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분수령, 3.1운동 - 3.1운동에 참가한 노동자들
우리 근현대사를 보면 세상을 뒤엎을 뻔한 항쟁들이 주기적으로 계속되었다. 1894년 농민전쟁, 1919년 ‘3.1운동’, 1946년 9월총파업과 10월인민항쟁, 1960년 4월혁명, 1979~80년 부마.광주민중항쟁, 1987년 6월항쟁과 7.8.9 노동자투쟁 들이 그러한 사건이었다. 1996~97년 노동법개정투쟁이나 2008년 촛불항쟁도 빼놓을 수 없겠다. 이러한 사건들은 항쟁과정에 직간접으로 참가한 사람들의 이후 삶 뿐 아니라 사회운동, 노동운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19년 3.1운동이 특히 그렇다. 노동자들은 만세 시위운동 뿐 아니라 공장을 멈추는 파업 투쟁으로 3.1운동에 동참했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노동자들은 84건의 파업을 벌였으며 9011명이 참여했다. 이 가운데 조선인 노동자들은 92%인 8283명이었다. 업종별 파업건수를 보면 인쇄공 13, 제화공 12, 정미소노동자 9, 담배공장노동자 8, 운수노동자 4, 부두노동자가 4, 철공소직공 4, 전기관계 노동자 3, 토건노동자와 광산노동자 각 3건이었다. 울산노동뉴스 함께 실렸습니다. 3.1특집 한인사회당 고려공산당 조선공산당 한국 좌파독립운동 역사 1918년 이동휘(李東輝)가 하바로프스크에서 조직한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이동휘는 1917년에 러시아 10월혁명의 성공에 고무되어, 러시아 혁명에 대한 옹호와 협조가 곧 조선 독립 달성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코민른 테극동 방면 선전위원으로 활동하던 그레고리노프의 도움을 받아 하바로프스크에서 1918년 한인사회당을 조직했다. 주요간부는 위원장 이동휘, 부위원장 박애 (朴愛 : 박 마다베이), 선전부장 전일(全一), 비서부장 박진순(朴鎭淳 : 미하일 박), 정치부장 이한업(李漢業), 교통부장 김립(金立)이었다. 그러나 창당 직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적군파가 물러 나고 백군파가 시베리아를 장악하게 됨으로써 한인사회당도 활동이 어려워졌다. 국내에서 1919년에 3·1운동이 발생하자, 이를 계기로 이동휘 등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재규합하여 적당한 기회에 레닌 정부로부터 원조를 받아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려 했다. 그해 4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대표자대회를 개최해 박진순·박애·이한영 등 3명을 사절단으로 뽑아 코민테른에 파견하기로 했다. 1920년 모스크바로 건너간 이들은 한인사회당이 코민테른에 가입한다고 선언하며, 당원명부를 코민테른에 제출하여 40만 원의 독립자금 원조금을 받았다. 한편 이동휘 등 한인사회당 세력은 상하이[上海]로 와서 상해 임시정부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된 대한국민회의를 통합할 때 주도적으로 참여해 이 동휘가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김립이 국무원 비서장에 임명되었다. 1920년 중엽 이동휘는 소련과의 관계강화를 통해 무장투쟁을 하기 위해 당시 임시정부 자체에 대한 격렬한 비판 여론을 기반으로 하여 임시정부의 전면개편을 주장했다. 이것이 거부되자 1921년초 이동휘 등 한인사회당 세력은 상해 임시정부를 탈퇴하여 대한국민의회 부회장 김만겸(金萬謙)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을 조직했다. 1921년에 중국 상해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공산주의 운동에 의거해 조직된 단체이다. 한국인의 공산주의 운동은 레닌혁명 이후 시베리아에서 기원적으로 발생하였다. 즉, 1918년 6월 26일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이 조직되었고, 1919년 1월 22일 이르쿠츠크에서 당시 러시아 볼셰비키당의 한인지부가 조직되었다. 전자는 이동휘(李東輝), 후자는 김철훈(金哲勳)가 대표하였다. 양자는 근본적으로는 모두 열렬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런데 두 조직의 체질상 차이는 전자가 서부 시베리아의 귀화인 집단이라면, 후자는 동부 시베리아의 귀화인 집단이라는 데에 있었다. 