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딸 안성희
학력 숙명여자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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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비아 40704, 1936년 발표
이하윤 작사
에르윈(R. Erwin, ?~?년) 작곡
노래 최승희
맑은 하늘에 새가 울면 / 사랑의 노래 부르면서
산 넘고 물을 건너 / 님 오길 기다리는 / 이태리 정원 / 어서 와 주셔요
저녁 종소리 들려오면 / 세레나데를 부르면서
사랑을 속삭이며 / 님 오길 기다리는 / 이태리 정원 / 어서 와 주셔요
라 라라 라~라 / 라 라라 라~라 / 라 라라 라
최승희(崔承喜, 1911년 11월 24일 ~ 1969년 8월 8일)는 무용가이다. 남편은 좌파 문학평론가 안막이다
무용입문
강원도 홍천, 또는 경성부 태생이라는 설이 있으며, 서울에서 자라고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6년 일본에 유학하여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에게서 사사 받았다.
무용활동
두 차례 일본 유학 이후에 국내에서 독자적인 근대 무용 공연을 가지면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모으게 되었고, 《반도의 무희》(1936)라는 영화에 출연하고, 자서전 《나의 자서전》(1936)을 출간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1930년대 후반에는 수년 동안 칠레등에서의 해외 순회 공연을 벌이면서 세계적인 명성도 얻었다.
북한에서의 예술활동
광복 후 남편인 안막을 따라 월북해서 최승희무용연구소(평양특별시)를 세워 소장에 취임하고 공훈배우, 인민배우 칭호를 받은 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1958년 안막이 숙청되면서 연금 당했다는 설이 나돈 이래, 행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아 숙청되었다는 소문이 오랫동안 나돌았다. 그러나 한설야와 함께 사후 복권된 상태라는 것이 2003년에 확인되었고, 묘지는 애국렬사릉으로 이장되어 있다.
무용계의 영향
최승희는 신무용의 창시자로서 한국 무용계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작품으로는 〈영산춤〉, 〈에헤라 노아라〉, 〈달밤의 곡〉, 〈반야월성곡〉, 〈우조춤〉, 〈칼춤〉, 〈보살춤〉, 〈초립동〉, 〈고구려 무희〉, 〈광상곡〉, 〈가면의 춤〉, 〈승무〉, 〈인도인의 비애〉, 〈해방을 구하는 사람들〉, 〈방랑인의 설움〉, 〈봉산탈춤〉, 〈유격대의 아들〉 등이 있고, 북조선에서 쓴 저서로 《조선민족무용기본》, 《조선아동무용기본》이 있다.
딸 안성희
안막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인 안성희도 소련에서 발레 유학을 하고 돌아와 북조선에서 무용가 및 안무가로 활동했다.
사후
2007년, 1930년대 초반에 가수로 음반을 낸 '최승이'가 음성 분석 결과 최승희와 동일 인물로 밝혀졌다는 주장이 나왔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일본군 위문 공연에 참여하고 여러 차례 거액의 국방헌금을 내는 등 일제에 협조한 행적이 있어 친일 논란이 계속되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심의가 진행 중이다. 최승희의 국방헌금 헌납은 강요된 것이었으리라는 추측이나, 설혹 친일행위가 사실이더라도 이로 인해 그의 춤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 등 일제 강점기의 행적에 문제가 없었으리라는 주장도 있다.
홍천군에서 최승희의 춤 선양사업 등을 한 예정이었으나, 광복회 등 단체와 여론의 반대로 중단되었다.
1946년 최승희
수상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경력 경력 더보기
- 1957 ~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 최승희무용연구소 설립
- - 중국 공연예술대 무용과 교수
1929년 서울에 ‘최승희 무용 연구소’를 차리고 승무ㆍ칼춤ㆍ부채춤 등을 통해 우리 춤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다.
1936년 영화 <반도(半島)의 무희>에 출연했고, 콜럼비아레코드에서 음반도 취입했다.
이 음반에는 <이태리의정원>과 함께 그녀가 직접 작사ㆍ작곡한 <향수의 무희>도 들어 있다.
1937년부터는 미국, 유럽 및 중남미 등 해외 공연을 통해 ‘동양의 진주’로 극찬받으며 세계적인 무용가로 활동했다.
한국 전쟁 발발 후 친일파로 몰리면서 1946년 문인이었던 남편 안막과 월북. 김일성은 그를 특별 대우했고,
활발히 활동하며 공훈 배우나 인민 배우의 칭호를 받지만 1958년 남편이 숙청당하면서 행적이 끊겼다.
