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02.18 거제도 포로 폭동사건 발생
6·25전쟁 중이던 당시 거제도에는 13만 2000명의 포로들이 수용돼 있었다.
포로들의 자유송환을 원칙으로 내세운 국제연합군측은 본국 귀환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일부 포로들에게 본국으로의 귀환 포기를 권유했다는 이유로 공산측 포로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결국 2월 18일 제62수용소에서 최초로 발생한 폭동사건으로 포로 77명이 사망하고 140명이 부상당했다.
이후 중국군 포로수용소에서도 중국군 56명이 살해되고 120여 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12월 4일에는 봉암도수용소에서 폭동이 발생했다.
6·25전쟁중이던 1952년 공산군 포로를 집단수용하고 있던 거제도에서 발생한 포로들의 폭동사건.
당시 거제도에는 약 13만 2,000명의 포로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포로들은 북한과 중국으로 돌아가려는 공산포로와 돌아가지 않으려는 반공포로로 나뉘어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들이 대립·분열된 이유는 국제연합(UN)군측이 포로 개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한국, 북한, 중국, 또는 타이완을 선택할 수 있는 이른바 자유송환원칙을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공산군측은 모든 북한 공산군과 중공군 포로는 무조건 각기의 고국에 송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UN군측이 포로들을 대상으로 본국으로 돌아갈 것인가의 여부에 대한 의사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일부 포로들에게 본국으로의 귀환 포기를 권유했다는 이유로 공산측 포로들이 격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충돌은 1952년 2월 18일에 있었다. 공산측 포로들의 저항이 더 강력했던 제62수용소에서 포로들이 미군의 강압적인 심사를 거부하자 미군이 발포하여 포로측에서 77명이 사망하고 140명이 부상했으며, 미군측에서는 1명이 사망하고 38명이 부상당했다. 3월 13일 한국군경비대와 포로들이 충돌하여 포로 12명이 죽고 26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5월 7일 수용소 소장인 F.T. 도드 준장이 제76포로수용소에 납치·감금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얼마 후 도드 준장은 미국의 잔학행위를 인정하고 나서야 석방되었다. 석방 후 그는 포로수용소장에서 해임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사위원회에 회부되어 심사를 받았다. 6월 13일에도 제76수용소에서 충돌이 발생하여 포로측 38명이 살해되고 195명이 부상당했으며 미군측 1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을 당했다. 10월 1일에는 중국군 포로수용소에서 중국군 56명이 살해되고 120여 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12월 4일에는 봉암도수용소에서 폭동이 발생하여 포로 87명이 사망하고 115명이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1952년에는 이러한 크고 작은 폭동이 계속되었다.
/네이트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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