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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조룡보(五爪龍補)

감효전(甘曉典) 2012. 2. 13. 14:51

오조룡보(五爪龍補)

 
 오조룡보는 쉽게 말씀드리면 곤룡포에 들어가는 자수입니다. 우리가 사극을 보면 왕과 신하들은 관복에 자수를 놓은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잘생겼다~하고 쳐다보는 듯한 저의 모습입니다.)
 
 
보시면 김수현씨가 입으신 곤룡포에는 가슴과 양 어깨, 그리고 사진에는 보이진 않지만 등에까지 이상한 괴물체가 수놓아진 것을 볼수가 있구요. 신하의 관복을 입은 저의 사진에는 가슴과 그리고 사진에 보이진 않지만 등에 학 두마리가 서로 눈이 맞아서 단숨에 새끼 학을 낳을 분위기를 연출하는 듯한 학이 수놓아져 있는데요. 그럼 이 차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일단 이 이야기를 하려면 중국 당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합니다. 후주, 당 시대에 관복 제도가 확립 되면서 당나라에서는 특이한 패션 혁명이 일어나는데요. 바로 관복에 자수 놓기가 유행을 타게 됩니다. 그러면서 황제나 신하 모두 가슴, 등, 양어깨에 수를 놓으며 위용을 보였는데요. 이후 우리나라에도 그러한 제도가 들어오긴 했습니다만 신하들에게는 적용되질 않고 왕에게만 적용이 되었구요. 송나라 시대에도 황제만 용포에 수를 놓게 되었습니다. 송나라때는 우리나라의 고려시대니까 우리나라 또한 마찬가지였구요.
 
이후 조선시대에 넘어와서 명나라의 곤룡포를 사여 받으면서 용포에 용보를 수놓기 시작한것을 알수 있게 됩니다. 기록에 의하면 세종 26년, 1444년 3월에 명나라에서 대홍직금 곤룡암화골타운포를 받으면서부터 이 용보를 쓰기 시작하는데요. 당시 용포에는 왕이 사조룡, 왕세자가 삼조룡, 왕세손이 이조룡보를 사용했으나, 명에서 왕의 용포는 오조룡보인것을 나중에 파악하고 왕은 다시 오조룡, 세자는 사조룡, 세손이 삼조룡으로 승격시켰다고 합니다.
 
쉽게 말하지면 용보는 왕의 흉배로서, 흔히 '보'라고 부르며, 왕과 왕비를 상징하는 관복에 수놓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쉽게 이해가 되실겁니다.
용보라는 표현은 이 보에 용의 모양을 수놓았기 때문인데요. 보는 왕의 양어깨와 가슴, 등에 수놓으며, 보 속의 용은 정면으로 쳐다보는 형태도 있고, 오른쪽으로 틀어져서 쳐다보는 형태, 즉 두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보는 남자 뿐만 아니라 궁중의 여인들도 당의에 용보를 붙혔구요, 계급에 따라서 모양이 달랐습니다.
 
그런데, 한자를 해석해보면
 
오 - 다섯 오(五)
조 - 발톱 조(爪)
룡 - 용 룡(龍)
보 - 도울 보(補)
 
라는 한자가 되는데요. 다섯개의 발톱을 가진 용이 수놓아져 있는 보라고 생각하시면 편하겠습니다.
위에 설명을 보시면 왕은 오조룡, 세자는 사조룡, 세손은 삼조룡이라고 되어있는데요. 이 몇조룡이라는 표현자체가 왕, 왕세자, 왕세손을 상징하게 되는것입니다. 왕이 다섯개의 발톱이 드리워져 있는 용이 수놓인 보를 곤룡포에 붙히고, 왕세자는 네개의 발톱이 드리워져 있는 용이 수놓인 보를 곤룡포에 붙히며, 왕세손은 세개의 발톱이 드리워져 있는 용이 수놓인 보를 곤룡포에 붙히는 것입니다.(다만 왕세손은 원형이 아닌 사각형의 흉배로, 등과 가슴에만 붙혔습니다.)
 
