洗川

[스크랩] [위인전] 사명대사 (1부)

감효전(甘曉典) 2011. 12. 19. 23:07

 

   

   사명대사 / 우리나라 위인 100 (계몽사 발행) 

 

                 ***   1 부   ***

 

1. 출생

 

밀양부(오늘날의 밀양시)에서 서쪽으로 30여리(12Km정도) 떨어진 곳에

수안(오늘날의 무안)이라는 제법 큰 동네가 있었고, 여기서 다시 10여리(4Km정도)

서쪽에 깊숙한 산골이 하나 있었으니, 이 곳을 괴나루(오늘날의 고라리)라 불렀다.

 

이 괴나루골의 끝쪽 산마루를 등지고 편편하게 내려 앉은 산기슭에 큰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그 속에 초가 삼간이 있으니, 이 집이 임처사(선비)의 집이었다.

 

이 집 주인 임처사는 큰 부자가 되거나 벼슬하기를 싫어하여

부인 달성 서씨와 조용히 글이나 읽으면서 농사일을 돌보며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백발 노인이 임처사 부부에게 나타나

"너희들의 그 고운 마음씨와 정성에 감동하여 이 아이를 보내니 잘 가르치고 키워서

나중에 나라에 큰 일을 하도록 하여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지는 꿈을 꾸었고,

얼마 후 애기를 갖게 되었다.

 

그 해(서기 1544년, 조선시대 중종 39년) 10월 17일 이들 부부는 아들을 얻었으니,

이 아이가 바로 사명대사 임 응규였다.

응규는 태어날 때부터 남달리 몸집이 크로, 울음 소리가 우렁차며 똑똑하여

모두들 신동(신기한 재주를 가진 아이)이 태어났다고 부러워 했다 한다.

이처럼 훌륭한 어린이를 태어나게 한 것은 그 당시 어려웠던 나라를 구하라고

하늘이 보내준 아이라고들 했고, 응규 부모님들은 응규를 훌륭히 키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2. 집안과 성품

 

사명대사의 아버지 이름은 '수성'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임처사라고 불렀다.

임처사는 본래 황해도 문천 임씨이니 원래 고향인 풍천에서 이름있는 문벌로서 임처사의 할아버지는 문과(과거 이름)에 급제하여 장악원정(음악 행사를 맡은 기관의 최고 책임자)이라는 벼슬을 하였고, 조선 시대 성종 말년에는 대구도호부(지금의 대구)의 부사(지금의 군수)를 지냈다.

이 때 임부사가 우연히 밀양을 들리게 되었는데 당시 밀양이 경치가 매우 아름답고 사람 살기에

적당한 곳이라 여겨 얼마 후 밀양의 사문동에 자리를 잡아 살게 되었다. 그런데 중종 임금에 이어

연산군이 임금이 되자, 연산군은 원래 성질이 사나와 나라에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아차리고 임부사는 사람이 살기 힘든 괴나룻골로 옮겨 살게 되었다 한다.

 

임처사의 아버지(사명대사의 할아버지)는 일찌기 문과에 급제하여 강계 부사까지 지낸바 있으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벼슬을 그만두고 과나룻골에서 책을 읽으며 조용히 살았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사명대사의 아버지인 임처사 역시 할아버지가 남긴 교훈을 지키고자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책읽기에만 열중하였다.

 

이렇게 훌륭한 집안에서 자라난 응규(사명대사)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뛰어나 남들이 신동이라

칭찬하였지만, 자기 자신은 조금도 우쭐해하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고,

오직 어른들께 공손하고 예의 바르며, 시간만 있으면 부지런히 책을 읽었다.

 

그러나, 응규의 집안 살림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곧고 맑은 성품으로

오랫동안 넉넉치 못하게 살아왔다.

응규는 이런 어려운 살림속에서도 조금도 거리낌없이

장차 나라를 위해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책을 읽었다.

 

 

3. 글짓기 대회에서 장원

 

사명대사의 어린 시절, 당시 밀양부에서는 해마다 삼월 첫 범날 즉, 음력 3월 3일에

영남루에서 소년 백일장(글짓기 대회)을 열어 이 지방 소년들의 글 재주를 겨루는 행사가 있었다.

