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사/고서화(古書畵)

[스크랩]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그림

감효전(甘曉典) 2012. 2. 27. 09:02
          조선시대 풍속화가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그림감상
      미인도(美人圖) 작품크기 114*45.2 재료 수묵채색 미인도/신윤복 조선시대(18세기 말~19세기 초) 비단에 담채 113.9*45.6cm 간송미술관 풍속화와 함께 신윤복의 사실주의적 미의식을 엿볼 수 있는 그림으로 신윤복의 작품 가운데 대작이기도 하려니와 비단 바탕에 고운 필치로 인물화 실력을 한껏 뽐낸 작품이다. 배추잎처럼 부푼 담청 치마, 단이짧은 저고리, 고개를 숙인 앳된 얼굴, 가느다란 실 눈썹의 고운 눈매, 다소곳한 콧날, 좁은 입 등 조선후기 미인의 조건을 여실히 보여준다. 치마 아래로 한쪽만이 살포시 드러나는 외씨 버선은 절묘한 느낌을 준다. 얼굴의표정은 마음까지 드러내 보여 주어 초상화를 방불케 한다. 쪽물을 들인 회청색 치마에 받쳐 입은 삼회장 저고리, 그에 조화된 자주색 댕기와 옆구리의 붉은 띠치장은 그 미모를 돋보이게 할 뿐 아니라 우리 옷맵시의 아름다움이 한껏 배어 나온다. 여인의 복장과 더불어서 붉은 삼작 노리개를 만지작거리는 자연스러운 자태는 풍속화로서 손색이 없다. 그러면서도 기존 왕공 사대부의 권위적 초상화에서는 볼 수 없는 인물화로서의 예술성이 충만하다. 신윤복 자신역시 이 <미인도>에 '여인의 가슴속 정한까지 모두 그려낼 수 있었다'라는 화제를 남길 만큼 스스로도 만족해 했는데... 어쩌면 신윤복, 그는 그림 속 여인을 사랑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美人圖 그림에 쓰여진 글구는 盤薄胸中萬化春 반박흉중만화춘 筆端能與物傳神 필단능여물전신 이 조그만 가슴에 서리고 서려있는 여인의 봄볕같은 정을 붓끝으로 어떻게 그 마음까지 고스란히 옮겨 놓았느뇨.
      청금상련(聽琴賞蓮)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화첩 종이에 채색 규격 : 28.2 x 35.3cm 소장 : 간송미술관 후원에 연당(蓮塘)이 있고, 고목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며, 잔디가 가득 깔린 크나큰 저택을 가진 주인이, 연꽃이 필무렵에 맘에 맞는 친구들을 청하여, 연꽃감상의 즐거움을 함께하는 모양이다. 연당을 거치는 선들바람이 청향(淸香)을 실어오고. 가야금의 청아한 선율이 이 위에 어리는데. 의관을 파탈할 정도로 자유롭게 연꽃과 여인을 즐기고 있다. 이렇게 격의없이 놀수 있는 사이라면 어지간히 무던한 사이일 것이고. 의복 차림으로 보면 벌써 당상(堂上)의 품계를 넘어 있어서. 나이도 그리 젊지는 않을 듯 하니 정말 허물없는 오랜친구들인 모양이다. 모두들 준수하게 빼어났지만 차림새가 빈틈없이 세련되어 귀족의 몸에 밴 기품을 대하는 듯하다. 이는 화원이었던 혜원 신윤복이, 궁정 주변에서 이들 귀족생활을 남김없이 눈에 익히고 살아온 때문에. 그 진면목을 이와 같이 실감나게 표현할수 있었을 것이다. 가리마를 쓴 기생의 모습에서나 갓끈을 귀밑에 잡아 맨 귀인의 관(冠)차림에서 당시의 남녀관식(冠飾)을 알수 있으며. 운치있게 둘러진 석축과 고목의 표현에서는 왕조시대의 격조높은 조원(造園)환경을 실감 할수 있다.
