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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46.02.08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로동당, 북조선인민위원회 발족

감효전(甘曉典) 2012. 3. 11. 17:09

1946.02.08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로동당, 북조선인민위원회 발족

 

 

 

 

 

 

 

(서울=聯合) 북한의 역사는 김일성 권력투쟁사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김일성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따라서 북한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김일성 개인에 대한 철저한 고찰을 해야 한다. 비록 현재 김일성은 사망하였지만 '영생'하여 북한을 통치하고 있다. 김정일도 이것을 감안, 유훈통치를 표방하고 있다. 김일성은 살아있는 神이었다. 김일성에 대한 북한인민들의 믿음은 종교적 신앙 그 자체이다. 우리의 의문은 김일성이 어떻게 정치를 하였기에 그처럼 장기간 절대 권력을 유지하였고 김정일에게 세습까지 할 수 있었을까에 모아진다.

김일성은 日帝때 북한이 선전하는 만큼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아니었지만 東만주를 거점으로 항일무장투쟁을 한 것은 사실이다. 오늘날 김일성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북한인민들이 그를 神처럼 숭배하는 이유는 첫째, 항일무장투쟁을 통한 救國을 했다는 神話이고, 둘째는 한국전쟁을 통한 '美帝'축출의 신화이다. 이것은 진위여부와 관계없이 인민들에게 각인되어 있고 김일성을 신봉하도록 만들고 있다.

김일성은 1940년대에 日帝의 토벌을 피해 소련의 하바로프스크 지역으로 피신, 소련의 동방지역 첩보부대였던 [88여단]에서 근무하였고 이를 인연으로 소련 군부 및 정치인들과 친하게 되었다. 특히 김일성은 스탈린을 존경하였고 이것은 해방후 정권수립과정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해방직후 정부가 수립되지 못하고 있었던 혼란된 상태에서 소련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던 김일성은 스탈린식 전위당을 만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주지한바대로 공산국가에서는 당권을 장악하지 않고는 국가를 장악할 수 없다. 따라서 김일성은 당권장악을 위해 빨치산식 테러리즘을 동원, 잔인하게 정적을 숙청해 나갔다. 첫번째 제거의 대상은 현준혁이었다. 현준혁은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조만식 및 북한의 민족주의자들과 협력하려고 노력하였다. 따라서 김일성은 북한 에서 현준혁의 주도하에 조선공산당이 움직여지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을것이다. 김일성은 현준혁이 계획했던 분국의 조직사업을 자신이 주도해 나가고 이를 바탕으로 김일성은 1945년 10월 10일에서 13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된 [조선공산당 서북 5도 당원 및 열성자대회] 대회를 마치고 10월 14일에는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민대회]에 참석하였다.

김일성은 약간의 소요는 있었지만 효율적으로 연설을 마쳤다. 이 대회를 통해 국내적 기반이 전혀 없었던 김일성이 타파벌에 대한 열세를 만회하고 향후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될 수 있는 기반을 획득하였다. [서북 5도당대회]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창설을 결의하였으며 향후의 정치노선과 조직노선을 정립하였다. 비록 김일성은 분국의 위원장이 되지 못하고 김용범이 위원장으로 되었으나 그의 의도대로 향후 인민정권이 추구해야 할 기본목표를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김일성을 중심으로한 200명이 채 안되는 빨치산파들의 노력의 결과였다. 이러한 노력은 최악의 경우에서도 생존 해야한다는 빨치산식 생존방식에서 발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반 난관을 극복하고 창설된 북조선분국은 2개월이 경과할때까지 활동상의 성과는 미진하였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김일성은 1945년 12월 17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를 소집하고 당내의 상이한 조직적 사상적 경향을 비난하였다. 김일성은 이 3차대회에서 위원장으로 피선되었다. 김일성이 위원장이 된 이유는 분국의 활동저조 원인을 분국의 지도체제 미비로 진단하고 지도부 활성화를 위해 김일성이 당책임비서가 되어야 한다고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북한의 黨史에서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의 역사적의의는 대단히 큰 것으로 평가되고있다.