최승희 역시 1960대 후반 숙청당한 것으로 추정되며, 2003년에 사후 복권되어 애국열사릉으로 이장되었다.
안막(安漠, 1910년 ~ 1958년?)은 문학평론가이다. 무용가 최승희의 남편으로 유명하다. 본명은 안필승(安弼承)이나, 일본 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이름을 따서 스스로 개명했다.
생애
경기도 안성 출생으로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0년대부터 일본의 와세다 대학교 러시아문학과에서 유학하며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다. 역시 사회주의 계열의 문예운동가이던 최승일, 박영희의 소개로 최승희와 만나[1] 1931년 결혼했다. 최승일은 최승희의 오빠이다.
1930년대 초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손꼽히는 이론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으며, 카프 시절의 평론으로는 〈프로 예술의 형식문제 -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의 길로〉(1930), 〈조선 프로예술가가 당면한 긴급한 임무〉(1930), 〈창작방법문제의 재토의를 위하여〉(1933)가 있다. 같은 일본 유학파이며 소장파인 임화, 김남천과 더불어 김기진을 비판하는 내용의 평론을 썼다. 1930년대 중반 카프가 해체되고 투옥된 이후에는 두드러지는 활동이 거의 없었다.
광복 후 곧바로 월북했고, 1950년대 중반에 문화선전성 부상을 지내는 등 북조선 내각의 고위직에서 일했으나 한설야 제거에 대한 사전 작업으로 1958년 경 카프 계열 완전 정리가 이루어질 때 서만일과 함께 축출당해 곧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자세한 사망 경위나 사망 년도는 알려진 바가 없다.
무용평론가, 연출가인 안재승이 친동생이며, 최승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인 안성희(초명 '안승자')는 발레 무용수였다. 동요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가 안성현은 안막의 조카로 알려져 있다.
참고자료
정수웅 (2004년 6월 7일). 《최승희 - 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어느 무용가의 생애와 예술》. 서울: 눈빛. ISBN 9788974098414
《조선일보》 (2003.4.16) '최승희 예술제' 안성 시댁마을서 열려
서구식 현대적 기법의 춤을 창작·공연한 최초의 인물로 8·15해방 이전의 한국무용계를 주도했다.
서울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소학교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2번이나 월반하여 1925년 숙명여자중학교에 입학했다. 숙명여고에 다닐 때 졸업 후 도쿄[東京] 음악학교에 진학할 생각이었으나 연령 미달로 좌절되고 사범대학도 같은 이유로 불합격되었다. 그러던 중 큰오빠 승일과 함께 이시이 바쿠[石井漠, 1886~1962]의 무용 〈수인 囚人〉을 보고 감명받아 무용에 입문하기로 하고 이시이 바쿠와 함께 도쿄로 떠났다. 1927년 가을 이시이 바쿠가 경성에서 공연할 때 한병용과 함께 출연했고 1929년 이시이와 결별하고 귀국하여 서울 적선동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차리고 1930년 2월 경성공회당에서 제1회 신작발표회를 가졌다. 이 공연은 한국인 최초의 독자적인 춤 공연이었다는 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그 뒤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공연을 했고 1931년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가인 안막(安漠:본명은 안필승)과 결혼했다. 결혼 후 경성에서는 창작 여건이 어려워 1933년 이시이에게 되돌아갔다. 일본에서 이시이의 공연에 주연으로 출연하여 호평을 받았으며 1934년 9월 일본 청년회관에서 그녀의 첫 무용발표회가 열렸는데 이때 발표한 〈거친 들판에 가다〉·〈칼춤〉·〈승무〉 등은 조선의 정취를 담았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 공연의 성공으로 최승희는 순회공연을 하고 학용품·화장품 광고에도 출연했다. 또 신흥영화사에서 만든 영화 〈반도(半島)의 무희(舞姬)〉에서 주연을 맡아 큰 인기를 누렸다. 최승희는 이런 활동을 통해 번 돈으로 창작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1937년 12월 미국을 거쳐 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네덜란드 등을 순회공연했다.
해외공연 후 많은 평론가들은 동양의 무희라고 극찬했고, 벨기에에서는 제2회 국제무용 콩쿠르 대회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이후 일본에 돌아와 가부키 극장에서 공연했는데 내용은 대개 조선무용이었고 반주는 조선에서 데리고 간 악사들이 맡았다. 그러던 중 일본총독부의 요구로 일본군 위문공연을 떠났다. 1942년 16일간 24회의 연속 독무 공연을 했는데 당시로서는 세계 무용계 최초의 장기 독무로 평가된다. 해방 후 일본군 위문 공연이 친일경력으로 평가되어 활동이 여의치 않은 데다 안막이 먼저 월북하자 그녀도 1947년 4월 월북했다.
