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10.13 조선민족청년단 결성. 초대단장에 이범석
1946년 10월 9일 이범석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한국의 청년단체이다. 단장은 이범석이었다. 비군사·비정치를 단시로 하여, 미군정 당국의 재정적 지원하에 대조직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47년 4월 귀국한 지청천이 대동청년단을 조직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고, 정부가 수립되자 대통령 이승만은 모든 청년단체의 통합을 지시하였다. 당시 국방장관과 국무총리를 겸하고 있던 이범석은 이를 거부하였으나, 결국 49년 1월 15일 족청은 해산되어 대한청년단에 흡수되고 말았다.
한편 족청계는 남아 후일 이범석이 이승만에 의하여 정치적 탄압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조선민족청년단 [ 朝鮮民族靑年團 ]
1946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청년운동단체.
이범석(李範奭)이 1946년 10월 민족정신의 전통을 계승할 청년운동의 모체로서 결성한 단체이다. 약칭 ‘족청(族靑)’이라 한다. 이승만(李承晩)이 집권한 뒤 실시한 청년단체 통합에 따라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으로 통합, 해체되었다.
그러나 내용은 형식일 뿐 이범석이 권좌에 오름에 따라 하나의 강력한 정치 파벌로 남아 있으면서 자유당 창당 및 자유당 집권 초기에 정치력으로서 크게 작용하였다.
족청의 초기 면모를 보면, 단장에 이범석, 부단장에 안호상(安浩相), 전국위원에 김관식(金觀植)·김활란(金活蘭)·이철원(李哲源)·현상윤(玄相允)·이용설(李容卨) 외 32명, 이사에 백낙준(白樂濬)·최규동(崔奎東) 외 10명, 상무이사에 김형원(金炯元)·노태준(盧泰俊)·박주병(朴柱秉)·설린(薛麟)·김웅권(金雄權) 등으로 구성되었다. 족청의 강령인 단지삼칙(團旨三則)은 다음과 같다.
① 우리는 민족정신을 환기하여 민족지상·국가지상의 이념하에 청년의 사명을 다할 것을 기한다. ② 우리는 종파를 초월하여 대내자립·대외공존의 정신으로 민족의 역량을 집결할 것을 기한다. ③ 우리는 현실을 직시하며 원대한 곳을 바라보고(着眼遠大), 비근한 것부터 착수하여(着手卑近) 건국도상의 청년다운 순감(純感)을 바칠 것을 기한다.
조선민족청년단은 미군정 당국의 지원을 받아 1946년 11월 수원에 훈련소를 설치하고 1개월 과정인 청년간부훈련에 착수하였다.
당시 훈련지원자 수는 2만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들 중에서 200명을 선발, 1946년 12월 제1기 훈련생 입소식을 가졌다. 제7기생부터는 여성간부훈련생도 입소시켰으며, 훈련은 이론부·실천부·기술부 등 5개 부문으로 나누었다.
이론 부문에서는 정인보(鄭寅普)·안호상·배성룡(裵成龍)·설린 등 20여 명이 강론을 맡고, 실천 부문에서는 이범석 스스로가 1주 12시간의 강론을 맡아 조국의 현실과 새로운 청년운동의 방안, 혁명적 인생관, 혁명적 민족관, 구국구족운동(救國救族運動) 등의 인식화 교육에 힘썼다.
조선민족청년단은 청년들의 특질, 즉 생명력·정열·구지욕(求知慾)·자의식(自意識)·모험심·순진성 등을 청년운동의 생산력과 투쟁력으로 전환시켜나갔다.
강훈련을 받은 수료생들은 이범석의 휘하에서 뭉쳐, 각기 사는 고장과 소속되었던 단체로 돌아가 족청의 하부조직을 결성, 강화해 나감으로써 전국적인 막강한 조직을 형성하였다.
이와 같이 조직이 확장됨에 따라 정계와 사회의 일부에서는 광복군 활동의 연장, 독재운동단체, 심지어 용공단체라는 비판의 소리가 강하게 일었다.
조선민족청년단은 1951년 12월 신당으로서 이기붕(李起鵬) 중심의 자유당이 결성될 때, 별도로 부산의 동아극장에서 발기인대회를 갖고 강령·당헌 등을 채택함으로써, 결국 같은 이름의 두 자유당이 탄생하였다.
이른바 ‘원외자유당(院外自由黨)’이다. 이 족청계의 원외자유당에서는 1952년 5월의 정·부통령선거에 즈음하여 원내자유당의 기선을 제압, 이승만을 대통령후보로, 이범석을 부통령후보로 내세웠으나, 이범석은 낙선하고 무소속의 함태영(咸台永)이 당선되었다.
자유당의 전당대회는 정부통령 선거 후 40일 내에 소집하게 되어 있었는데, 전당대회에서 선거 결과에 따른 논공이 예상되어 족청계열은 유례 없는 정치적 격분에 휩싸였다.
족청계는 선거에 비협조적이던 인사들을 규탄하는 한편, 당외로도 공세를 폈다. 당시 국무총리 장택상(張澤相)과 내무부장관 김태선(金泰善)을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하는 동시에 정치적 투쟁을 선언하기까지 하였다.
김태선은 실각하여 서울특별시장으로 물러앉고, 장택상은 ‘고시사건(古市事件)’이라는 정략에 휘말려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정·부통령선거 후 숙청을 위한 족청계 주도의 전당대회가 1953년 5월에야 대전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자유당 안에서 그 종파적 투쟁으로 족청계가 당권을 전단(專斷)한 최고절정기였으며, 이것을 당시에는 조선민족청년단의 자멸을 초래한 발악적인 횡포기였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승만은 같은 해 9월 족청파 제거에 관한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승만은 특별분부라 불리는 이 담화를 통하여 “자유당 안에 구민족청년단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부식자들이 있어서, 내 의도에 대립하여 당내의 통일을 해치며 전 국민의 통일정신을 위험하게 하여 분열을 일삼고 있으니, 이는 ‘단지(斷指)의 아픔’을 당하더라도 숙청되어야 한다.”는 전례 없는 강경한 결단을 보였다.
이를 고비로 하여 이범석은 자유당 안에서 이기붕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 대한청년단으로의 통합원칙을 결의하고 통합교섭을 위한 5명의 대표자를 뽑았다. 그리하여 다음해인 1954년 1월 “우리 청년운동의 공과에 대하여는 우리 민족이 부흥하였을 때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는 성명을 마지막으로 해체되었다.
≪참고문헌≫ 民族과 靑年 1(高麗文化社, 1948)
≪참고문헌≫ 韓國政黨史(韓太壽, 新太陽社, 1961)
≪참고문헌≫ 事實의 전부를 記述한다(李範奭 編, 希望出版社,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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