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현대사 재조명

[스크랩] 아빠 간첩누명에 세살 아들 " 빨갱이 총살" 놀잇감

감효전(甘曉典) 2012. 4. 26. 07:18

아버지 간첩누명에 세살 아들은 ‘빨갱이 총살’ 놀잇감

등록 : 20111121 20:28

 

가족들의 외로운 싸움
부인들까지 중정 끌려가 고문
미 정보책임자에 사실 들은
외국인 선교사 주축 구명운동

1974년 8월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발표된 뒤 상당한 기간 동안 피고인이나 가족을 막론하고 인혁당 관련자들은 세상의 그 어떤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함께 발표된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이나 변호인들도 배후세력으로 지목된 인혁당과 연계를 끊으려고만 했지, 사건 자체에는 미처 관심을 기울일 수 없었다. 우선 ‘나부터 살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심지어 처음에는 인혁당 가족들까지도 다른 구속자 가족들로부터 소외되었다.

» 1975년 4월8일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상고심에서 재판장인 민복기 재판장이 8명의 사형을 확정한 순간, 방청석에 있던 가족들이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 오글 목사와 시노트 신부의 호소

최근 <인권변론 한 시대>라는 자전적 기록을 펴낸 홍성우 변호사는 책에서 “민청학련 변론 당시 (인혁당 재건위와 고리로 지목된) 여정남을 민청학련과 단절을 시켜야 되겠다 싶어서 법정에서 두 사건을 분리시키는 노력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아마도 인혁당 가족들은 매우 서운했을 겁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다행히 재판이 진행되면서 인혁당 가족들도 구속자 가족들과 함께 목요기도회·금요기도회·명동성당 기도회에 나가 억울한 처지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공덕귀(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인), 김한림(민청학련 홍일점 구속 김윤씨 어머니), 정금성(김지하 시인의 어머니)씨 등 구속자가족협의회 어머니들이 손을 잡아준 덕분이었다.

사실 맨 먼저 이들에 대한 관심과 후원을 아끼지 않은 것은 외국인 선교사들이었다. 선교사들은 미국의 주한 정보책임자로부터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기도회에서 인혁당에 대한 관심과 기도를 호소했고, 그 가족들을 돌봤다. 개신교의 오글 목사와 천주교의 시노트 신부, 즈베버 신부 그리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들이 구명운동에 적극 나섰다.

74년 12월9일 사형선고를 받은 피고인 8명의 부인들이 대통령과 대법원장에게 보낸 ‘구명 탄원서’에는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해 한경직·함석헌 등 사회 원로 15명이 서명하기도 했다. 해가 바뀌어 1월6일에는 신구 교회의 선교사 60여명도 ‘공개재판’ 탄원서를 대법원장에게 보냈다. 2월6일 명동성당의 ‘인권회복을 위한 기도회’에서 사제단은 ‘현실 고발’을 통해 중앙정보부가 피고인의 부인들까지 연행해 잠을 재우지 않는 등 정신적·육체적 고문을 했다고 폭로하고, “남편이 반국가·반정부 활동, 심지어는 간첩과 같은 행동을 했다고 진술서를 써라” “앞으로는 다시 구명운동이나 호소를 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써라”고 위협한 사실을 규탄했다. 이때 중정 안에서 당한 일이 부끄러워 자살을 기도한 가족조차 있었다.





» 사형선고 이튿날인 4월9일 아침 체포된 뒤 1년 만에 처음으로 면회를 기대하며 서대문구치소를 찾았던 가족들이 그날 새벽 이미 사형이 집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오열하고 있다.

조작과 고문의 실상
박정희 ‘민청학련’ 긴급조치 뒤
중정·검찰·법원 조작 한통속
‘친북용공’ 각본대로 사형 수순

■ 숨막히는 진상조사 보고서 발표

75년 2월24일 사제단과 구속자가족협의회 후원회(회장 시노트 신부)는 명동성당 사제관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어 ‘인혁당 사건의 진상은 이렇다’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진상조사 보고서는 피고인들의 법정진술 또는 항소·상고 이유서, 가족들의 증언과 양심선언, 기도회 등에서 발표한 호소문, 변호인을 비롯한 관련 인사들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됐다. 임인영·강순희씨 등 피고의 부인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자료를 수집했고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과 땀이 배어 있었다. 200자 원고지 100장 안팎 분량의 보고서는 내가 정리해 작성했다.

우리는 보고서에서 고문의 실상부터 낱낱이 밝혔다. 모든 피고인들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 정도로 그때 중정의 남산 조사실은 ‘고문 공장’이었다. 쉰살의 도예종이 협심증으로 수십번 졸도를 했는데도 그때마다 외제 응급치료제를 먹여가며 고문을 계속했고, 그보다 연배인 서도원도 다리에 시커먼 자국이 남도록 시달렸다. 우홍선은 나흘 만에 하반신을 쓸 수 없어 교도소 안에서 누워 지내도 좋다는 와허증까지 받았으며, 술 취한 수사관의 폭행으로 ‘3층에서 떨어져 죽고 싶은 만큼’ 심장이 파열되는 고통을 겪었다. 하재완은 전기고문으로 탈장과 폐종양이 생겨 기침할 때마다 피가 묻어 나오는 고통 속에서 진술서를 보지도 못한 채 강제로 무인을 찍어야 했다. 서른살 청년 여정남도 심한 전기고문과 구타로 다리를 절어야 했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 송상진은 동맥을 끊어 자살을 기도할 정도였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75년 10월15일 장석구는 끝내 옥사했고 이태환·유진곤·정만진·이재형·조만호·전재권 등은 석방된 뒤 병사했으며, 많은 관련자들이 정신이상 등 고문 후유증을 겪었다고 밝혔다.

