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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건웅이 그린 <나는 공산주의자다> 1권 겉표지 |
ⓒ 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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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땅에서 스스로 공산주의자라고 확신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이 공산주의자라고 당당히 밝힐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어쩌면 공개적으로 당당하고 떳떳하게 자신이 공산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허영철' 한 사람뿐일지도 모른다.
허영철은 1920년 전남 부안군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으며, 철이 들면서 전국 여러 곳을 다니면서 노동자로 일했다고 한다.
노동자로 지내면서 사회주의를 만나게 되어 해방 후 부안에서 남로당과 청년단체 활동을 하면서 혁명가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부안군과 황해도 장풍군 등에서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한국전쟁 중에 북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 이른바 "조국통일 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남파공작원이 되었다.
"1954년 8월 공작원으로 남파되어 1955년 7월 하순 체포됐고 국가보안법 위반과 간첩 미수로 무기형을 선고 받았다. 36년을 꼬박 살고 1991년 2월 25일 출감했다. 2000년 6·15선언으로 비전향 장기수의 송환이 이루어질 때, 북으로 가지 않고 남쪽에 남아 고향에서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서른여섯 젊은 나이로 감옥에 들어가서 일흔 두 살에 옥문을 나섰다. 꼬박 36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공교롭게도 우리 민족이 일제의 지배를 받았던 것과 똑같은 시간이다. 36년, 얼마나 긴 시간인가?
36년 감옥생활, 간첩이 아니라 '공작원'
일제 침략초기 독립운동에 나섰던 많은 조선 지식인들은 식민지배가 길어지자 독립에 대한 희망을 접고 일본의 지배를 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처음에는 독립운동가였던 그들이 하나 둘 친일파가 되었던 것이다.
허영철은 일제 식민 지배 기간과 똑같은 36년을 남조선 감옥에서 전향 공작에 시달리며 보냈지만 단 한 번도 '공산주의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공산주의자다>(보리 펴냄)의 주인공 '허영철'은 대남공작원이고 '국가보안법식' 표현으로는 이른바 '간첩'이다. 그는 스스로 간첩이 아니라 공작원이라고 말한다. 간첩은 적국에서 활동하는 첩자, 혹은 영화 '람보'에서와 같이 적국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는 '무장 간첩'을 말하는 것이고, 자신에게 남조선은 적국이 아니기 때문에 '공작원'이 옳은 표현이라고 말한다.
간첩이란 국가 기밀을 빼돌리는 사람인데 자신은 통일 사업을 하러 왔기 때문에 간첩이 아니라 공작원이라는 것이다. 정전협정이 되고도 미국 때문에 한반도에서는 통일 문제가 한 번도 제대로 거론되지 않았다고 한다. 국제회의에서 여러 번 정당한 남북통일 방안을 제기했지만 남쪽에서는 보도도 안 되고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공작원으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겠지만, 이 책에는 통일 사업을 하러 남조선으로 왔다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 할 역사적 사실들이 소개되어있다. 모스크바삼상회의에 따른 임시정부 수립과 후견제 결정이 미국의 훼방으로 무산되었다는 것,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후견제'를 주장하였다는 것.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하지 않았다
"미국의 신탁통치는 우리나라를 완전히 식민지 취급하는 것이지만 소련의 후견제는 자주 국가로 안정될 때까지 길어야 5년 동안 정치적인 후견을 하겠다는 것이에요."
모스크바 삼상회의는 신탁통치가 아니라 후견제를 채택했는데 이것이 잘못 알려져 반탁운동이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해방 이후 북조선에서 민주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사업이 진행되어 나가는 과정과 남조선에서 자주독립 국가를 세우려는 인민들의 바람을 짓밟고 벌어지는 점령군 미군정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미군정의 성격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38도 이남이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의 전 권한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하에 시행된다"로 시작되는 맥아더의 포고령이었다.
"미군은 건준, 인민위원회 같은 조직을 해산하고 일제시대 경찰에다 새로이 경찰을 보강하여 인민들을 폭압하기 시작했지요."
"북조선에는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1946년 2월에 조직된 북조선 인민위원회가 중앙 정부 역할을 했어요. 북조선 인민위원회는 1946년 3월 5일 토지개혁을 단행하고 노동법과 남녀 평등권을 비롯해 여러 민주개혁을 진행시켜나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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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건웅이 그린 <나는 공산주의자다> 2권 겉표지 |
ⓒ 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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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철은 미군정의 기만적인 정책을 폭로하는 투쟁에 참여하였고, 1946년에 창당한 남조선노동당원이 되었다. 그는 당원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자랑스런 노동당원이자 공산주의자
"신분도 분명하고 실천력도 있어야 하고 이론도 알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당사업에 열성으로 참여해야 하는데, 당과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헌신한다는 뜻과 같아요. 내 입당 일자는 남조선 노동당 창당일자인 1946년 11월 23일이에요. 그러므로 그날이 내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가장 기쁜 생일인 것이지요."
