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
실버드나무의 검으스렷한 머리결인 낡은 가지에 제비의 넓은 깃나래의 감색(紺色) 치마에 술집의 창(窓) 옆에, 보아라, 봄이 앉았지 않는가. 소리도 없이 바람은 불며, 울며, 한숨지워라 아무런 줄도 없이 섧고 그리운 새캄한 봄밤 보드라운 습기(濕氣)는 떠돌며 땅을 덮어라.
검으스렷한 : [형] 검은 듯한. 깃나래 : '깃'과 '날개'의 합성어. 감색(紺色) : [명] 검은빛을 띤 푸른 빛깔의 색. 청색(靑色)과 자색(紫色) 간색(間色). 줄도 없이 : 까닭도 없이. |
시적 화자는 여러 곳에서 봄을 확인한다. 실버드나무의 낡은 가지, 제비꼬리(감색치마), 술집 창옆 등. 그런데 봄이 아직 가까이까지 오지 않은 탓일까? 봄이 와 머문다는 사물들은 왠지 밝고 활기찬, 생동감 넘치는 봄기운과는 거리가 멀다. 새싹이 움트는 물오른 가지가 아니라 '검으스렷한 낡은 가지'(1행)이며, 지지배배 봄을 노래하는 제비의 주둥이가 아니라 제비꼬리이며, 봄날 취객의 술주정이 들릴 것같은 '술집의 창 옆'(3행) 이다. 우리는 이런 사물들을 통해서 회색빛깔에 가까운 화자의 우울한 심리를 확인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2연에서는 화자의 우울한 심리가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설움과 그리움이 까닭없이 차오르고, 우는듯 한숨짓듯 바람이 분다. 2연 첫행에는 역설적 표현이 쓰였다. 소리도 없는 바람이 '울며, 한숨'(4행) 짓는다고 표현한 것이다. 소리 없는 바람은 자연의 바람이고, 울며 한숨짓는 바람은 화자의 마음 속에 부는 바람이다. 봄밤의 분위기가 보드랍고 온화하면 할수록 화자의 서러움과 그리움을 사무치게 된다. 1연에서 조장되었던 화자의 우울함은, 이런 역설을 통해서, 더욱 확대 심화되는 것이다.
이런 화자의 우울은 일종의 식민지 지식인의 우울함이기도 하다. 통로가 막히고, 소망을 키워갈 수 없던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봄밤의 '보드라운 습기'(6행)는 오히려 한숨이며, 절망이 아니겠는가?(한국어에서 '습기'라는 단어는 왠지 '음습한 분위기'를 이끌고 다닌다) |
김 소월(본명 :廷湜, 필명/아호: 素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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