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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룡옥대(鈒龍玉帶)

감효전(甘曉典) 2012. 2. 13. 14:48

삽룡옥대(鈒龍玉帶)

(용포 차림의 김수현씨, 허리띠가 너무 크다?)

 

 우리가 사극에서 관복에서 착용하는 벨트를 보면서 시청자들은 이렇게 생각하실겁니다.
'도대체 왜 저렇게 허리띠가 넓은거지? 어떻게 허리띠가 안 흘러내리고 매달려 있는거지?'
그 전에, 저 벨트 이름은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라고 하신다면 조선시대에는 대(帶, 띠 대)라는 용어를 썼습니다. 거기에 옥으로 만들어진 것일 경우 옥대(玉帶), 물소뿔로 만든 당하관들의 각대는 흑각대(黑角帶)라고 부르며, 물소뿔로 만든 당상관의 각대는 서대(犀帶)라고 부르는 등, 각대 자체가 뿔로 만들어진 띠돈(장식)이 붙은 허리띠라는 것이지, 각이져서 각대는 아닙니다^^. 
이런 궁금증을 지금부터 풀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조선시대에는 무조건 그렇게 크고 사각형으로 된 허리띠만 있었는지, 지금부터 한번 보시죠.
 
(옥대와 각대)
 
두 점 다 조선시대의 유물인 옥대와 각대입니다. 옥대는 조선시대 말기의 왕이었던 '영친왕'의 유품이고, 그 옆의 각대는 조선 중기 인물인 '권응수' 장군의 유품입니다. 사진에서 보셨다시피 뭔가 외형에서 차이가 느껴지죠? 조선 중기는 시대가 오래지났으니, 약간 훼손되어있는 느낌도 있지만, 옥대 같은 경우는 시대가 약 100년을 넘기지 못한 상태다보니 그렇게 외형적으로 큰 문제는 없어보이기도 하네요.
 
그러나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어떤 분들은 어라?하실수도 있을겁니다. 조선시대 하면 영친왕의 옥대처럼 저렇게 정사각형, 또는 정오각형의 형태를 띤 각대가 아닌가요? 라고 하실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각대에 대한 외형정리부터 먼저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학술적인 용어는 아니고, 제 스스로가 정리한 용어에 따르면 대는 3가지 외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사각형, 또는 오각형 형태.
 
(사각 또는 오각형의 옥대 재현품)
 
우리가 사극이나 재현 행사에서 가장 많이 볼수 있는 형태인 사각, 또는 오각형의 형태를 가진 각대입니다. 사각, 또는 오각이라고 말한 이유가, 옥대의 가장 가운데 부분인 각대 연결 고리 부분(바클)이 보시다 시피 앞으로 튀어나와있죠? 그 부분 때문에 오각형의 형태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 형태는 조선시대에 유물로 두루두루 남아있는 형태기 때문에 이것만이 고증에 맞는것이냐?라고 물어본다면,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고..라고 답변을 해드릴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 감히 추측하자면, 조금 있다가 거론될 일자형 또는 원형의 관대 같은 경우는 조선 후기로 가면 갈수록 관복의 품이 늘어나고, 관원들이 배가 나오면서 일부러 허리에 여유를 주게 되면서 사각형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감히 해봅니다.
 
 
2. 일자형, 또는 원형 형태.
 
(일자형 또는 원형 옥대 재현품)

실제 재현행사 뿐만 아니라 사극에서도 우리가 알게 모르게 재현되고 있는 원형 또는 일자형의 각대입니다. 이 관대 같은 경우는 걸려있는 바클만 풀고 늘어놓게 되면 원형이 아닌, 일자형으로 늘어지게 되기 때문에 일자형, 또는 원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도 유물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 형태도 무시할수가 없는 것이구요. 어떻게 보면 가장 실용적이고 허리라인을 잡아주면서 옷과 밀착되어 관복을 입은 사람이 튀어나오는 생뚱 맞음보다 요즘의 사람들이 보기에도 눈이 가장 익숙할 스타일이기도 합니다(요즘 다시 은근히 각광 받는 스타일이죠).
 
 
3. 포목대 형태
 
(광다회와 세조대, 그리고 광대)
 
실 또는 원단을 이용하여 묶은 허리띠 형태 중 하나로, 군복이나 편복 따위에 두르는 조선시대에 흔히 볼수 있는 형태입니다. 광다회는 철릭에 두르며, 세조대는 도포나 쾌자 위에 두르는 것이 일반 상식이구요. 광대는 구군복의 위에 두른 뒤에 그 위에 전대를 두르는것이 원칙입니다. 이러한 포목대 형태는 일자형이기도 합니다만 원단이나 재료, 외형이 크게 다르므로 포목대 형태로 감히 구분해보았습니다.
 
어떻습니까? 3가지 형태로 구성된 조선시대 허리띠의 모습들, 그렇게 어렵지는 않죠?
우리나라의 현실과 비교해봤을때 비슷비슷한게 좀 보이긴 하실겁니다. 태권도 할때 쓰는 품띠 같은게 떠오를수도 있을겁니다.
 
실제로 대에 대한 명칭은 조선시대에 여러가지 명칭으로 남아 전해졌습니다.
가령 예를 든다면 동의어를 살펴본다면, 품대, 품띠, 허리띠, 관대, 각대, 대, 옥대, 관디, 각띠 등 다양한 명칭들이 존재한답니다.
 