월북 후 북한 무용계를 선도하여 조선춤을 체계화하고 무용극 창작에 힘썼다. 1948년 김구 환영 공연과 무용극 〈해방의 노래〉·〈춘향전〉 등을 발표했다. 1950년 소련 순회공연을 했고 중국무용을 연구하여 〈조선의 어머니〉·〈거친 파도를 헤쳐〉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1955년 인민배우가 되었고 무용극 〈맑은 하늘 아래서〉를 발표했으며 1957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당선되었다. 1958년 안막이 숙청당하자 그녀가 만든 최승희무용연구소는 국립무용연구소로 바뀌고, 그녀의 무용도 주체예술사상에 맞지 않는다 하여 무용계에서 제외되었다. 1964년 〈조선아동무용기본〉을 펴냈고 1966년 〈문학신문〉에 〈조선무용 동작과 기법의 우수성 및 민족적 특성〉을 발표했다. 1967년 그녀도 숙청당했고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으며, 그녀의 딸 안선희가 볼쇼이 발레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다고 하나 그 뒤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2003년 2월 북한은 최승희가 문인 한설야, 시인 박세영 등과 함께 애국열사릉으로 이장되었다고 발표했는데, 이때 최승희의 묘비에는 1969년 8월 8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한국 신무용의 개척자였던 그녀의 작품세계에는 민족주의적·국제주의적 성향이 섞여 있다. 그녀는 장기공연과 지속된 순회공연을 통해 대중의 인기를 모음으로써, 당시 춤 작품의 유통구조에 신기원을 열었다. 최승희는 음악과 춤에 대한 천부적 자질과 함께 무대 위에서 관객을 사로잡는 강렬한 눈빛과 몸동작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춤' 최승희, 노래도 불렀다…음반·영상 최초발굴
기사등록 일시 [2011-11-18 12:11:26] 최종수정 일시 [2011-11-18 13:57:41
【서울=뉴시스】김지은 기자 = 한국 근대무용의 여명을 연 무희 최승희(1911~1969) 관련 새로운 사료가 대거 발굴됐다.
신나라레코드는 18일 "최승희 탄생 100년을 맞아 그녀의 작품 전기와 중기, 후기를 모두 담은 총괄편을 24일 발매한다"며 "그동안 거의 공개되지 않았던 월북 후의 모습과 공연 영상, 노래 등이 담겨 있어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최승희가 1946년 북으로 넘어간 이후의 이 자료들은 1961년 일본 사회당(현 사민당)의 호아시 게이 의원이 최승희무용단을 일본으로 초청하기 위해 방북, 최승희에게서 받은 것들이다. 그동안 국내에 소개된 최승희 관련자료는 주로 월북 이전의 것이었다.
김연갑(57) 한민족아리랑연합회 이사는 "북한과 접촉하는 러시아가 최승희 관련자료를 단편적으로 한 두 컷 보낸 적은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학계 전유물이었고 이번처럼 대중에게 최승희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자료는 없었다"며 "컬렉션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자료가 방대하다"고 전했다.
또 "최승희는 아리랑을 세계에 알린 한류 1세대다. 헤밍웨이, 피카소, 찰리 채플린 등은 세계를 사로잡을 만큼 매혹적인 무용가라고 최승희를 극찬했다"며 "최승희의 예술 세계와 활동상이 재조명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짚었다.
CD 4장과 DVD 1장, 책 1권 세트로 이뤄졌다. CD는 최승희가 무용과 함께 관심을 기울인 무용음악으로 채워졌다. 최승희가 북에서 일궈낸 가장 큰 공적으로 평가받는 조선민족무용 기본동작, 아동무용 기본동작 음악도 담았다.
가수로서의 자질을 보여주는 최승희의 노래 3곡이 실렸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최승희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영화 '반도의 무희'의 주제가 '향수의 무희'(작·편곡 최승희), '반도의 무희'의 또 다른 삽입곡 '축제의 밤', 그리고 최승희가 우리말로 불러 녹음한 유일한 곡인 '이태리의 정원' 등이다.
신나라레코드 김기순(72) 회장은 "이 세 곡은 최승희가 생전 육성으로 녹음해 남긴 유일한 자료다. 일제시대 때 일본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발매됐다는 기록으로만 존재하던 '향수의 무희'와 '축제의 밤' 두 곡은 실존 음반으로 최초 공개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DVD에서는 가무 '물동이춤' '방아 찧는 춤'과 군무 '장미춤' '부채춤', 독무 '장고춤' 등을 추는 최승희를 볼 수 있다. 책에는 최승희의 작품 세계와 활동상이 정리돼 있으며 그녀와 함께 월북, 최승희무용단을 이끈 각계 인사들의 프로필과 무용곡 친필악보 등을 실었다.