 

그래서, 해마다 이 날이면 밀양 고을뿐만 아니라,

가까운 이웃 고을에서까지 재주있고 글 잘하는 소년들이 떼를 지어 모여 들었다.

 

소년들은 저마다 자기 마을에서는 으뜸가는 글 재주를 가졌다고 추천된 소년들이었다.

그러니, 그 중에서 장원(글짓기 대회에서 1등을 말함)으로 뽑힌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백일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이것보다 더 훌륭한 시는 없고, 나는 이것을 장원으로 하는 것이 좋겠는데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어떻소?"


  "그렇게 합시다."

 

이윽고 여러 시험관들은 그 시를 만장일치로 뽑았다.

 

    "봄바람 상사절 수양버들은 푸르르고,
    비 개인 저 하늘엔 무지개가 걸렸구나.
    신녀들이 쌍쌍이 구름 타고 내려와,
    꽃같은 얼굴들이 나비 춤을 춥니다.

    복숭아꽃 한송이가 떨어져 내리는 듯,
    봄바람에 제비가 물을 차고 날으는 듯,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닌 허공 속에
    푸른 물과 푸른 산이 오락가락 합니다."

 

  "정말 이렇게 잘 지을 수가 있을까?"


  "이 시야 말고 수양버들 숲에서 그네 뛰는 아가씨의 모습을 그림처럼 환하게 그려 놓았군!"


소년 응규의 시를 심사하던 시험관들은 모두 감탄하였다.

장원(1등)을 정하고 봉해 놓은 이름을 뜯어보니 임응규 소년이었다.

때마침 응천강가에서 상사놀이 굿을 하던 수백명의 사람들이 이 백일장에 장원을 한 소년을

구경을 한다고 영남루 주위에 둘러서 있다가 장원을 알리는 방이 내걸리자

박수 소리가 우뢰같이 터져 나왔고, 이 때 부터 응규의 이름은 금시에 온 고을에 퍼지게 되었으니

응규가 13살 되던 해 봄에 있었던 일이다.

 

이처럼 사명대사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재주가 뛰어나고 글짓기에 특별한 재능을 가졌다.

 

 

5. 소년시절

 

응규는 말을 겨우 깨우쳤을 때부터 천자문을 따라 외우는 흉내를 곧잘 내었다.

차차 자라면서 조금씩 어려운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보통 아이들처럼 소꼽놀이도 자주 하였고,

모래와 돌을 모아 탑을 만들고 부처 모습을 만들어 주위를 꽃으로 장식하여

밤을 차려 놓고 노는 놀이를 자주 하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여섯 살 때는 자라 잡는 것을 보고 불쌍히 생각해 밤을 주워 주고,

자라를 사서 못에 놓아 주는 등 동물을 사랑하는 마은도 남달리 강했다고 한다.

일곱살이 되면서 할아버지께 본격적인 한문 공부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가르치는 할아버지도 열심이었지만 배우는 응규는 더욱 열심이었다고 한다.

한 번 시작하면 공부하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공부방을 떠나는 일이 없을 만큼 열심히 했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서 할아버지께 직접 배우는 시간보다는 언제나 스스로 열심히 공부했다.

의심나거나 모르는 것이 있으면 밤잠을 자지않고 알려고 했고, 모르는 것은 그냥 넘기는 일이 없었다.

이렇게 하여 응규가 13살 되던 해, 할아버지께는 더 배울 것이 없게 되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응규를 앞에 불러 놓고,

 

"응규야, 내 이젠 너에게 더 가르칠 것이 없구나.

오늘부터 너는 유촌 황여헌 선생댁에 가서 맹자와 논어 등을 배우도록 하여라." 하시는 것이었다. 


 "예."


  응규는 알았다는 듯 공손히 대답하였다.


 "응규야, 유촌 선생 댁에 가서는 몸가짐을 특별히 조심하고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내 말을 꼭 명심하여라."


  "예, 깊히 명심하겠습니다."


응규는 그 날부터 유촌 선생 댁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유촌 선생 댁에서도 응규는 항상 스승보다 먼저 일어나 세숫물을 떠 올렸고,

밤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스승의 잠자리를 돌봐 드렸으며,

밤 늦게까지 글을 배우고 익혀 스스로 깨우치기에 온갖 노력을 다했다.