1946년 2월 8일 평양에서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고 김일성이 위원장이 되었다. 김일성은 우선적으로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무상몰수무상분배' 원칙에 입각한 토지분배는 김일성의 인기를 급상승시켰다. 왜냐하면 당시 다수를 점했던 소작농들의 평생소원은 자기 토지소유였기때문에 김일성의 정책은 농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체제 건설노선이었던 민주기지노선에 대한 다양한 의견대립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김일성은 이러한 노선갈등을 청산하기 위해 1946년 8월 30일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을 합당하여 [북조선로동당]을 창당하였다. [북조선로동당]의 창당으로 김일성은 보다 넓은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보하였고 이러한 여세를 몰아 1948년 제2차 당대회를 개최, 빨치산파(갑산파 포함), 소련파, 연안파, 국내파를 망라한 연합정부를 구성하였다. 이것은 물론 김일성 특유의 통일전선의 구체적 실천이었다. 이후 통일전선전술은 김일성의 독특한 정치스타일이 되었다. 김일성은 1949년 6월 30일 남로당과의 합당을 통해 [조선로동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이 됨으로써 명실공히 조선 최고의 공상당지도자가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은 한반도 내외정세를 급변시킨 중대한 사건이었지만 김일성 개인에게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김일성은 한국 전쟁을 정적제거를 위한 호기로 활용하였다. 그는 한국전쟁 패전 책임을 여타파벌에 전가하여 정적들을 숙청하였다.

공격대상은 김일, 최광, 임춘추, 김열 등을 포함한 빨치산파, 김한중, 무정 등의 연안파, 허가의를 비롯한 소련파, 허성택, 박광희를 비롯한 국내파, 박헌영을 중심으로한 남노당파였다. 첫 대상은 무정이었다. 무정은 연안파의 거두로서 전략전술에 뛰어난 자였고 김일성에게는 눈의 가시였다. 김일성은 1950년에 무정을 제거하였고 1951년 11월에는 소련파의 실력자 허가의를 제거하였다. 왜냐하면 허가의는 김일성이 정권을 이론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김일성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남로당파의 도전은 허가의처럼 1인이 아니고 집단이었다. 박헌영은 국내에 잔류하면서 끝까지 투쟁함에 따라 국내외의 추종세력이 많았다. 따라서 김일성은 위협을 느낄수 밖에 없었고 1953년 이승엽, 임화 등 12명의 남로당세력을 미제간첩 및 쿠데타 음모죄로 구속 처형하였다. 박헌영은 1955년 처형되었고 남로당계열은 북한내에서 소멸되는 비운을 맛보게 되었다.

이후 1956년 4월 제3차 당대회가 개최되었다. 물론 이때까지 빨치산세력들이 당내의 다수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중앙위위원중 정위원 11명과 후보위원 6명이 빨치산출신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대회후 2개월도 못되어 빨치산출신들이 득세할 절호의 기회를 맞이 하였다. 김일성은 1956년 6월 1일부터 7월 19일 사이에 1957년부터 시작되는 제1차 5개년계획에 필요한 사회주의국가들의 원조를 얻기위해 구소련과 동구를 방문하였다. 이 기간에 소련파인 박창옥과 연안파인 최창익 등은 집단지도체제의 수립과 엄격하게 통제되어온 당기구의 완화를 명분으로 조직과 선전 양측면에서 공개적으로 반김일성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즉각 김일성에게 보고되었고 김일성은 급거 귀국한 후 각종 증거 수집과 적절한 대응책을 강구하였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도래하였다. 1956년 8월 30일부터 김일성의 소련 및 동구방문 결과보고와 인민보건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당중앙위 제3기 8월 전원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최창익, 박창옥, 윤공흠 등이 중심이 되어 김일성 노선에 대해 비판을 시작하였다. 이에대해 김일성을 중심으로한 빨치산파들은 대대적인 역공을 퍼부었다. 최용건, 김창만, 이종옥 등이 윤공흠을 반박하였고 회의장 중간중간에 배치된 빨치산파 대의원들은 야유와 욕설을 퍼부음으로써 회의를 파장시켰다. 결국 윤공흠, 최창익, 김두봉 등의 공격은 무위로 끝나고 윤공흠을 비롯한 연안파들은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김일성은 빨치산 특유의 정공법으로 그의 정치여정상 최대의 위기를 돌파하였고 [8월종파사건]으로 유명한 이 사건은 김일성의 권력을 공고화 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김일성은 '종파'를 가장 두려워하게 되었고 어떤 누구도 2인이상의 파벌을 조성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1961년 9월 11일부터 18일까지 개최된 제4차 당대회는 과거의 종파주의를 청산하고 김일성과 그의 빨치산동료들만이 지휘하는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건설로 향하는 발판이 되었다. 9월18일 소집된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는 김일성이 위원장으로 최용건, 김일, 박금철, 김창만, 이효순 등이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연안파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김창만외에는 모두 빨치산 출신들이었다. 제4차 당대회는 김일성과 그의 빨치산파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 주었고 파벌투쟁은 빨치산파의 일방적 승리로 귀결되었음을 내외에 과시한 것이었다. 4차 당대회 이후 권력문제와 관련해서 김일성앞에는 더이상의 정적은 없게 되었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 김일성은 가계우상화와 본인의 절대화에 매진하였다.