전자의 구실은 시베리아의 한인을 반일운동에 규합하는 일이었고, 후자는 서부 시베리아의 한인을 볼셰비키전선에 동원하는 일이었다. 1919년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동휘는 그 해 8월 말 상해에 도착해 대한 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에 취임하였다. 이동휘는 레닌정권의 힘을 빌려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첫 포석으로서 1920년 봄 상해에서 공산주의자 그룹을 결성하였다. 이 조직은 이동휘의 심복인 박진순(朴鎭淳)·김립(金立)·이한영(李漢榮) 등의 한인사회당 간부를 중심으로, 여운형(呂運亨)·조완구(趙琬九)·신채호(申采浩)·안병찬(安秉瓚)·이춘숙(李春塾)·조동호(趙東祜)·최창식(崔昌植)·양헌(梁憲)·선우 혁(鮮于赫)·윤기섭(尹琦燮)·김두봉(金枓奉) 등의 임시정부관계자들도 가담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920년 12월 모스크바 자금을 상해로 운반해 온 김립이 이 돈을 임시정부에 주지 않고 비밀리에 보관하였다. 이 사건으로 이동휘의 위신이 크게 떨어져 임시정부 관계자들의 공산주의 그룹 이탈은 급속히 표면화되었다. 이동휘는 1921년 1월 10일 자파만의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모스크바 자금을 공산주의 운동에 사용하기로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다. 또 공산주의 그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하였고, 그 달 23일 당의 임시 간장(簡章) 12개조, 당규율 5개조, 당정략 5개항을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1921년 5월 상해에서 고려공산당대표자회의가 소집되었다. 여기에는 국내와 만주 및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대표들이 참가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당선언 및 강령규약을 채택하고, 중앙위원회책임위원에 이동휘, 중앙위원 김립·이한영·김만겸(金萬謙)·안병찬, 번역부위원 여운형, 출판부위원 조동호 등의 지도부를 선출하였다. 이 당을 세칭 상해파고려공산당이라고 한다. 한편, 1919년 9월 5일 이르쿠츠크에서 전로(全露) 한인공산당이 결성되었다. 지도부는 고문 보리스 스미야스키, 위원장 김철훈, 비서장 이재복(李載馥, 일명 李檉), 정치부장 한(韓)안드레이, 선전부장 최고려(崔高麗), 군정부장 오하묵(吳夏默), 교통부장 박(朴)이노겐치, 중앙위원 26명이다. 이 당은 시베리아의 이민족을 다루는 코민테른동양비서부의 수족이 되었다. 한인 청년들에 대한 공산주의 교육과 군사훈련을 실시하였고, 당원과 일반 주민에 대해서는 ≪경세종 警世鐘≫이라는 기관지를 통해 정치사상교육 및 볼셰비키정책 침투에 힘썼다. 이 당은 1920년 7월 이르쿠츠크에서 러시아 안의 고려공산단체 제1차 대표회의를 소집하고 전로고려공산당으로 당명을 개칭하였다. 이후 1921년 5월 4∼17일에 한인공산주의자대회를 개최하고 이동휘의 상해파고려공산당과 대립하는 또 하나의 고려공산당을 결성하였다. 이를 세칭 이르쿠츠크파고려공산당이라고 한다. 이 당은 상해파고려공산당을 이탈한 세력과 이르쿠츠크파 세력이 합작한 공산당이므로 종래의 전로고려공산당 간부는 모두 퇴진하고 안병찬·한명서(韓明瑞)·남만춘(南滿春)·한규선(韓圭善)·이재복이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 해 11월 3일 당지도부에는 위원장 김철훈, 비서장 한안드레이, 정치부장 이성, 선전부장 최고려, 군정위원장 오하묵, 교통부장 박이노겐치로 등 구간부들이 그대로 복귀하였다. 그 뒤 상해파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고려공산당은 서로의 유일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레닌 집단에 경쟁적으로 접근하려는 투쟁 관계에 들어갔다. 상해파에서는 중국 및 일본 공산주의자들과의 제휴, 국내공작, 민족무장단 지원 등을 통하여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반면 이르쿠츠크파에서는 상해지부 설치, 상해고려공청 조직, 러시아 안의 한인군사조직 장악 및 러시아 안의 한인볼셰비키화 공작 등을 통해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양파는 러시아 안의 한인군사조직을 둘러싸고 쟁탈전에 들어갔다. 1921년 6월 28일 수라셉흐카에서 상해파의 지원 하에 있는 사할린 의용대가 러시아적군에 가담한 이르쿠츠크파에 대항하다가 러시아적군 제29연대의 포위공격을 받아 144명의 전사자 및 행방불명자를 내고 생존자 864명이 전원 붙잡히는 참사가 발생하였다. 