응규는 언제나 선생님이 시키지 않아도 자기가 할 일과 공부를 스스로 찾아 하곤 했다.

이렇게 공부한 응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면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게 되었다.

 

 

6. 승려가 되다.

 

응규의 학문은 나날이 발전해 갔고,

부모님과 유촌 선생은 이런 응규를 더욱 사랑과 정성으로 보살폈다.

 

특히, 유촌 선생은 응규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기를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응규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사람은 왜 죽고, 병들고, 늙으며, 또 태어나야 하는지,

그리고 왜 온갖 걱정 속에 살아가야 하는지 늘 의문을 버릴 수가 없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해 주는 책도 없었고, 선생님도 그 문제만은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아무리 높은 벼슬에 있는 사람도, 훌륭한 학자도, 재산을 많이 가진 부자도 세월이 흘러 죽고 나면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을 이런 것들을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도대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응규는 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내던 중, 어느 날 한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 스님은 응규에게 두 권의 불경 (불교의 교리를 적은 책)을 꺼내 주며

 

 "이 책에는 우리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을 벗어나서,

나고 죽음이 없는 부처가 되는 법을 써 놓은 책이니 읽어 보도록 하여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응규는 크게 기뻐하며

 

  '여태까지 내가 알려고 했던 그 어려운 문제의 해답이 바로 이 책 속에 있겠구나."

 

 생각하고 책을 펴 보았다.

 그러나 그 내용이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대사님, 이 글의 뜻이 무엇이옵니까?"

 

 하고 책을 주신 스님에게 여쭈어 보았다. 그러자 그 스님은

 

   "허, 허, 그것을 어떻게 간단히 말로서만 일러 줄 수 있겠는가!"

 

   "그럼 알 도리가 없겠습니까?"

 

 "그것을 바로 알려면 숙세(사람들이 사는 사회)와 인연을 끊고,

산속에 들어와 한 가지 마음으로 공부를 해야 되는 것이야."

 

 이런 말을 남기고 스님은 돌아서 갔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응규는 스님이 주신 책을 열심히 읽어

그 책을 줄줄 외울 수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이 공부를 꼭 해야겠다."

 

응규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을 하고 집을 떠나 산속으로 들어 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과 자기를 가르쳐 주신 유촌 선생님을 생각하니

떠나는 일이 몹시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며칠을 망서린 응규는 결국 집을 떠나기로 하였다.

 

   '부모님, 그리고 유촌 선생님, 소자 오늘부터 이 세속을 떠납니다.

    나고 죽음이 없는 법을 배우러 갑니다.

 

응규는 마음속으로 부모님과 선생님께 이렇게 인사를 하고 집을 떠나게 되었다.

 

이 때가 응규의 나이 13살 되던 해 5월이었다.

소년 응규는 더 높은 공부를 하기 위해 오랫동안 정들었던 고향 괴나룻골을 떠나

직지사(충청도 황간에 있는 절 이름)로 향했다.

 

직지사는 충청도 황간의 황악산에 있는 절로 그 당시는 상당히 큰 절이었다.

직지사의 주지(절의 책임자)는 신묵대사로 불법에 관해 공부를 많이하여

여러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큰 스님이었다.

응규는 직지사에 온 날부터 신묵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불법을 공부하기 위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중이 된 응규 소년은 그 날부터 세속의 이름을 버리고

다시 이름을 얻으니, 유정이라했고, 자는 이환이요, 호를 사명, 또는 송운이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유정은 정식으로 중이 되는 시험을 보기 위해

불교에 관해 열심히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6. 승과에 장원급제

 

1561년(조선 명종 11년) 유정이 18세 되던 해 나라에서는 중을 뽑는 과거시험이 있었다.

유정을 가르치던 신묵대사는 유정에게
  

"지금 나라에서 쓰러져가는 불교를 바로잡기 위해 과거를 통해 유능하고 훌륭한 중을 뽑아

불교를 더욱 발전시키려고 하니, 너도 과거 시험(승과)을 보아라.

그것은 우리 절을 위할 뿐만 아니라 장차 이 나라의 불교을 위함이니라."하면서

 

유정더러 과거 시험을 보도록 권하였다.

