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현대사 재조명

[스크랩] `이승만,백선엽,박정희` 감출 수 없는 과거

감효전(甘曉典) 2012. 5. 20. 07:46

 

 

이승만-백선엽-박정희의 감출 수 없는 과거

 

 

 

 

 

KBS의 '찬양프로'-동상 건립, 페어플레이 아니다

 

 

 

이승만, 박정희, 백선엽.

 

한국 현대사를 풍미했던 이들 '3인방'이 지금 한국사회에서 논란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발단은 이승만 동상 건립과 '공영방송 KBS'의 특집프로 때문입니다. KBS는 올 8월 방송 예정으로 이승만의 일대기를 5부작으로 준비 중이며, 지난 24~25일에는 '백선엽 특집방송'을 2부작으로 방영했습니다. 문제는 KBS가 이들 두 사람에 대해 공과(功過)를 제대로 짚기보다는 찬양 일변도의 프로를 방영했거나 방영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달 초 누군가가 부산 서구청이 부산 부민동 '임시수도거리'에 세운 이승만 동상에 붉은색 페인트를 뿌려 볼썽사나운 장면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최근 보수진영에서 서울 광화문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려는 움직임에 대한 반발로 추정됩니다. 박정희 미화도 마찬가집니다. 지난 5월, 5·16군사쿠데타 50주년을 맞아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보수언론에서 '박정희 찬양가'를 틀어대면서 이를 두고 또다시 박정희 논쟁이 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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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이들 세 사람은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인물들로, 하나같이 역사적 평가에서 공과(功過)가 교차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보수-진보간에 호불호도 극명하게 갈립니다. 우익-보수 진영에서는 이들을 영웅시하는 반면, 진보-개혁진영에서는 친일전력 등을 이유로 부정적 평가에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이들 세 사람의 '인생유전(人生流轉)'을 한번 따라가 볼까요?     

 

백선엽과 박정희, 참 닮은 삶 살았구나

 

우선 셋 가운데 이승만과 박정희는 전직 대통령으로, 장기집권과 독재통치로 삶의 마지막을 비참하게 마쳤습니다. '독재자' 이승만은 4·19혁명으로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나 하와이로 망명한 후 그곳에서 쓸쓸히 지내다가 생을 마쳤습니다. 반면 박정희는 1979년 '10·26사건'으로 부하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을 맞고 숨을 거뒀습니다. 두 사람 모두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습니다. 현재 생존한 자는 백선엽뿐인데 그도 사후 이곳 장군묘역에 묻힐 가능성이 큽니다.

 

 

 

백선엽(1920년생)과 박정희(1917년생)는 경력 면에서 공통점이 아주 많습니다. 우선 두 사람은 보통학교(현 초등학교) 교사 출신입니다. 평남 강서 출신인 백선엽은 평양사범학교를, 경북 구미출신인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이 두 사범학교는 당시 서울의 경성사범학교와 함께 3대 사범학교로 꼽힌 명문으로 이들이 수재였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두 사람은 사범학교를 마치고 교사로 있다가 군에 입문한 것도 똑같습니다.

 

 

백선엽은 만주 봉천(현 심양)에 있던 봉천군관학교 9기로, 박정희는 신경(현 장춘)에 있던 신경군관학교 2기로 입교했습니다. 백선엽의 '봉천 9기'는 박정희의 1기 선배인 '신경 1기'와 같은 셈인데, 나이가 적은 백선엽이 박정희보다 군관학교 입교가 빠른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박정희는 사범학교 졸업 후 '의무복무기간'을 다 마치고 입교한 반면, 백선엽은 도중에 입교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나중에 총독부에서 이를 문제 삼자 그때 백선엽을 도와준 사람은 만주 군의학교 출신의 군의장교 원용덕이었습니다.

