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현대사 재조명

[스크랩] 하늘도 땅도 안다."조봉암 죽인 이승만은 국부(國父) 될 수 없다”

감효전(甘曉典) 2012. 4. 25. 19:39

 

                                                 '정권의 사법부 길들이기' 사건
                                                 '대통령의 정적
해외도피' 단초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9월 18일 "이 사건은 정권에 위협이 되는 야당정치인을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표적수사에 나서 극형인 사형에 처한 것으로 민주국가에서 있어서는 안 될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적 탄압사건"이라고 이승만 정권이 조봉암선생을 사형에 처한 사건의
성격을 규정했다.

  조봉암을 처형한 것은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
투표에서 지고 부정선거로 집권을 연장한' 이승만 정권의 두려움에서 비롯됐다. 김삼웅이 쓴 '조봉암 평전'에는 "개표상황을 본 순간 너무나 큰 차이가 나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 표 저 표 할 것 없이 모두 죽산표뿐이었다"는 당시 이승만의 부정선거를 지휘했던 인물의 회고가 실려 있다. 이승만 정권은 군 특무대, 경찰, 검찰, 사법부까지 총동원해 조봉암을 사형에 처했지만,얼마 안가 4.19혁명으로 무너졌다.

 
조봉암 사형 사건은 대통령의 정적은 죽음을 두려워해야 하는 낡은 정치문화 관행의 시작이었다. 조봉암은 사형선고를 받고서 "판결은 잘 되었다. 무죄가 안 될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정치란 다 그런 것이다. 정치를 하자면 그만한 각오는 해야 한다"고 말해 대통령의 정적이 짊어져야 할 숙명을 얘기했다. 이후 우리나라 정치문화에서 대통령 선거 낙선자는 본능적으로 해외로 도피했다.

 조봉암 선생 사형에 대한 무죄판결은 이승만으로부터 시작된 '정권의 사법부 길들이기'
역사재고하는 계기가 됐다.

 이승만은 1심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한 판사들을 '처단'했다. 홍진기 법무장관으로부터 항소심 재판부의 사형선고 결과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이승만은 "1심판결은 말이 안된다. 그때에 판사를 처단하려 하였으나, 여러 가지 점을 생각하여서 중지하였다.… 헌법을 고쳐서라도 이런 일이 없도록 엄정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결국 1심재판장인 유병진 서울지법 부장판사를 재임용에서 탈락시켜 '처단'을 실행했다.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이 보유했던 기개는 사라지고 이때부터 정권에 눌린 사법부의 오욕이 시작됐다. 52년만에 무죄를 선고한 오늘의 대법원도 사법부의 독립성을 지켜나갈 수 있느냐에 대한 크고 작은 시험을 겪고 있다.

 조봉암 선생은 진보정당의 기치와 성공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면서도 동시에 '진보의 분열악습'을 일찍이 보여준 예로 연구되기도 한다. 그의 진보당은 선거를 통한 평화통일론을 걸고 북진통일론을 내건 이승만을 기세로 제압한 진보정치를 선보였지만, 국민대중과 깊이 밀착해 단결을 이루진 못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사형에 처해졌어도 이렇다 할 대중적인
저항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던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현실 권력투쟁에서 졌지만 역사속에서 조봉암 선생은 승자가 됐고, 이승만은 영원한 패자의 기록을 안게 됐다. 최근 일부 극우인사들이 이승만을 국부로 숭배하자며 광화문 광장에 이승만 동상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나 조봉암 선생의 무죄확정으로 이승만의 국부승격운동은 설자리를 더 잃게 됐다. 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로 시작하여 조봉암 선생 사법살인으로 막을 내린 이승만 정권의 행적이 확정된 이상 '광화문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자'는 말을 제정신 가진 사람의 말로 여길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조봉암 선생에 대한 재조명은 인천지역에서 활발하게 일고 있다. 남북분단의 접경지역인 강화도 출생인 그에 대해 송영길 시장을 중심으로 인천지역 사회에서 조봉암을 추모하고 정신을 되살리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진병기 기자 jin@naeil.com

 

   폭설과 한파가 계속되는 엄동설한이다. 유년 시절 눈 덮인 고향을 떠올리며 우리가 품었던 삶의 이상을 돌아보기도 하고, 얼어터진 수도관과 출퇴근길의 혼잡 때문에 삶의 핍진한 현실을 퍼뜩 깨닫기도 하는 때이다. 삶은 늘 이렇듯 이상과 현실이 곡예처럼 맞물려 엮어져 있지 않나 싶다.


