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현대사 재조명

[스크랩] 1974년(긴급조치, 알리)

감효전(甘曉典) 2012. 5. 14. 15:21

 긴급조치의 시대(1974년 남한)

 

 



 

 

                                 민주주의는 국민이 주인입니다

 

   [박정희가 만들어낸 사악한 ‘사법살인' 인혁당사건]

      국제법학자협의회는 이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정했습니다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독재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중앙정보부와

반공 이데올로기를 활용하여 정치적 반대세력들의 민주화 요구를 억합하고

인권을 침해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우리가 ‘인혁당’으로 알고 있는 이 단체는 대구 지역 교사들이 모여서

시국과 경제와 남북관계를 토론하고 책을 읽던 단순한 학습모임이었다.

‘인민혁명당’이라는 명칭은 이 사건으로 처형당한 이들이 만든 게 아니라

공안기관이 만든 호칭이었다.

 

 

1964년 8월 14일, 박정희 정권의 저승사자라 불리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인민혁명당 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여 57명의 청년들을 잡아들인다.

 

이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지명수배하게 된다.

 

그해 6월에 있었던 굴욕적인 한일회담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와 반정권 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정권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었다.

 

이것이 ‘1차 인혁당 사건'이다.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4명의 검사 중 3명이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는 사건'이라는 이유로 사표를 제출했다고 전해진다.

 

사법부도 기소된 57명의 중 12명에게만 실형을 선고했다.

그들조차도 3년에서 1년의 가벼운 형량을 선고 받았다.

1차 인혁당 사건은 독재 정권의 민심돌리기용으로 적당히 결말을 맺었다.

 

적어도 사법살인으로까지 가지는 않았다.

 

 

1974년은 한국 근대사에서 반유신 독재운동이 한창이던 때로 위기의식을 느낀

박정희 정권이 비상적 헌법조치인 긴급조치 4호를 발령한 시점이었다.

 

당시 반유신 독재운동을 주도한 학생운동 단체가 바로 ‘민청학련'이다.

 

민청학련은 조직적인 반유신운동을 전개할 필요성을 느낀 전국의 학생운동 세력이

전국 대학의 일제 시위를 계획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조직되었다.

 

나아가 민청학련은 반유신 독재운동을 학생운동과 같은 단순히 특정 집단의 운동이 아닌

종교계, 학계 등의 광범위한 세력과 연계해 추진하게 된다.

 

따라서 민청학련은 이후 전개될 여러 노동, 재야, 민주, 통일 운동의 토대가 된다.

 

이러한 조직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던 민청학련에 대해 박정희 정권은

위기 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을 잠재울 궁리 끝에 10년 전 ‘인혁당'을 기억해 낸다.

 

민청학련의 배후세력으로 인혁당을 지목했던 것이다.

 

 

1974년 4월 3일 교수와 학생 등 무려 254명이 구속되는 대규모 시국공안사건이 터진다.

 

민청학련이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재건조직과 재일 조총련계 및 일본 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 인사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정부를 전복하려하고 있다는 것이

당시 사건의 핵심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인혁당 사건의 연루자들은 1974년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를 통해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내란죄, 내란선동 등으로 기소되어 주요 주모자로 지목된

우홍선, 송상진,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도예종, 김용원, 여정남 8명에게 사형이 선고된다.

 

그리고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상고심이 열린다.

대법원은 관련자 254명 중 36명에게 실형을 선고하고 도예종 등의 8명에 대해서는

사형을 확정한다.

 

그리고 이들은 이튿날 가족을 만날 기회조차 없이 새벽 4시부터 시작해 차례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한다. 죽어서도 이들은 시신조차 가족의 품으로 가지 못하고

정부당국에 의해 경기도 벽제 화장터에서 태워지는 한을 안고 갔다.

 

 

 

이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것은 많은 점에서 지적되어 왔다.

 

인혁당 사건의 증거로 채택된 것은 고문과 강압의해 작성된 피의자들의 진술서뿐이었다.

 

또한 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피의자들은 가족은 물론 변호사들조차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정권은 사건을 완전히 은폐하기 위해 피의자들의 법정진술까지 조작했으며

가족들이 보관한 항소이유서와 공소장까지 압수해 사건의 증거를 모두 인멸하려고

했다는 점이 이 사건이 정권과 정보기관에 의한 날조임을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난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이었다고 밝혔다.