      청루소일(靑樓消日) : 청루에서 시간을 보내다 간단한 선으로 그려넣은 단순한 배경에, 탕건(갓 아래에 받쳐 쓰던 관으로 말의 꼬리나 갈기털인 말총으로 만들었다)을 쓴 남자가 방안에 앉아 있고 생황(중국 묘족(苗族)이 만든 악기로 조선시대에 많이 수입되었다고 한다)을 든 기생이 앉아서 집으로 들어오는 여인을 바라보고 있다. 들어선 여인은 전모를 썼는데, 그 아래 검정 가리마(원래 궁중의 의녀들이 쓰던 것이다)가 보이고 있다. 어디 나들이 갔다 오는지 뒤따라 오는 아이는 보퉁이를 들고 있다. 따라오는 아이가 기생에 비해 너무 작아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키가 작아서, 어린아이라서, 기생보다 뒤에 위치해서 그럴 수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주 오랜 옛날에 그려진 고분벽화 등을 보면 중요하지 않은 시중드는 시녀같은 사람은 작게, 왕이나 그만한 지위의 인물 등 중요한 사람은 아주 크게 그려 넣은 것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심부름하는 이 아이의 역할은 크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혜원의 그림에는 이런 경우가 종종 표현되기도 한다. 이것은 이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이지만 이 그림을 보는 우리 같은 사람의 입장이 되어 그림 속에서 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이 지켜봄으로써 자칫 밋밋해질 수 있는 그림 속 인물들 사이에 긴장감이 생기고 그 느낌을 우리가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출처] [혜원 신윤복]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
      주유청강(舟遊淸江) (1805) 특별히 하는 일없이 유희나 즐기며 세월을 죽이고 있는 선비들을 한량이라고 하죠. 그 한량들이 기녀들을 데리고 뱃놀이를 나왔습니다. 조선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화면 위쪽에는 “피리 소리는 바람을 타서 아니 들리는 데 흰 갈매기가 물결 앞에 날아든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단오풍정(端午風情)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화첩 종이에 채색 규격 : 28.2 x 35.3cm 소장 : 간송미술관 신윤복의 그림 중 특히 뛰어난 작품이다. 음력 5월5일 단오절의 여인네 들의 풍속을 그린 그림인데 , 화면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3개의 인물군으로 전개되고 있다. 인물군의 하나는 화면 좌측 아래 부분에 그려진 몸을 씻고 있는 여인들. 화면 우측에 보이는 그네 뛰고 머리를 손질하는 여인. 먹거리를 머리에 이고 있는 아낙이 이루는 인물군. 끝으로 화면 좌측 상부에서 여인네들을 훔쳐보고 있는 인물군이 있다. 이들 인물군을 살펴보면 배경을 제거하고 본다면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산수배경의 효과적인 형태배치로 무리없이 하나로 연결되고 있다. 또한 구도상으로 훔쳐보고 있는 두 명의 중들은 없어도 무방하나 엉뚱한 인물이 삽입되면서 활기를 띠게 되며,시각적으로 확장된 느낌을 준다.
      상춘야흥 (賞春野興) : 무르익은 봄날의 들판에서 여흥을 즐기다 국보로 지정된 혜원전신첩 중에‘상춘야흥‘이라는 그림입니다. 10명이 등장하는 그림인데도 그 세밀한 표현들이 놀랍기만 합니다. 이 그림이 어지간히 큰 그림인줄 알았는데 막상 간송미술관에서 본 실제 그림은 꽤 작았습니다. 그래서 더 놀랬습니다.^^ 실제 도판은 35.6cm X 28.2cm인데요. A4와 A3의 중간 정도라고 보면 될까요? 이만한 크기에 어떻게 저런 묘사가 가능했는지 절로 감탄사가 나왔습니다. 진달래 꽃이 피기 시작한 어느 봄날, 양반가의 후원에서 벌어진 연회의 흥취를 그렸습니다. 음악에 흠뻑 취한 주빈의 표정이 이 날의 연회가 아주 성공적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춘흥(春興)이 도도한 날이다. 후원의 나무들은 푸른 물빛이 완연하고 여린 진달래 꽃잎은 고운님 얼굴처럼 보드라운 기운을 머금었다. 이 난만한 봄을 어찌하나 싶은 날, 한가롭고 나른한 봄기운을 가뿐하게 풀어낼 음악을 신윤복의 그림 속에서 만난다. 신윤복의 유명한 풍속화 중에 봄날의 흥취를 그렸다는 ‘상춘야흥’(賞春野興). 화가는 진달래꽃이 피어나기 시작한 어느 봄날, 뉘 댁 후원에서 벌어진 조촐한 음악회 장면을 그렸다. 차비를 갖춰 산으로 놀이를 나서는 대신 후원 뜰에 자리를 마련해 피리와 장구를 곁들인 호사스러운 삼현육각대신 거문고와 대금, 해금연주자만 초청해 ‘넘치는 유흥’이 아닌 조촐한 풍류의 한 순간을 그린 그림이다.
