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붕의 영주 부석사(삼도헌의 한시산책227)
榮州浮石寺(영주부석사)
周世鵬
浮石千年寺(부석천년사)는 부석사는 천년 넘은 옛 절터
半臨鶴背山(반임학배산)을 학배산 반쯤은 다다라있네
樓居雲雨上(루거운우상)이요 높은 다락 구름 위에 세워졌는데
鐘動斗午間(종동두오간)을 종소리는 하늘에서 치는가 보다
斫木分河逈(작목분하형)하고 나무를 찍어내어 물길도 트고
開巖鍾玉閑(개암종옥한)을 바위를 쪼개내어 물도 맑어라
非關眈佛宿(비관탐불숙)이요 부처님 탐탁하여 머무는 것 아니오
蕭濾劫忘還(소려겁망환)을 맑고도 깨끗하여 돌아가기 잊었오
斫:쪼갤작 逈:빛날 형. 蕭:맑은대쑥 소. 濾:거를 려. 巖:바위 암.
오늘은 7회 서예세상답사를 앞두고 영주 부석사를 읊은 주세붕선생의 시를 감상하기로 한다. 아래에서 이 시를 지은 주세붕에 대해 간단히 소개한다.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의 본관은 상주(尙州)이고,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이다. 중종 17년((1552)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였다.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가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갔으며,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3년 뒤에는 헌납(獻納)으로 김안로(金安老)를 탄핵하였다.
주세붕이 그의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자 향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흰 실 여덟 타래를 주면서 병이 곧 나을 것이라고 했다. 그 뒤 정말 어머니의 병이 낫고 80일을 더 살다가 죽었는데, 그제야 그 여덟 타래가 80일 동안 목숨을 연장시켜 준 징조였음을 알았다.
주세붕
주세붕이 일곱 살 때에 그의 어머니가 오랫동안 병석에 있어 빗질을 못하자 자신을 머리를 감고서 기름을 바른 뒤 그의 어머니 머리카락에다 갖다 대어 이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건너오게 하니, 주위 사람들이 모두 그의 효성을 기특하게 여겼다.
그 뒤 그의 아버지상을 당하여 산소 앞에 여막(廬幕)을 짓고 그곳에서 거처하였는데 3일에 한 번씩 내려와서 어머니를 뵈면서도 자기 방에는 한 차례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집에 개가 한 마리가 있었는데 주세붕이 출입할 때마다 따라다녔다. 그런데 주세붕이 상주가 된 뒤로는 그 개에게 고기를 주어도 먹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주세붕의 효성이 짐승까지 감동시켜 그렇다고들 여겼다.
중종 36년(1541)에 풍기군수(豊基郡守)가 되어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가 살던 옛 터에다 사우(祠宇)를 지어 봄가을로 제향을 지내며 백운서원(白雲書院)이라고 불렀다.
백운서원은 좌우(左右)의 질서가 정연하였다. 주민들 가운데 준수한 자를 모아서 학문을 강론하며 연습하게 하였고, 곡식은 저축하고 남은 것을 가져다 학생들의 숙식 자료로 제공하였으며, 녹봉에서 얼마를 떼어 경전(經傳)과 사기(史記) 등의 서적을 구입하여 강독하는 데 대비하도록 하였다. 서원 터를 처음 닦을 때에 그 터에서 구리로 된 그릇 3백여 근(斤)을 얻게 되어 그것을 팔아 경비로 썼다.
그 뒤 명종 5년(1550)에 퇴계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백성의 교화는 임금을 경유하지 않으면 뒷날 반드시 퇴폐한다는 취지로 감사(監司)에게 편지를 보내어 임금에게 보고를 드리되, 송(宋)나라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 학규(學規)에 의거하여 임금이 서원 이름을 짓고 편액(扁額)을 써주며 겸해서 전토와 노비를 내려주어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열심히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하도록 하였다.
주세붕 선생 글씨
감사 심통원(沈通源)이 그의 말대로 임금에게 보고하여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이름을 지어 내려주고,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에게 서원 기문(記文)을 짓도록 명하였다. 또한 그 일로 인하여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책을 내려 주었으니, 사원(祠院)에 임금이 이름을 지어주고 편액을 써서 내려주는 일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명종 5년에 대사성으로서 불교를 배척하는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주세붕은 조정에서 벼슬한 30년 동안을 한결같이 가난한 선비처럼 지내며 산과 못가에서 노니는 것을 좋아하여 지금까지 경치가 좋기로 이름난 곳에는 가끔 그가 남긴 자취가 있다.