김 회장은 "최승희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일했던 최승희무용단 초대 음악감독인 최옥삼 등 당대 최고의 음악인들을 자세히 소개했다. 앞으로 최승희와 우리 근대음악, 무용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질 것"이라고 밝혔다.
강원 홍천 출신인 최승희는 19세 때인 1929년 서울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했다. 조선의 정취를 담은 '봉산탈춤' '칼춤' '승무' 등 근대무용을 선보이며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기에 신무용이라는 춤 사조를 창출한 선구적 인물이다. 1930년대 후반 한국 춤의 문화적 우수성을 세계무대에 떨쳤으며 중국의 매란방, 인도의 우다이 상카르와 더불어 아시아 출신 세계적인 무용가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의 요구로 만주, 남경 등지로 일본군 위문공연을 다닌 이력 탓에 훗날 한국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1947년 월북, 김일성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국립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세우고 무용극 창작에 주력하면서 초기 북한무용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1958년 남편 안막의 몰락과 더불어 최승희 역시 1960년 이후 숙청됐다는 소문이 나돌았으나 2003년 북이 방송을 통해 사후 복권됐다고 발표했다. 애국렬사릉으로 이장된 것이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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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일(崔承一, 1901년 ~ ?)은 일제 강점기에 연극, 방송, 문학 등 문화예술계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다. 아호는 추곡(秋谷)이다.
생애
무용가 최승희의 큰오빠다. 최승희가 무용을 시작할 때부터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과는 같은 사회주의 계열의 문예운동가였다.
첫 부인은 아나운서 마현경, 두 번째 부인은 영화 배우 석금성(1907-95)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시인 최로사가 최승일의 딸이다.
경성부에서 자라 배재고등보통학교와 일본 니혼 대학에서 수학했다. 1920년 일본에서 결성된 극예술협회를 시작으로 좌익 유학생들이 조직한 북풍회에 참가하고, 박영희, 나도향 등과 함께 신청년 동인으로 활동했다. 1922년 사회주의 연극 단체인 염군사에 참여했으며, 염군사가 박영희의 파스큘라와 통합하여 결성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도 참가했다.
신흥극장을 중심으로 연극 운동을 하고, 경성방송국에 근무하면서 라디오 드라마를 연구하는 라디오 극연구회를 조직하기도 하는 등 선구적인 문예 활동을 벌였다. 그는 '한국 최초의 PD'로 불린다.
첫 부인 마현경은 경성방송국의 제1호 공채 아나운서이며, 두 번째 부인 석금성은 신흥극장의 연출자와 배우로서 만나 결혼했다.
1924년 〈안해〉로 등단하여 서대문형무소를 배경으로 한 〈봉희(鳳姬)〉(1926) 등 소설 작품도 꾸준히 발표했으며, 숙명고등여학교에 다니던 막내동생 최승희에게 무용을 권해 유명한 무용가가 되자 자서전을 대필해 출판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동아영화사 대표로 있으면서 지원병 제도를 홍보하는 전쟁 영화 《지원병》을 제작했다. 이 영화는 최승일의 카프 동료인 안석영이 감독을 맡아 찍은 친일 영화이다. 이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연극/영화 부문에 선정되었다.
광복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최승희, 안막 부부와 마찬가지로 월북했다. 부인 석금성은 대한민국에 두고 4남매와 함께 북조선으로 갔는데, 자녀들 중 맏딸 최로사는 한국 전쟁을 거치며 전시 가요인 〈샘물터에서〉 작사가로 유명해졌으나 최승일의 이후 활동은 잘 알려진 바 없다. 막내아들 최호섭도 북조선 무용계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석금성(石金星, ) :본명 석정의(石丁義). 1907. 12. 3~ 1995. 9. 3 경기 광주. 강원도 홍천
무성영화와 흑백·컬러 영화시대 및 텔레비전 시대를 섭렵한 한국 영화계의 증인이었다.