      월야밀회(月夜密會)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화첩 종이에 채색 규격 : 28.2 x 35.3cm 소장 : 간송미술관 장안의 인적이 끊어지고 보름달만 휘영청 밝게 비치는 야밤중에 골목길 후미진 담그늘 아래에서 남녀가 어우러져 깊은 정을 나누고 있다. 남자의 차림새가 전립(氈笠)을 쓰고, 전복(戰服)에 남전대(藍纏帶)을 매었으며 지휘봉 비슷한 방망이를 들었으니, 어느 영문(營門)의 장교일시 분명한데 이렇듯 노상에서 체면없이 여인에게 허겁지겁하는 것은, 필시 잠깐밖에는 만나볼수 없는 사이인 때문일 것이다.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버린 옛 정인(情人)을 연연히 못 잊어, 줄이 닿을 만한 여인에게 구구히 사정하여 겨우 불러내는 데 성공한 모양이지만 여기서 이렇게 다시 헤어져야만 하는 듯하다. 이쪽 담모퉁이를 도는 곳에 비켜서서, 동정어린 눈길로 이들을 지켜보는 여인은, 밀회를 성사시킨 장본인인 것 같다. 차림새가 여염의 여인은 아닌듯 하여, 장교를 만나고 있는 여자의 전력(前歷)도 대강 짐작이 간다. 조선시대의 화류계를 주름답던 사람들이, 대개 각영문의 군교(軍校)나 무예청(武藝廳)의 별감(別監)같은 하급 무관들로서, 이들이 기생의 기둥서방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을 상기할 때 군교 차림의 이런 애틋한 밀회는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삼추가연(三秋佳緣) 깊어가는 가을에 아름다운 인연을 맺는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은 양반의 위세보다는 중인의 돈이 더 큰 위세를 떨치고 있는 도시 뒷골목의 분위기를 30점의 풍속화로 포착하고 있습니다. ‘혜원전신첩’에 실려 있는 ‘삼추가연(三秋佳緣)’에도 젊은 남자와 어린 소녀, 그리고 노구가 보입니다. 노구는 순매를 소개해 달라는 이생의 부탁을 일단 거절하고는, “순매는 마음이 고귀하니, 그 뜻을 앗을 수 없는 것이 첫번째 어려움”이라면서 “약간의 돈을 맡기시면 일을 주선해 보겠다.”고 속내를 드러내지요. 혜원은 ‘절화기담’의 삽화라도 그리듯 노구를 간교하고, 불길하게 묘사해 놓았습니다. 왼쪽에 있는 젊은 선비는 저고리를 벗은 채 대님을 만지고 있는데, ‘거사’를 위해 풀고 있는 장면인지, 일을 끝내고 묶고 있는 장면인지 미술사학도 사이에서는 내기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절화기담’에 힌트가 있는데, 이생과 순매가 운우지정을 나누는 장면을 ‘일진일퇴 어루만지고 쓰다듬으니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분 바른 뺨은 달아올랐다.’