非不非是不是 差之毫釐失千里
(비불비시불시 차지호리실천리)
그름과 그르지 않음, 옳음과 옳지 않음이여
어긋남이 털끝만치라도 있으면 천리를 잃나니
☞ 영가현각(永嘉玄覺), <증도가(證道歌)>
※ <증도가(證道歌)>는 영가현각(永嘉玄覺) 선사가 705년경 남종선(南宗禪)의 시조인 6조 대감혜능(大鑑慧能)에게서 선요(禪要)를 듣고 하룻밤에 증오(證悟)를 얻은 뒤 대오(大悟)의 심경에서 증도의 요지를 247구 814자의 고시체로 읊은 것이라 한다.
돈황(敦煌)에서 출토된 ≪선문비요결(禪門秘要訣)≫에도 증도가와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증도가>에서는 7언시의 율격에 맞춰 '差之毫釐失千里'라고 했으나 일반에서는 差之毫釐 失之千里(차지호리 실지천리), 差之毫釐 謬之千里(차지호리 유지천리) 또는 差之毫釐 繆以千里(차지호리 무이천리)라는 표현이 널리 회자(膾炙)되고 있다.
"(시작할 때) 털끝만큼의 차이가 나중에 천리만큼이나 벌어지고 만다"는 뜻이다(cf: 誤繆=誤謬). 줄여서 호리천리(毫釐千里, 출발에서 一毫一釐의 차이가 결과에서 천리를 隔한다)라고도 한다.
보리달마(菩提達磨)에서 시작된 중국 선불교는 신광혜가(神光慧可)를 거쳐 감지승찬(鑑智僧璨)에 이른다. 승찬은 유명한 ≪심신명(心信銘)≫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
毫釐有差 天地懸隔
(지도무난 유혐간택
단막증애 통연명백
호리유차 천지현격)
지극한 도에는 아무 어려움이 없다
오직 이러쿵저러쿵이 문제다
그것도 밉고 곱고 차별하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 문제가 없지만
만일 추호라도 차별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결과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서로 멀어지게 되리라
달리 "만일 도를 닦는 사람이 진리에 티끌만큼(毫釐)이라도 어긋남이 있다면 잠깐 사이라도 능히 본심을 지키지 못하리라"고 풀기도 한다.
<증도가(證道歌)> 247구 가운데 유독 이 대목에 주목하는 것은 이 구절이 현대 물리학의 총아(寵兒)로 불리는 카오스이론의 핵심을 적확히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20세기 과학사에서 기록될 세 가지 큰 업적으로 △상대성이론(相對性理論) △양자역학(量子力學) △카오스이론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들 이론은 하나 하나가 물리학분야에서 일어난 혁명이었으며 기존의 뉴턴의 물리학(고전물리학)의 교의(敎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어떤 물리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상대성이론은 절대적 공간과 시간이라는 뉴턴 물리학의 환상을 없애버렸다. 양자이론은 측정과정을 제어할 수 있다는 뉴턴 물리학의 꿈을 깨뜨렸다. 그리고 카오스이론은 결정론적 예측가능성이라는 라플라스적 환상을 없앴다."
그러면 카오스이론이란 무엇인가? 카오스이론의 핵심은 "입력의 미세한 차이가 출력에서 엄청나게 큰 차이로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좀더 압축하면 '초기조건에 대한 민감한 의존성'(sensitive dependence on initial condi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일례로 '나비효과'(Butterfly Effect/連鎖蝶變)라는 것이 있다. 주로 날씨와 관련해 많이 인용되는 용어이다. 나비 한 마리가 베이징(北京)에서 공기를 살랑거리면 다음달 뉴욕에서 폭풍이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얘기의 무대를 돌려 조선시대로 가보자.
정조(正祖) 임금이 경연(經筵)에서 신하들과 주희(朱熹)의 ≪근사록(近思錄)≫을 강담(講錟)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이 자리에서 심염조(沈念祖)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幾는 움직이는 것의 기미이니 선악의 움직임을 모름지기 이곳에 나아가 이해하여야 된다. 주렴계(周濂溪)가 '幾' 한 글자를 뽑아낸 것은 참으로 (공부에) 친절하다. 凡人이 날마다 쓰는 사이에도 오히려 幾微를 삼가야 되는데 더구나 임금이 하루에 만기(萬機)를 살핌에랴.
털끝만큼의 차이가 나도 천리나 어긋나게 되는데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언제나 '幾' 한 글자에 항상 省察을 가하여, 버리고 취할 것을 가리면 精一의 道가 곧 여기에 있다."
[幾是動之微 善惡之動 須就這處理會 濂溪之拈出一幾字 是親切 凡人日用之際 尙愼其幾 而況人主一日萬機 差之毫釐 繆以千里 可不愼歟 每於一幾字 常存省察 決擇去取 則精一之道 便在此矣 ☞ ≪홍재전서(弘齋全書≫ 卷65, <경사강의(經史講義)>]
서정수(徐鼎修)는 "한 생각의 기미(幾微)에 선악이 나누어진다"면서 임금이 요순(堯舜)이 될지, 걸주(桀紂)가 될지도 오직 '幾' 한 글자에 달려있다고 설파한다.
"'幾'자의 의미가 크다. 한 생각의 기미(幾微)에 선악(善惡)이 나누어진다. 그 幾微를 살펴 善을 따르면 堯舜이 되고, 살피지 못하여 惡을 따르면 桀紂가 된다. 堯舜과 桀紂의 나누어진 까닭이 단지 한 '幾'字에 있다. 대개 생각이 처음으로 발하여 남이 알지 못하는 때가 곧 幾微이다.
진실로 이 幾微를 살펴 善과 惡을 나누어 반드시 惡은 버리고 善을 따라서 밖에 발하고 일에 드러나 人心(天心)이 (道心의) 命을 듣고 天理가 혼연하는데 이르면 堯舜이 聖職도 전혀 이에 지나지 않는다."
[幾字之義 大矣 一念之微 善惡分矣 察其幾 而循善則堯舜是也 不能察 而從於惡則桀紂是也 堯舜桀紂之所以分 只在一幾字上耳 蓋念之初發 人所不知之時 卽是幾也 苟能察是幾而分善分惡 惡則克祛 善則必從 以至發於外著於事 而人心聽命 天理渾然 則堯舜之聖職 不過如是矣 ☞ ≪홍재전서(弘齋全書≫ 卷65, <경사강의(經史講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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