 

진실위는 이 사건은 학생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거센 저항에 직면한 박정희 정권이

학생시위의 배후에 공산주의자들이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이용한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특히 북한방송을 녹취한 노트를 돌려 본 행위 등은 분명 당시의 실정법 위반이지만,

이를 조작하여 8명을 사형에 처한 조치는 국가형벌권의 남용이며,

이는 정당성을 결여한 독재정권의 유지를 위한 공포분위기 조성을 위한

필요성 때문이었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2006년 12월 23일 서울중앙지법 311호 법정, 법원은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 8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유족들은 회한에 받쳐 오열했다.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대한민국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겨레와 나라를 사랑한 것밖에 죄가 없다]

소위 인혁당 사건 대책위 출범에 부쳐 -이기형 (시인,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

 

1974년 3월 초 유신 암흑에서도

매화꽃 개나리꽃 진달래는 방긋방긋

방향(芳香) 천지에 뿌렸다.

 

온 겨레가 새희망을 찾아 부푸는데

무슨놈 날벼락이냐 민청학련사건 배후로 지목

여덟 애국투사를 줄줄이 옭아갔다

조작하여 '인혁당사건'이라고

 

천하에 둘도 없는 고문 만행 발길질 주먹질

물과 고춧가루와 전기와 불과 몽둥이와 대바늘과 철사로

생사람을 잡아 죄를 남산만큼 쌓았다.

 

일심에서도 줄줄이 사형 이심에서도 줄줄이 사형

일년쯤 지난 1975년 잔인한 4월 8일 대법원 판결 날

김용원 사형 도예종 사형 서도원 사형 송상진 사형

여정남 사형 우홍선 사형 이수병 사형 하재완 사형

 

 

 

천인 공노할 극형

찰칵 찰칵 수갑을 채운다

여덟 투사는 할 말을 잃었다

서로 멍히 쳐다봤다

한마디씩 분통을 터뜨려 '이따윗 법이 어딨노!'

'생사람을 잡아!'

'망할 놈의 세상!'

'나라와 겨레를 사랑한 것밖에 죄가 없다!'

한 사람 한 사람 독방에 등을 떠밀어 넣는다

그날 밤 투사들은 잠을 못 이뤘다

목이 바삭바삭 탔다

아름다운 고향 산천이 눈앞에 선해

부모 형제, 아내와 자식들의 얼굴

정다운 친구들의 얼굴이 선히 보이고

잠시도 눈을 못 부쳤는데 어느새 날이 훤히 밝는구나

 

뚜벅 뚜벅 뚜벅 잰 발걸음 소리

앗!

저마다 신경을 곤두세워 집행까지는 꽤 시일이 걸린다던데...

'철컥!'

문 따는 소리

'서도원 나왓!' 수갑찬 팔을 오랏줄로 묶는다

'이놈들 뭔 짓들이냐!'

"동지들! 비겁하지 말자!"

형리는 다급히 입을 틀어막는다

양쪽에 한 사람씩 붙어 팔을 잡고

뒤에는 총든 간수가 노려본다

'민, 민...'

틀어막은 서의 입에서 소리가 새어 나온다

저벅 저벅 멀어지는 발자욱 소리

'철컥!'

'도예종 나왓!'

'군사독재를 타도하자!'

'철컥'

하재완

'민주주의 승리 만세!'

'철컥'

송상진

'남북통일 만세!'

'철컥'

우홍선

'미군은 물러가라!'

'철컥'

이수병

'망국적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

'철컥'

김용원

'야만적 긴급조치법을 파기하라!'

'철컥'

여정남

'자유로운 조국 독립 만세!'

애국투사들은

이렇게 형장으로 끌려갔다

아!

목숨은 하늘인데... 목숨은 하늘인데...