사상사업에서 [혁명전통]교양이 중요시되었고 김일성을 위대한 사상가로 만들기 위해 [김일성혁명사상]이라는 것이 등장하게 되었다. 1967년부터는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작업이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수령화작업이 본격화된 것이다. 김일성이 1955년부터 표방하기 시작한 주체는 주체사상으로 승격되었고 1970년 5차 당대회에서 개정된 규약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자기 활동의 지도적 지침"이라고 명기하였다. 이것은 1972년 개정헌법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같은 과정을 통해 김일성 주체사상은 북한내 유일사상으로 정착되었다. 1974년 부터는 이것을 실천하기위한 [유일지배체계]확립 노력이 진행되었다. 이 작업은 후계자 김정일에 의해 전담되었다. 김정일은 김일성에 대한 유일지배체계확립은 곧 자신의 유일지배체계확립이라는 공식을 도입, 관료들을 철저히 통제하였다.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유일지배체계 라인은 김일성 사후에도 김정일로 모든 권력이 통합될 수 있는 정치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아울러 김정일은 김일성 김일성 주체사상을 집대성하여 [주체사상에 대하여(1982)]와 [사회정치적생명체론(1986)]을 내놓았고 이를 통해 김일성을 神으로 승격시켰다.

결국 수령 김일성의 카리스마는 불멸적인 것이 되어버렸고 김정일도 수령 김일성의 유훈 관철에 혼신을 다할 수밖에 없을 만큼 신격화되었다. 또한 김일성유일사상체계 유일지배체계는 김일성의 절대권력이 자신 뿐만 아니라 김정일에게 까지도 연계될 수있는 근간을 마련하였다. <全賢俊 박사(민통연 연구위원)>

/연합뉴스

 

 

 

북조선인민위원회[ 北朝鮮人民委員會 ]

1947년 2월 성립된 북한의 최고 중앙정권기관.

 

1946년 11월 북한 전역에서는 인민위원회 선거가 실시되었고 이때 김일성은 평남 제57선거구에 출마했다. 이 선거에서 뽑힌 3,459명은 1947년 2월 '시·도·군 인민위원회 대회'를 열어 간접선거로 북조선인민위원회 대의원을 선출했고, 선출된 대의원들은 이어 열린 '북조선인민회의'에서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결성했다. 당시 인민회의가 통과시킨 북조선인민위원회 규정안은 "조선에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수립되기까지 북조선 인민정권의 최고 집행기관"이라고 내세웠다. 1947년부터 인민경제계획을 실시하고 경제관계에서 사회주의적인 부분을 확대시킴으로써 사회주의 혁명단계로 이행하기 위한 작업을 수행하여 북한의 문헌들은 북조선인민위원회를 북한에 들어선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 기관으로 추정하고 있다.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해체되었다.

 

 

/네이트 백과사전

 

 

 

 

 

 

 

출처 : 추억속으로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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