이를 세칭 자유시사변이라고 한다. 1919년 3·1운동 후 일제가 군국주의적 무단통치를 문화정치로 바꾸어 회유책을 쓰자, 우리의 민족운동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 시기의 민족주의적 사조는 점진주의와 급진주의의 두 경향으로 나누어졌는데, 전자는 민족적 자산층사상의 주류였고, 후자는 해내·외의 극우·극좌적 민족운동자들의 사상적 주류였다. 1919·1921년은 점진 및 급진적 민족운동이 전개되고 민족주의운동 안에서의 사회주의적 경향이 나타난 시기였고, 1922·1923년은 민족주의운동 안에서의 사회주의운동의 분리와 사회주의운동 안에서의 소분파가 발생한 시기였으며, 1924·1925년은 민족주의·사회주의 양진영간의 대립의 노골화와 사회주의자 등이 조직정비를 시도한 시기였다. 우리 나라에 사회주의사상·마르크스주의를 처음으로 전파한 것은 일본유학생들이었다. 이들은 1922년 2월 동우회(同友會)의 이름으로 ‘전국 노동자제군에 격(檄)함’이라는 선언을 발표하고 동우회가 계급투쟁의 직접적 행동단체임을 밝혔다. 동우회의 선언을 전후하여 국내에는 사회주의적 색채의 단체가 태동하게 되었는데, 그 중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북풍회(北風會)·화요회·조선노동당·서울청년회 좌파 등이 주요 좌익사상단체로 꼽힌다. 신사상운동을 전개한다는 목표에서는 원칙적으로 동일선상에 있는 그들이었지만, 경쟁적으로 자파세력의 확충에 힘쓰게 됨으로써 무원칙한 분파투쟁을 초래하는 폐단도 나타났다. 이미 민족주의자들이 만들어놓은 각종 기성단체에 침투하여, 내용상 같은 단체들을 장악하는 분할공작과 사상·노농(勞農)·청년·부녀·형평(衡平) 등의 새로운 단체를 조직하는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창당경위〕 이처럼 신사상운동의 명분에 의한 사회주의운동이 점차 확대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1923년 6월 서울에 코민테른이 설치되었는데, 이것을 ‘코르뷰로국내부(高麗局國內部)’라고 하였다. 이 기관의 책임비서는 블라디보스토크 소재 코르뷰로에서 한국내 공산당결성의 밀명을 받고 서울에 잠입한 김재봉(金在鳳)으로, 그는 서울에서 화요회를 모체로 이를 결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먼저 병립상태의 좌익합법단체를 정비하여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과 조선청년총동맹을 각각 결성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1925년 4월 17일 서울에서 비밀결사 조선공산당, 4월 18일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화요회가 주동이 되어 이 당을 조직하였다고 하여 일명 ‘화요파의 당’이라고도 한다. 이 당의 책임비서에는 김재봉이, 고려청년회의 책임비서에는 전에 해외에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상해공산청년회 비서였던 박헌영(朴憲永)이 각각 선출되었다. 코민테른은 이 당을 1국1당원칙의 코민테른 한국지부로 승인하였다. 이때부터 한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은 코민테른의 직접 지도하에 들어갔다. 〔제1차∼제3차 조선공산당사건〕 김재봉과 박헌영은 공산당조직확대와 고려공산청년회원 모스크바파견훈련을 적극 진행하다가 1925년 11월 신의주에서 그 계획이 탄로되어 일제경찰에 일망타진되었는데, 이것이 제1차 조선공산당사건이다. 1925년 12월 서울에서 제2차로 조선공산당이 극비리에 조직되었다. 당책임비서에는 강달영(姜達永),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에는 권오설(權五卨)이 각각 선출되었다. 이들은 모두 화요회의 요인이며 제1차 조선공산당의 당원이기 때문에 이들에 의한 제2차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재건은 사실상 제1차 당 및 공산청년회의 후속조직이었다. ‘강달영당’의 정치목표는 좌우연합의 국민적 당을 조직하여 공산당이 실권을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강달영당이 민족진영의 천도교 중진들과 접촉한 것은 곧 민족적 기반의 좌우연합당을 성취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1926년 6·10 만세운동을 통하여 3·1 운동을 재현하려던 강달영당의 계획이 거사 직전에 탄로되어 일망타진됨에 따라 좌우연합당은 실현되지 못하고 강달영당은 궤멸되었다. 