60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벼슬은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저서(著書)로는 『죽계지(竹溪誌)와 무릉지(武陵誌)』가 있고 합천(陜川)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있다.
소수 서원[紹修書院]이란?
이번 답사는 먼저 부석사를 살펴보고, 이어서 소수서원을 살펴볼 계획이다. 따라서 소수서원에 대해서도 간단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소수 서원은 당시 왕이 직접 현판을 내린 사액서원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소수 서원 전경
소수 서원은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順興面) 내죽리(內竹里)에 있는 한국 최초의 서원. 1542(중종 37)년에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백운동(白雲洞) 서원이 1550(명종 5)년에 이황(李滉)의 건의로 사액(賜額)된 이름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고등 교육 기관이 소수 서원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紹 이을 소, 修 닦을 수의 뜻은 글자 그대로 ‘이어서 닦다.’이며, 선현의 학문을 잘 계승하여 몸과 마음으로 체득하여 닦는다는 뜻이다. 관학이 미약해진 때에 주세붕 선생이 송나라 백록동서원의 제도와 이념을 본떠 새로운 개념의 교육기관인 백운동서원을 창건하였고, 이어서 이황 선생의 주청에 의하여 국가 차원의 공인을 통하여 교육과 학문을 진흥하기 위하여 조정에서 정하여 내린 이름이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선생은 1541년 7월 4일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1543년 8월 11일 문성공묘에 회헌영정을 봉안하였고, 이어서 서원을 창건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명명하였다. 그 뒤 풍기군수로 부임한 退溪 李滉 선생이 1549년 12월 경상감사 심통원(沈通源)에게 편지를 올려, 서적과 편액을 하사하고 토지와 노비를 정해 주어 서원의 형편이 풍족하게 하고, 또한 감사와 군수로 하여금 선비의 양성 방안과 경비의 지원 등에 관해서만 살피고 번거로운 명령과 사소한 조목에 얽매이지 말게 해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심통원(沈通源)이 조정에 건의하니, 1550년 2월 11일영의정 李芑, 좌의정 沈連源, 우의정 . 이에 예조에서 「紹修書院」과 「興慶書院」으로 입계하니, 1550년 3월 11일 「紹修書院」으로 낙점하여 사액할 것을 윤허하였다. 1550년 4월 하순에 홍문관·예문관 대제학 申光漢이 <白雲洞紹修書院記>를 지었다.
그 글에서 「紹修」의 뜻에 대하여, “판서 尹漑가 나에게 서원의 명칭과 뜻을 쓰게 하여 校書館으로 하여금 간행하여 반포케 하고, 서책을 보내줄 것을 주청하니, 임금께서 모두 윤허하셨다. 내가 명을 듣고 황송하여 절을 올리고 그 이름을 ‘백운동 소수서원’ 이라고 하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학문의 도가 쇠퇴하여 강구하지 못한 지 오래이다. 배우고서 그 이치를 講明하지 않으면 몸을 닦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敬으로 마음을 바르게 하지 못한다. 하물며 義로써 밖을 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서원 이름을 「紹修」라고 하게 된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判書臣尹漑請以臣光漢名其院。且記命名之義。令校書館刻而頒之。加給書冊。郵以傳之。上皆可之。臣光漢聞命惶懼。拜稽而獻其名曰。白雲洞紹修書院。臣竊惟爲學之道廢而不講。久矣。學而不講明其理。不知修己之爲何事。旣不能敬而直之於內。況能義以方之於外乎。此紹修之所以名書院也]
소수 서원 사액 편액
이렇게 결정된 「紹修書院」 편액은 1550년 6월 경 큰 글씨로 써서 하단에 연호와 월일과 「宣賜」 등의 글자와 함께 새기고 짙은 청색 칠을 하고 雲閣[구름 무뉘 장식]으로 주위를 장식하여 하사되었다.
소수서원 경내에 있는, 明倫堂[윤리를 밝힘], 直方齋[敬으로 마음을 곧게 하고, 義로 행실을 바르게 함], 日新齋[날마다 새로워짐], 至樂齋[가장 큰 즐거움은 독서] 등 서재의 이름도 무엇을 계승하고 어떻게 닦느냐에 관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紹修』의 뜻은 “윤리와 학문을 잘 계승하여 몸으로 실천하여 닦는다.”라는 것으로 교육의 기본 이념을 함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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