무남독녀로 자란 석금성은 19세에 장안의 기생집을 누비고 다니던 충청도의 부잣집 아들과 혼인했다. 시집살이를 하던 석금성은 서울에서 많은 날을 허비하는 남편을 찾아 상경했다가 극작가 이서구를 만나 그의 권유로 한국 최초의 연극단체였던 토월회의 창단 멤버로 입단했다. 그녀의 데뷔 무대는 황금좌의 〈추풍감별곡〉이었는데, 석금성은 이 무대를 시작으로 당시의 유명한 여배우 복혜숙과 함께 연극무대를 주름잡았다. 1937년 안석영 감독의 무성영화 〈심청전〉으로 영화계에 데뷔한 이후 2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1985년에는 77세의 나이로 〈백구야 훨훨 날지 말라〉(정진우 감독)에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심술궂은 계모, 시어머니, 기생어멈 등 개성이 강한 악역을 도맡아 하면서 개성파 연기자로 자리를 굳혔던 그녀는 죽기 전까지 텔레비전 드라마 〈분례기〉·〈친애하는 기타 여러분〉·〈사랑의 향기〉 등에 출연해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녀는 경성방송국 아나운서였던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과 재혼했는데 최승일이 동생 최승희를 뒷바라지하며 8·15해방 후에도 월남하지 않자, 1948년 4남매를 모두 아버지가 있는 북으로 보냈다.
죽기 얼마 전 그녀는 북한을 방문했던 재일동포를 통해 맏딸 로사는 북한의 유명한 시인이 되었으며, 막내아들 호섭은 최승희의 영향을 받아 안무가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표작으로 〈춘향전〉·〈단종애사〉·〈장화홍련전〉 등이 있다.
마유미 (1990) - 유가족
백구야 훨훨 날지마라 (1982)
궁녀 (1972)
만고강산 (1969)
시댁 (1969)
요화 장희빈 (1968)
石井 漠(いしい ばく、本名忠純、1886年12月25日 - 1962年1月7日)は
日本の舞踊家、舞踏家、ダンサーである。作曲家の石井歓、石井眞木は子息、石井五郎は実弟。
1886年(明治19年)、秋田県山本郡下岩川村(のちの山本町、現三種町)に生まれた。下岩川小学校時代、吃音の友人の口真似をしているうちに自らも吃音となる(これは終生改まらなかった)。1906年に秋田県立秋田中学校(現在の秋田県立秋田高等学校)のストライキに連座して同校を退学になり、小坂鉱山の庶務課に勤務するも長続きせず1909年に上京。押しかけ弟子として大町桂月や小松耕輔の門を叩いたが受け容れられず、同郷の小杉天外の書生となる。このころ、中村武羅夫や加藤武雄と交際し、加藤の勧めで吃音矯正のため伊沢修二の楽石社に通ったが挫折。やがて天外の家を出て三島霜川の家の居候となり、小説の修業をしたが自らの文学的才能に見切りをつけ、三島の家に同居したまま帝国劇場管弦楽団の団員見習いとなる。しかし、帝国劇場から貸与されたヴァイオリンを三島により無断で入質された上、そのことが帝国劇場側に露見したため、2ヶ月で見習いをクビになる。三島の家を出た石井は友人の水守亀之助や加藤武雄の家に転がり込んで生活していたが、1911年、帝国劇場の歌劇部開設に伴い、見習い第1期生として歌劇部に入部。三浦環に美声を認められ帝劇歌劇で活躍したが、指導者ジョヴァンニ・ヴィットリオ・ローシーから暴行を受けて帝劇を去り、以後は浅草オペラなどで活躍した。のちの大正時代、ヨーロッパやアメリカに渡り、現代舞踊を研究。「モダン・ダンス」の先覚者となる。黎明期の宝塚歌劇団等々の指導も経て、作曲家・山田耕筰らと組んで、日本人にとっての新しい舞踊という境地を大きく切り拓いた。
生涯、一度だけ映画に主演として出演したことがある。小説家の直木三十五にとっても最初で最後の監督作品『一寸法師』(脚本直木三十五、共同監督志波西果、原作江戸川乱歩、製作連合映画芸術家協会)である。1927年3月25日に一般的に商業公開された。
1928年、自由が丘に「石井漠舞踊研究所」(現在の「石井漠記念バレエスタジオ/石井早苗:主催」)を開設(現在では創立80年になり、バレエ教室激戦区の自由が丘にあって、突出した伝統あるバレエスタジオとして、クラシックバレエを基礎とし、モダンバレエ、創作バレエ、キャラクターダンス、民族舞踊等々幅広く取り入れ、石井漠の精神を受け継ぐ)。
1955年、栄典制度改正により新設された紫綬褒章の第1号受章者となった。
主な弟子に暗黒舞踏の代表的な舞踏手である大野一雄や崔承喜、石井みどりらがいる。
慢性甲状腺炎のため、1962年(昭和37年)1月7日に東京神田の杏雲堂病院で死去。75歳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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