그러면 조선시대 대에 대해서 대충 외형과 다양한 명칭들을 알아봤으니, 왕이 매는 옥대는 무엇인지, 삽룡옥대가 뭔지 알아볼까요?
먼저 명칭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삽 - 鈒(새길 삽)
룡 - 龍(용 룡)
옥 - 玉(구슬 옥)
대 - 帶(띠 대)
 
이렇게 한자 그대로를 해석해본다면 용이 새겨진 옥으로 띠돈을 만든 허리띠 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지난시간 용보에 대해서 배우셨다시피, 용은 왕을 상징하는 것중 하나였습니다. 어찌보면 곤룡포 자체가 왕의 옷이지만, 그 옷 자체가 용의 가죽이라고 생각하시면 더 편할것처럼, 조선시대에는 '왕=용' 으로 평가하여, 신성시하고 위대한 존재로 생각했지요. 결국엔 다 똑같은 사람입니다만..
 
그러다보니 왕의 허리띠에는 용을 조각하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왕의 허리띠에 용을 새기지 않고, 용의 모양이 나있는 금박을 옥 위에 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그 당시에 그런 조각을 할수 있는 세공 기술이 부족했던 것인지, 아니면 굳이 섬세하게 옥을 조각해서 쓸 필요가 있겠냐고 생각을 하신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조선 초기에는 그러한 제도가 유지되었다고 하구요. 어느시대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시기 이후로부터는 옥대에 용을 조각하여 쓰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왕의 허리띠는 용이 조각되어있는 옥으로 된 각대를 매는 것이 조선시대 사극, 왕의 의상 고증 중 가장 기본 정석이 된 것이죠.
 
그렇다면 급, 갑자기 궁금해지는것이 있을것입니다. 왕세자와 왕세자빈, 그리고 왕후의 옥대는 어떤것을 썼을까요? 그들도 과연 왕 처럼 용이 조각되었을까요?
그럼 사진자료부터 한번 보시죠.
 
(옥대 유물)
 
 
왼쪽은 순종 황제가 왕세자일 때 썼을 것으로 추측되는 유물입니다. 띠돈 부분들이 많이 떨어져 나가있습니다만, 그래도 옥으로 만든것임은 쉽게 알수가 있죠. 제가 아까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왕은 용이다 라고 생각하시는게 편하다고 말씀드렸죠? 그렇습니다. 왕은 용으로 생각하며 상징화 시킨 조선시대이니만큼, 조선시대의 허리띠 중 용이 조각되어있는 것은 왕에게만 국한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바로 자신의 바로 뒤를 이을 왕세자나, 왕세자빈, 그리고 자기 마누라인 왕후의 것에도 옥에 조각을 하는것을 허용하지 않았는데요. 왕과 왕세자, 왕후 모두 (여자들은 대례복에 국한되어 각대를 착용) 각대를 착용할 경우 왕후는 민옥(珉玉), 왕세자와 세자빈은 청민옥(靑珉玉)을 사용하여 조각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왕이라는 존재에게 유니크적인 특징을 주려고 했던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 아주 특이한 것은 삼국시대에는 옥대가 1~3품 이상의 관원들은 착용할수 있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왕족들의 귀한 보물로만 자리잡게 했다는것은 참 독특한 것이 아닐까 싶네요. 그럼 조선시대 관원들은 허리띠에 무슨 장식이 있었냐구요?
 
앞서 위에도 설명드렸지만, 대충 설명을 드리자면 조선 초기 법전인 경국대전을 보면 이와 같이 정리가 될수 있습니다.
 
1품 - 서대(물소뿔로 띠돈을 만들어 붙힌 허리띠)
정 2품 - 삽금대(금이 조각되어있는 띠돈으로 장식된 허리띠)
종 2품 - 소금대(조각되지 않은 금이 띠돈으로 장식된 허리띠)
2품, 3품 - 여지금대(공복에 한해서 착용했지만, 여지는 우리가 흔히 볼수 있는 베트남 지방의 과일 '리찌'의 모양을 본따 금으로 조각한 허리띠로, 리찌는 중국 도교 사상에서도 나타나는데, 길상(吉祥)의 의미와 함께, 귀한 과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리찌가 유명해진 것은 당나라 때 경국지색이었던 양귀비는 신선한 리찌를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이 리찌를 먹기 위해서 5월만 되면 황제인 현종에게 구해달라고 졸랐는데요. 현종은 자기가 좋아하는 애첩이 구해오라고 난리를 치니까 이를 구해오라고 명령을 내렸고, 베트남서부터 상하지 않게 가져오느라 많은 인명들이 고생할수 밖에 없었던 과일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귀하고 맛이좋았던 모양이에요^^ 당의 시인인 백거이 같은 경우도 여지를『딸기와 같은 열매인데 속살은 빙설 같고, 맛은 새콤달콤한 우유죽 같다. 열매가 가지를 떠나면 하루만에 빛이 변하고, 이틀만에는 향이 변하여, 사흘이면 맛이 변한다.』고 했습니다. 사흘이면 맛이 변하는데, 베트남에서부터 당나라 장안까지 사흘내로 수송하기...어려웠겠죠? 또 다른 당의 대표 시인 두보의 경우는 『병귤』이라는 시에서 '남해의 사신들이 여지를 바치고자 수만리 길을 달려, 수백마리 말이 산곡에서 죽었구나'라고 표현했을 정도라고 하네요^^.
정 3품 - 삽은대(은이 조각되어있는 띠돈으로 장식된 허리띠)
종 3품, 4품 - 소은대(조각되지 않은 은이 띠돈으로 장식된 허리띠)
정 3품 당하 ~ 9품 - 흑각대(물소뿔로 띠돈을 만들어 장식한 허리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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