고 묘사했습니다. ‘삼추가연’의 젊은 선비를 자세히 보면, 왼쪽의 뒷머리와 오른쪽에 보이는 귀밑머리가 온통 상투 밖으로 풀어헤쳐져 있지요. 혜원은 소녀의 자세에서도 정황을 알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습니다. 노구는 속물스러워 보이는 표정과는 달리 앉음새만큼은 그런대로 단정합니다. 반면 소녀는 긴장이 풀어질 대로 풀어진 탓인지 속치마를 드러내고 거의 퍼질러 앉아있다시피하고 있지요. ‘삼추가연’은 ‘깊어가는 가을에 아름다운 인연을 맺는다.’는 뜻이지만, 전체적으로 화폭에는 사랑의 기쁨이 아니라 성매매의 뒤끝에 남는 우울함이 배어 있습니다. 200년전 조선시대에도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요즘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쌍검대무(雙劍對舞)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화첩 종이에 채색 규격 : 28.2 x 35.3cm 소장 : 간송미술관 신윤복은 자를 입부(笠父), 호를 혜원(蕙園)이라 하며. 화원으로서 첨사(僉使)를 지냈다. 檀園 金弘道와 더불어 조선 후기의 풍속화를 대성시킨 인물로 특히 기녀(妓女)와 한량 등을 등장시키고 남녀간의 애정을 곧잘 소재로 택하여 섬세하고 세련된 필치로 능숙하게 묘사하였다. 이 그림은 세력있는 귀족이 장악원(掌樂院)의 악공(樂工)들과 가무(歌舞)에 능한 기생을 불러다가 즐기는 장면이다. 악공과 기생의 수로 보아 이 놀이가 보통 규모는 아닌데 이를 즐기는 사람들은 오직 주인대감과 그의 자제낭관(子弟廊官)인 듯하니, 일가의 세도가 어지간한 모양이다. 혹시 혜원 신윤복을 키워준 어느 풍류 재상집에서의 한때인지도 모르겠다. 화면구성에 있어서 일체의 배경을 무시하고 검무하는 장면만가득채운 대담성을 보였으나 주제표현에 조금도 군색함이 나타나지 않으나 이는 인물의 포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시각의 초점이 되는 검무기생들은 의상에서 청홍의 강렬한 대조를 보이면서 화면을 압도하는데 주인을 비롯한 관객들과 악공들이 이를 중심으로 포열(布列)함으로서 화면의 비중은 평형을 이룬다. 그런데 검무기생의 날렵한 동작에서 오는 율동감은, 관객들의 도취된 몸짓과 악공들의 신바람나는 연주에 혼연일치를 보여 아연 활기를 띤다. 이렇게 놀이에 참석한 인물들의 심리를 꿰뚫어 순간적인 동작을 화폭에 그대로 옮겨 놓을수 있다는 것은 아무리 화가의 예리한 안목이라 하더라도 그리 쉽지않을 일이다. 따라서 작가 신윤복이 이런 세계에 얼마나 익숙하였던가를 짐작할수 있는데 인물들이 하나같이 극도로 세련된 차림을 보이는 것도 그의 주변을 보는듯 흥미롭다.