 

외세를 등에 업고 정권을 찬탈한 독재자

나라와 계레를 끔찍히 사랑한 투사들의 고문 흔적을 지우려고,

억지로 조작된 죄가 탄로날까봐,

언도 다음날 새벽

전례없이 부랴부랴 교수형을 집행

가족들의 항의와 애원도 뿌리치고

시신을 화장하는 만행도 서슴치 않았다

 

오늘도 산천에 가득찬 부모님들의 한숨소리

자식들의 피울음소리 올봄으로 만산의 진달래는 피꽃으로 피어

님의 넋을 아로새겨 준다

세상이 운다 운다

천추의 한을 품고

슬픔을 가누지 못한 채

오랏줄에 묶여 총칼에 내몰린

그 새벽 그 감옥도

지금은 독립공원으로 바뀌어

형장 앞 미류나무 잎새는

23년전 그날의 사연을 곡하듯

살랑살랑 슬픈 곡조로 운다

꽃나이 애국 선열의 목숨을 단칼에 앗아간

그날의 난폭자도 진작 비명에 갔거니

조국 분단 반백년! 아, 잔인한 세월이여!

그대들의 거룩한 길

우리들 가슴마다에 활활 타올라 중음신으로 떠도는 님들의 명예와 영광을

민주화와 통일의 길에서, 오늘 반드시 되찾아 드리오리다

 

끝내는 백두산 높이 대통일의 깃발을 올려

님들의 넋도 빛나는 그 이름

남북 온 겨레와 어울려 덩실덩실 춤추려니

아, 남북 대통일의 그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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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의 승리(1974년 미국)

 

 

 

 

 

 

 

 

 


 

  

 

나는 당신들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챔피언이 되겠다.

베트콩은 우리를 검둥이라고 욕하지 않았다.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

 

자신들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소망 , 꿈 , 그리고 이상이 진짜 챔피언을 만든다.

 

 

                 [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

 

내가 뭘 하려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요.

미국 사람들은 권투선수를 그다지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죠.

 

권투가 아니었다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뛰어넘으려고

내가 권투를 한다는 걸 사람들은 몰라요.

 

권투를 함으로써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멋있어 보이려고 싸우는 게 아닙니다.

여러 가지를 바꾸고 싶을 뿐이에요. ....

 

나는 내가 조지 포먼을 두들겨주고 주먹으로 세계를 정복해도

우리가 자유로워지지 못한다는 걸 압니다.

 

나는 내가 이 모든 걸 뛰어넘고 그 이상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걸 압니다.

나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 일생

 

미국의 권투선수. 1942년 1월 17일 켄터키 주 루이빌에서 태어났다.

 

흑백 갈등이 첨예했던 미국 사회의 인종 차별에 거침없이 저항하는 발언을 쏟아내며 백인 사회에 적대감을 표출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고, 블랙 무슬림에 가입하여 이슬람교로 개종하면서 본명 캐시어스 마르셀러스 클레이 2세를 '흑인 노예'의 이름이라며 버리고 무하마드 알리가 되었다.

 

베트남전 징집영장 거부로 인해 챔피언 벨트를 빼앗기는 등, 여러 사건들 이후 커다란 사회적 이슈의 중심에 서게 된 알리는 일약 흑인 이슬람교도들의 선구자이자 인종 차별이 공공연하게 행해졌던 당대 미국 백인 주류 사회에 반기를 든 흑인 저항 세력들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열두 살 때 자전거를 훔쳐간 도둑을 때려주기 위해 권투를 시작한 후, 아마추어 권투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총 여섯 번의 켄터키 골든 글러브 타이틀, 두 번의 내셔널 골든 글러브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는 라이트헤비급 금메달을 땄다. 그의 아마추어 전적은 105전 100승 5패였다.

 

1960년 첫 프로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1963년까지 19전 19승 15케이 오승이라는 쾌거를 이루었다.

 

1964년 소니 리스턴을 7회 케이오승으로 꺾고 헤비급 세계 챔피언에 올랐지만 베트남 전쟁 당시 징집영장이 발부되자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는 말을 남기고 양심적 병역거부를 한 대가로 챔피언 벨트를 빼앗긴다.

 

그사이 챔피언 벨트는 '무패 철권'의 복서 조지 포먼에게 넘어갔고, 1974년 아프리카 중부 내륙의 자이르공화국(현 콩고민주공화국)의 킨샤사에서 '럼블 인 더 정글'이라 불리는 세기의 대결 후 헤비급 세계 챔피언 자리를 되찾았다.