 

백-박 두 사람 모두 '만주군관학교' 출신이었던 만큼(박정희는 일본 육사에서 본과 2년을 다님) 둘 다 만주군에서 복무하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이때의 경력이 이들 두 사람에겐 두고두고 치명적인 오점이 된 셈입니다. 소위 '친일군인'이라는 지적이 그것입니다. 박정희는 만주군 보병8단에서 단장(계급은 상위, 대령) 부관으로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1942년 봄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한 백선엽은 자무쓰(佳木斯) 부대를 거쳐 간도특설대에 배속돼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해방 당시 두 사람의 계급은 모두 중위였습니다.

 

죽어라 일본군 된 군인, 죽어라 일본군 탈출한 김준엽

 

 

 

한편 두 사람의 만주군 경력과 관련해 비난이 심한 쪽은 박정희보다는 백선엽 쪽입니다. 그건 조선인 독립군 등을 주로 토벌해온 '간도특설대' 근무 경력 때문입니다. 그간 알려진 바나 또 필자가 취재한 바에 따르면, 박정희는 간도특설대에 몸 담은 적은 없습니다. 반면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 3년간 근무했습니다. 이는 백선엽 자신이 남긴 회고록(<군과 나>)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관련내용 몇 줄을 인용해보면,

 

"봉천만주군관학교를 마치고 42년 봄 임관해 자므스(佳木斯) 부대에서 1년간 복무한 후 간도특설부대의 한인 부대에 전출, 3년을 근무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그동안 만리장성 부근 열하성(熱河省)과 북경 부근에서 팔로군과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간도특설부대에서는 김백일(중장·51년 전사), 김석범(중장 예편·해병대사령관), 신현준(중장 예편·초대 해병대사령관), 이용(소장 예편). 윤춘근(소장 예편) 등과 함께 근무했다."

 

 

만주군관학교 입교자 가운데는 백선엽의 경우처럼 평안도 출신이거나 아니면 방원철, 김동하(이상 신경군관학교 1기생) 등 함경도 출신들이 많았습니다. 이는 이북지역 출신이라는 지역적 연고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경북 구미 출신의 박정희나 충남 대덕 출신의 송석하(봉천군관학교 5기생)가 만주로 가 군인이 된 것은 다소 예외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박정희의 경우, 나이가 많아 입교가 어렵게 되자 '혈서'를 써서 바쳤다는 점에서 그의 친일성이 돋보인다고 하겠습니다.  

 

최근에 타계한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은 일본 유학 중 1944년 1월 학도병에 강제징집 돼 중국 전선에 배치됐습니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일본군을 탈출, 6000리를 걸어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重慶)으로 가서 마침내 광복군에 합류했습니다. 누구는 안정된 교사직을 버리고 만주로 가서 일본군(만주군)이 되었고, 누구는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군을 탈출했습니다. 똑같은 시대상황 하에서 박정희·백선엽은 김준엽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사정이 이러니 생각도 딴판일 수밖에요. 간도특설대 근무에 대한 백선엽의 '회고' 한 대목을 보시죠.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식으로 문죄(問罪)하지 않았는데도 백선엽은 스스로 자신의 죄과에 대해서 인정하고 비판을 감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지난 시절 백선엽이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의 전공(戰功)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강조해왔는데, 이는 제대로 따져 묻지 않은 언론의 책임도 없진 않습니다. 몇몇 수구 언론들은 그의 '어두운 그림자'는 아예 제쳐둔 채 그를 '전쟁영웅'으로 만드는 데만 혈안이 돼 왔거든요. 

 

해방 후 패잔병의 몰골로 귀국한 두 사람은 이후 한국군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여기서도 백선엽이 빨랐습니다. 백선엽은 해방되던 해 12월 미군정이 설립한 군사영어학교(약칭 '군영') 1기생으로 입교해 이듬해 2월 임관하였습니다.

 

반면 해방 후 중국 북경에서 '해방 후 광복군'에 잠시 몸담았던 박정희는 해방 이듬해 5월 귀국해 고향에서 빈둥거리다가 그 해 9월 뒤늦게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2기생으로 입교했습니다. 3개월 단기 과정을 마치고 그 해 12월 박정희가 한국군 소위로 임관할 무렵 백선엽은 국방경비대 5연대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백선엽과 박정희, 특별한 인연의 시작은...

