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문이나 무인 풍류객들과 어울리는 장면만을 보면 운심이 운치 없는 기생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운심은 한 분야에서 최고라는 이름을 얻은
인물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성대중의 ‘청성잡기(靑城雜記)’에는 운심과 관련된
일화가 또 한 가지 실려 있는데,
운심이 백하(白下) 윤순(尹淳, 1680~1741)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다.
백하라면 조선후기의 서예가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운심을 사랑했다는 것이다.
최고 검무가와 최고 서예가의 사랑, 무엇인가 묘한 어울림이 느껴진다.
물론 당시의 상황에서 소론 명문가 출신이요,
진사시 장원급제자며, 서예가로 최고의 명망을 누리던
백하의 당당한 위상에는 제 아무리 검무의 달인이라 해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엄격한 신분상의 상하질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윤순과 운심에게선 극치에 달한 최고 수준의
예술가들이 공유하는 어떤 동질성이 감지된다. 성대중이 쓴 글을 보자.
[백하(白下) 윤순(尹淳)이 운심을 사랑하였다.
백하는 본래 글씨를 잘 썼는데 희롱 삼아 운심에게 “네 검무가 능히 나로 하여금 초서(草書)의 비결을
깨닫게 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했다.
운심 역시 평소 백하의 글씨를 사모하여
그것을 얻어 보물로 지니고 싶었다.
백하는 글씨를 써주기로 약속했으나 미처 써주지 못했다.
일찍이 가을비 내릴 때 홀로 앉아 있는데 낙엽이 뜰에 가득했다.
운심이 홀연히 술상을 받쳐들고 와서
권주가를 불러 백하에게 술을 권했다.
백하는 흔연히 술을 마시고 조금 취하자
자주 붓과 벼루를 쳐다보았다.
그때 운심은 갑자기 비단 치마를 벗어 백하 앞에 깔고서는
“상공께서는 지난날의 약조를 잊지 않으셨지요?”라고 했다.
백하는 바로 붓을 휘둘러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썼다.
백하 스스로도 득의작(得意作)이라고 생각할 글씨였다.
백하는 운심에게 비밀스럽게 보관하고 절대 내놓지 말라고 경계를 했다.
그런데 백하가 술에 취해
우연히 그 사실을 풍원(豊原) 조현명(趙顯命)에게 발설했다.
조현명이 운심을 불러 사실을 물었고
운심은 감히 숨길 수 없어 마침내 그 서첩은 조현명의 차지가 되었다.
운심은 종신토록 그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희롱삼아 한 말이라는 단서가 달려 있지만
백하는 운심의 검무가 초서의 비결을 깨닫게 한다고 말했다.
물론 당나라 때의 유명한 무용가 공손대낭(公孫大娘)의 춤을 보고
초성(草聖)으로 불리는 장욱(張旭)이 초서의
새로운 경지를 얻었다는 고사를 연상하며 한 말이다.
운심의 검무가 백하의 초서 쓰기에 어떤 영감을 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사실 검무의 역동적 춤사위를 생각한다면
초서와의 관련성이 없지도 않을 듯하다.
윤순은 운심의 검무를 보고 초서의 격을 높이려 하고
운심은 윤순으로부터 글씨를 받으려고 했다.
운심은 윤순이 글씨를 쓰고 싶은 욕구가
가장 강렬할 때를 포착해 분위기를 돋운 다음 비단치마를 벗어
그 위에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쓰게 하였다.
글씨를 쓴 본인조차 득의작이라고 자평(自評)할 작품이었지만
우연한 실수로 당대의 명사 조현명에게 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예술작품을 두고 벌어지는 이러한 이야기는
모두가 풍류운사(風流韻事)를 벗어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금전과 권력으로 따지기 좋아하는
속물근성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운심은 예술을 이해하는 기생이었다.
운심보다 조금 뒷사람인 기생 단섬의 일화도
그와 비슷한 사연을 담고 있다.
회양(淮陽) 출신의 내의원(內醫院) 의녀(醫女) 단섬(丹蟾)은
가무를 잘하고, 글자를 이해할 줄 알았으며,
또 서화를 사랑하는 기생이었다.
당시의 저명한 화가 이명기(李命基)가
그녀를 위해 작은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그러자 단섬은 유명한 화가요 시인인 강세황에게
사람을 보내 특별히 그림에 부칠 찬(贊)을 부탁했다.
부탁을 받은 강세황은 그 기생을 특이하게 여겨 찬을 지어주었다.
강세황은 그 찬 가운데 “내 서화를 사랑한다고 하니
그 맑은 운치가 가상하다”고 했다.
신분의 차별, 남녀의 차이, 나이의 차이 등등이
그들 사이에 놓여 있지만, 예술이라는 차원에서는
자유로운 소통이 가능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런 점에서 운심이 윤순과 나눈 사랑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