 

 혹한 속에 맞은 몇몇 죽음들은 우리로 하여금 삶을 더 깊고 더 조용히 돌아보게 한다. 역사를 앞서 달리며 바람을 맞아야 했던, 그리하여 후발주자들을 편안하게 해줬던 그 ‘선두주자들의 벌금’을 또한 떠올려본다. 나를 포함해 거의 모든 우리네 삶들이 해당되는, 늘 결단하지 못했던 후발주자로서의 미안함도 생각해보게 된다. 꼴찌였지만 누구 못지않게 받고 싶었던 갈채도 그리워해 본다.

 

  사법살인 52년 만에 이루어진 조봉암에 대한 대법원의 재심 판결을 통한 무죄선고는 인간과 생명에 반하는 정치의 본질을 깨닫게 해준다. 무죄였음에도 불구하고 권력과 사법이 죽인 조봉암의 삶은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 그가 선구자의 벌금으로써 치러야 했던, 소중한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앞서 걸어갔던 ‘한반도 복지’, ‘평화통일’, ‘민주주의’, ‘인간평등’의 선진 사상은 누가 어떻게 이뤄갈 것인가? 탈냉전의 지금에 들어도 그의 사상, 용어, 개념, 현실인식은 놀랄 만치 선도적이었다.

 

 그럼에도 정의를 수호해야 하는 법은 왜 52년 전에는 진실의 편에 서지 않았던가? 광풍의 시대에 조봉암 못지않은 억울한 사연을 안은 채 국가·권력·법률·이데올로기·정부의 이름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생명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이며, 그들의 무죄는 어떻게 이끌어낼 것인가? 후세 가족마저 옥죄었던 이 억울한 삶들의 묘비명은 누가 어떻게 채워줄 것인가?

 

 참으로 곡진한 개인적 삶을 살았으되, ‘자상하며 정의롭고’ ‘따뜻하며 올곧은’ 모성성으로 우리를 ‘품어주며 깨우쳤던’ 박완서 선생의 죽음은 전쟁과 가난의 시대가 낳은 정신적 풍요의 세대가 사라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곡진했던 만큼 진실했고, 슬펐던 만큼 진정성이 넘쳤던 선생의 소설은 과장도 허구도 없는 자기 삶의 정신적 문학적 연장이었다. 구체가 도달한 영성은 그가 보여준 놀라운 깨달음의 수준을 가늠하게 했다. 자기 삶의 진액을 빼내어 썼음이 분명한, 너무도 슬퍼 책읽기를 중단한 채 창밖을 보며 눈물을 흘려야 했던 장면들이 그의 소설들 속에는 너무도 많이 너무도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지 않은가? 젠체하며 크고 굵게 쓰지 않아도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깊고 길게 움직일 수 있는지를 선생은 전범적으로 보여줬다.

 

 

 저 풍진 광풍의 세상을 만나 자신들의 개인적 고난을 극복한 영혼의 자양분으로 우리의 정신을 먹여살렸던 그 세대들의 사라짐, 이제 누가 또 박완서처럼 “따뜻하면서도 올곧을 것이며”, “품어주면서도 깨우칠 수 있을 것인가?” 이 겨울 리영희, 이돈명, 박완서의 죽음은 격조와 희생, 지혜와 위로, 계몽과 헌신의 결합을 삶으로 보여주었던 현자들이 거의 모두 사라지고 있음을 뜻하는 듯하여 몸보다도 더욱 추워지는 우리네 영혼이 아닌가 싶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추운 새벽에 리영희 선생의 영결식장에서 만난 한 평범한 시민은 나의 콧날을 시큰하게 했다. 그는, “아빠는 비록 리영희 선생처럼 온몸과 영혼을 바쳐 남을 위해 살지는 못했지만, 그의 삶과 정신만은 존경했다고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다”며, 바쁜 출근길에 영결식장을 잠시 들러 아이에게 보여줄 영결식 팸플릿을 하나 달라고 했다. 정치인이나 언론인이나 학자나 종교인들이 목소리 높여 정의를, 민주주의를, 평화를, 복지를, 평안을 외치고 있음에도 거꾸로 가고 있는 현실에서 “팸플릿 하나 달라”며 어두운 새벽에 그가 내민 손길은 평범성이 갖는 위대성을 깨닫게 하고도 남았다. 박완서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주는 위대한 깨우침처럼.

 

 꽁꽁 얼어붙은 혹한의 이 아침, 우리는 언제 어떻게 무엇으로 타인의 삶과 영혼을 위한 선두주자의 벌금을 치를 수 있을까 조용히 생각해본다.

 

출처 : 산들사랑
글쓴이 : 산골 나그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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