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半)달
희멀끔하여 떠돈다, 하늘 위에, 빛 죽은 반(半)달이 언제 올랐나! 바람은 나온다, 저녁은 춥구나, 흰 물가엔 뚜렷이 해가 드누나. 어두컴컴한 풀 없는 들은 찬 안개 위로 떠 흐른다. 아, 겨울은 깊었다, 내 몸에는, 가슴이 무너져 내려앉는 이 설움아! 가는 님은 가슴에 사랑까지 없애고 가고 젊음은 늙음으로 바뀌어 든다. 들가시나무의 밤드는 검은 가지 잎새들만 저녁빛에 희그무레히 꽃 지듯 한다.
들가시나무 : 들판에 있는 가시나무. 희그무레히 : [형] 희끄무레하다. 희끄무레하게. |
프라이라는 비평가는, 어둠과 자아의 깨어남 사이에 있을 수 상응관계를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실의와 위약에 빠지는 것은 대낮이고 정복적인 영웅적 자아가 깨어나는 것은 자연의 어둠 속에서라고 말했다.
빛과 어둠이 갈마들어 '빛 죽은 반달'(2행)이 나오는 시간이 되면, 화자의 의식은 깨어난다. '언제 올랐나!'(2행)라는 표현은, 대상이 어느 순간 문득 인식 가능한 지평으로 들어왔음을 알려준다. 겨울이 깊고(2연), 젊음이 늙음으로 바꾸어드는(3연) 것도 이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인식 가능한 대상이 된다. 물론 깨어난 화자의 자아가 정복적이거나 영웅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그와 반대다. 이는 사랑의 진멸(盡滅)이라는 말로 설명 가능할 듯하다.
화자의 막 깨어난 의식은, 사랑의 진멸(盡滅)을 깨닫는다. '가는 님은 가슴에 사랑까지 없애고'(9행) 떠나가 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들가시나무 잎새의 떨어짐에 비유된다. 님의 떠남과 늙음이라는 인간사가 잎이 지는 자연현상에 비유된 것이다. 유사성에 근거하여 인간사와 자연사를 대비시키는 이런 기법은 소월이 자주 사용하던 시적 기교로, 시상을 효과적으로 전개하면서 시의 의미를 강화하는 효과를 거둔다. |
김 소월(본명 :廷湜, 필명/아호: 素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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