 

 

 

백선엽과 박정희. 평소 알고 지냈을 법도 한 이 두 사람이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박정희의 좌익활동 때문이었습니다. 1948년에 발생한 '여순사건'을 계기로 군부내 숙군(肅軍) 바람이 휘몰아쳤는데, 여기에 박정희가 걸려든 것입니다. 여러 증언과 자료들에 따르면, 박정희는 남로당에 가입해 군부내 조직책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가 군사재판에 회부돼 처형 위기에 몰렸을 때 그를 구명해준 사람이 바로 백선엽이었습니다. 당시 백선엽은 육군 정보국장(대령)으로 있으면서 숙군 총책임자였습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박정희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육군 소령으로 다시 군에 복귀하였고, 백선엽은 1사단장으로 전투를 지휘하였습니다. 개전 초기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낙동강까지 후퇴한 백선엽은 미군과 함께 칠곡에서 '다부동전투'를 치렀으며, 다시 반격에 나서서는 제일 먼저 평양에 입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의 입성으로 그는 다시 38선 이남으로 후퇴해야 했으며, 전쟁 중인 1952년 7월 그는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약관 32세였습니다. 6·25 발발 직후 전사한 채병덕 후임으로 정일권이 졸지에 육군참모총장 겸 3군총사령관(三軍總司令官)에 취임한 때가 33세 때였으니 백선엽도 이에 못지않게 승승장구한 셈입니다.

 

한편 현역으로 복귀한 박정희는 1953년 11월 준장으로 승진, 장군이 되었으며 2년 뒤 55년 7월 5사단장으로 나가면서 '은인' 백선엽을 다시 만났습니다. 당시 백선엽은 육참총장을 마치고 1군사령관을 맡고 있었는데, 5사단이 1군 예하에 있었습니다. 그 해 '탄신 80회'를 맞은 이승만 대통령이 전국 시찰을 하면서 5사단에도 들러 박정희 사단장과 악수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이날 박정희는 이승만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 박정희는 평소 그가 따르던 이용문 장군과 함께 이승만 축출을 도모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용문이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면서 이 일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승만-백선엽-박정희로 이어진 라인업은 1960년 4·19혁명을 기화로 졸지에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우선 최고권력자 이승만은 4·19 일주일 뒤인 4월 26일 대통령에서 하야한 후 하와이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1군사령관을 마치고 두 번째로 육참총장에 취임한 백선엽은 59년 연합참모회의 의장(현 합참의장) 재임 중 4·19를 맞았는데,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소장파 장교들의 군부 쇄신운동에 떠밀려 급기야 그 해 5월 말 군문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이후 백선엽은 주중대사를 시작으로 근 10년간 해외에 대사로 나가 있었습니다. 결국 최후의 생존자는 박정희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한편 4·19혁명 이듬해인 1960년 5월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마침내 최고의 권좌에 올랐습니다. 박정희는 해외를 떠돌던 백선엽을 불러들여 교통부장관(1969~1971)을 시킨 다음 이어 국영기업체 여러 곳의 사장 자리에 앉혔습니다. '은인'에 대한 그 나름의 '보은'이었을 것입니다. 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이 망명지 하와이에서 별세한 후 시신이 국내로 운구되자 박정희는 3부 요인을 대동하고 김포공항으로 나가 영접하였으며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토록 하였습니다. 이 역시 한때 그가 모셨던 지도자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였을 것입니다. 

 

이승만·백선엽, 역사의 법정에 두 번 세우려는 KBS

 

 
 

 

  
▲ 백선엽과 박정희(2) 백선엽(왼쪽)을 교통부장관에 임명하는 박정희(1969.10)
ⓒ 자료사진
백선엽

세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은 이미 죽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승만과 박정희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이제 남은 한 사람 백선엽은 1920년생으로 올해 91세입니다. 백선엽을 뺀 두 사람은 모두 대통령을 지냈으며, 백선엽은 이들 두 사람 밑에서 장군과 장관을 지냈습니다.