그러면서 용보는 시대별로 모양과 크기의 차이를 보이게 되는데요. 그럼 지금부터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태조 어진)
 
조선 초기 - 옆으로 틀어져 있는 용의 형태.
 
 조선 초기에는 명나라 황제의 것도 마찬가지지만, 태조의 어진에 수놓인 용보는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용보 형태입니다.
조선 초기에는 특이하게도 용보를 따로 헝겊에 수놓은 뒤에 관복에 붙히는 형태가 아닌, 관복 위에 바로 수놓은 형태라서 더욱더 특이한데요.
태조의 어진에 보시는 곤룡포는 기존의 용포색과는 달리 청색의 용포를 입고 있습니다. 이는 다양한 추측설을 내놓고 있는데요.
그중에서 가장 신빙성이 있는게 어진을 그릴 당시 태조가 '고명(명나라 황제로부터 왕으로 인정받는 것)'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청색 용포를 입었다는 것이 가장 강력한 설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청룡포 = 고명을 받지 못한 왕이 받기 전까지 나라일을 할 때 입는 관복 의 이미지로 굳어져 있죠.
그런데, 용이 보시면 어진을 기준으로 했을 때 오른쪽(우리가 보면 왼쪽)으로 틀어져 있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저 또한 왜 용이 저쪽으로 틀어져서 쳐다보고 있나 싶은데요(삐져서 저러나?). 자세한 이유는 현재까진 알수 없고 다만, 명 황제의 것도 그런것으로 봐서는 단순히 그 당시의 형태가 그러했다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괜히 명나라를 바라보기 위해서 라는 설은(우리가 동쪽이나 서쪽을 쳐다본다는 이야기) 그럴듯하나 신빙성이 없구요. 그러면 명나라 황제는 서양을 바라보는것도 아니고(태양의 나만 바라봐가 생각나네요)... 그러니까 그냥 형태가 당시 유행이 저랬나보다~하고 넘어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크기가 매우 커서 가슴을 다 가리고 목 아래까지 원이 그려져 배꼽 근처까지 용보가 수놓아져 있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거의 지름이 45cm 정도 되보이네요.
 
 
(영조 어진)
 
 
조선 후기 - 정면을 쳐다보고 있는 용의 형태
 이 순재 선생님이 맡았던 배역이자, 정말 닮았다고 한 때 화제가 되었었던, 국사책에서 탕평책이네 뭐네 하면서 꼭 한번씩은 보셨을 영조 임금의 어진입니다. 영조 임금이 맘에 들었는지 용보가 정면을 쳐다보고 있네요. 요즘 한 성격 하시는 분들이 보시면 뭘 꼬나보나? 앙? 눈 안 깔어?! 하실수도 있지만, 그냥 용은 당신을 쳐다보고 있지 않다는 것 명심해주시구요. 용이 정면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조선 어느 왕부터 이러한 변형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알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좌통례가 감히 추측한다면...명나라 멸망 이후라고 개인적으로 혼자 주장을 하고 있어요..
 
제 주장을 조금 살을 덧붙혀 본다면, 조선은 임금이 바뀔때마다 명나라에서는 대례복인 구장복을 비롯하여 곤룡포, 강사포 등을 하사 받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명나라 황제가 내려주신 이 의상들을 입으면서 나라일을 돌보았는데요. 그렇게 평화로운 사대 노선이 이어져오다가 조선 중기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당시 동 아시아의 정세를 다 바꿔놓는데 일조하게 됩니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정권이 무너지고 도쿠가와 막부가 세워졌으며, 명나라는 새로 일어난 후금,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여진, 청나라에 의해서 멸망을 맞게 됩니다. 다만 우리나라만 정권이 바뀌지 않고 조용히 넘어갔는데요. 뭐 그래도 그 속에서는 꾸준한 변화도 일어났으니 꼭 변화하지 않았다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네요.
 
