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사/고서화(古書畵)

[스크랩] 시화일체(詩畵一體)

감효전(甘曉典) 2012. 1. 12. 20:36

※ 근현대 중국화가 부유(溥儒)의 <공취습인의(空翠濕人衣)>
 

藍谿白石出  玉川紅葉稀
山路元無雨  空翠濕人衣
(남계백석출 옥천홍엽희
 산로원무우 공취습인의)


쪽빛 계곡물에 하얀 돌 드러나고
옥빛 시내엔 붉은 낙엽 섞이었네
산길에는 본래 비 내린 적 없는데
비취빛 산 기운 옷깃을 적시네


☞ 왕유(王維), <산중(山中)>

 

※ 청말근대 화가 왕곤(汪琨)의 <空翠濕人衣> (1936年作)


- 소식(蘇軾)은 왕유(王維)가 그린 <남전연우도(藍田煙雨圖)>를 두고 "왕유(摩詰)의 시를 음미해보면 그의 시(詩) 속에는 그림이 있고, 그의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림 속에 시(詩)가 있다"(味摩詰之詩 詩中有畵 觀摩詰之畵 畵中有詩 及詩畵本一律 天工與淸新)고 했다. 

 

유명한 시중유화(詩中有畵)· 화중유시(畵中有詩)론의 제기로 '시중유화'는 특히 앞 2구에 구현되어 있다.

   

청(淸)나라 때의 문인이자 주석가(注釋家)인 풍응류(馮應榴)의 ≪소시합주(蘇詩合注)≫에 보면, 소식(蘇軾)은 그의 시 <한간마(韓幹馬)>에서 "두보(小陵)의 詩는 형상이 없는 그림이고, 한간(韓幹)의 그림은 말이 없는 詩"(少陵翰墨無形畵 韓斡丹靑不語詩)라고도 했다.

 

※ 당대(唐代) 화가 한간(韓幹)의 그림 <조야백(照夜白)>

 

당(唐)나라의 서화이론가 장언원(張彦遠)은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에서 "서화(書畵)는 이름이 다르지만 같은 몸체"(書畵異名而同體)라 했다.

 

북송(北宋)의 화가 곽희(郭熙)는 ≪임천고치(林泉高致)≫ <화의(畵意)>편에서 "그림은 소리 없는 시(詩)이고, 시(詩)는 형태 없는 그림"(畵是無聲詩 詩是無形畵)이라고 말해 시화일체(詩畵一體)를 강조했다.


역시 북송(北宋)의 서화가인 장순민(張舜民)은 ≪화만집(畵墁集)≫ 제1권(卷一) <발백지시화(跋百之詩畵)>에서 "시(詩)는 형상(形象)이 없는 그림이고, 그림은 형상이 있는 시(詩)"(詩是無形畵  畵是有形詩)라고 했다.

 

※ 북송(北宋) 화가이자 화론가인 곽희(郭熙)의 <산수(山水)> 수권(手卷)


공자(孔子)의 47세손으로 송(宋)나라 때의 문인이었던 공무중(孔武仲)은 ≪종백집(宗伯集)≫  제1권 <동파거사화괴석부(東坡居士畵怪石賦)>에서 "글은 형태 없는 그림이며, 그림은 형태 있는 글이라. 둘은 그 자취는 다르지만 의취는 같다"(文者無形之畵  畵者有形之文  二者異跡同趣)고 했다.


소동파의 문인이었던 황정견(黃庭堅)은 "이후(李侯)는 시구(詩句)를 글이나 말로써 토(吐)해 내기를 원치 않아, 엷은 먹색의 그림으로 소리 없는 시를 그려 놓았네"(李侯有句不肯吐 淡墨寫作無聲詩)라고 했다.

 

르네상스시대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필기(筆記)≫에서 "그림은 말없는(벙어리) 시요, 시는 보이지 않는(눈먼) 그림"(畵是'啞巴詩' 詩是'瞎子畵')이라 했다.

 

 

※ 왕유(王維)의 그림 <장강적설도(長江積雪圖)>


일찍이 소식(蘇軾)은 <서언릉왕주부소화절지(書鄢陵王主簿所畵折枝)> 詩에서 '시서본일률'(詩畵本一律)이라고 했다. 시(詩)와 서(畵)가 본래부터 일사(一事)요, 일률(一律)임을 밝힌 것이다.

 

서(書)와 화(畵)는 근원적으로 같은 것(書畵同源)이요, 시(詩)와 서(畵)는 一事이고 一律이니 시(詩)와 화(畵)의 관계 또한 一律이고 一事일 수밖에 없다.

 
이로부터 '시서화 일률론'(詩書畵 一律論)'이 형성되었고, 학문하는 선비들은 일신(一身)에 시서화(詩書畵)를 겸비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이른바 '시서화 삼절(詩書畵 三絶)'이라는 말도 이렇게 생겨났다.

 

출처 : 청경우독(晴耕雨讀)
글쓴이 : 경화수월鏡花水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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