우리는 공판조서가 변호인과 가족들이 방청석에서 들었던 진술 내용과 정반대로 조작됐다는 사실도 조목조목 공개했다.

그때 진상 보고에서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은 어린 자녀들이 겪은 수난이었다. 하재완의 세살짜리 아들은 어느날 동네 아이들에게 끌려가 나무에 묶인 채 ‘빨갱이 자식이니 총살한다’는 놀잇감이 됐다. 초등학교 다니던 그 형은 소풍날 급우들이 돌을 던져서 나무 뒤에 숨어서 혼자 밥을 먹어야 했단다. 어느 가족은 제삿날 시동생이 오지 않아서 연락을 했더니 “형수님, 우선 내가 살아야 안 합니까” 했다. 그렇게 가까운 친척들조차 연을 끊었던 것이다.

“인혁당 재건위는 조작됐다”고 결론을 맺은 사제단의 이런 진상조사와 발표는 30년 뒤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과 진상규명위 활동에 중요한 밑자료가 되었다.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장석구 사건에 대한 조사와 2005년 12월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원회의 조사에서 그 모든 내용은 사실로 밝혀졌다.

» 2007년 1월23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심 공판에서 32년 만에 ‘무죄판결’이 나온 순간 문정현 신부와 신동숙(도예종씨 부인·왼쪽), 이영교(하재완씨 부인)씨 등 유족들이 끌어안고 회한의 눈물을 터뜨리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짜깁기 수사·눈가림 재판
검사가 미리 신문조서 써놓고
공판조서도 멋대로 변조
취재·면회금지 ‘비공개 재판’

■ 인혁당은 이렇게 조작되었다

박정희는 74년 4월3일 ‘긴급조치 4호’ 발표에 즈음해 “소위 민청학련이라는 불법단체가 반국가적으로 불순세력의 배후조종 하에 그들과 결탁하여 ‘인민혁명’을 기도하고 있다”는 담화를 발표한다. 이미 그때 모든 수사의 방향과 초점을 정해놓은 것이다.

실제로 4월21일치 중정의 내부문서로 된 수사상황 보고를 보면 “투쟁 방법과 목표를 북한의 대남적화통일 전략전술인 인민민주주의의 혁명 완수를 위해 민족통일 전술에 따라 우리 정부를 폭력으로 타도하고 과도정부를 거쳐 종국에 가서는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한다는 내용으로 조사”하고, “배후관계에 있어서는 간첩의 지령에 의한 것이다, 재일 조총련의 지령이다, 국내 혁신계의 조종 하에 움직이고 있다, 북괴 대남방송을 청취하고 그대로 행동했다고 하여, 친북용공으로 규정하기 위한 방향으로 수사”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민청학련 사건에서 처음에는 서울대의 이철·유인태 등이 대구 쪽의 여정남에게 지시를 내렸다고 했다가, 이후부터는 여정남이 민청학련을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바뀐다. 이어 4월2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각본대로 민청학련 수사 상황을 발표한다.

그런데 5월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의 ‘민청학련이 주동이 된 국가변란 기도사건’에 대한 추가발표에서는 “서도원·도예종 등이 69년부터 인혁당 잔재세력을 규합, 인민혁명당을 재건하고 대구·서울에서 반정부 학생을 배후에서 사주했다”며 민청학련 배후조직을 인혁당 계열에서 ‘인혁당 재건위’로 변경, 관련자 23명을 국가보안법·반공법·내란예비음모 등의 혐의로 기소한다.

검찰 신문 때도 검사가 미리 불러주는 대로 검찰 서기가 진술서나 조서를 작성하고, 이를 부인하면 다시 고문하는 방식을 반복하면서, 일사불란하게 조작이 진행된다. 그마저 기소 전인 5월23일과 25일 사이에 작성된 것처럼 꾸민다.

당시 중정의 두 사건팀에는 헌병 21명, 경찰관 38명이 파견근무했지만, 중정의 6국 6계장 윤종원이 ‘긴급조치 위반사건에서 조직사건으로 확대시켜라, 물건을 만들어라’ 주문·지휘하며 모든 조서와 진술서를 취합했다. 마지막으로 군 검찰은 중정의 의견서와 검찰의 공소장에 맞춰 진술을 받아냈다. 사건 조사는 대부분 중정 6국 조사실에서 했지만, 피의자 심문조서에는 서울구치소 또는 서울중부경찰서에서 한 것처럼 거짓으로 적혀 있다. 이는 조작에 가담한 중정 직원들이 이름이 기록에 남는 것을 감추고 싶어했기 때문이라는 증언이 훗날 나왔다.

■ 엉터리 재판과 예고된 사형

재판부는 판결에서 “피고인들의 이 법정에서의 전부 또는 일부 부합되는 각 진술 부분”을 근거로 모든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했다. 그러나 1·2심을 통틀어 국가를 변란시키고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검찰의 공소사실을 시인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중정은 체포 이후 사형 때까지 가족 면회를 금지했고, 제한적인 변호사 접견 때도 정보부 요원이 입회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취재는커녕 방청도 제한해 재판은 사실상 비공개로 진행됐다. 김종필 국무총리는 당시 국회에서 질의응답을 통해 “외신기자들은 재판 내용을 잘못 이해해 보도할 수 있다”며 방청 불허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기도 했다.

“우리들은 살고 싶습니다. … 그러나 죽이고 난 다음에는 살릴 수가 없습니다. … 공개재판, 공명정대한 재판을 받게 해주십시오. 피를 토하는 아픔과 절망을 안고 여러분 앞에 호소드립니다.”

지금도 그때 그 가족들의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

출처 : 명진스님을 지지하는 네티즌연대
글쓴이 : 보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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