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현대사 재조명

[스크랩] [다시쓰는 독립운동列傳] “나는 광복군이다”

감효전(甘曉典) 2012. 2. 7. 10:05

[다시쓰는 독립운동列傳] “나는 광복군이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그랬듯이 임정의 직속군대인 광복군도 우파만의 군대는 아니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임정이 1919년 설립 이래 지속적인 좌·우연합을 모색해온 것과 마찬가지로 광복군도 후기에 좌파 무장세력들을 합류시킨 것이다. 여기에 중국군 및 일본군 학도병 출신, 심지어 무정부주의자까지 합류해 이념과 신분, 계층을 초월한 총체적 항일무장연합 세력으로 조국독립을 위해 한마음으로 싸웠다.

◇이데올로기는 없었다=41년 11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 패망은 가시화됐다. 이념과 지역 연고에 따라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단체들 사이에 이제는 임정 산하에 결집해 항일운동에 총력을 바쳐야 한다는 공감대가 조성됐다.

마지막 전쟁을 위해선 뭉쳐야 했다.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좌파)이 임정의 좌·우합작에 따라 41년 12월 합류하고 그가 이끄는 군대 조선의용대도 후기 광복군 제1지대(충칭)로 편입된다. 제1지대는 45년 국내정진작전의 일선에 참여할 군대로 성장하기까지 한다. 전문가들은 “김원봉이 광복군에 합세한 것에 대해 이준식, 이범석, 김학규(이상 우파) 등 전기 광복군 지대장들 사이에 반발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며 “독립전쟁이 최우선 목표인 이들에게는 좌우의 개념을 떠올릴 겨를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광복군에 무정부주의자도 합류했다. 항일전쟁을 위해 39년 일찌감치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결성한 무정부주의 독립운동 단체는 소규모 초모활동(병사모집)과 첩보활동을 벌이다 41년 광복군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전기 광복군 5지대장을 맡은 나월환이 대표적 인물이다. 일본 유학 도중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던 나월환은 모든 힘을 결집시켜야 할 때가 왔다고 감지하고 임정의 문을 두드렸다. 국사편찬위 김광재 연구원은 “대부분 무정부주의자인 5지대 대원들과 기존의 우파 대원들 사이에 갈등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깝게 지냈다”고 밝혔다.

◇애국자는 누구든지 오라=국민대 장석흥 교수는 “광복군은 좌파나 무정부주의자들뿐 아니라 일제에 강제징집된 학도병, 중국군에 포로로 잡힌 한인청년 가운데 애국의 의지만 있다면 누구든 포용했다는 사실이 최근 더욱 의미있는 것으로 부각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창건 당시 30명에 불과하던 광복군은 초모활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애국청년은 물론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강제징집돼 일본군복을 입은 학도병의 포섭과 편입에 주력했다. 일본군으로 있다가 전투 중 중국군 포로가 된 한인청년들을 탈출시켜 광복군으로 끌어들이는 데도 앞장섰다.

중국이든 일본이든 과거 어느 쪽을 위해 싸웠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광복군의 선전활동에 따라 300여명의 학도병들이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광복군을 찾아가다 중국군의 포로가 되거나 목숨을 잃는 이들도 생겨났다. 김준엽(전 고려대 총장), 장준하, 한성수, 김우전(광복회장), 윤경빈(전 광복회장) 등은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탈출해 광복군이 된 이들로 유명하다.

김광재 연구원은 “45년 3월말 500명이던 광복군이 광복 당시엔 1,000명 가까이로 늘었다. 이는 계속되는 중국의 견제와 임정이 국제사회에서 국가로 인정받지 못한 열악한 상황에 비춰볼 때 대단한 숫자임에 틀림없다”고 설명했다.

〈심희정기자〉
출처 : 비전 여수
글쓴이 : 고재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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