      이부탐춘(釐婦貪春) 1805년 이후 작품으로 추정 종이에 담채 28.2cm x 35.2cm 간송미술관 소장 '혜원풍속도첩 (蕙園風俗圖帖)' 중에서 <과부:이부탐춘(釐婦貪春)>, 간송미술관 혜원 선생님의 국보급 그림 한점 간송미술관 -상중의 여인이 몸종과 함께 개의 짝?기를 감상하고 있는 모습이다. 집안에 갇힌 ?은 과부의 억압된 성을 끄집어내고 있다. 이부는 과부를 뜻하니 소복을 입은 여인이 마당에서 짝짓기 하는 개와 참새를 보고 웃음을 머금고 몸종이 나무라듯 그 허벅지를 꼬집는 장면입니다. 해학적이면서도 여필종부를 강요하는 남존여비사상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읽을 수 있습니다. 기다림 그림은 세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단순한 선을 이용한 절묘한 면분할은 그림을 그린 자가 선과 면, 그리고 형태를 인식하는 능력이 뛰어남을 말해줍니다. 또한 나뭇가지와 담장을 화면 양쪽 모서리로 빠져나가게 하고 버드나무의 늘어진 가지만 묘사한 것은 전경을 화면 밖으로 연속해서 보이도록 한 것입니다. 작은 화폭에 표현할 수 없는 많은 이야기들을 화면 밖으로 확장시킨 것이지요. 또한 외면한 듯 여인의 시선을 뒤쪽으로 뺀 것은 보는 이의 시선을 화면 뒤까지 입체적으로 확장시켜주는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여인의 모습입니다. 뒤로 하고 있는 손에는 스님의 옷과 모자가 들려있는데, 그로봐서는 스님을 기다리고 있는것이라고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신윤복의 그림은 배경의 물체 하나 하나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주의깊게 살펴봐야하는데 드리어진 버드나무가 고개 돌린 여인의 애타는 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계변가화(溪邊佳話) 비탈진 암반이 드리운 계곡물이 흐르는 곳에 한 부녀자가 빨래하고, 한 부녀자는 머리감고 긴 머리를 단장하고 있다. 금남의 구역 계곡 빨래터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의 모습과 반나신 여인들을 훔쳐보며 그 옆을 지나는 한량 사내의 아슬아슬한 감정을 표현했다. 주사거배(酒肆擧盃) (1805) 주막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취객들과 주모의 모습을 그려내었습니다. 그러나 여느 주막과는 다르게 주변의 기와집과 마당 안의 매화도 보이는 것이 양반들을 상대하기에도 손색없는 꽤 반듯한 집 같아 보입니다. 술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손님들도 선비와 양반들인 듯 하구요. 매우 일상적인 조선시대의 한 생활상입니다. 유곽쟁웅(遊廓爭雄) 기생집에서 벌어진 사내들의 싸움 재료 종이에 담채/ 작품 크기 28.2x35.6cm / 소장 간송미술관 소장/ 혜원풍속첩 中 기방 앞에서 난투극이 벌어진 후의 광경이다. 기방에는 까다로운 관습이 허다했고 악소배들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사소한 시비나 실수에도 주먹이 난무하였다. 장죽을 문 기생은 구경을 하고 붉은 옷을 입은 별감이 싸움을 말리고 있습니다. 연소답청(年少踏靑)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화첩 종이에 채색 규격 : 28.2 x 35.3cm 소장 : 간송미술관 '연소답청'이란 젊은 선비들이 푸른 새싹을 밟는다는 뜻으로 조선 후기의 양반들의 유한놀이 문화인 들놀이를 말한다. 조선조의 후기문화가 황금기를 이루고 있던 시대에 서울 장안의 귀족생활은 아마 가장 호사가 극치를 이루었을 것이다. 따라서 귀문(貴門)자제들의 행락도 어지간히 극성스러웠을 듯한데 이 그림은 그 시대를 산 신윤복의 붓을 통하여 그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수 있겠다. 진달래꽃 피는 봄철이 되자 협기 만만한 반가(班家)의 자제들이 장안의 기녀들을 대동하고 간화답청(看花踏靑)의 봄나들이에 나섰는데 이들의 옷차림은 장안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멋을 부리고 있다. 보라색과 옥색 천으로 발 굵게 누빈 저고리에 향낭(香囊)을 달아 차고, 홍록의 갖은 주머니를 긴 띠매어 치레하며. 행전은 짧게 치고, 중치막의 앞 두 폭을 뒤로 잡아매어서 뒤폭만 꼬리로 늘이어 걸음마다 나풀거리게 하고 있다. 장안 명기들의 미태(美態)에 홀딱 빠진 양반자제들은 체면불구하고 말탄 기생에게 시중드느라 담뱃불을 붙여 대령하며 구종되기를 자원하여 갓을 벗어 마부 주고, 마부 벙거지를 제가 쓰고서 검은띠를 허벅대님으로 매고, 말고삐를 잡고있다. 한 친구는 시간에 늦었는지 갓을 벗어 짊어지고 옷자락에 바람 일며, 동자 구종을 몰아 급히 달려오는데. 나귀탄 기생의 초록 장옷도 깃발처럼 나부낀다. 암벽에는 진달래나무인 듯 분홍꽃을 가득 피운 나무들이 군데군데 있고 구름 같은 기생의 트레머리에도 그 꽃가지가 꽂혀있다. 물빛으로 갈라 놓은 삼거리 주변의 청태점(靑苔點)이 분분하여 답청이 실감된다.
