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6.12
민간인학살 문제 왜, 어떻게 해결되어야 하나
김 동 춘 (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1. 전쟁의 세기에서 평화와 인권의 세기로
분단 55년, 휴전 47년만에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양 정상은 14일 5개 조항의 합의문을 발표하였는데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 상봉했다고 전제하면서,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천명하였다.
그 동안 한국전쟁의 당사자인 남 북은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지 않은 채 준 전시 상태를 유지해 왔다. 이번의 정상회담은 적대의 시대를 청산하고,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열어가는 도상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룬다. 주지하다시피 그 동안 남 측은 북이 전쟁 책임자라고 규정하면서 체제를 인정하지 않았고, 북은 미국이 전쟁의 책임자이며, 미군의 주둔과 국가보안법이 남북한의 화해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번의 정상회담 한번으로 55년간 쌓인 적대의 골이 한꺼번에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과거의 적대를 미래의 적대로 연결시키지는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확인한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과거 남북한의 전쟁과 적대로 인해 발생했던 모든 문제들을 이데올로기의 잣대에 의해서가 아니라 21세기 민족 공동체 구성의 전망 속에서 정리해야 할 것이다.
이산가족 문제, 장기수문제, 납북 어부문제 등 한국전쟁 혹은 분단으로 인해 발생한 여러 가지 현안이 산적해 있으나 전쟁 중 민간인 학살 문제는 그 피해자의 규모와 피해자의 고통의 심도 등에서 볼 때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로 거론될 필요가 있다. 특히 이산가족 문제, 장기수 문제 등과 달리 민간인 학살 문제는 전쟁시 이념적 적대의 산물이므로 중요한 과거청산 과제이자 한반도의 평화와 인권을 구축하기 위해서 먼저 해결되어야 할 미래지향적인 과제이기도 하다. 남북한 적대 과정에서 이렇게 많은 민간인이 억울하게 죽었으며, 이데올로기의 압박 때문에 그 유가족들이 지난 50년 동안 소리내어 울지도 못했다고 생각해 본다면, 민간인 학살 문제는 우리 분단의 역사가 낳은 최고의 최대의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화해와 협력의 마당에 아직 수백만의 유가족들이 진정으로 화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면, 그러한 화해는 정치적인 수사로 그칠 위험성이 있다.
따라서 남 북이 진정으로 평화와 화해를 원한다면 이 문제를 회피할 수 없다.
2. 왜 ‘양민’(良民)이 아니고 ‘민간인’(民間人)인가?
이 평화와 화해의 시대에 민간인 학살 문제를 거론할 때 우선 지난 이데올로기의 시대에 사용되었던 ‘양민’의 개념을 재고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한국전쟁 당시에 양민증이라는 것이 존재하였다. 그것은 전선이 교차하면서 누가 적이고 우가 우리편인가 하는 점이 불분명하게 되자, 주변의 보증을 통해 국군이 들어온 이후 치안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대한민국에 협력하려는 주민들을 양민(良民)으로 분류한 것이다. 양민증은 형편없이 작은 종이조각에 불과했지만 그것이 없으면 절대 외출을 할 수 없었다. 이 경우 좌익과 관련이 있는 가족, 의심을 받는 가족들 혹은 ‘통비분자’로 분류된 사람들은 양민증을 받지 못했다. 그 뿐아니라 양민의 자격을 얻지 못한 사람들. 특히 좌익 관련자와 그 가족들은 이 엄혹한 이데올로기의 굴레 아래에서 사실상 국민, 혹은 민족 구성원으로 대접받지 못했으며, 사실상 죽은 목숨처럼 생명을 부지해 왔다.
한국에서 빨갱이로 지목되는 것은 전근대 시절의 천형과도 같다. 빨갱이에게는 어떠한 처벌이라 폭력을 가해도 용인되고, 부녀자와 자녀들에 대한 유린도 용납이 되었으며, 그들을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해도 반발이 없었다. 그리하여 전쟁 후 지난 50여 년 동안 피학살자들의 가족들과 기적적인 생존자들은 사실상 죽은 목숨이었다. 재산을 빼앗기고 망가진 몸을 갖고서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동네가 쑥밭이 된 이후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4.3 사건의 피해자들처럼 이 상처를 잊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을 하기도 하고, 또 자녀들이 피해를 입을까봐 철저하게 침묵하면서 살아왔다. 그리하여 노근리 미군의 양민학살 건이 전국에 메아리치고, 특별법이 제정되고 각 지역에서 산발적으로나마 진상규명 활동이 본격화되는 이 시점에도 극소수의 유족을 제외하고는 자신이 피해자라고 선뜻 나서는 사람이 거의 없다. 목격자나 기적적인 생존자들은 이제 연로하여 거의 사망하였으며, 너무 연로하여 과거의 기억도 가물가물한 상태이다.
양민이라는 것은 사상적인 순수성, 즉 세계를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구분한 다음 좌익을 악으로 보고 그러한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평상시는 물론 전시의 경우에도 보통의 사람들은 사상적, 정치적 문제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않은 경우가 더욱 많고, 근대 문명사회에서 이렇게 획일적인 잣대로 사람의 양심과 생각을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양민, 불순분자의 구별은 적절치 않다. 그것은 어떤 가치를 절대선으로 놓고 그것을 어기는 사람들을 불순한 존재로 규정하는 극도의 반공주의가 통용되는 한반도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국제적인 규범에서 사용되는 민간인(civilians)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적절하다. 유격전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민간인과 무장세력과의 구별이 어려운 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민간인을 모두 무장된 적으로 취급할 수는 없는 것이며, 만에 하나 민간인 중에서 아동이나 여성, 노약자가 포함되어 있다면, ‘전투 수행’ 과정에서 ‘통비분자’를 처형했다는 기존의 논리는 명분을 잃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양민이라는 개념을 계속 사용한다면, 누가 양민이고 누가 양민이 아닌가라는 소모적인 논쟁에 또 다시 휘말려 들어가게 된다. 동시에 그러한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게 되면 양민에 대한 학살은 부당한 것이고, 양민이 아닌 사람에 대한 학살은 정당하다는 결론으로 유도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은 공권력이 저지른 불법적인 인권유린을 용인하는 결과가 된다. 근대 국민국가에서는 설사 간첩이라고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처형하지는 못한다. 한국전쟁기 국민 보도연맹원이나 좌익 혐의자에 대한 예비구금을 통한 학살 역시 적법한 절차를 거치는 않는 것들이었다. 지금까지 정부가 대전, 대구 등 형무소에서의 재소자를 학살한 것이나, 전시 부역자 처벌이나 학살에 관한 모든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는 것도 그것이 불법적이고, 반인권적이며, 반인륜적인 것이라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우리는 한반도를 드리운 이데올로기의 굴레를 용인하는 양민이라는 개념보다는 민간인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한다. 우리는 국가주의의 관점에서 아니라 인권의 관점에서 한국전쟁 중 민간인 학살 문제를 접근하고 있으며, 따라서 좌익 우익의 구분을 떠나 전시에 발생한 모든 억울한 죽음들, 특히 남북한 양 공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 문제를 이 자리에서 거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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