 

그 당시 나라에서는 유학을 하는 선비들이 어찌하든지 불교를 없애려고 노력하였으나,

임금님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이 일을 반대하여 중을 뽑은 과거시험을 그대로 두게 되었다.

 

유정은 이 기회에 나라에서 인정하는 중의 자격을 얻어 나라와 불교를 위해 일하고 싶어

과거를 보기로 하였다.  이번 과거는 선종 봉은사라는 절에서 보게 되었는데,

과거날 봉은사에는 과거를 보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3천명이 넘었다.

 

그래서, 1차 시험을 치루어 천명을 뽑았는데 유정은 1차 시험에 합격하였다. 그 다음날은

본 시험으로 먼저 초장을 치루어 200명을 뽑고, 다시 종장을 치루어 100명을 뽑았으며,

그 다음은 30명을 뽑는 것이었다.  유정은 모든 시험에 다 합격하고 마지막 시험에 들어갔다.


이 시험은 선종 판사로 있는 보우대사가 직접 시험관이 되어 7가지 질문을 하는 시험이었다.

 

  "어떤 사미(처음 중된 이름)가 그리 거만한고?"

 

 보우대사의 우렁한 목소리에 유정은 침착하게

 

  "이 법 가운데 주객(주인과 손님)이 없고, 노소가 없는데 무엇이 거만합니까?"

 

하고 첫째 질문에 답하니,  

보우대사는 약간 머리를 움직이며 무엇이 가슴에 와 닫는 기분을 느끼며 두번째 질문을 하였다.

 

  "어디로부터 왔는고?"


  "일찌기 간 곳이 없는데 온 곳이 있으리까?"

 

유정의 대답에 보우대사는 또 한번 놀라며

  "지금 네가 있는 곳은 어디냐?"


  "내 마음 속에 있습니다."

이런 질문과 대답을 거쳐 마지막 물음에 벼락같은 큰 소리로 물으니,

유정도 벼락 치는 것 같은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결국 마지막 시험에서 7가지 질문에 모두 답한 사람은 유정밖에 없었고,

응시자 3천명 중 1등(장원)으로 합격하였다. 특히 그 날의 시험관, 전원은

불교계에서 큰 인물이 나타났음을 알고 모두들 기뻐하며 잔치를 베풀었다..

 

 

7. 선비들과 실력을 겨룸

 

유정이  승과에 장원 급제하자 그 이름이 온 나라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유정의 이름이 이렇게 널리 알려지자 그 때 나라안에서 이름 있는 글재주꾼들은

 

'대체 유정이란 중이 얼마나 똑똑하고 재주꾼이기에 승과에 장원(1등)한 것이 그처럼 야단인가?'

한 번 만나 겨루어 보자고 봉은사로 찾아오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 당시 이름난 글 재주꾼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한 아계 이산해, 고죽 최경창, 제봉 고경명,

백호 임제, 사암 박순, 하곡 허봉, 고봉 기대승 등이 유정을 만나 보기를 원했다.

그때 유정은 직지사에 있다가 보우대사의 부름을 받고 불교를 업신여기는

선비들의 마음을 바로 잡아 주고자 봉은사로 오게 되었다. 유정이 봉은사에 왔다는 말을 듣고

이산해, 최경창, 임제, 고경명 등이 찾아왔다.

 

이들은 당시 나라안에서 가장 재주있고, 학식이 높은 젊은 선비였다.

어느날 선비들과 유정이 시 짓기 시합을 하였는데,

선비들은 유정의 시 짓는 솜씨를 보고 모두 마음속으로 그의 뛰어난 솜씨에 놀랐다고 한다.

 

그 다음은 불교와 유교에 대해 토론을 벌였는데, 이 역시 유정의 넓고 깊은 학식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유정은 선비들의 생각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 날, 선비들은 유정의 사람 됨됨이에 감탄하였고, 유정의 이름은 더욱  더 널리 알려져

많은 선비들이 유정을 찾아와 이때부터 유정은 많은 선비들과 사귀게 되었다.  (계속)

 

 

 

출처 : 내 고향 밀양
글쓴이 : 龍雲(칠득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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