      정변야화(井邊夜話) 휘영청 떠오른 달을 배경으로 야심한 밤임을 알 수 있는 시각에 뒷배경으로 등장한 바위와 산의 모습으로 우물가의 여인네들이 아주 은밀한 장면으로 보여지게 만드는데 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나이가 지긋이 든 양반이 비밀리에 여인네들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또한 긴장감을 고조 시키고 있지요. 여인네들의 옷차림새로 보아서는 평민인 것 같은데, 이를 쳐다 보는 양반네의 모습에서 왜곡된 양반들의 성의식과 태도를 비꼬는 듯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의 그림을 통해 이렇게나 많은 이미지와 사실을 전달한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무녀신무(巫女神舞) (1805) 일반 집에서 굿을 하고 있는 풍경입니다. 갓을 쓰고 부채를 들고 춤을 추는 무당 앞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빌고 있는 아낙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혜원은 이렇게 흥미롭고 이색적인 생활의 풍경을 화폭에 담길 즐겨하였지요. 그래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이 기녀, 무녀 들입니다. 여기서도 기녀의 붉은 의상은 우리의 시선을 기녀에게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월하정인 (月下情人) 조선 (18세기 말-19세기 초) 재료 지본채색 (紙本彩色) 규격 28.3x35.2cm 소장 국보 135호, 간송 미술관 月沈沈夜三更 월침침야삼경 兩人心事兩人知 양인심사양인지 달은 기울어 밤 깊은 삼경인데,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이 안다. 초승달 지는 깊은 밤 한껏 차려 입은 남녀가 담 모퉁이에서 밀회를 한다. 무슨 일일까? 다소곳하게 쓰개치마를 둘러쓴 여인은 수줍음 반 교태 반 야릇한 정이 볼에 물들었다. 저고리 깃과 끝동의 보랏빛이 옥색 치마 아래 진자줏빛 신발과 어울리고, 치마와 동색인 한층 연한 쓰개치마 맵시가 곱기도 하다. 그윽한 눈길을 건네는 사내는 오른손에 초롱 들고 왼손으로 허리춤을 뒤적인다. 애틋한 정표라도 전하자는 것일까? 도포 자락이 가볍게 흔들리고 긴 갓끈은 멋들어지게 어깨에 걸쳤는데 마음은 진작부터 초롱불 속처럼 뜨듯해서 발끝이 벌써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내로라 하는 장안의 한량인 사내의 가죽신은 코와 뒤축에 따로 옥색을 댄 호사스런 것이다. 여인은 치마를 묶어 올려 하얀 속곳이 오이씨 같은 버선 위로 드러났다. 아마도 함께 갈 낌새지만 안 그럴지도 행여 알 수 없다. 달빛이 몽롱해지면서 두 사람의 연정도 어스름하게 녹아든다. 배경이 뽀얗게 눅여져 있으니 섬세한 필선과 화사한 채색으로 그려진 두 연인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신윤복은 이 정황을 풍류 넘치는 흐드러진 필치로 이렇게 적었다. ‘달도 기운 야삼경/두 사람 속은 두 사람만 알지’(月沈沈 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 화제(畵題)도 기막히지만 글씨 주위와 옆 건물 벽을 반쯤 여백으로 처리한 솜씨가 쏠쏠하다.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 옛말에 ‘늙어 기첩(妓妾)을 두면 반드시 뒷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 정승을 지낸 김명원이 젊어서 화류계에서 놀기를 좋아했는데, 그만 사랑하는 기생이 권문세가의 첩이 되고 말았다. 그녀를 잊지 못한 명원이 어느 날 밤 담을 넘다가 주인에게 붙잡혀 크게 경을 치게 되었다. 때마침 형 경원이 급히 달려와 소리를 쳤다. “내 아우가 기운이 호탕하고 몸가짐은 거칠어 공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아우는 평소 재주와 학문이 뛰어나 뒷날 크게 쓰일 인물입니다. 공께서는 아녀자 일로 나라의 인재를 정녕 죽이시렵니까?” 