그러면서 청나라에 있어서 관복 사여를 받지 않겠다고 했던 임금이 숙종 임금이었습니다. 당시 청나라 사신이 숙종 임금에게 구장복을 하사했는데, 당시 옷이 커서 맞지도 않을 뿐더러, 청나라 사신의 태도가 오만하기 그지 없었던지라 숙종 임금이 '나 빈정 상했어. 갈거야.' 하면서 그 옷을 입지 않고, 우리식으로 면복을 수정하게 됩니다. 혹시 그 여파로 용보도 변화하지 않았을까 살포시 발을 얹어봅니다만, 그래도 기록엔 남아 있질 않으니 어떠한 것도 정설이 될수는 없지요.
 
그래서 우리나라의 어진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면 그 자료로 아, 이 임금 때부터 뭔가 바꼈구나라는걸 아는데, 아쉽게도 6.25전쟁과 임진왜란 등으로 어진들이 많이 전소되어 버려, 남아 있는게 태조 어진, 영조, 철종, 고종의 자료 수준입니다. 정말 아쉽기 그지없지요...
 
그래서 일단 조선 후기는 영조 어진의 것을 최대한 고증자료로 삼고 재현을 한답니다. 어쨌든 영조 어진의 용보는 정면을 쳐다보고 있고 태조 어진처럼 지름이 매우 넓고 큽니다. 대략 이것도 45cm가 된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고종 어진)
 
 
 
 
- 조선 말기 - 정면을 쳐다보고는 있지만 작아진 용보의 형태
 
 조선 말기에 이르면 조선에서는 갖가지 개혁령이 이루어집니다. 의복도 피해갈수 없는 사항중 하나였는데요.
흥선대원군은 집권 초기에 양반들의 도포나 갓이 큰 것이 매우 큰 폐해라고 생각해서 갓의 크기를 중인들이나 쓰는 소갓으로 채양(갓의 챙)을 줄이고, 도포나 쾌자 대신에 두루마기를 입을 것을 권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관복의 소매나 흉배의 크기도 매우 줄어들었고(흉배는 지름 30cm 정도 이상의 것이 15~20cm로 줄게 됩니다. 용보도 지름이 40cm가 넘던 것이 20cm 정도로 줄게 됩니다.) 이렇게 차차 복식 개혁령이 이루어져 가면서 고종이 집권하던 시기에도 이 의복 개혁령은 피해갈수 없었는데요. 곤룡포도 피해갈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용보의 수가 정면으로 쳐다보는 그 형태는 영조의 것과 차이가 없지만, 절반으로 지름이 줄어들었다는게 가장 큰 변화죠.
 
이러한 3단계의 외형 변화를 겪게 되면서 조선은 차츰 용보의 형태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황제가 입는 황룡포는 용의 발가락이 계산을 해보면 황제는 칠조룡, 황태자가 육조룡, 황세손이 오조룡이 되는건가요?라고 질문하실분들도 계신데요. 그러면 어떤지 한번 알아볼까요?
 
 
(명태조 주원장의 황룡포와 고종의 황룡포를 재현한 모습)
 
 황제가 입은 황룡포입니다. 주원장의 황룡포도 보시는바와 같이 왼쪽으로 치우쳐져있지요? 그러니까 꼭 우리나라가 명나라를 사모하는 듯한 그런 상상의 이미지는 버리시길 바랍니다. 두 용포의 공통점은 황색으로 황제가 입었던 것(고종과 명 태조)이라는 점이구요, 차이점은 용보의 형태가 하나는 정면을, 하나는 왼쪽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종의 황룡포 재현품은 잘 안보이더라도, 눈이 조금만 발달되신분들은 명 태조 주원장이 입은 황룡포의 용보가 보이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