 

 

잠시 신예 리언 스핑크스에게 챔피언 벨트를 빼앗겼지만 리턴 매치에서 승리를 거둬 세 번이나 챔피언 자리에 오르는 최초의 선수가 된다.

 

통산 전적 61전 56승(37KO) 5패라는 전설적인 기록을 남기고 1981년 은퇴했다. '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는 명언이 나올 정도로 가볍고 경쾌하며 빠른 몸놀림을 구사했던 알리 스타일의 권투는 마치 춤을 추는 것 같다고 묘사되었고, 심지어 아름답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1998년 유엔개발계획(UNDP) 친선대사로 임명, 1999년 BBC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선정 '세기의 스포츠맨'이 되었으며, 2005년 유엔 오토한 평화상 등을 수상했다.


 

  

 

 


■ 조지 포먼과의 권투시합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 두 흑인의 권투 시합. 하지만 알리와 포먼은 피부색이 같을 뿐 신념과 가치관에 있어 완벽한 대조를 이루는 양극이었다.

 

백인 전용 레스토랑에서 출입을 통제당한 후 올림픽에서 딴 금메달을 강에 버려버리는 등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에 강력하게 저항하고 흑인 민권 운동에 앞장서며 백인 종교인 기독교 대신 흑인 이슬람교로 개종하며 본명까지 버린 알리에게 포먼은 자본주의 미국 사회의 백인들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궁극적인 목표가 흑인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던 알리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미국 국기를 흔들어대며 미국을 경멸하는 말조차 못하게 했던 포먼은 권투경기의 상대 선수로서뿐 아니라, 이념과 신념의 차원에서도 반드시 쓰러뜨려야 할 장애물이었던 것이다.

 

백인들의 시선을, 같은 인종이지만 자신의 움직임에 동조하지 못하고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소극적인 흑인들의 시선을 바꾸고 개혁하는 것. 그 험난한 고난과 투쟁의 여정 중간 지점에 1974년 자이르공화국 킨샤사에서의 역사적인 경기는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는 하나의 깃발과도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1974년 자이르공화국 킨샤사 알리 측 선수 대기실. 항상 "사방의 벽들아, 내 위대함을 알아다오."라고 외치듯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승리를 장담하던 알리와는 달리 전체적인 분위기는 마치 사형장에 끌려가기 직전 죄수의 감옥 같다.

 

무기 없이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가장 무서운 존재,

케이오로 쓰러져 있는 선수에게도 마지막 확인 사살을 잊지 않았던 잔혹한 복서 조지 포먼과의 경기에서 노쇠한 전 챔피언 알리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알리 측 사람들까지도. 하지만 알리 자신만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마치 주문을 외우듯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그 분위기를 전파하고자 애썼다.

 

두 육체가 맞붙어 이루어내는 몸의 향연,

20세기 몸의 예술 권투.

가볍고 경쾌하며 빠른 몸놀림,

자신의 몸으로 쏟아지는 공격도 가장 적은 움직임으로 처리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위해 필요한 만큼의 주먹만을 날리며 완벽한 공격과 수비의 조화를 이룬 예술 권투를 구사했던 무하마드 알리의 권투는 일종의 아름다운 춤이었고, 즐거운 자신만의 소명이자 기쁨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공이 울렸다. 같은 극의 자석처럼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공격의 기회만을 살피던 순간, 번개처럼 날아간 알리의 오른손 스트레이트!

 

일 인치나 반 인치 차이로 승부가 결정되는 권투경기에서 거의 모든 자세에서 왼손보다 목표까지 최소한 한 걸음 이상 거리가 먼 오른손 주먹으로 경기를 시작한 선수는 이제껏 아무도 없었다.

 그것도 성난 황소처럼 달려들어 파괴적인 주먹을 퍼붓는 조지 포먼을 상대로 한 경기에서.

 

그리고 그때부터 모두의 예상과는 다른 경기가 펼쳐지기 시작하고 알리의 승리로 끝났다.

 

 

 

 

  

 


  비록 1984년 은퇴 몇 년 뒤 파킨슨 병 진단을 받은 후 오랜 기간 투병으로 거동도 불편하고 예전의 날랜 퓨마 같은 모습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를 영원히 새로운 변화를 향해 나아가는 '영웅'이자, 미국 흑인들을 있게 한 '선구자'로 기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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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와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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