그러자 주인은 결박을 풀고 후히 술을 대접해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림 속 주인공이 누군지 모르는데 김명원을 끌어댄 것은, 화제로 쓴 시구가 들어 있는 한시를 그가 지었기 때문이다. ‘창 밖은 야삼경 보슬비 내리는데/ 두 사람 속은 두 사람만 알리라/ 나눈 정 미흡해서 날 먼저 새려 하니/ 나삼(羅衫) 자락 부여잡고 뒷기약만 묻네’ (窓外三更細雨時 兩人心事兩人知 歡情未洽天將曉 更把羅衫問後期). 예나 지금이나 남녀간의 일은 갈피도 많고 두서는 없으며 반드시 은밀하게 마련이다. 신윤복은 그러한 남녀간의 정을 주제로 한 그림의 명수였다. 때로는 한 장의 그림이 소설 한 편보다 더 소상하다. 기방무사 (妓房無事) (1805) 종이에담채 28.2*35.2cm 간송미술관 소장 현대적인 구도감각과 독특한 상황설정이 돋보이는 그림이다. 화면은 전체적으로 수직선과 수평선 및 사건의 기하학적 구조에 의한 질서잡힌 짜임새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정적인 구도가 그림 속에 등장하는 세 명의 인물에 대하여 고요함과 기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기하학적 짜임새를 지닌 건물의 기둥이나 벽이나 문짝 등은 모두 엷은 먹선이나 희미한 담묵으로 칠해져 있는 데 비해 등장 인물들은 모 두 강렬한 원색과 진함 먹선으로 그려져 시선을 모은다. 화면에 그려진 상항은 에로틱한 긴장감을 보여주고 있으며, 화면 속의 배경은 그 시대의 기방[妓房]의 정경인 듯하다. 방안에서 남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다가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당황한 듯 하죠? 아마도 방 안의 여인은 기생의 몸종이고, 방안의 남자는 기생을 찾아왔다가 그녀의 몸종과 사랑을 나누던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갑자기 기생이 들어오니 사내는 이불로 자신의 벗은 몸을 가린 듯 하구요. 혜원의 춘화 중에는 이와 같은 내용으로 이불을 덮지 않은 채 벌거벗은 사내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 있답니다. 전모 쓴 여인(氈帽 쓴 女人)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화첩 비단에 채색 규격 : 28.2 x 19.1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전혀 배경이 없은 것이 그 첫째이며 右顔八面으로 얼굴을 그렸는데 자신감 넘치는 자태로 앞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두번째 차이 이다. 수줍음이나 부끄러움은 아랑곳 하지 않는 표정에 오른손에는 쥘부채를 쥐고서 걷는 보폭도 넓다. 조선여인의 아름다움을 그 누구보다 잘 나타낸 혜원은 이 분야의 그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고르고 가는 필선으로 여인을 그리되 치마 저고리의 각기 부풀고 착 달라 붙은 모습이라든지 모든 부분에서 몸체를 숨기는 고유복색이나, 이에 반해서 얼굴. 손끝. 발끝의 맵시가 사뭇 두드러진다. 그러면서도 결코 외설스럽지 않은 묘사에 해학과 멋을 홍건히 담고 있다. 짤룩한 허리에 부푼치마 그 아래 보이는 속곳바지와 외씨버선이 잠긴 좁은 신의 가는 선 등은 혜원이 그린 여인도에서 쉽게 발견되는 공통된 묘사이다. 또한 나이 짐작이 다소 힘든 애띤 얼굴에 초생달 같은 눈썹과 순하게 생긴 둥근 얼굴과 코. 꼭다문 좁은 입 등 전혀 생소하지 않은 얼굴이다. 전모는 무늬가 없는 단순한 형태이나. 이와 대조적으로 전모끈을 길게 늘어뜨렸다. 이그림에선 주인공 한사람만을 그렸으되. 화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한 그루의 나무를 그렸으면 하는 위치에 전인미발가위기(前人未發可謂寄)란 제발을 의도적으로 적었다. 연당의 여인 1805 제 작 연 대 : 18~19세기 소 장 처 : 국립중앙박물관 재 료ㆍ크 기 : 비단에 채색, 29.6×24.8㎝ 「연당의 여인」에 와서는 풍속화풍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난다. 통속적인 주제를 아취 있는 화풍으로 그려낸 것이다. 오른손에 생황을 들고 왼손에 장죽을 들고 마루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 기녀의 모습이 매우 서정적이다. 연못 속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피어 올라온 옅은 색조의 연잎과 연꽃은 죽죽 내려 그은 직선으로만 묘사된 한옥 일각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상반된 성격의 배경 사이에는 이들을 중재라도 하듯이 기녀가 마루에 걸터앉아 연못을 바라보고 있다. 기녀가 주인공인지 아니면 연꽃이 주인공인지를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서로 어우러져 있다. 평론가들에게 신윤복 회화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평을 듣는 작품입니다.