이를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이라고 한다. 이 무렵 일본에 있던 좌경유학생단체인 일월회(一月會) 간부 안광천(安光泉)·하필원(河弼源) 등이 국내에 진출하여, 1926년 11월 선언을 발표하고 한국의 사회주의운동은 민족주의운동을 경시하여서는 안 되며 종래의 경제투쟁형태를 정치투쟁형태로 바꾸어야 한다는 방향전환론을 내놓았다. 이 선언을 정우회선언(正友會宣言)이라고 한다. 이 선언은 민족·공산 양진영의 협동을 추진하는 사상적 자극이 되었다. 이것을 세칭 ‘ML당’이라고 한다. 이 당을 조선공산당사상 이른바 ‘파쟁청산의 통일적 당’이라고 한다. 코민테른은 ML당에 대하여 당조직 운영방침, 단일의 민족혁명전선 조직방침 및 운영방침 등에 대한 11개 조의 지령을 내렸는데, 특히 단일 민족혁명전선의 운영방침을 명시한 것은 주목할만하다. ML당은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당책임비서를 김철수·안광천·김준연(金俊淵)·김세연(金世淵) 등으로 자주 바꾸었지만, 그들은 1928년 2월 검거되고 말았다. 이 당의 고려공산청년회도 당과 같은 이유로 책임비서로는 양명(梁明)·하필원·김철(金哲) 등으로 자주 바꾸다가 당과 함께 검거되었다. 이것을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이라고 한다. 1927년 12월 정통파조선공산당에서 배제된 이영(李英) 등이 서울 춘경원(春景園)에서 ML당의 정통성을 탈취하기 위하여 ML당과는 별도로 조선공산당을 결성하였지만,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1928년 4월과 6월에 일제경찰에 일망퇴진되고 말았다. 조선공산당사상 비정통파조선공산당 또는 춘경원당(春景園黨)이라고도 한다. 〔제4차 조선공산당 출범〕 1928년 3월 ML당의 잔당, 서울계의 신파 및 상해파 등이 연합하여 코민테른 지부로서의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이것이 제4차 조선공산당이다. 이 당의 책임비서로는 조선공산당사상 처음으로 노동자출신의 차금봉(車今奉)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는 고광수(高光洙)가 선임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추적은 혹심하여 그 해 7월 차금봉당이 검거되었다. 이로써 조선공산당은 국내에서는 사실상 명맥이 끊기고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취소, 해체를 지령하여 만주와 일본 등지의 해외조직만 남게 되었다. 1928년 12월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는 조선공산당 재건을 촉구하는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이 결정서를 통상 ‘12월테제’라고 한다. 이 테제는 궤멸된 조선공산당의 처지를 논술하고, 앞으로는 당체질을 노동계급의 혁명적 당으로 개선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공산당조직은 국내에서는 자동적으로, 만주에서는 1930년 3월에서 9월 사이에, 일본에서는 1931년 10월에 각각 해체선언을 하고 각 파가 경쟁적으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돌입하게 되었다. 1930년 9월 프로핀테른(Profintern:적색노조 인터내셔널)은 ‘한국의 혁명적 노동조합의 임무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고 일본제국주의 압박하의 한국노동운동의 지침을 하달하였다. 이 결의를 통상 ‘9월테제’라고 한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침략전쟁이 개시되자, 그 해 10월 프로핀테른 범태평양노조비서부에서는 한국에서의 범태평양노조비서부 지도자에 대한 ‘비격(飛檄)’을 통하여 한국노동운동에 대한 긴급지침을 하달하였다. 코민테른은 이상의 조처를 통하여 종래의 합법적 한국노동조합과 농민조합운동을 적색노동조합과 적색농민조합운동으로 급좌전시키고, 이것을 기반으로 혁명적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성공하지 못하고 대부분 검거되고 말았다. 