 

권력 창출자가 아니었기에 백선엽은 최고 권좌에 오르진 못했지만 한 개인으로 보면 부귀영화를 두루 누린 셈입니다. 특히 박정희와는 도움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지낸 사이라고 하겠습니다. 4·19와 5·16으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 와서 이들이 새삼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풍미했던 이들 3인은 이제 '역사의 법정'에 섰습니다. 공정한 판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들의 공(功)과 과(過)를 빠짐없이 저울에 올려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나서 평가할 것은 평가하고 또 비판할 것은 비판하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KBS의 이승만·백선엽 찬양 프로 제작이나 보수 일각에서 광화문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자는 주장은 모두 '페어플레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직 이들에 대한 역사 법정의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거든요. 사적 인연을 앞세운 일방적인 찬양은 되레 그들을 두 번 법정에 세우는 결과를 초래할 뿐입니다.

 

 

- 정운현

 

 

ⓒ 오마이뉴스 ( http://www.ohmynews.com/)

 

 

 

 

 

 

 

“백선엽 지리산 토벌작전때 양민 집단 동사”

 

 

 

 

 

 

 

6·25 61주년 앞두고‘반공 영웅화’ 논란 증폭


작전참모 지낸 고 공국진 전 준장 ‘한국전쟁사’서 증언
“아이들·부녀자들 포로수용소 갔다가 반수 이상 죽어”
“송요찬도 토끼몰이 토벌 반대”…백장군쪽 “답변 곤란

 

 

 

 위기에서 조국을 구한 한국전쟁의 영웅인가? 독립군을 토벌하던 친일부역 군인인가?

 

 

 

       

6·25 발발 61돌을 앞두고 백선엽(92) 장군을 둘러싼 논란이 달아오르고 있다. 한국군 첫 4성 장군이자 참모총장을 두 번 역임한 군 원로인 백 장군을 두고 <한국방송>(KBS)이 특집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일부에선 동상 건립에 나서지만, 이에 대해선 공과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은 일방적 미화라는 비판도 나온다.

 

이런 가운데 <한겨레>는 백 장군이 주도한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이 무고한 양민들의 희생을 불러왔다는 당시 군 관계자의 증언 기록을 단독으로 입수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현 군사편찬위원회)가 1960년대 참전자들의 구술 증언을 채록한 자료인데, 여기서 백 장군의 작전참모 출신인 예비역 장성은 당시 작전과 관련해 회한 서린 이야기를 털어놨다.

 

■ “이 양반은 이 안에 있는 것은 다 적이라며” 1964년 발족한 전사편찬위는 <한국전쟁사> 편찬을 위해 참전자 3000여명을 대상으로 방대한 구술 채록 작업을 진행했다. 이 작업의 일환으로 1965년 6월15일 한국지업㈜ 사장이었던 공국진 전 예비역 준장을 상대로 증언 청취가 이뤄졌다

 

 

 

“(1군단) 작전참모로 갔습니다. 백(선엽) 장군 모시고 춘계, 1차, 2차, 3차, 4차 공세까지 겪고, 지리산으로 갔다가…. 백 대장하고 싸우고 헤어졌습니다.” 전장에서 지휘관과 작전참모는 가장 긴밀한 사이인데, 왜 헤어졌다는 것일까?

 

“지리산이 4개 도, 9개 군입니다. 9개 군 주민이 20만입니다. 이 양반(백 장군)은 이 안에 있는 것은 다 적이다, 광주에 포로수용소를 지었어요. 그래서 공격 개시하면 아이들, 부녀자들을 다 적을 만들고 포로로 오는데, 트럭에 싣고 광주까지 후송하면 다 얼어 죽을 것입니다. 국내전에서 동족상잔을 하고 있는데 다소 양민과 적을 가려 취급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북 땅에 가서 8로군 토벌하는 것과 무슨 다름이 있느냐 했습니다. 그래서 나하고 싸운 것입니다.”