      야금모행(夜禁冒行) 통행금지를 무릅쓰고 밤길을 간다 신윤복의 "야금모행" 이라는 작품인데, 간송미술관에서 어렵게 볼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자정이 넘어 통행금지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달이 떠오른 것과 앞길을 안내하는 시종과 담뱃대를 길게 물고 있는 기생과 양반의 모습에 포도군관이 뭐라고 나무라는 것 같기도 한데, 그럼에도 여유만만한 기생의 모습에서 이들 간에는 모종의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포도군관의 붉은 옷과 기생의 푸른 옷이 잘 대조되어 긴장감을 높여주네요. 신윤복 申潤福 1758(영조 34)~? 조선후기의 화가. 자는 입부(笠夫), 호는 혜원(蕙園). 본관은 고령(高靈). 화원(畵員). 벼슬은 첨정(僉正)에 올랐다. 혜원 신윤복은 정확한 생존시기가 알려져 있지 않은 화가이나, 김홍도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신윤복은 김홍도에게서 받은 영향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고 새롭게 변화시켜서 그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창안하여 김홍도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풍속화의 대가가 되었다. 당시의 서민 사회의 풍속을 매우 세밀하게 잘 그려, 김홍도와 함께 조선의 대표적인 화가로 손꼽힌다. 훌륭한 그림을 많이 그려 한국 미술사에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나,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양반 중심의 체계적 문화에서 벗어나 부녀자들을 그리는 등 그림의 소재의 다변화를 꾀하였다. 시골 주막의 서정적인 풍속을 날카로운 화필로 잘 그려냈다. 현 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참된 모습을 즐겨 화폭에 담았다. 김홍도와 함께 조선사회의 대표적인 화가로 손꼽히며 그의 작품 중 대다수는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주류이다. 비록 김홍도처럼 임금님 밑에서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으나 그만의 대단한 선과 아름다운 필체로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그의 작품대다수는 항상 부녀자들이 나오며 양반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대부분 양반들은 앉은 자세로 향연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며 부녀자들은 춤추고 노래하고 술을 따르며 기생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 민족의 민속놀이나 흥겨운 농악을 그린 김홍도에 비해 신윤복은 세밀하고 표독스러운 느낌을 멋지게 자아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사물의 모습을 한층 더 화사하고 화려하게 돋보이기 위하여 배경을 그 색에 맞게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윤복 풍속화의 진면목은 <단오풍정端午風情>이나 <방문訪問> <검무劍舞> <선유도船遊圖> <월하정인月下情人> <연당야유도> <미인도> <송정아회> <야연도> <연소답청> <이부탐춘> <전모 쓴 여인> <풍속도>등의 작품에서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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