박헌영의 서울콤그룹이 유독 8·15광복에 이르기까지 지하에 남아 있었다고는 하지만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1940년 12월과 1941년 6∼12월 사이의 검거로 인하여 사실상 일망타진되고, 지도자 박헌영은 간신히 8·15광복까지 지하에 숨어 있었다. 한편, 1930년대 후기에 만주 동변도(東邊道) 일대를 활동무대로 한 김일성(金日成)일파의 항일유격대가 있었지만, 이것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수하였기 때문에 조선공산당의 계보에 속하지 않으며, 더구나 그때에는 조선공산당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해체과정〕 그러나 1945년 8·15광복과 더불어 조선공산당의 초대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였던 박헌영이 중심이 되어 8월 20일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이 조직은 여운형(呂運亨)·박헌영·허헌(許憲)·김원봉을 의장단으로, 한빈(韓斌) 등 9인을 부의장단으로, 이주하(李舟河) 등 33인을 중앙상무위원으로 하였다. 조선공산당의 당면주장은 조선의 노동자·농민·도시빈민·인텔리겐치아 등 일반노동자의 이익을 옹호하여 급진적인 개혁을 위한 투쟁, 조선민족의 완전한 해방과 봉건잔재의 일소, 혁명적·민주주의적 인민정부수립 등이었다. 그러나 재건된 조선공산당은 소련의 후견을 업고 등장한 김일성에 의하여 1국1당원칙이 파괴되어 북한지역내에 독자적인 북조선노동당을 창립하였다. 그 뒤 박헌영은 미군정청의 공산당간부체포령과 함께 지하로 잠복, 월북하고, 조선공산당은 남한지역의 남조선노동당과 북한지역의 북조선노동당으로 양립하였으나, 결국 남조선노동당은 모두 숙청, 체포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白凡逸志[노동자역사 한내] 이달의 노동자역사
1919년 3월 1일부터 4월 말까지 2개월 동안에 200만명이 넘는 민중이 3.1운동에 참가하였다. 전국 232개 부.군가운데 229개 부.군에서 1491건의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에 참가했던 조선 민중들은 169여 개의 주재소, 면사무소같은 식민지 지배기구를 파괴하였다. 격렬한 반일항쟁 뒤에는 엄청난 희생이 뒤따랐다. 일제의 통계에 따르더라도 전국에서 학살된 사람이 8천여 명, 부상자가 1만5000여 명, 검거된 사람이 4만7000명에 이를 정도였다.
3.1운동 당시 노동자 계급은 전체 인구 가운데 머리수가 많지도 않았고,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노동자의 요구를 따로 내세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3.1운동 초기 단계부터 노동자들끼리 또는 시민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나섰으며 파업 투쟁으로 3.1운동의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시위에 나선 것은 3월 2일 0시 20분 종로에서였다. 400명 가까운 노동자들이 종로 네거리에서 종로경찰서 앞까지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3월 5일 서울역과 남대문에서 거행된 시위에도 노동자들이 합세하였다. 3월 8일 오후 7시 40분 무렵에는 용산에 있는 조선총독부 총무국 인쇄소에서 야간 작업을 하던 노동자 200명이 식당에서 시위를 결의하고 사옥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를 계기로 경성전기주식회사의 전차차장과 운전수, 수선공들이 잇따라 파업에 들어갔다.
3월 9일 오전에 시작한 전차 노동자들의 파업은 3월 29일까지 20일 동안 계속되었다. 서울의 전차교통은 마비상태에 빠졌다. 회사측과 일본 경무당국은 회유와 협박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을 분열시켰다. 3월 10일 종로 4가에서 300여 명의 시위대가 동료들을 배신하고 파업에서 빠져나가 전차를 몰던 운전수를 폭행하였다. 그들은 “왜놈에게 혹사되면서 운동에 가담하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다. 하루 속히 자살하라”는 선전문을 뿌리며 곳곳에서 전차에 돌을 던지고 운행을 방해하였다. 서울에서 평상시 58대가 운행되던 전차가 겨우 19대만이 운행되었다. 그것도 무장한 일본군이 함께 타고 경호해야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26일에는 20량의 전차가 시위대에 의해 대파되었다.