 

한국전쟁중이던 1951년 말 미군은 지리산 빨치산 토벌을 위한 사령부를 꾸리고 백선엽 당시 1군단장에게 지휘를 맡겼다. 백장군의 이름을 따 ‘백(白)야전전투사령부’로 불린 부대다. 예하에는 수도사단(사단장 송요찬)과 8사단(사단장 최영희), 서남지구 전투사령부 등이 배치됐다. 백 장군과 의견 대립 끝에 백야사 작전참모를 그만뒀다는 공 전 장군의 증언이 이어졌다.

 

■ “사고 많았다…지금 같으면 욕 많이 먹었을 것” “헤어져 가지고 (나는) 21연대로 갔어요. 결과가 무엇입니까? 엄동설한에 우리는 바-카 입고 히-타 해도 추운데 수많은 양민은 광주(포로수용소)에 갔다가 반수 이상 죽었어요. 백 장군 당신이 정치적으로 어떤 이유가 있는지 모르지만 성과가 늦더라도 그렇게 해야지, 이 추운 때에 광주에 갖다 놓으면 그 양반들이 두고두고 한평생 원망할 것입니다. 그 후에 내 진의를 알았어요. 사고가 많이 났어요. 전시니까 그렇지 지금 같으면 욕 많이 먹었을 것입니다.”

 

당시 백 장군이 채택한 작전 이름은 ‘쥐잡기 작전’(Operation Rat Kill). 지리산을 포위해 토끼몰이를 하는 식으로 주민을 소개하고 먹을 것을 없애 고사시키는 방식이었다. 작전 성과는 좋았다. 51년 11월 시작된 토벌작전은 이듬해 초 사실상 완료됐다. 포로들과 주민들이 뒤섞여 수용된 광주포로수용소는 열악한 환경과 양민 수용으로 사회문제가 됐고,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1953년 해체됐다.


이어지는 공 전 장군의 증언. “나도 참모로서 잘못이 있지. 참모로서 최선을 다해서 건의하면 되고, 실패를 최소한으로 국한하는 것이 참모(의 역할)인데, 그 작전의 작전참모로서 못하겠다, 그렇게 해서 나왔습니다. (중략) 송요찬도 반대했습니다. 최영희도 다 반대했습니다. 길이길이 두고 욕을 먹을 텐데….”

 

■ “일방적 비난 부당하지만, 본인 침묵도 문제” 공 전 장군의 이런 증언과 관련해 백 장군의 견해를 듣고자 했으나, 백 장군을 수행하는 관계자는 “장군님이 연로해서 그런 인터뷰가 어렵다. 답변이 곤란하다”고 답했다. 증언자인 공 전 장군은 몇 해 전 작고했다.

 

증언록의 성격상 한쪽의 주장인 만큼 모든 증언을 100% 신뢰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백 장군이 책임자로서 실행했던 작전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온 것은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백 장군은 과거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지휘부의 지침과 달리, 말단 부대가 비행을 저지르고 허위보고로 무마하는 경우, 그것을 완전히 확인해 진위를 가리기란 참으로 어렵다. (중략) 당시로서는 내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겠지만 토벌부대의 총사령관으로서 나도 혹시라도 부하 장병의 비행으로 희생된 넋들이 있다면 그들의 명복을 빌고 싶은 심정이다.”(<실록 지리산>)

 

한국 근현대사를 전공한 한 역사학자는 “양민학살 문제는 전쟁이라는 당시 시대적 상황을 함께 봐야 하고, 백 장군보다 더 심하게 한 지휘관도 있어 일방적으로 비난하기는 어렵다”면서도 “본인으로서는 (양민학살 문제나) 간도특설대 등 자신의 과거와 관련해 민감한 문제에 침묵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  이순혁

출처 : 내마음은 황무지
글쓴이 : Jump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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