한국전쟁과 36년의 감옥생활 등 60년이 훨씬 넘는 긴 시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자랑스런 노동당원이고 공산주의자다. 지금도 사회주의자로서 신념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다. 그는 결코 자본주의 사회가 영원히 존재할 수는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공산주의 사회가 좋다고 단번에 완벽한 공산주의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우리는 먼저 현실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어요. 더 높은 사회가 분명히 있고 또 그곳으로 가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러려면 많은 장애들을 겪어야 하지요… 더 높은 사회를 향하는 꿈을 잃지만 않으면 돼요."
소련이 무너지고 사회주의가 한때 퇴보했어도 사회주의가 없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 그는 반드시 더 나은 사회주의로 발전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역사는 과정이지 완성된 것이 아니며 또한 일직선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어서 물러서기도 하고 돌아가기도 하면서 발전해나간다는 것이다.
천안함 사건으로 한반도 정세가 불안해지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보면 1950년 한국전쟁의 성격을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누가 한반도를 전쟁의 위협으로 몰아가고 있는가?
허영철은 전쟁은 정책의 연장이며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북쪽은 일관되게 평화통일을 주장하였고, 오히려 북진통일을 줄기차게 부르짖은 것은 남쪽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출신들에게 전쟁의 책임을 뒤집어 씌웠다는 주장도 일축한다. 북쪽은 한국전쟁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에 전쟁의 책임을 져야할 일이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출신들의 '간첩질'에 대한 책임을 물었을 뿐이라는 것.
근대사의 굴곡을 온 몸으로 맞닥뜨린 삶
이 만화의 원작은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이다. 그 제목처럼 허영철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1920년에 태어나 일제 치하에서 시작된 그의 삶은 이 나라의 굴곡진 역사를 한 번도 비껴가지 않았다.
일제 침략기에는 식민지 출신의 탄광 노동자로 살았고, 해방 후에는 남로당원으로서 미군정에 맞서서 싸웠으며 죽음과 삶을 넘나드는 한국전쟁 기간에는 빨치산 활동을 하였다. 북한에서 짧은 당 간부 생활 후 1954년 대남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가 검거되어 36년을 감옥살이로 보내게 된다.
감옥에서는 이른바 구타, 고문, 회유가 반복되는 '전향 공작'에 시달렸을 뿐만 아니라 광주교도소에 수감된 동안에는 5·18 광주항쟁을 몸과 마음으로 함께 겪었다고 한다. 감옥 역시 늘 분단의 비극이 첨예하게 드러나는 역사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는 여전히 소년처럼 해맑은 웃음 속에 담긴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남과 북을 넘나들고, 전쟁과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고, 수십 년을 감옥에서 살았지만 여전히 그지없이 밝은 웃음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참 무거운 만화다. 만화인 것은 분명한데 그림도 내용도 주제도 모두 무겁다. 마치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 그렇다. 영화감독 김동원의 표현처럼 고품격 다큐만화다. 몇년 전 이런 만화를 본 적이 있다.
미국 흑인 작가 조 사코가 쓴 <팔레스타인>과 <안전지대 고라즈데> 두 권의 만화책은 만화책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확 바꿔놓았다. 특히,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오랫동안 한국에는 왜 그런 만화 작가가 없을까하는 아쉬운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탁월한 작가 박건웅, 헌법을 믿고 책을 낸 윤구병
그런데, 박건웅이라는 탁월한 작가가 있었다. 빨치산 이야기를 다룬 <꽃>과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다룬<노근리 이야기>(최근 영화 <작은연못>도 노근리를 다뤘다), 제주 4·3항쟁을 그린 <홍이 이야기>들을 만화로 그렸다고 한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를 눈에 보이게 하는, 독자들을 역사의 현장으로 빨아들이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작가다.
이런 위험한 책이 세상에 나오도록 부추긴 사람은 보리출판사 윤구병 선생이라고 한다. 나름대로 평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싸우고 평화와 통일운동에 몸 바친 사람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란다.
그는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사실상 헌법보다 위에 있는 '국가보안법'을 위반하였기 때문에 36년간이나 옥살이를 하였다는 거다. 헌법에 있는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공산주의자에게 해당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를 지키려던 허영철은 평생을 감옥에서 보냈고, 우리들 대부분은 헌법을 어긴 대가로 감옥 밖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윤구병 선생은 대한민국 헌법에 보장된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를 곧이곧대로 믿고 이 책을 냈다고 한다.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를 믿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노동자 삶, 이름나지 않는 혁명가의 삶을 통해 민중의 시각으로 다시 씌어진 우리 근대사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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