일본군이 시위 군중에게 총을 쏘면서 진압함에 따라 일반 시민들의 시위가 거의 중단되었을 때도 노동자들은 공장 단위로 분산적인 동맹파업을 벌이면서 줄기차게 투쟁을 계속하였다. 3월 10일 이후 서울에서는 노동자가 평상시의 10% 정도밖에 출근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업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3.1운동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벌인 대표되는 시위는 3월 22일 철도기관수 차금봉이 잡역노동자와 부근의 전차차장, 공장직공 등 700~800여 명을 이끌고 만리동에서 독립문까지 행진하면서 벌인 만세시위였다. 철도노동자들의 시위행진은 한동안 잠잠하던 시위운동에 불을 붙였다. 23일에는 새벽부터 훈련원, 동소문, 미생동, 원효로, 창덕궁 등 시내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차금봉은 27일에도 만철경성관리국 조선인 노동자의 시위를 조직하였다. 노동자 800여 명이 서울역 부근에서 ‘조선노동자대회’ ‘조선독립’ 등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내걸고 파업시위를 벌였다. 삼엄한 경계 속에서도 만철경성관리국의 조선인 노동자 900명 가운데 85명의 탈락자를 빼고 800여명이 시위에 참가하여 3월 31일까지 5일간의 파업을 감행하였다.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을 이끌었던 차금봉은 뒤에 1928년 노동자 출신으로 4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 임명되었다가 1929년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지방에서도 노동자들의 만세 시위에 나섰다. 3월 7일 평북 운산군 북진에 있는 동양합동광업회사 노동자 시위, 3월 15일에는 평북 의주군 고창면의 조선총독부 광무과 출장소 노동자 시위, 3월 20일 회령 지역의 노동자 시위, 3월 20일, 28일, 4월 3일 천안군 직산금광회사의 광산노동자 시위, 4월 1일 충남 아산군 둔포면 운룡리 일본인 광산노동자 시위, 4월 5일 강원 통천군 고성의 노동자와 농민 시위, 4월 8일, 10일 경남 동래군 기장의 노동자와 가족 시위들이 이어졌다.
노동자들의 파업에서 중심되는 요구는 임금인상으로서 전체의 83%를 차지한다. 건수로는 적으나 8시간 노동제 요구도 이미 1919년 노동자 파업투쟁에서 나타났다. 노동자들의 파업은 공장 기계시설 파괴, 일본인에 대한 폭력행사, 항의 연설회, 시가행진, 동맹파업, 태업, 진정 같은 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파업과 요구가 바로 3.1운동의 한쪽의 내용을 이루고 있었으며 투쟁을 이어나갔던 힘이었다.
3.1운동은 그 이후 운동의 방향과 주체가 바뀌고 나뉘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문화정치라는 개량의 공간 한편에서는 “무식한 대중이 200만, 300만이 들고일어났는데도 결국 실패하고 말지 않았나, 얻은 것이 뭐냐, 주어진 조건을 활용하면서 힘을 기르고 필요하면 들어가서 입지를 넓히는 것도 운동의 방법 아니냐” 하면서 자신들의 좌절과 변절을 정당화하는 타협적 개량적 민족주의가 고개를 내밀며 목소리를 높여갔다.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자 농민대중을 민족해방운동의 주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조직하고 교육하고 투쟁하는 것이 민족해방운동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인식한 활동가들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 사회주의 활동가들이었다. 이들은 3.1운동 과정에서 억눌리고 빼앗기고 무시당하던 ‘무지렁이 백성’들이 뿜어내는 힘을 생생하게 보았다.
3.1운동은 사회주의 사상이 사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족해방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실천의 무기로 만드는 용광로이자 풀무였다. 사회주의 활동가들은 자본주의 국가통합과 제국주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민족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노동자 농민대중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조직하고 함께 투쟁의 대열에 나섰다. 3.1운동을 겪고 난 뒤 1920년대 노동운동은 이러한 사회주의운동과 짝을 같이하면서 발전하게 되었다.박준성(역사학연구소, 노동자교육센터, 노동자역사 한내) 쓴
≪참고문헌≫ 若山과 義烈團(朴泰遠, 白楊堂, 1947)
≪참고문헌≫ 夢陽呂運亨(呂運弘, 청하각, 1967)
≪참고문헌≫ 韓國共産主義運動의 起源(스칼라피노·李庭植, 韓國硏究圖書館,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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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ユミンテルン大會史(ロゾフスキ, 高等警察報 2 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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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高麗共産黨及全露共産黨梗槪(朝鮮總督府警務局)
≪참고문헌≫ 上海高麗共産黨宣言(朝鮮總督府警務局)
참고문헌≫ 韓國共産主義運動史 1∼5(金俊燁·金昌順, 高麗大學校 亞細亞問題硏究所, 1967∼1976)
≪참고문헌≫ 한국공산주의운동사자료집 1(한창수 편, 지양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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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한국공산주의운동사 1·2(스칼라피노·이정식, 한홍구 역, 돌베개,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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