 다음날 160명의 학생들이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했으며, 4월 2일에는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 상당수가 참여한 밀양소년단 단원 40여 명이 윤태선을 선두로 야간에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면서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 독립만세시위운동에 참여했던 윤태선․강덕수․박소수․윤수선․김성수 등 소년단원들은 구속되어 1년 6월에서 6월의 징영향을 선고받았다. 이러한 만세시위운동은 밀양공립보통학교가 민족운동의 중심지임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한편, 밀양공립보통학교는 춘계운동회, 학예회 등을 개최했는데, 이것은 단순한 학교의 행사였을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 400~1,500명 정도가 참여하는 지역의 문화축제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 점에서 밀양공립보통학교는 밀양 교육의 요람이면서 밀양 신문화의 산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밀양시민대운동회 광경 <동아일보 1928.5.23>

 

2) 사립 학교

1910년대 밀양의 사립학교는 동화학교, 동진학원, 계성학교, 경신학교, 일신학교, 집성학교6개소로, 경남지역에서는 동래(11개소) 다음으로 많은 숫자였다. 이는 밀양지역이 경남의 다른 지역에 비해 개화와 혁신의 기풍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밀양의 근대학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개창학교(밀양초등학교 전신) 뿐만 아니라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던 1908년 9월 설립된 사립 동화학교(同化學校)이다. 사립 동화학교는 1910년대 비밀결사운동과 1919년 3․1운동, 1920년대 의열단투쟁 나아가 일제시기 밀양지역 청년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많은 인물들(김원봉․윤세주․김상윤․최수봉 등)을 배출한 학교였다고 앞서 밝힌바 잇다.

 

또한 3․1운동시 밀양지역의 만세시위운동을 지도하다 체포 투옥된 김소지, 박소종, 정동찬 등도 동화학교 출신이었다. 이렇듯 동화학교는 일제 강점 시기 항일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는 등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기관이 되었으나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사학 탄압정책에 의해 폐쇄되었다.

 

이것은 일제가 1910년대에 계속하여 사립학교에서의 민족교육을 탄압하고, 또 3․13운동 직후에는 사립학교가 만세시위운동의 중심지가 되면서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밀양지역 근대학교인 개창학교(밀양공립보통학교)와 동화학교는 1920년 국내외를 비롯한 밀양지역 청년운동과 민족해방운동에 많은 인재들을 배출한 요람으로 자리했다.

 

동화학교를 졸업한 김원봉, 윤세주, 최수봉, 김소지, 박소종, 정동찬 등은 모두 밀양 3.1운동과 의열단에 관련되었으며 개창학교의 후신인 밀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윤치영(졸업년도,1911년), 표문호(1913년), 윤세주(1914년), 박고지․정동찬․박임수(1916년) 등 또한 밀양청년회와 신간회밀양지회에서 청년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2. 밀양의 3.1운동의 전개

가. 밀양의 3.1운동

1919년 밀양의 3․1운동은 밀양지역 독립운동사에서도 획기적 의미를 지닌다. 밀양의 3․1운동은 3월 초부터 4월 초까지 한달 이상 지속되었으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계층이 참가했다. 유교․기독교․불교 등 지역 내 모든 종교 조직들도 총동원되었다.

 

이 중 가장 조직적으로 계획되고 격렬하게 전개된 것은 표충사의 승려들이 주도한 단장면 태룡리의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참여인원도 5천여 명으로 가장 많았을 뿐만 아니라 주재소를 습격 파괴하고 헌병을 폭행하는 폭력운동으로 발전하였으므로 일경도 발포로써 겨우 진압되었다.

 

<표> 밀양지역 3․1독립운동 현황

일시

장소

참석인원

주모자

3월 13일

밀양읍

1000여명

윤세주, 윤치형, 정동찬, 김소지, 박소종, 박만수, 박상오, 설인길, 권재호, 김병환 등.

3월 14일

밀양읍

360여명

밀양공립보통학교학생 160여명

3월 15일

밀양천변 솔밭광장

미상

밀양유림구락부, 기독교인

3월 20일

밀양시장

미상

안희원 장송행렬의 우발적 시위

4월 2일

밀양읍

소년단원 50여명

밀양소년단:윤태선,강덕수,박소수,윤수선,김성수등

4월 4일

단장면 태룡리

5000여명

표충사승려:이장옥,구연윤,이찰수,오응석,오학성,손영식,김성읍,김경호,이준호,

손종헌 등

4월 6일

부북면 춘화리

춘화,청운,덕곡주민 300여명

金씨문중:김래봉,김응삼,김승수,김영환,김응진 등

4월 7일

대룡각(大龍角)

3천여명

미상

4월 10일

청도면 인산리

50여명

미상

 

위의 표와 같이 밀양인이 전개한 3․1운동은 이후 밀양인들의 청년운동사가 전개되는데 주요한 영향을 미쳤다. 하나는 국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밀양 인사들을 의열단이라는 단일 조직으로 결집시켰다는 점이다. 황상규․김원봉 등 밀양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의열단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폭력적 파괴를 중심으로 한 의열투징 노선에 의거했다는 점에서 당시의 어떤 단체보다도 일제에 대한 저항성이 강한 조직이었다. 또 지역내에서는 밀양의 3.1운동을 일으킨 청년들을 중심으로 지역내 사회․문화 계몽운동을 주도한 청년단체를 결성하여 보다 체계적인 청년운동을 전개해 나갈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2) 밀양 3월13일 만세운동

영남최초의 만세운동인 밀양의 3.13 만세운동은 일합사․연무단 등의 비밀결사, 동화학교․정진학교 등의 민족교육학교, 전홍표․황상규 등의 항일인사들에 의해 길러진 밀양의 항일독립의식이 3․13만세운동을 통해 표출된 것이다. 그 주체는 윤치형․윤세주 등과 밀양공립보통학교 교우들, 기독교인, 농민들이 주축이 되어 사전 준비와 치밀한 계획 아래 조직적으로 추진되었다. 전홍표․윤치형․윤세주 등은 밀양면 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한 뒤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선의열단을 결성하는 주체가 되었고 이후 의열투쟁의 선봉이 되었다.

 

다음호에서는 이러한 밀양청년운동의 배경하에 전개된 밀양청년단체들의 조직과 흐름에 대해 설명하기로 한다.

출처 : 밀양 이야기(밀양향토사연구회)
글쓴이 : 우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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